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학(apologetics)이란, 기독교 학문의 한 분야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변호하고, 그것을 비기독교 세계에 효과적으로 전하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변증학은 소통(engagement)을 독려한다. 다시 말해 변증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 문화의 사상에 대해 꽁무니를 빼거나 그 사상을 무시해도 되는 척하지 말고, 오히려 그 사상과 소통하라고 독려한다. 변증학은 믿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믿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변증학은 우리의 이성과 상상력 그리고 가장 깊은 갈망과도 소통한다. 변증학은 우리의 가슴과 눈과 마음을 연다. (머리말 14쪽)
초기 기독교 저자들은 플라톤적 사고에 길들여진 청중에게 복음의 진리와 능력을 어떻게 전달했을까?
13세기~16세기 초 기독교 변증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제기한 여러 도전을 어떻게 규명했을까?(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세상이 영원하다고 믿는다)
변증가들이 맞닥뜨린 세 가지 과제(변호하기, 권하기, 번역하기)가 있다.
1. 변호하기(26쪽) : 신앙의 장애물을 찾아낸다. 오해나 잘못된 설명을 바로잡는다. 변호란, 반응 전략이다. 어떤 사람이 관심을 보인다면 우리는 그의 관심에 반응할 책임이 있다. 변증가는 청중을 알아야 한다. 변증가는 신앙을 가로막는 장애물과 그 특징을 규명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반응을 제시하려 한다.
변증가는 '지성의 제자도'를 기르라며 그리스도인들을 독려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자신의 신앙을 생각하고, 자신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벼리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변증학이란 기독교 신앙에 더 멀리, 더 깊이 들어가 그 풍성함을 찾아내는 것이다.
예) 왜 하나님은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애완동물도 죽으면 천국에 가는가?
우리는 여러 관심 주제들을 섬세하고 동정 어린 마음으로 다뤄야 하며, 이러한 주제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가봐야 한다.
우리는 방어적 태도를 취하지 않고도 복음을 변호할 수 있다.
2. 권하기(29쪽) : 이 단계에서 변증가는 청중이 복음의 진리와 적합성을 깨닫도록 돕는다. 이를 위해 청중과 복음을 연결하기에 유익한 예화나 비유 또는 이야기를 사용해도 좋다.
변증학에서 논증은 중요하다. 그러나 논증은 한계가 있다. 우리 시대 많은 사람이 기독교에 끌리는 까닭은, 기독교가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과제는 기독교 신앙이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을만큼 흥미진진하고 놀랍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도록 돕는 것이다.
변증학이란 복음에 대한 반대나 어려움을 규명하고 여기에 대응하며 신앙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극복하도록 돕는 것이다.
변증학이란 인간의 처지를 바꾸는 기독교 신앙의 잠재력을 알 수 있도록, 기독교 신앙이 주는 흥분과 경이를 전달하는 것이다.
변증학이란 기독교 신상의 핵심 개념을 외부인들이 이해하는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33)
데이비드 보쉬, 전도란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선포하고, 회개와 회심을 촉구하며 죄 용서를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지상 공동체의 살아 있는 구성원이 되어 성령의 능력으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삶을 시작하라고 초청하는 것이다. (34)
변증학의 한 가지 목적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세상이 이해하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다. '칭의'는 세속문화에 맞게끔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유익하지 못한 두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첫째, 복음을 문화적 용어로 번역하면 기독교 사상이 그 사회의 문화적 등가물로 축소되기 쉽다. 변증학을 잘못 활용하면 기독교의 뚜렷한 정체성을 잃기 쉽다.(38)
둘째, 변증학은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만 보여주면 그만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위험을 안고 있다.(39)
신앙(믿음)이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섬에 이르는 항해와 같다. 변증가들은 배가 있음을 믿는 게 합리적이고, 그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게 안전할 터이며, 수평선 너머에 섬이 있다는 사실을 확고히 하도록 도울 수 있다. 그렇더라도 직접 그 배를 타고 그 섬까지 가야 한다. 신앙이란 단지 하나님을 믿는게 아니라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다.-마르틴 루터- (39)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라면 앞서 말한 획일주의에 대한 거부가 아닐까 싶다.(53)
변증학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시선을 향하도록 돕기 위해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려는 의지다. (69)
유대 문학에는 사실상 직업 때문에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막1:16~18) 특히 두 그룹의 사람들이 언급되는데, 바로 목수와 어부였다. 목수는 장의사를 겸하는 터라 늘 시체를 만져야 했기 때문이며, 어부는 뒤섞인 물고기 가운데 깨끗한 물고과 부정한 물고기를 분류해야 했기 때문이다. 두 그룹 모두 정결 의식과 관련된 유대교의 엄격한 규범을 지키지 못했다. 유대교의 규범은 부정한 대상과는 접촉을 일절 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러한 어부들을, 유대 사회의 종교생활에서 변두리로 내몰린 사람들을 부르신다. 이 장면은 기독교 복음이 모두에게 다가가는 방식을 강하게 일깨운다. 다시 말해 기독교 복음은 사회에서 힘없고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라도 절대 외면하지 않는다.(71)
왜 시몬과 안드레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는가? 예수께는 강력한 설득력을 지닌 그 무엇이 있었다. 변증학은 아무도 회심시키지 않으며 그렇게 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변증학은 하나님을 만나는 데 방해되는 장애물을 제거함으로, 또는 그리스도를 보게끔 창문을 열어줌으로써 사람들을 바른 방향으로 인도한다.(72)
빌립과 나다나엘의 이야기(요 1: 45~ 46) 에서는 만남이 논증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73)
빌립은 예수님을 위해 논쟁하지 않는다. 다만 상대방을 예수께로 향하게 한다. (74)
믿음이란 단지 생각이 바뀌는 게 아니다. 믿음이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남으로 인격이 변화되는 것이다.(75) 변증학은 치유하고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의지한다. (76)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역할은 중요하지만 제한적이다. 회심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76) 변증학 자체가 치료하지는 않는다. 변증학은 치료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줄 뿐이다.(78) 변증가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진선미를 드러낼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78) 기독교 신앙의 큰 주제들이 기독교의 어휘나 관습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변호되고 설명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79)
복음을 사람들의 삶과 연결하는 일이 중요하다. 신학은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과 연결되는 가장 적절한 접촉점을 찾아내도록 도우며, 그럼으로써 그들이 신앙의 기쁨을 발결할 수 있게 해 준다.(92)
가려운 부분을 복음으로 긁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수용자 중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