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정신 신인문학상 당선작] 동을배곶 말목장성*에서 외 4편 / 송준규
동을배곶 말목장성*에서 외 4편
송준규
돌문을 드나들던 말의 행렬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말봉재를 울리던 말발굽 소리를 찾아
말 잔등에 오른다
여명의 바다를 지나 반 바퀴나 기운 태양이
청보리 물결로 출렁거리는 구만리, 푸른 등줄기를 내달리는 말갈기가
시간의 벽을 허문다
군마들이 내달렸다는 드넓은 목장
조형물이 된 세 마리 말이 돌 울타리를 지키고 있는
말목장성 능선마루에 가만히 귀를 대 본다
갈기 세운 말발굽 소리 두두두. . . . . .
군마들의 기상이 지평선을 가르자
동을배곶 호랑이 꼬리가 바다에 출렁거린다
멀건 풀죽에 쑥버무리로 끼니를 때웠다는
오월의 보릿고개는 또 어디로 갔을까
청보리 푸르게 나부끼는 구만리 언덕에서
나는 풍차처럼
오월의 달력을 넘긴다.
* 호미반도에 자리하고 있던 장기현 말목장성의 옛 이름.
간지럼 타는 나무
짓눌린 허리 바루느라
뒤구르기로
진땀 빼는 아내
산호혼식 맞을 동안
배롱나무같이 배롱배롱
사방연속무늬로 꽃망울 피워내더니
노목이 될수록 너울너울
배틀린 가지에
애처로운 저 붉은 꽃잎
팝콘 한 통 사들고 앉은
인생극장 네온 불 아래
살풋 스치는 손길에도 간지럼 못 참고
웃음허리 자지러지는
아내는 백양수伯痒守*
* 배롱나무의 다른 이름
푸얼차 普洱茶
청정한 운남 육대차산 구름의 고향을 우린다
뜨거운 가마솥 살청시련을 비비고 볕 쪼이고
돌에 눌려 타, 병, 전, 방, 틀을 잡아
말등에 실려 비바람 맞으며 차마고도를 넘을 때
인생과 풍류를 알았고
어두운 항아리 속에 묵언수행 수십 년
모나고 각진 것 다듬고 또 다듬어
원만한 도를 이루었다네
호壺에 들어 정갈하게 씻은 몸 녹여
매끄럽고, 부드럽고, 촉촉하고, 단침고이는
붉고 투명하게 부활한 보살
도를 이루는 길이란 험하고도 멀어
잃어버린 길을 나는 다시 잃어버리고
푸얼차 한 모금 입속에
상상의 우담바라 꽃 피워본다
시월 청도에 가면
시월의 청도에는
있는 것도 많고, 없는 것도 많다.
바람이 내달려 구름 여는 운문호가 깊은 수심 이루어
파리낚시 던져두고 밤새워 별 헤던 시간들 일렁이고,
벚꽃고운 고향마을 잠긴 물위엔
눈송이처럼 그리움이 흩날린다.
내호리 시인의 마을엔 예스러움은 있으나 시인은 간데없고,
800년을 버틴 은행나무 맹아, 유주가의 길어 나올 동안
적천사엔 목어가 없다
청도역 골목 간판마다 추어탕 집, 탕 속에 추어는 없고,
온천지 붉게 열린 감에는 씨가 없다
삼랑진 만어산 용궁왕자 따라 올라오던 고기떼는 다 어딜가고
너덜지대 산을 이룬 도처에 문화유적 산재하나
신라에 대적하던 이서국은 간데없고 말울음소리만 서글프다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니
공연한 분별심 일으키지 말라고
박곡리에 앉아계신 석가여래 부처님
눈도, 코도, 입도, 귀도 없이 묵언수행 중이시다
서각(書刻)
먹 갈아 바람을 쓰고
뾰족한 칼끝으로 적막을 파고 새긴
세월의 편린들
청송 부동 마을길 오백 살 된
물푸레나무도
영양 석보 마을 숲 600년에
속이 텅 빈 느티나무도
소백산등성이에 벼락 맞은 고사목도
장기기증 새 생명 살려내듯
썩은 부위 잘라내고
생채기를 다듬네
서예, 회화, 조각
삼차원 입체 공간에
나무의 물컹한 체취 쓸어 담으며
생의 나이테를 어루만지네
■ 당선소감
오랫동안 서예와 서각을 해왔다. 그러나 좋은 글귀들을 붓으로 쓰고, 나무에 새기는 작업만으로는 언제나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남았다. 알 수 없는 허전함을 메우기 위한 방법으로 남의 생각이 아닌 나의 생각,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 남의 글이 아닌 나의 글을 써보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시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분야를 새롭게 배워나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리고 작고 큰 공모전에서 입상의 기회를 얻으면서 또 하나 깨달은 것은 서예와 서각 작품을 위해 선조들의 좋은 글귀를 음미하고 사숙私淑하는 동안 내 속에 글이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나의 생각,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가슴 저 밑바닥에 감춰두었던 응어리들이 하나하나 스스로 치유되는 행복감을 맛볼 수 있었다.
시인의 칭호를 얻게 된다는 기쁨도 잠시, 부끄럽지 않은 문학인의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늘 풋풋하고 새로운, 살아있는 글쓰기에 무거운 책임감이 앞선다.
꿈꾸어 왔던 시詩, 서書, 각刻의 삼락三樂과 함께 나이 들어가고 성숙해져야 할 터이다. 이제는 글을 쓰기 위해 먹을 갈고 나무를 깎는 것이 아니라 나를 쓰기 위해 나를 깎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지도해주신 선생님, 문우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며, 졸작을 뽑아주신 시인정신사 관계자 분들과 심사위원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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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규 : (사)한국미술협회 회원, -신라미술대전 초대작가, 운영위원, 국제유교미술, 서예대전 심사위원,
경상북도미술대전 초대작가, 대한민국서예,문인화대전 초대작가,
포항소재문학상 시부문 최우수상 수상. 현재 포항 남부경찰서 재직 중.
■ 심사평
시를 쓸 때의 처음은 시를 발견하는 눈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시인은 일반인의 육안과 또 다른 마음의 눈이 있다. 마음의 눈은 섬세한 관찰력이며 마음의 눈 속에 미물이라도 긍휼히 보는 사랑이 있다면 무심히 지나쳐버릴 수 있는 일상이나 사물에서도 능히 시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송준규는 일상의 사물에서 인성을 발견하는 썩 괜찮은 눈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시들을 보면서 그가 사물을 사물로써만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사물에서도 인성을 발견하여 인간과의 교집합을 탐구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 일례가 「간지럼 타는 나무」이며 그의 시선이 붉게 꽃을 피운 나무에서 수줍음 타는 아내로 오버랩 시키는 재주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그를 문단에 내어놓는 이유다.
하지만 서예와 서각에 상당한 깊이를 지닌 짧지 않은 그의 삶이 다분히 안빈락安貧樂을 추구하는 도가적道家的일 수도 있어 우려하는 바가 없지는 않다. 앞으로는 비유와 상징과 이미지의 기법으로 보다 치열하고 응집력이 있는 언어의 그림을 그려가기를 당부하며 그의 섬세한 눈과 예술의 재능이 능히 이를 극복하여 문단에서도 족적을 남기리라 기대한다.
ㅡ 김지향 (시인,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