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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 날의 삽화(揷話) 1
박 완 서
성당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헐레벌떡 달려왔기 때문에 정신이 얼떨떨했다. 벽시계를 보니 미사시간까지는 반 시간도 더 남아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서둘렀는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미사시간에 늦을까봐 조급하게 군 건 아니었다. 시간이 넉넉하다는 걸 알고도 달려올 때의 조바심은 그대로였다.
일부러 일찍 온 신도들이 앞자리에 무릎 꿇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고백소에도 불이 켜져 있고 신도들이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영세받은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고백성사를 받은 적이 없었다. 예비자 교리를 받을 때 그 속에서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걸 배웠지만 잘 생각나지 않았다. 신부님하고 단둘이 말할 수 있고 어떤 말을 해도 비밀이 새어나갈 걸 염려 안 해도 된다는 것 정도를 알고 있을 뿐이었다. 신부님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그렇게 서둘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얘기라고 해도 좋고 불평이라고 해도 좋았다. 나는 고백소 앞으로 가서 줄을 섰다. 내 앞엔 세 사람이 있었고 나하고 같은 연배의 중늙은이들이었다. 한참 입심이 좋은 나이들이었다. 마냥 기다려야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기다리는 동안 내 바로 앞의 부인은 줄창 가놀게 떨고 있었다. 그 미세한 전율이 무엇 때문인지 짐작이 안 되는 채로 나는 약간 물러섰다. 옮아붙을 것 같아서 싫었다. 그 부인은 나보다 모가지 하나는 작아서 가르마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머리가 빠져 남자의 대머리처럼 반들반들 윤기나는 맨살을 몇 가닥 안 남은 머리칼이 어설프게 덮고 있는 것이 민망하도록 여실히 보였다. 그 부인이 고백소로 들어가 맨 앞 차례가 될 때까지 줄곧 그 대머리는 늙은 여자의 치부를 훔쳐보는 것처럼 나를 참담하게 했다.
오래 걸리리라고 자신 있게 예상한 것과는 달리 그 부인은 곧 나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뒷사람들을 돌아다보았다. 세 사람이 더 서 있었고 그들의 무표정에 떠다밀린 것처럼 나는 아무런 준비 없이 고백소 안에 들어서고 말았다. 꼭 공중전화부스만한 넓이의 실내는 침침하고 형언할 수 없이 고즈넉했다. 기대와는 달리 신부님하고 마주 앉게 돼 있지 않았다. 신도는 무릎 꿇게 돼 있었고 신부님은 칸막이 저쪽에 계신 듯했다. 나는 황급히 성호경을 욌지만 그 소리의 떨림이 나의 것 같지 않아 낭패스러웠다. 신부님이 뭐라고 그러셨지만 내 가슴이 두근대는 소리가 하도 명료하게 들려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고백을 재촉하는 말씀이려니 짐작될 뿐이다. 나는 먼저 처음 보는 고백성사라는 걸 변명하듯 밝히고 나서 주님께서 정말 계신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의심하고 또 자주 이웃을 미워하고 가족들을 속였다고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다. 나는 그런 소리를 내가 들어도 건성으로 들릴 만큼 빠르고 성의 없이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늘 아침 내내 신부님한테 따지고 뭔가 환기시킬 게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성당으로 달려올 때 같은 조바심이 가슴을 옥죄었다.
요다음부터는 잘못을 그렇게 추상적으로 말하지 말고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고백하도록 하라는 신부님의 훈계말씀이 들렸다. ‘신부님처럼 말인가요?’ 이렇게 말대답이 하고 싶어서 나는 입 속이 탔다. 신부님의 강론은 언제나 신자들의 죄에 대해서였다. 어떤 것이 죄가 되고 어떤 것은 죄가 안 된다는 걸 일일이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가며 쉽게 타이르셨는데 그런 일에다 죄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과연 온당할까 의심스러울 만치 사소한 잘못들이었다. 이를테면 주일날 아침부터 급한 볼일이 생겨 미사를 거른 건 죄가 안 되지만, 게으르거나 귀찮아서 아침미사를 낮 미사로 미루고, 낮엔 또 저녁에 가지 하고 미루다가 저녁에 급한 볼 일이 생겨 결국 주일 미사를 거르게 되면 그건 죄가 된다는 식이었다. 그런 식의 자상한 지적은 끝도 없었다. 쌀이나 연탄을 살 돈도 없어서 교무금을 안 내는 건 죄가 안 되지만 자식 과외학원에 보낼 돈은 있는데 교무금 낼 돈이 없다면 그건 죄가 된다고 했고, 우리의 가족이나 이웃 중 아직 주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을 두고도 전도를 안 하면 죄가 되지만 전도를 했는데도 주님을 모른다고 하면 그건 우리의 죄가 아니라고도 했다. 신부님은 교회
라는 공동체의 이익에 위배되는 사소한 잘못이나 무관심도 놓치지 않고 후뚜루 죄라고 지목하셨고, 나는 그 죄목에 승복할 수가 없었다. 그런 것들은 죄라기보다는 잘못이라고 하는 게 합당할 듯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짓지 않고 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일상적인 잘못에다 일률적인 죄목을 붙여 끝도 없이 지적하는 강론을 들을 때마다 ‘어찌 우리 죄를 그뿐이라 하십니까?’ 라고 반박하고 싶어 몸이 달곤 했다. 적어도 신부님쯤 되면 누구 눈에나 보이는 그런 잗다란 실수보다는 우리가 죄인 줄도 모르고 편히 몸담고 있는 크나큰 잘못, 진짜 죄에 대한 환기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 바라고 있었다. 신앙의 초심자다운 순진한 바람일 수도 있었으나 벌써부터 냉담을 예비하며 구실을 찾는 심보인지도 몰랐다.
신부님이 주신 보속은 묵주신공올 열 번 바치는 거였다.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사하나이다”
하는 신부님의 마지막 말씀을 듣고 고백소를 나왔다. 긴장에서 풀려난 때문인지 아까보다 훨씬 편해진 듯했다. 그 동안에 미사시간이 임박한 듯 성당 안은 거의 차 있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모여들고 있었다. 나도 순백의 미사보로 머리를 가리고 다소곳이 뒷자리에 앉았다. 속속들이 편안해진 건 아닌 듯 울고 싶게 막막하고 외로웠다. 오늘만은 신부님이 나의 근심과 잘못에 대해 언급하시려니 했는데 또 그냥 지나갔다. 오늘의 내 고통과 잘못을 우리들의 고통과 잘못으로 확대해서 풀이하고픈 내 기대는 서운케 무너졌다. 무턱대고 조바심친 끝에 남은 것은 안타까움뿐이었다.
밤에 딸 내외가 맡겨놓았던 아이들을 데리러 왔다. 배낭을 멘 채 등산화 끈 풀기 귀찮다고 올라오지도 않고 현관에 섰다가 갔다. 즈이 집보다 심심한지 평소보다 일찍 잠들었던 남매가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마다 않고 에미 애비 손목을 잡고 비틀걸음을 걷는 걸 나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했다. 학교가 뭔지……, 학교만 아니었으면 데리러 올 리도 없지만, 그렇게 보내지도 않았을걸 하는 아쉬움을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현핀문을 들어서려는데 신장 위에 새빨간 단풍잎이 여남은 장 흩어져 있었다. 딸 내외가 무심히 떨군 건지 일부러 놓고 간 건지 모르지만 점점이 떨어진 핏자국처럼 처연한 빛깔이었다. 나는 그중에 몇 장을 골라 부챗살처럼 펴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남편은 안방에다 텔레비전을 켜놓은 채 잠들어 있었다. 오그리고 자는 남편을 깨워 잠자리를 봐주면서 아이들한테 뭘 더 껴입혀 보낼걸, 감기나 들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일기 해설자는 내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일교차가 심하니 감기 조심하라고 말하고 들어갔다. 딸 내외는 둘 다 등산을 좋아하긴 하지만 둘이서만 근교의 산을 즐기는 정도지 전문적인 산악인은 아니니까 올해의 마지막 등산이 될 듯 했다. 어제 아이들을 맡기면서 즈이들 입으로도 그와 비슷한 말을 했었다. 단풍을 따라 남단(南端)까지 내려갔다 오려니 부득이 일박을 하게 되었노라고. 아직도 그렇게 고운 단풍이 남아 있는 데는 남단 어디쯤일까. 나는 그걸 미처 묻지 못했고 그애들도 그걸 밝히지 않았다. 딸네는 가까운 아파트 단지에 살기 때문에 걸핏하면 아이들을 맡겼지만 재우기까지 하는 일은 어쩌다가 있었다.
“동냥자루 도루 달랜다더니…….”
나는 이렇게 소리내어 중얼대며 집 안을 휘둘러보았다. 아이들이 다녀간 후는 언제나 그렇듯이 무엇 하나 제자리에 제대로 놓여 있는 게 없었다. 남편 들으라고 한 소리인데도 안방에선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동냥자루 메고 다니는 거렁 뱅이한테 애 보기를 시켰더니 처음엔 빌어먹는 것보다는 얼마나 좋으냐고 감지덕지하더니 사흘이 못 돼 동냥자루 도로 달래가지고 떠났다는 옛날얘기가 있다. 나는 그 얘기에 빗대서 애 보기의 신역이 얼마나 고되다는 푸념을 하기를 잘했고 남편은 그 소리를 제일 듣기 싫어했다. “에잇 그것도 말이라고……, 천금 같은 손주 보는 일을 얻다 못 갖다대서 하필 동냥질에다 갖다대남.” 가래 꿇는 소리로 이렇게 역정을 내기를 나는 우두커니 기다렸다. 남편은 깊이 잠들었나보다. 아이들이 떠나고 난 후의 정적에는 스산함이 스며 있어 나는 추위 타듯이 어깨를 웅숭그렸다. 그리고 제자리를 벗어나 흩어지고 곤두선 잗다란 장식품과 일용 잡화들을 제 자리에 끼워맞추면서 크레용 토막, 꽃핀, 조립하다 만 로켓, 반도 안 짜내고 굳어버린 접착제 튜브 등 아이들이 떨구고 간 것들을 따로 모았다. 그런 하찮은 것들, 십중팔구는 다시 찾지 않을 것들을 일일이 챙길 때마다 나는 달아나는 아이의 덜미를 붙잡았을 때처럼 가슴 가득히 아이의 체온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바닥의 모래흙을 쓸어 냈다. 아이들은 수없이 들락거렸고 그때마다 접은 바짓단 속으로 하나 가득 모래흙을 담아들였다. 그때그때 현관에서 털고 들어오도록 일렀건만도 모래흙은 구석구석에 공
기처럼 스며 있었다. 나는 중늙은이 특유의 결벽성으로 그것들을 꼼꼼하게 쓸고 닦았다. 그래도 부족해 해마다 니스칠을 새로 해서 좋은 거울처럼 잘 비치는 마훗바닥을 손바닥으로 핥듯이 쓸어보았다. 무슨 일이든지 완벽하게 끝낸다는 건 결코 좋은 일이 못 되었다. 문득 맥이 빠지면서 어찌나, 싶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어떤 일이고 완벽하게 끝냈을 때처럼 그 일의 무의미함이 노골적으로 드러날 적도 없다는 생각을 간간이 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인 듯했다. 그런 생각은 때로는 어렴픗했고 때로는 몸서리가 쳐지게 과장되어 다가오기도 했지만 오십여 년을 몸에 밴 완벽주의가 쉼게 고쳐질 턱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생각이 저절로 사그라질 것 같지도 않았다.
내 속으로 낳은 딸들도 내 결벽증과 완벽주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딸들이 기분 내키는 대로 사입은 기성복의 단추나 단은 나 보기엔 늘 미심쩍게 마련이어서 벗으라고 해서 일일이 손을 봐주고 나면 그 꼼꼼한 솜씨에 질린 딸들이 한다는 소리는 으레 “우리 엄마는 백 살은 사시겠네”였다.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말버릇이 있나, 속으로 이렇게 언짢아하면서도 그런 말버릇을 대놓고 야단친 일은 없다. 에미가 백 살까지 살까봐 미리 징그러워하고 있는 딸의 진의를 짚어본 듯 섬뜩한 심사 때문이었으리라.
정말 백 살까지 살면 어떡하나. 맥없이 앉았다 말고 그런 생각이 들자 누구한테 유세하려는 엄살이나 응석이 아니라, 정말 마음으로부터 그게 싫어져서 체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갈증처럼 다급하게 기도가 하고 싶어졌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기도할 때마다 빠뜨리지 않는 ‘저를 너무 오래 살게는 마옵시고…….’ 소리를 하고 싶은 거였나. 오랫동안 방심해 있다가 정신을 차린 것처럼 오늘 낮에 신부님으로부터 보속으로 받은 묵주신공 열 번이 생각났다. 마루는 너무 넓고 번들거렸나. 나는 기도가 즉각 반사될 것 같은 번들거럼이 불안해서 허청허청 마루를 건넜다. 큰딸의 공부방이었던 건넌방은 지금은 남편의 서재였다. 말이 좋아 서재지 장서는 빈약했고 전문적이지도 장식적이지도 않았
다. 딸의 나이 따라 열심히 들여놓아준 전집들이 세계명작동화로부터 문학 역사 관계 전집류까지 손때보다는 세월의 때에 곱게 찌든 채 간간이 이가 빠지긴 했지만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딸이 직접 샀음직한 릴케, 니체, 헤세의 책들도 딸의 정신에 영향을 미쳤다기보다는 지적 허영심 이나 채우다 말았음이 역력했다. 오래된 리본이나 포장처럼 사용의 흔적 없이 그냥 바래 보였다. 남편의 책이라곤 일본말로 된 삼국지와 어쩌다 사놓은 종합지가 몇 권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남편은 친한 친구가 오면 “우리 서재에서 바둑이나 한판 두세” 하기도 했고, “여보, 서재에서 술 한잔 하게 해줘” 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 방은 남편의 서재였다. 나는 그 방에 남아 있는 딸의 의자에 앉았다. 딸이 시험공부할 때 피곤을 덜라고 사준 의자는 푹신하고 뱅글뱅글 도는 회전의자였다. 묵주의 기도 열 번은 너무 지루했다. 나는 내가 그 기도를 바침으로써 용서받고자 하는 잘못이 무엇이었던가를 골똘히 생각하느라 자주 기도문을 놓치고 헷갈렸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전도서의 첫 구절을 외고 있었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한 세대가 가면 한 세대가 오지만 이 땅은 영원히 그대로이다. 떴다 지는 해는 다시 떴던 곳으로 숨가빠지고, 남쪽으로 불어갔다 북쪽으로 돌아오는 바람은 돌고돌아 제자리로 돌아온다. 모든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넘치는 일이 없구나. 강물은 떠났던 곳으로 돌아가서 다시 흘러내리는 것을. 세상만사 속절없어 무엇이라 말할 길 없구나. 아무리 보아도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수가 없고 아무리 들어도 듣고 싶은 대로 듣는 수가 없다. 지금 있는 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이요, 지금 생긴 일은 언젠가 있었던 일이라 하늘 아래 새것이 있을 리 없다.” 전도서도 그 이상은 외지 못했다. 지금 있는 것은언젠가 있었던 것이요, 지금 생긴 일은 언젠가 있었던 일이라 하늘 아래 새것이 있을 리 없다는 대목만 몇 번 되풀이하는 사이에 어젯밤부터의 조바심으로부터 조금씩 풀려나는 듯한 느낌을 맛보았다. 너만 그런 게 아냐, 남들도 다 그렇게 해왔다는 위로처럼 확실하고 참담한 위안은 없다. 꼭 외고 있어야 하는 기도문도 제대로 못 외는 주제에 전도서의 그 대목만은 노력하지 않고 쉽게 욀 수 있었던 것은 학교 시절 암기 과목은 싫어하면서도 읽어 마음에 드는 시만 있으면 곧 욀 수 있었던 소질과 관계가 있는지도 몰랐다. 왜 그 대목이 마음에 들었을까. 세상은 새록새록 새로워지고 있었다. 아직 생존해 계신 친정 어머니는 팔순을 바라보시건만도 세상 변화를 어린애처럼 즐거워하시면서 백 살을 살아도 죽을 때는 억울할 것 같다고 한탄을 하신다. 그런데 내가 직조(織造)해내는 나의 일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수없이 떴다 풀었다 다시 뜨는 듯한 낡은 실이 몇 가닥씩 어떤 때는 온통 끼어들곤 했다. 그건 매우 기이하고 기분 나쁜 느낌이었다. 곧 그 기이함조차 처음 인식 했을 때의 낯설음이 바래고 익숙하고 낡은 실이 되리라. 조금도 새롭지 않은 나날들, 예전에도 수없이 저질렀음직한 잘못과 어리석은 짓, 헛된 욕망의 되풀이는 사는 걸 쉽고 익숙하게도 했지만 때로는 비명을 지르고 싶도록 진부하고 무의미하게도 했다.
“이제 그만 아이들을 재우도록 해요.”
텔레비전 화면에 착한 아이가 나와서 이 닦고 세수하고 잠옷 갈아입고 안녕히 주무시라고 인사를 하자마자 남편은 이렇게 나에게 채근했다. 아이들의 눈은 아직 초롱초롱했다. 더군다나 로켓 조립이 거의 완성 직전이었다. 계집애는 오빠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접착제 튜브를 아껴가며 조금씩 짜주고 있었고, 사내녀석은 가느다란 나무젓가락 끝에 그걸 묻혀서 로켓의 날개를 붙이고 있었다. 계집애는 선망과 찬탄으로, 사내녀석은 몰입과 자신감으로 둘 다 발가니 상기해 있었고 숨결이 할딱이고 있었다. 로켓은 거의 다 돼가고 있었다. 그때가 조립식 장난감의 전성시대였다. 완성되자마자 그것은 방치되고 그리고 잊혀졌다. 아마도 아이들의 꿈에서나마 그게 땅을 박차고 비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아이들한테 조립식 장난감 좀 작작 사주어라, 낭비벽 생길까 겁난다고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딸에게 말해봤지만 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어머니도 참, 조립은 가지고 놀라는 장난감이 아니라 만들면서 놀라는 장난감이에요. 만들고 나면 끝이라니까요.”
보고 있자니 그 말이 이해가 되었다. 어린 남매의 몰입과 협동은 볼수록 대견했다. 공장에서 완성된, 전지약이나 태엽으로 구르고 나는 비싼 장난감보다 훨씬 교육적 효과가 높은 장난감이다 싶었다. 고지식한 남편은 아이들에게 텔레비전 속의 착한 아이를 즉시 본받도록 하지 않는 내가 아직도 못마땅한지 눈매가 곱지 않았다. 분합문이 흔들리면서 커튼이 부풀었다. 커튼을 젖혀보니 분합문이 반뻠쯤 열려 있었다. 밤바람은 찼고 먼 허공에서 휘파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밤사이에 더 추워지지나 말았으면 좋으련만. 나는 아무리 남쪽이라지만 일기가 변덕스러울 때 등산을 간 딸 내외가 걱정이 돼서 일기예보를 기다렸다. 착한 아이는 들어가고 뉴스시간이었다.
K대학에서 농성하고 있던 대학생들이 연행되고 있었다. 얼굴이 검게 탄 학생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자 손녀가 무섭다고 말하면서 다가왔다. 그새 로켓은 완성되어 저만치 나동그라져 있었다.
“벼엉신 저까짓 게 뭐가 무서워.”
손자는 로켓을 조립할 때의 우월감을 곧장 화면으로 끌고 올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싶었는지 필요 이상으로 똑똑히 화면을 바라보면서 가슴을 펐다.
“안 돼! 보면 안 돼.”
나는 겨드랑이 밑으로 아이들의 머리통을 끌어안아 눈을 가려주면서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게 내 뭐 랬소? 진작 재우라니까.”
남편의 험악하게 부름뜬 눈과 마주쳤다. 남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자 어쩔 수 없는 심술과 혐오감이 복받쳤다. 손녀는 어른들의 심상치 않은 기색에 놀라 더욱 떨며 몸을 오그렸지만 손자는 안 무섭다고 반항했다. 손자는 특히 영택이를 따랐었다. 영택이가 집을 나간 지 일 년이 넘었는데도 손자는 외가에 올 때마다 삼촌 어디 갔냐고 묻는 걸 잊은 적이 없었다. 한번은 온데간데없어진 손자를 찾아 헤매다가 영택이가 거처하던 지하에서 올라오는 것과 부딪친 적도 있었다. 거긴 뭣 하러 내려갔었느냐는 내 물음에 손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할머니 미워. 영텍이 삼촌 방은 더럽고 냄새도 나빠. 그려니까 삼촌이 도망가버렸잖아.”
아이는 탄환처럼 온몸으로 격앙해서 나를 비난했다. 그애는 벌써 국민학생이었다. 능히 가족간의,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의 비밀을 감지할 수 있는 나이가 돼 있었다. 그러나 모르는 게 더 많았다. 내가 영택이를 구박한 건 사실이나 어디까지나 마음 속으로였지 지하실을 쓰게 할 만큼 드러내놓고 하진 않았다. 그 지하실에는 연탄광과 보일러실과 꽤 큰 방이 하나 있었다. 집장수가 그렇게 지어놓은 걸 샀다뿐 그 방에서 사람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골목 안의 집들이 같은 집장수 솜씨여서 다 그런 방을 가지고 있었고 월세나 전세를 준 집도 적지 않았고 식구가 쓰는 집도 있었지만 우리집의 지하방은 그렇지 못했다. 처음부터 잘못된 방수는 몇 번씩 새로운 방수제로 딧칠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벽지고 장판지고 오줌 싼 요처럼 누렇게 습기가 번지면서 들고 일어나 축 처졌다. 영택이가 멀쩡한 제 방 놓아두고 그런 지하방으로 제 짐을 옮긴 건 내가 그애를 구박하고 싶어지고부터 였다.
영택이가 우리집에 온 건 여덟 살 때였다. 지금의 외손자만할 때였다. 키도 꼭 그만했었다. 남달리 자식복이 많아 자그마치 육남매를 둔 남편의 친구가 상처를 하더니 다음해엔 그마저 따라 죽은 사건은 남편의 친구들 사이에 적지 않은 충격이 되었다. 그들은 서둘러 사십대의 건강을 면밀히 체크해보기도 했고 보약을 먹거나 건강식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안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남긴 자식의 반밖에 안 되는 제 자식을 얼싸안으며 두셋만 낳은 단출한 식구를 자축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세상에, 육남매라니, 모아놓은 재산도 없다는데, 맡아줄 만한 친척도 없다는데.” 이러면서 알토란 같은 제 식구와 중년의 건강을 껴안은 마음에는 일말의 동정과 진이 날 듯이 농밀하고 잔혹한 쾌감이 없었다고는 말 못 했다. 외할머니가 그 많은 외손들의 치다꺼리를 맡게 되었다는 뒷소식에 적이 마음이 놓이면서도 그 노인의 욕된 장수가 징그러워 몸서리를 치는 결 잊지 않았다. 남편이 그 육남매의 유자녀 중 막내인 영택이를 집으로 데려온 것은 그후 얼마 안 돼서 였다. 남달리 정이 많은 남편은 생환비라도 좀 보태주려고 들렀다가 외할머니도 오래 사실 것 같진 않너라며 막내를 데리고 왔다. 안 찾을 테니 입양을 하라고 신신당부하더란다. 영택이는 총명하고 순진해서 곧 정이 들었다. 본은 달랐지만 같은 이씨여서 남 보기에 우리 아들로 키우는 데 쟐 지장이 없었다. 우리에겐 딸만 둘이 있었다., 한 번도 드러내 보인 적이 없는 아들에 대한 갈망을 먼저 드러내 보인 것은 내 쪽이었다. 저애를 진작만 데려왔어도 감쪽같이 우리 아들로 키우논 건데·…·이런 말을 나도 모르게 입 밖에 낼 만큼 영택이는 탐나는 아이였다. 그애는 공부를 썩 잘했다. 나는 그애 덕에 반장 엄마 노릇도 할 수가 있었고 요릿집에 그 학년의 선생님을 모두 초청해서 일등 턱을 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끔 기억력이 비상한 그 아이의 머릿속에 남아 있을 우리집 자식이 되기 전의 기억에 생각이 미치면 치가 떨리는 적의를 느끼곤 했다. 겉으로 보기에 그 아이에겐 그런 기억의 그늘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늘을 남기진 않는 기억, 투명한 기억, 그건 행복일까 불행일까 이런 부질없는 생각에 시달리기도 했다. 딸들은 자라면서 나보다 한결 지혜롭게 영택이를 귀애했다. 남동생이 없다는 걸 아는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가 낳아 들여온 동생이야. 역시 아들은 있어야겠나봐. 아빠도 아빠지만 엄마도 저렇게 좋아하신단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 능청스럽게 굴었다. 그애들의 남동생에 대한 욕심은 대를 잇고 싶다는 우리의 맹목적인 갈망과는 달리 그들이 평생 지게 될 지도 모르는 책임에서 놓여나고 싶은 걸 뜻했으므로 한결 용의주도했다.
영택이가 남편의 친구가 밖에서 낳아 들여온 자식이었다는 소문을 들은 건 그 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해였다. 그런 소문 때문에 영택이와 우리 식구와의 관계가 달라질 리가 없었는데도 한번 귀에 들어온 그 소문은 목구멍의 가시처럼 내 일상의 흐름을 편안치 못하게 했다. 소문을 소문으로 흘려보내지 못하고 진부를 가려보려고 수소문할수록 뚜렷한 실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영택이 외할머니는 아직도 생존해 계셔서 남은 오남매 중. 셋이나 시집 장가를 보낸 후였다. “그 노인네한테 육남매는 무리야. 밑으로 세 아이는 남을 주든지 고아왼에라도 보내야 할 것 같소. 내가 제일 먼저 솔선수범을 했으니 차차 독지가가 나서겠지.” 영택이를 데려오고 나서 남편이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노인은 악착같이 오남매를 다 기르면서도 내친 막내를 한 번도 찾은 일이 없었다. 제 앞가림을 할 만큼 자란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영텍이를 내칠 때 그렇게 약속이 돼 있다고는 하나, 제 딸의 배를 빌리지 않은 외손자, 배가 다른 형제간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 되는 냉혹함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오남매의 자식복에다 하나를 뎌 보탠 영택이가 그 집안에 얼마나 큰 화근이 되었던가를 생각하면 그 동안 그 아이한테 들인 나의 정까지 중년에 헛디딘 하룻밤 치정처럼 수치스럽게 식어지곤 했다. 내가 아는 육남매의 어머니는 사십대 초반에 이미 얼굴이 노인 반점으로 충충하게 얼룩져 있었다. 간암으로 죽고 나자 어쩐지 간이 나쁜 안색이었다고 쉽사리 해명이 됐던 걸 다시 수정하려 들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오남매씩이나 낳아 기르느라 뱃가죽이 터져 주글주글 겹겹의 주름으로 늘어지고, 가슴은 늑골의 수를 헤일 만큼 말라붙은 조강지처에게서 채워지지 않는 욕정을 함부로 흩뿌리고 다니다가 또하나의 아이를 만득 짐승 같은 남자 때문에 그 여자가 맛보았을 절망과 증오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건 암으로라도 피어나지 않으면 다스릴 길 없는 지독한 원한이었으리라. 그 여자의 죽음도 참혹했지만 그 여자의 복수 또한 참혹했다. 그 짐승 같은 남자는 아내가 죽고 나서 일 년도 더 살지 못했으니까. 나는 그 연쇄적인 죽음 끝에 추처럼 달린 게 영택이라고 생각했고 피가 차갑게 굳는 듯한 두려움을 맛보곤 했다. 내 딸들이 바야흐로 꽃처럼 피어나 혼기를 맞을 무렵이었다. 나는 영택이가 딸들의 장래에 해코지나 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고 그를 식구로 받아들인 걸 후회했다. 내가 영텍이를 밀어낼수록 남편은 그를 측은해하며 보듬어안으려는 게 보이는 듯했다. 영택이가 좋은 대학에 무난히 합격하던 해 여름이었던가. 텔레비전으로 야구중계를 볼 때마다 눈꼴이 시도록 죽이 잘 맞던 그들이 결승전 때는 경기장에 같이 가자고 약속을 하는 것 같았다. 결승전은 연장전까지 가 밤늦게 끝났다. 우승한 쪽의 코치와 홈런을 친 선수를 헹가래치는 것까지 보고 나서도 한 시간이 넘도록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몇 대 몇으로 어느 쪽이 이길까 내기를 거는 것 같더니 진 쪽에서 한잔 사는 게 아닐까. 친한 부자지간에나 가능한 그런 활기 넘치는 친화의 관계가 나에겐 견디기 어려운 통증을 일으켰다. 나는 그런 통각이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마치 의심할 여지없는 외도에서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리는 헐벗은 심정으로 나는 자정이 넘도록 대문 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알맞게 취해서 떠들썩하게 돌아왔다. 귀에 익은 야구 선수들 이름을 종횡무진으로 들먹이면서 그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취중에도 내 뾰족한 시선이 심상치 않았던지 영택이는 열없게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감싼 남편의 팔을 슬그머니 풀었지만 남편은 좀더 취해 있었는지 그만한 눈치도 없었다.
“왜? 당신 우리 부자가 죽이 잘 맞는 게 샘이 나나보군. 우하하하…… 나는 오늘 기분좋았다구. 아들이 좋긴 좋아. 역시 아들은 있어야겠더구만. 통하는 게 있거든.”
그런 모욕적인 언사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그들이 취기보다 훨씬 확실하고 농밀하게 내뿜는 부자다움이었다. 그 그지없이 행복해 보이는 친화감이었다. 얼핏 마(魔)가 끼듯이 순간적으로 날렵하게 영택이가 남편의 진짜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친구가 낳아들인 아들이 아니라, 남편이 밖에서 낳아들인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실상 터무니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상상력으로도 이치에 맞게 뜯어맞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그들의 부자다움을 지켜보는 동안 그건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영택이는 당신 아들이죠? 그쵸? 그쵸? 그쵸? 이렇게 미친 듯이 날뛰면 남편은 억지 죽 작작 부릴 수 없냐고 가래 끓는 소리로 나무라고 나서 낭패스러운 듯 어깨를 축 늘어프드렸다. 그럴 때 남편은 죽지를 잃은 날짐승처럼 억울하고 무력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라도 해서 영택이를 남편으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밀어내야만 했다. 그들이 드러내놓고 다정하게 굴 적만이 아니라, 은근히 통하는 것처럼 보일 적에도 나는 어김없이 남편을 들볶았다. 영택이는 당신 아들이죠? 그쵸? 그쵸? 도대체 어느 년 하고 눈이 맞아 갤 낳았죠? 대란 말예요. 점점 사설이 길어지고 수법도 악랄해졌다. 낮에 있었던 사소한 눈짓이나 부드러운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챙겨두었다가 밤에 곤히 잠든 남편의 어깨를 미친 듯이 흔들어 깨워 들볶을 꼬투리로 삼곤 했다. 당신은 제정신이 아냐. 처음부터 변명의 가치조차 없는 억지이기도 했지만 남편은 변명하기를 단념하고 어떡하든지 나를 딧들이지 않으려고만 했다. 나를 덧들이지 않는 방법은 간단했다. 남편과 영택이 사이는 하루하루 서먹서먹 해졌다. 아아 거기까지만 영 택이를 몰아붙였으면 좋았을 것을.
그 무렵 이었다. 영택이가 이층 다락방으로부터 지하실로 내려간 것은. 그전서부터 보일러의 연탄을 가는 일을 그가 자청해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하실 출입도 그의 전담이었다. 들락거리며 아직 안 가신 개구쟁이 적 호기심으로 그 동굴 같은 지하방에 눈독을 들였을 뿐 아니라 하나 둘 은밀하게 예비를 했으리라. 친구들이 한 떼 몰려와 도배를 한다고 법석을 떨고 간 다음날, 영택이는 나하고 누나들을 집들이에 초대했다. 나는 교활하고도 용의주도하게 남편과 영택이 사이만 이간질했을 뿐 나하고는 예전과 다틈없이 흔연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친구들도 열 명 가까이나 와 있었다. 어느 틈에 짐도 다 옮겨 지하실은 아늑하고 오븟하게 신혼살림을 시작해도 좋을 만큼 정결하고 오밀조밀하게 꾸며져 있었다. 을씨년스럽거나 구질구질한 구석은 조금도 없었다. 도배만 했다고 당장에 그런 기분이 나는 건 아닐 것이다. 애정과 잔손이 조금씩 조금씩 그곳을 그렇게 변화시키고 길들였음직했다. 나는 영택이와 그의 친구들이 권하는 대로 막걸리도 찔금찔금 마셨고 족발도 널름널름 집어먹 었다. 새우깡하고 굴도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잘 웃고 떠들었지만 나는 그들의 농담을 반도 못 알아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례했지만 그중에는 부끄럼을 타는 아이도 있었고 귀티 나는 아이도 있었다. 그들은 영택이를 따라 조금도 구김살 없이 나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하긴 시장의 과일장수나 생선장수도 손님에게 아주머니나 할머니 대신 어머니라고 너스레를 떠는 세상이니까. 그렇게 흔한 어머니 소리건만 범강장달이 같은 일류 대학생들한테 듣는 맛은 또 달랐다. 입에서보다 속에서 훨씬 더 독한 막결리 탓도 있었겠지만 나는 맥없이 감동해서 남편이 영택이하고 어깨동무하고 야구 구경 갔다 오면서 왜 그렇게 행복해했나까지를 소급해서 이해하려 들었다. 내가 좀 해롱해릉했던지 저희끼리 더 질탕하게 놀고 싶었던지 영택이는 나를 부축해 일으키면서 어머닌 이제 그만 올라가셔야겠어요, 했다. 그래그래, 늙은이가 주책이야 진작 자리를 비켜줄 일이지, 이러면서 일어서서 몇 발짝 떼다 말고 나는 돌아섰다. 몽릉하고 빙글빙글 도는 듯한 취중에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이건 내 집이야.’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니 선언하고 싶었다. 내 집을 무단히 점거당한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취중에도 그런 느낌은 감겨오는 젖은 수건의 감촉처럼 섬뜩하고 불쾌했다. 나는 그 말을 몇 번씩이나 했지만 저희끼리 웃고 떠드는 소리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때의 내 느낌은 옳았다. 그날부터 지하실은 영택이가 아닌 그들 모두의 차지였다. 지하실은 현관문을 통과하지 않고도 드나들 수 있게 돼 있었다. 그들은 한꺼번에 우루루 몰려나갔다가 몰려들어오기도 했고 한 사람 두 사람 모래처럼 조용히 스며들어 오기도 했다.
“큰일났어요. 영택이가 못된 친구들과 못된 짓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잠자리에서 남편에게 겁먹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건 이간질도 음해도 아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근심이었다. 남편은 대꾸 없이 줄담배를 피웠다. 나는 우리집 지하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악(惡)이 땅 속 깊이 뿌리를 박고 가닥가닥 무성하고 극성스럽게 퍼지는 걸 유리병에서 기르는 등근 파 뿌리를 보듯이 명료하게 보는 것처럼 느꼈다. 그것만은 결코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정적인 증거까지 잡고 말았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유심히 봐두었던 불온서적의 대부분을 영택이의 지하방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그 물적 증거를 남편에게도 확인시키는 걸 잊지 않았다. 그건 영택이의 어떤 비행을 고자질하는 것보다도 확실한 이간질이었다. 정부를 비난하는 논조가 강한 신문을 구독하는 것조차 공무원 신분에 어긋난다고 믿을 만큼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남편의 얼굴에서 핼쑥하게 핏기가 가셨다. 분노와 불안 때문이리라. 그는 이를 악물고 떨고 있었다. 여보, 진정해요. 그러면서도 내심 나는 마침내 영 택이를 재기 불능으로 몰아붙였다는 잔혹한 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집 안에서조차 그 이상 가는 방법은 없었다. 그날 남편은 영텍이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보는 앞에서 그 온당치 못한 책에 불을 싸지르며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못된 놈 같으니라구, 이게 고작 너를 길러주고 공부시켜준 은인한테 할 짓이냐. 천하에 배은망덕한 놈, 썩 나가지 못할까. 꼴도 보기 싫다.”
영택이는 정말 나갔다. 정말 나가리라고까지는 생각 안 했는지 남편은 가끔 남의 자식 기르고 난 뒤끝의 허망함을 한탄하며 한숨을 짓곤 했다. 영택이는 그렇게 쉽게 뛰쳐나갈 때와는 달리 나중엔 잘못했다고 빌러도 왔고 설이나 추석을 쇠러도 왔다. 전화로 묻는 안부도 예의바르고 다정했다. 그러나 다시 들어올 것 같진 않았고 그건 우리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를 내치고 나서도 행여나 그가 못된 일에 연루되어 우리에게 화를 끼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만도 못할 노릇이었다. 그후 지하실의 벽지는 다시 뉵눅하게 처지고 시커멓게 곰팡이가 슬었고, 사람이 한번 살고 간 찌꺼기엔 쥐가 극성맞게 들끓었다. 다만 아이들만이 영택이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같이 살지도 않았건만 외손자들은 외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영택이 없는 외가를 재미없어하고 외삼촌이 돌아와도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게 망가지고 더립혀진 지하방을 보고는 다부지게 항의도 할 줄 알았다.
이번 K대학 농성사건엔 꼭 영택이가 끼어 있을 것 같았다. 수적으로도 많았지만 우리가 영텍이에게 붙인 죄목과 같은 조목이 이미 붙어 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아이들한테 그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나는 두 아이를 양쪽 겨드랑 밑에 음짝달싹 못 하게 끼고 있으면서도 안심이 안 돼 연방 입으로 겁을 주었다.
“눈 꼭 감고 있어. 아이들은 저런 나쁜 사람 보는 거 아냐. 세상에, 나쁜 사람들이 많기도 하지. 끔찍 한 세상이로구나.”
문득 한쪽 겨드랑 밑에서 계집애가 떨고 있는 걸 느꼈다. 계집애는 눈을 꼭 감고도 제 두 손바닥을 펴서 얼굴을 가리고 미세하게 그러나 속 깊이 떨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떨고 있는 게 손녀가 아니라 나일 거라는 기이한 느낌에 빠져들었다. 손녀의 작은 심장 소리, 할딱이는 숨소리, 꼭 감은 눈 속의 막막한 어둠, 나쁜 것, 나쁜 사람에 대한 공포는 나에게 얼마나 익숙한가.
내가 손녀만했을 때 우리집은 서대문형무소 근방의 빈촌에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가난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꿋꿋한 분이었지만 감옥소 근처에서 자식을 길러야 한다는 걸 퍽 불안해하고 때로는 굴욕스러워하기도 했다. 이놈의 동네만 떠날 수 있으면 죽을 끓여먹어도 다리 뻗고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소리를 말버릇처럼 되뇌곤 했다. 그때는 재판받으러 가는 미결수한테 용수를 씌워서 무개차에 태우고 다녔다. 용수는 머리끝부터 목 밑까지 내려오는 뾰족한 짚모자였지만 두 눈 있는 데만은 뻐끔하게 뚫어놓았었다. 나쁜 사람이 그 구멍으로 내다본다는 건 어린 마음을 매우 으스스하게 했다. 자다가 가끔 가위를 눌릴 만큼 구멍 속의 시선은 악을 농축한 그 무엇이었다. 어머니는 더했다. 어머니하고 같이 길을 가다가 용수 쓰고 끌려가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어머니는 우선 나를 당신 치마폭으로 폭 싸안으면서 눈 감아라, 꼭꼭 감고 있어야 한다, 나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눈을 꼭 감고 몸을 잔뜩 오그리고 마음속 깊이 떨었다. 그때 어머니는 나쁜 사람이 한번 눈독을 들이면 곧장 악에 물든다는 미신적인 공포감을 갖고 계셨던 듯하다.
그후 철이 들고 나서 그 미결수들은 나중에 무죄가 판명되어 풀려나는 수도 있고 또 독립투사도 얼마든지 섞여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왜 그런 말을 안 해주었을까, 어머니가 그걸 조금만 귀띔해주었던들 꼭 감은 눈 속의 어둠이 그리도 완벽하고 막막하지만은 않았으련만. 이렇게 훗날 어머니를 경멸한 주제에 오늘날 손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 역시 똑같은 짓밖에 없었다. 손자의 칠흑 같은 어듬에 행여나 반딧불만한 빛이라도 스며들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어제 일어난 일은 끔찍 했다. 그러나 오늘 신부님의 강론에 그 사건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으셨다. 우리 눈에만 큰 사건이었나보다.
나는 끝내 묵주신공을 열 번 채우지 못했다. 서재를 돌아나오려는데 벽에 걸린 십자고상이 눈에 띄었다. 영세받은 날 교우로부터 선물로 받은 거였다. 놋쇠로 된 십자고상은 너무 반짝거렸다. 가까이에서 표정을 살피고 싶어 다가가니 마침내 입술이 못 박힌 예수의 발에 닿았다. 그 우연한 사실에 감동해서 나도 애절한 마음으로 그의 얼굴을 우러르며 물었다.
“주여, 한 말씀만 하소서. 저희들이 매일매일 말과 행위로 못 박는 죄인 중 의인은 몇몇이나 되리이까?”
영택이를 몰아붙이는 데만 급급해서 한 번도 이해하고자 하지 않았던 데 대한 회한으로 못 박힌 분의 얼굴이 몽롱하고 부드럽게 흐려 보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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