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15일
부산시민공원에 해바라기가 피고 있다는 소식이어서 더위도 피할 겸 아침밥을 일찍 먹고 아침운동삼아 마짱과 7시에 집을 나섰다.
동래에서 179번 버스를 타고 시민공원앞 정류장에 내렸다.
공원 안은 산책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을 뿐 조용했으며, 며칠 전 내린 비로 나뭇잎이 햇빛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천천히 걸으면서 주위의 사진을 찍고 대나무 숲을 지나니 해바라기 밭이 나타났다.
해바라기는 아직 완전히 핀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볼만했으며 앞으로 더 많이 피면 멋질 거라 생각되었다.
해바라기밭을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9시쯤 다시 179번 버스를 타고 두 번째 목적지인 동래 온천천으로 발길을 돌렸다.
동래 온천천에는 이맘때쯤 수국이 피는 곳이 있는데 그것을 보기 위해서였다.
세병교 버스정류소에 버스를 내려 온천천으로 내려갔다.
온천천에는 산책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고 점점 더워지고 있어서 서둘러 수국이 있는 곳으로 갔다.
헌데 실망! 수국은 대호아파트와 로얄듀크아파트 사이 길 아래 언덕에 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칠분지일만 피고 나머지는 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시시한 것 같아 별로 기대는 안했지만 간 김에 보려고 했는데 허탕 쳤다.
영도 태종사와 거제 지구항으로 가 코로나로 취소된 훨씬 멋진 수국축제나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모르파티 [五分冥想]
트로트 가수 김연자(1959~)가 부른 ‘아모르파티’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저는 지금까지 그 노래의 뜻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그 가사를 한 번 알아볼까요?
‘아모르파티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와/
소설 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
자신에게 실망 하지 마/
모든 걸 잘할 순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아모르파티/
인생이란 붓을 들고서/
무엇을 그려야 할지/
고민하고 방황하던/
시간이 없다면 거짓말이지/
말해 뭐해/
쏜 화살처럼 사랑도 지나갔지만/
그 추억들 눈이 부시면서도/
슬펐던 행복이여/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돼/
이제는 더 이상 슬픔이여 안녕/
왔다갈 한 번의 인생아/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
눈물은 이별의 거품일 뿐이야/
다가올 사랑은 두렵지 않아/
아모르파티 아모르파티"
어떻습니까?
상당히 철학적인 가사(歌辭)가 아닌가요?
이 아모르파티라는 말은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한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의 ‘운명관(運命觀)’을 나타내는 용어라고 합니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의미로,인간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를 설명하는 용어인데 ‘운명애(運命愛)’라고도 하지요.
니체에 따르면 삶이 만족스럽지 않거나 힘들더라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난과 어려움 등에 굴복하거나 체념하는 것과 같은 수동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아모르파티’ 즉, ‘운명애’는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고난과 어려움까지도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방식의 삶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가치 전환’하여,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꼭 항상 <공부와 사업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열적으로 뛴다.>와 같은 뜻이 아닐까요?
아모르파티 노래의 한 구절대로 ‘인생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루해가 저물어 갈 때 오히려 저녁노을이 더욱 아름답고. 한해가 저물어 갈 즈음에야 귤은 잘 익어 더욱 향기롭다 했습니다.
사람도 인생의 황혼기에 더욱 정신을 가다듬어 멋진 삶으로 마무리해야 하지 않을까요?
권세와 명예, 부귀와 영화를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을 고결(高潔) 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재색명리(財色名利)를 가까이 하고서도 이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더욱 고상하다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나이도 익어갑니다.
그런데도 여태껏 권모술수와 재와 색, 권력과 이익 앞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을 보면 여간 측은한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분수를 넘지 않도록, 자신의 인격을 갈고 다듬는 수양(修養)에 정신과 육신, 그리고 물질을 아낌없이 쓰며 선업을 쌓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성공에만 목매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일을 그르치지 않는 것만 해도 성공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베풀 때 상대방이 그 은덕(隱德)에 감동하기를 바라면 안 됩니다.
원망만 받지 않아도 그것이 바로 은덕입니다.
내가 남에게 베푼 공(功)은 마음에 새겨 두지 말고, 남에게 은혜 입은 것만 마음에 새겨 두어야 공덕(功德)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굴기(屈起)하면 하심(下心)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거름이 많은 땅에서는 초목이 잘 자랍니다.
지나치게 물이 맑으면 물고기가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때 묻고 더러운 것도 용납하는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너무 결백하여 독단적으로 몰아 부치려 해도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평생 쌓은 공덕이 훼손(毁損)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괴롭히거나 질리게 하는 사람일지라도 아주 적(敵)으로 돌리지 말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안 되면 차라리 무심(無心)해 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사람에게도 마음을 열고 용서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세상을 뜨겁게 사랑하면 그것이 ‘아모르파티’이고 ‘운명을 사랑하는 방법’이 아닐 런지요?
오청원교장님 전달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