묘적사
묘적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를 고증할 만한 기록이나 유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원효스님과 요석공주에 관한 이야기가 구전되어 올 뿐이다. 묘적사에 관한 문헌기록으로는 『세종실록(世宗實錄)』과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등이 있으며, 이들 문헌 기록을 통해 볼 때 묘적사는 조선 초기에는 그 사격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또한 대웅전 앞의 팔각칠층석탑 또한 그 시대의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절에서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묘적사는 본래 국왕 직속의 비밀기구가 있던 곳으로, 이곳에 일종의 왕실산하 비밀요원을 훈련시키기 위한 사찰을 짓고 선발된 인원을 승려로 출가시켜 승려교육과 아울러 고도의 군사훈련을 받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집중 공격을 받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두 차례는 잘 막았으나 마지막 한 번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완전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대웅전에서 동쪽으로 약 20m 떨어진 곳에는 이제면(李濟冕)이라는 사람의 묘와 묘비가 있어, 이를 통해 묘비가 세워졌던 1720년(숙종 46) 무렵에는 절이 거의 폐허화되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후 묘적사가 다시 중건되는 시기는 19세기로 절에 남아 있는 기록 중 「묘적산산신각창건기(妙寂山山神閣創建記」에 따르면 1895년(고종 32)에 규오(圭旿)법사가 산신각을 중건했다고 한다. 그 뒤 1969년에 화재로 대웅전, 산신각 등이 소실되었다가 1971년 자신(慈信)스님에 의해 대웅전과 요사가 중건된다. 이후 1976년에 다시 대웅전을 비롯해 관음전과 마하선실이 중건하고, 1979년과 1984년에는 나한전과 산령각을 각각 건립하였다.
묘적사 묘적폭포
묘적사 안내석
묘적사 입구
묘적사 주위의 멋진 숲
묘적사 요사채
묘적사 주위의 석탑 부재석들
묘적사 경내
묘적사 요사채
묘적사의 요사채는 모두 4동이 있다. 대웅전 앞의 팔각칠층석탑을 중심으로 좌우와 전면에 각각 1동씩 3동의 건물이 있으며, 연못가에 별채가 있다.
팔각칠층석탑 앞에서 대웅전을 바라볼 때 우측에 있는 요사는 마하선실(摩訶禪室)로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좌측의 요사는 마하선실과 같이 정면 6칸의 팔작지붕 건물이지만 측면은 3칸이다. 또 석탑 전면의 요사는 다경실(茶經室)로 주지스님이 머무르는 공간인데, 벽돌 건물로 기둥만 목재를 사용했다. 한편 이 3동의 건물들은 모두 기둥이 특이한 형태로, 목재를 다듬지 않고 자연스럽게 휘어진 나무의 상태 그대로 세워놓았다.
묘적사 대웅전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제법 당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외벽에는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원래 묘적사의 대웅전은 현 위치에서 동쪽을 약 2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었는데, 1969년에 화재로 소실되자 1971년에 중건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고, 1976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당 내부에는 근래에 금동으로 조성한 석가여래좌상을 모시고, 아미타후불탱을 비롯해 신중탱, 칠성탱 등 3점의 불화를 봉안하였는데, 3점의 불화는 모두 1980년에 조성되었다. 이밖에 법당에는 범종이 1구 있으며, 이는 1974년에 조성된 것이다.
◎ 주련
불신보편시방중(佛身普編十方中)
삼세여래일체동(三世如來一體同)
광대원운항부진(廣大願雲恒不盡)
왕양각해묘난궁(汪洋覺海渺難窮)
도량청정무하예(道場淸淨無瑕穢)
삼보천룡강차지(三普天龍降此地)
부처님의 법신은 시방에 두루 하시니
삼세여래도 모두 한결 같으시네
광대한 서원의 구름 항상 다함이 없으시고
드넓은 깨달음의 바다는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려워라
청정 도량 티끌 한 점 없으니
삼보천룡이 이 땅에 내려오시네
묘적사 대웅전내 석가모니불
묘적사 팔각칠층석탑
대웅전 앞에 있는 팔각칠층석탑은 향토유적 제1호로 석탑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탑의 높이는 대략 430cm 정도이다. 이 탑은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팔각구층석탑과 양식적으로 이어지는 것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흔치않은 팔각다층석탑이다. 또한 이 탑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수종사(水鍾寺)의 팔각오층석탑(건립하한연대-1493년)과 규모만 다를 뿐 양식이 거의 동일하여 조선 초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의 양식을 살펴보면, 기단부는 팔각의 지대석 위에 하나의 돌로 조성된 팔각의 2층 기단이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2구씩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으며, 기단석의 위와 아래에는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의 연화문이 배치되어 있다. 팔각의 탑신에는 각 면마다 기둥이 표현되어 있고, 옥개석에는 3단으로 된 옥개받침과 목조 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두(柱頭)까지 표현되어 있다. 추녀는 각 모서리가 위로 반전되어 있고 끝에는 풍탁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보인다. 상륜부는 반구형(半球形)으로 그 둘레에 삼각형 모양이 연속되도록 조각하였으며, 꼭대기에는 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한편, 이 탑을 자세히 살펴보면 3층과 4층 사이의 체감률이 부자연스러운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본래 탑의 높이는 7층보다 높은 9층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의 체감률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11층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된다.
묘적사 산령각 오르는 길
묘적사 산령각 입구
묘적사 산령각과 나한전
묘적사 나한전
자연 동굴에 인공을 가하여 만든 굴법당(窟法堂)인 나한전은 1979년에 건립되었다. 내부에는 석조석가여래좌상이 중심에 봉안되어 있는데,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을 본떠 조성하였으며, 불상의 광배 또한 석굴암의 것과 같은 형태로 후불벽에 광배를 표현하였다.
또한 후불벽에는 반원의 형태로 16개의 감실을 만들어 그 속에 16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이들 나한상 역시 석조로 되어 있다.
묘적사 전경
묘적사 찾아가는 길
청량리역 쪽에서 망우리고개를 넘어 쭉 직진하다가 도농삼거리에서 덕소방면으로 계속 직진해 덕소삼거리에서 월문리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계속 직진하면 왼쪽으로 묘적사 입구길이 나타난다. 묘적사까지는 청량리에 1시간가량 거린다. 도농삼거리를 지나 덕소 중심가로 진입하려면 도로의 오른쪽으로 난 진입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자칫하면 그냥 지나치기 쉬우므로 주의를 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