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구] 도시에서 공동묘지는
공동체의 가치와 규범을 형성하는 장소에서 개발 논리에 밀려 기피 시설로 취급돼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평소와 달리 명절을 전후한 교통 정보는 공동묘지 주변 상황이 추가된다.
지금은 공동묘지 주변을 지나는 도로의 교통 상황을 제공한다면 자가용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공동묘지까지 연장 운행하는
버스 노선 안내가 중요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성묘는 반드시 지켜야 할 중요한 의례라 할 수 있다.
서울시 강남구 일원동의 한 문중 묘역. 안내문에 따르면 이 묘역은 500여 년 됐다고 한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공동체의 가치가 공유되는 곳
묘지는 죽은 자를 묻는 곳이면서 죽은 자를 기억하게 하는 곳이다. 이는 장례 풍습이 달라도 세상 사람들이 공감하는
공동의 가치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족이 세상을 떠나면 좋은 땅에다 묻고는 고인을 기렸다.
조선시대에 묘지는 풍수의 영향에 따라 주로 산이나 들에 있었다. 다만 법으로 매장이 금지된 금장(禁葬) 지역이 있었는데
한양도성 안과 성저십리(城底十里, 도성 밖 약 4km 지역)가 대표적이었다. 그래서 왕릉도 성저십리에서 벗어난 구파발이나
태릉 등에 조성했다. 이 시대의 명문가나 부유층들은 그들이 소유한 땅에 가문 묘소인 선산(先山)을 모셨다.
선산을 소유할 수 없는 평민들은 마을 주변 공산(公山)에 집단으로 매장했다. 이런 공산을 북망산(北邙山)이라 불렀다.
북망산은 무덤이 많은 곳을 뜻한다. 원래는 중국의 어느 산 이름이지만 그곳에 무덤이 많아 이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됐다고 한다. 이러한 선산과 북망산은 죽은 자들을 위한 공간임과 동시에 가문이나 마을 공동체가 공동의 가치와 규범을 형성하는 장소였다.
장례 문화 연구 자료들을 보면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죽은 자가 그가 속했던 사회로부터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 좋은 땅을 골라서 묘소를 썼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한양도성 바깥 성저십리 지역에 묘지들이 암암리 들어서게 된다.
대표적인 지역이 시구문으로도 불린 광희문 밖 신당동과 서소문 밖 애오개 지역이다.
공동묘지 연구 자료들을 보면 전근대사회의 집단 묘지는 도시 내에서 질적인 향상 없이 양적인 팽창을 거듭하면서 중요한 도시문제로 대두됐다. 특히 사망자의 증가로 인해 수많은 묘지가 도시 내에 신설되자 도시민들의 건강과 위생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죽음의 공간인 묘지는 산 자의 공간인 도시와 새로운 관계 정립이 필요했다.
1915년 경 촬영된 광희문 밖 신당동의 조선인 집단 묘지. 멀리 한양도성 성곽이 보인다.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통제와 관리의 대상
조선이 대한제국을 거쳐 일본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도시의 모습과 기능도 크게 달라진다.
묘지도 그랬는데, 묘지의 관리 및 운영 주체가 가문이나 마을 공동체에서 국가로 이전됐다. 죽은 자가 영면하는
공간이면서 고인을 기억하는 공간인 묘지가 국가의 관리를 통해 시체의 처리가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전환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취체규칙」 즉, ‘묘지 규칙’을 만들어 정해진 장소에 신고를 하고 시신을
매장토록 했다. 이는 죽은 자도 관리하고 도시의 묘지 증가를 막으려는 억제책이기도 했지만, 토지 수탈을 위해 공지를
확보한 사전 작업이기도 했다고 학자들은 분석한다.
묘지 관리의 연장선에서 총독부는 경성 외곽에 공동묘지를 만든다. 그렇게 1930년에 미아리에, 1933년에 망우리에
경성부립 공동묘지가 들어서게 됐다. 그것도 모자라 1939년에는 한강 남쪽으로도 경성부립 공동묘지를 신설하게 된다.
이때의 일을 1939년 3월 18일 <조선일보> 기사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경성의 공동묘지가 포화 상태라 경성부는 시흥군
동면(지금의 신림동 일대)과 광주군 언주면(지금의 개포동 일대)에 각 10만 평의 땅을 구매해 공동묘지를 신설했다.
그리고 총독부는 경기도에 신설한 이들 공동묘지를 경성부립으로 관리했다.
도시개발의 방해가 되는 시설
해방 후 10여 년이 지난 1957년에 공동묘지 문제가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당시 언론들이 미아리 공동묘지의 이장을
촉구하는데, 이런 분위기는 서울 도심 확장과 도시개발을 원하는 정부 측과 민간 측의 의견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미아리 일대는 서울 동소문 밖의 대표적 서민 거주지역이었다. 서울 도심에 인구가 몰리며 주택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도성 바깥으로도 주거지가 형성됐는데 공동묘지 인근까지 도시 빈민들의 판자촌이 빽빽이 들어서게 됐다.
그래서 도시 미관과 공중위생을 위해서 미아리 공동묘지 일대에 도시계획이 필요함을 여러 언론이 제기하게 된 것이다.
이 기사들은 주거지가 부족해 확장이 필요한 서울 부도심에 공동묘지는 방해물이라는 느낌을 풍긴다.
1975년 경의 미아리 백호주택 일대 항공사진. 미아리 공동묘지 부지에 들어선 백호주택은 동일한 규격의 단독주택 100호가 들어선 주택단지를 의미한다. 길음역 사거리에서 삼양로를 따라 올라가면 나온다.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결국 서울시는 미아리 공동묘지의 분묘들을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의 공동묘지로 이장하기로 정한다.
그 후 1년 여가 지난 1958년 연말쯤의 기사들을 보면 미아리 공동묘지의 분묘 1만 9000여 기를 언주 공동묘지로
이장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사들에서 언주 공동묘지를 ‘서울시 지정 공동묘지’라거나 ‘서울시립’으로 표현했다.
언주 공동묘지가 있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은 1963년 1월 1일부로 서울특별시로 편입된다. 언주면은 나중에 강남구가 되는데 언주 공동묘지는 지금의 구룡산과 대모산, 그리고 개포동 일대에 있었다. 1960년대 명절 즈음의 신문을 보면 언주 공동묘지 인근으로 연장 운행하는 서울 시내버스 안내 기사를 볼 수 있다.
당시 언주면은 구릉과 농경지가 많은 곳이었다. 그런 곳이 서울 확장의 대상지가 되며 신도시로 바뀌게 됐다. 1970년 서울시는 「매장 및 묘지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는데 토지 이용을 원활히 하고 묘지 관리를 일원화하는 목적을 가진 걸로 학자들은 분석한다. 그 결과 강남 개발을 위해 한강 이남에 있던 시립 공동묘지들은 서울 외곽으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언주 공동묘지의 분묘들은 1970년 6월부터 이장에 들어간다. 그러니까 미아리 공동묘지의 분묘들을 언주 공동묘지로 이장한 지 10년이 조금 지났는데 또 이장하게 된 것이다. 언주 공동묘지뿐 아니라 신사동, 학동, 신림동 등 한강 이남에 있었던 8개의 서울시립 공동묘지를 경기도 파주군 용미리 등으로 옮겼다.
이렇게 이장하고 빈 땅이 된 공동묘지 부지들은 거의 택지로 개발된다.
다만 사유지인 문중 등에서 관리하는 묘역은 그대로 남았다. 강남구 일원동에는 한 문중이 관리하는 묘역이 있다.
서울시 강남구 일원동의 한 문중 묘역의 안내문. 안내문에 따르면 이 묘역은 500여 년 됐다고 한다.
도시개발 과정을 살펴보다 보면 공동묘지가 미관을 해치고 부동산 가치를 하락시키는 개발의 걸림돌 취급을 받는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분당신도시를 예로 들면 수내동에 있었던 ‘성남 시립공동묘지’가 주민들 민원 때문에 2000년 대 초반 성남시 외곽으로 이전했다. 그 자리에 지금 도서관 신축 공사가 한창이다.
묘지는 예로부터 공동체의 가치를 공유하는 공간이었지만 오늘날 도시에서는 기피 시설일 뿐이다. 그래서 밀려나고 있다. 도시개발의 역사 한편에 공동묘지가 있고 개발 과정에서 밀려난 도시빈민들의 이주 역사 못지않은 공동묘지 이전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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