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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송사[宋史] 외국열전(外國列傳)
차 례
1. 고려(高麗)
2. 안정국(定安國)
3. 발해(渤海)
○ 송사(宋史)[註001] 외국열전(外國列傳)[註002]
1. ○고려(高麗)[註003]
○ 고려(高麗)의 본래 이름은 고구려(高句麗)이다. 우(禹)가 [천하(天下)를] 구주(九州)[註004]로 나눌 적에 기주(冀州) 땅에 예속시켰고, [註005] 주(周)나라 때에는 기자(箕子)[註006]의 나라가 되었으니, 한(漢)나라의 현도군(玄菟郡)이다. 요동(遼東)에 있었는데, 부여(扶餘)의 별종(別種)으로 평양성(平壤城)을 도읍지로 삼았다.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이래로 항상 직공(職工)하면서도 자주 변방을 침략하기도 하였다. 수(隋) 양제(焬帝)는 두 번이나 출병(出兵)하였고, 당(唐) 태종(太宗)은 친히 [고구려(高句麗)를] 정벌하였으나 모두 이기지 못하였다. 그 후 [당(唐)] 고종(高宗)이 이적(李勣)[註007]에게 [고구려(高句麗)] 정벌을 명하여, 마침내 그 성(城)을 함락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군(郡)· 현(縣)으로 삼았다. 당(唐)나라 말엽 중국이 어지러워지자 [註008] [고려(高麗)]가 마침내 스스로 군장(君長)을 세웠다
○ 후당(後唐)의 동광(同光)(A.D.923~925; 高麗 太祖 6~8)· 천성(天成)(A.D.926~929; 高麗 太祖 9~12)에 그 임금 고씨(高氏)가 여러번 직공(職工)하였다. [註009] 장흥(長興) 연간(A.D.930~933; 高麗 太祖 13~16)에 권지국사(權知國事)[註010] 왕건(王建)이 고씨(高氏)의 왕위(王位)를 계승하여[註011]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니, 건(建)을 현도주도독(玄菟州都督)으로 삼고 대의군사(大義軍使)[註012]에 충임(充任)하는 동시에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책봉하였다. [註013] [후(後)]진(晉) 천복(天福) 연간(A.D.936~943; 高麗 太祖 19~26)에도 다시 와서 조공(朝貢)하였다. 개운(開運) 2년(A.D.945; 高麗 惠宗 2)에 건(建)이 사(死)하고 아들 무(武)가 왕위(王位)를 계승하였다
○ 후한(後漢) 건우(乾祐)(A.D.948~950; 高麗 定宗 3~光宗 1) 말에 무(武)가 사(死)하여 아들 소(昭)가 권지국사(權知國事)가 되었다. [후(後)]주(周) 광순(廣順) 원년(A.D.951; 高麗 光宗 2)에 사신을 보내와 조공(朝貢)하니, [註014] 소(昭)를 특진(特進)· 검교(檢校)[註015] 태보(太保)[註016]· 사지절(使持節)· 현도주도독(玄菟州都督)· 대의군사(大義軍使)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삼았다. [註017] 현덕(顯德) 2년(A.D.955; 高麗 光宗 6)에 또 사신을 보내와 조공(朝貢)하니, [소(昭)를]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註018]· 검교태위(檢校太尉)로 올려주고, 또 태사(太師)[註019]를 더하였다.
○ 건륭(建隆) 3년(A.D.962; 高麗 光宗 13) 10월에 소(昭)가 광평시랑(廣評侍郞)[註020] 이흥우(李興佑)[註021]· 부사(副使) 이려희(李勵希)· 판관(判官) 이빈(李彬) 등을 보내와 조공(朝貢)[註022]하였다. [건륭(建隆)] 4년(A.D.963; 高麗 光宗 14) 봄에 [태조(太祖)]가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註023] “옛적 명찰(明哲)한 제왕(帝王)이 중국을 통치할 적에는 어찌 문자(文字)와 거궤(車軌)가 만방(萬方)에 통일되고 교화가 사해(四海)에 미치지 아니하였겠소? 그런데 나는 박덕(薄德)으로서 외람되게 홍명(鴻名)을 물려받아 이에 사신이 오게 되었으니, 정중하게 명(命)을 내리오.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사(檢校太師)· 현도주도독(玄菟州都督)· 충대의군사(充大義軍使)· 고려국왕(高麗國王) 소(昭)는 태양의 정기가 뭉쳐 요좌(遼左)에서 영웅으로 추대되어 기자(箕子)가 남긴 교화(敎化)를 익히고 주몽(朱蒙)의 옛 풍습을 따랐소. 그리고 구름과 바다를 관측하여 조공(朝貢)으로 제정(帝庭)을 채웠으니, 그 쏟은 정성을 생각하면 실로 매우 가상한 일이오. 그러므로 의호(懿號)를 하사하는 동시에 공전(公田)[註024]으로도 보답하며, 원방(遠方) 사람들을 회유하는 은혜를 미루어 중국에 충성하는 뜻을 표창하는 바이오. 아! 만리(萬里)를 와 조공(朝貢)하니 진정한 충성이 아름답구려. 사봉(四封)을 회유·위무하고 있으며, 바라건대 어지럽히거나 비뚤어지지 말고 영원히 동방(東邦)을 보존하여 마침내는 하늘의 도움을 받기 바라오. 식읍(食邑) 7천호(千戶)를 더하여 [註025] 주고 아울러 추성순화보의공신(推誠順化保義功臣)의 호(號)를 하사하겠오.” 하였다. 그 해 9월에 사신 시찬(時贊) 등을 보내와 조공(朝貢)하였다. 바다를 건너다가 큰 풍랑을 만나 배가 파괴되어 익사(溺死)한 사람이 70여명이나 되었는데, [시(時)]찬(贊)은 가까스로 모면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그를 위로하였다.[註026]
○ 개보(開寶) 5년(A.D.972; 高麗 光宗 23)에 사신을 보내와 방물(方物)을 바치니, 제서(制書)를 내려 식읍(食邑)[註027]을 더하여 주는 동시에 추성순화수절보의공신(推誠順化守節保義功臣)의 호(號)를 하사하였다. 진봉사(進奉使)[註028]인 내의시랑(內議侍郞)[註029] 서희(徐熙)[註030]에게는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를, 부사(副使)인 내봉경(內奉卿)[註031] 최업(崔鄴)에게는 검교사농경(檢校司農卿)[註032] 병겸어사대부(並兼御史大夫)[註033]를, 판관(判官)인 광평시랑(廣評侍郞) 강례(康禮)에게는 소부소감(少府少監)[註034]을, 녹사(錄事)인 광평원외시랑9廣評員外郞)[註035] 유은(劉隱)에게는 검교상서(檢校尙書)· 금부랑중(金部郞中)[註036]을 각각 제수(除授)하는 동시에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註037] 소(昭)가 졸(卒)하자 그의 아들 주(伷)가 권령국사(權領國事)가 되었다.
○ [개보(開寶)] 9년(A.D.976; 高麗 景宗 1) 에 주(伷)가 사신 조준례(趙遵禮)를 보내와 토산(土産) 공물(貢物)을 바치면서, 그의 부왕(父王)이 죽었으니 왕위(王位)를 계승하는 것이 마땅하므로 조지(朝旨)를 보내 달라고 하였다. 주(伷)을 검교태보(檢校太保)·현도주도독(玄菟州都督)· 대의군사(大義軍使)에 제수(除授)하는 동시에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책봉하였다.[註038] 태종(太宗)이 즉위하여 [주(伷)에게] 검교태부(檢校太傳)[註039]를 더하고, 대의군(大義軍)을 고쳐 대순군(大順軍)으로 삼아 좌사어부솔(左司禦副率) 우연초(于延超)·사농사승(司農寺丞)[註040] 서소문(徐昭文) 등을 고려(高麗)에 파견하였다. 주(伷)가 고려(高麗) 사람 김행성(金行成)을 보내어 [송(宋)나라의] 국자감(國子監)[註041]에 들어가 공부하도록 하였다.
○ 태평흥국(太平興國) 2년(A.D.977; 高麗 景宗 2) 에 [주(伷)가] 그의 아들 원보(元輔)를 보내어 양마(良馬)· 방물(方物)· 병기(兵器) 등을 바쳤다.[註042] 그 해 김행성(金行成)이 [註043]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다.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A.D.978; 高麗 景宗 3)에 또 사신을 보내와 방물(方物)· 병기(兵器) 등을 바치니, 주(伷)에게 검교태사(檢校太師)를 더하여 주면서 태자(太子) 중윤(中允) 직사인원(直舍人院) 장계(張洎)· 저작랑(著作郞)[註044] 직사관(直史館) 구중정(句中正) 등을 사신으로 삼아[註045] [고려(高麗)에 파견하였다.] [태평흥국(太平興國)] 4년(A.D.979; 高麗 景宗 4)에도 공봉관(供奉官)[註046]으로 합문지후(閤門祗候)[註047] 왕선(王僎)을 고려(高麗)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태평흥국(太平興國)] 5년(A.D.980; 高麗 景宗 5) 6월에 [고려(高麗)에서] 사신을 보내와 방물(方物)을 바쳤다.[註048] [태평흥국(太平興國)] 6년(A.D.981; 高麗 景宗 6)에도 [고려(高麗)에서] 또 사신을 보내와 조공(朝貢)하였다. [태평흥국(太平興國)] 7년(A.D.982; 高麗 成宗 1)에 주(伷)가 졸(卒)하자 그의 아우 치(治)가 지국사(知國事)가 되었다. 사신 김전(金全)을 보내와 금은실로 봉제한 계금포(罽錦袍)·계금욕(罽錦褥)과 금은(金銀)으로 장식한 칼·활·화살 및 명마(名馬)· 향약(香藥) 등을 바치고[註049] 왕위(王位) 계승을 요청하였다. 치(治)를 겸교태보(檢校太保) 현도주도독(玄菟州都督)으로 제수(除授)하고 대순군사(大順軍使)에 충임(充任)하는 동시에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책봉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 이거원(李巨源)·예기박사(禮記博士) 공유(孔維)[註050] 등을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 옹희(雍熙) 원년(A.D.984; 高麗 成宗 3)에 사신 한수령(韓遂齡)을 보내와 방물(方物)을 바쳤다. [옹희(雍熙)] 2년(A.D.985; 高麗 成宗 4)에 치(治)를 검교태부(檢校太傳)를 더하여, 한림시서(翰林侍書)[註051] 왕저(王著)·시독(侍讀)[註052] 여문중(呂文仲)[註053] 등을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 [옹희(雍熙)] 3년(A.D.986; 高麗 成宗 5)에 [송 태종(宋 太宗)이] 군사를 출동시켜 북쪽으로 [거란(契丹)을] 정벌하였는데, 고려(高麗)가 거란(契丹)과 인접하여 항상 그들의 침략을 당하는지라,[註054] 감찰어사(監察御使) 한국화(韓國華)[註055]를 [고려(高麗)에] 파견하여 조서(詔書)를 가지고 가서 효유(曉諭)하기를, “짐(朕)이 외람되게 중대한 국사(國事)를 짊어지고 오랫동안 천하를 통치함에 중국과 오랑캐가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소. 어리석은 북방 오랑캐가 왕략(王略)을 침해하고 있으니, 유주(幽州)·계주(薊州) 지방은 중국의 강토였는데 한(漢)·진(晉) 때의 혼란한 틈을 타서 빼앗아 차지하였던 것이오.[註056] 지금은 우리 국가의 통치가 미치는 곳마다 문자(文字)와 거궤(車軌)가 통일되었는데, 어찌 백성들을 오랑캐의 풍속에 빠져 있도록 둘 수 있겠소? 이제 군사를 독려·정돈하여 오랑캐를 섬멸하려고 하오.
왕(王)은 오래도록 중국의 풍속을 사모하여 항상 밝은 계책을 가지고 굳은 절개로 예의의 나라를 편안히 하였소. 그런데 거란(契丹)의 변경에 인접하여 침략을 당하곤 하였으니, 쌓였던 울분을 씻을 기회는 바로 지금이오. 부디 군사들에게 거듭 타일러 서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어 인국(隣國)과 협조하에 힘을 합쳐 [거란(契丹)을] 평정하되, 한번 북을 쳐서 [적을 무찌르는] 웅용(雄勇)을 뽐내어 멸망하게 된 구적(寇賊)을 쳐부수도록 하오. 좋은 기회는 두 번 오지 않는 법이니 왕(王)은 도모하시오. 노획한 사람·소·양·재물·기계 등은 모두 고려(高麗) 장병들에게 주어 포상(褒賞)할 것이오.” 하였다.
○ 앞서 거란(契丹)이 여진국(女眞國)을 정벌할 적에 길이 고려(高麗) 국경을 경유하게 되자, 여진(女眞)은 고려(高麗)가 [거란(契丹)을] 끌어들여 전화(戰禍)를 꾸민 것이라 생각하고 [송(宋)나라에] 말(마,馬)을 바치러 와 조정(朝廷)에 참소하기를, “고려(高麗)가 거란(契丹)과 우호 관계를 맺고[註057] 서로 의지하여 후원(後援)으로 삼아 여진(女眞) 백성을 사로잡아가 돌려보내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그 후] 고려(高麗) 사신 한수령(韓遂齡)이 들어와 조공(朝貢)하자, 태종(太宗)은 급변(急變)을 알리기 위하여 여진(女眞)에서 올린 목계(木契)[註058]를 꺼내어 [한(韓)]수령(遂齡)에게 보여주면서, “본국(本國)에 돌아가거든 사로잡아간 [여진(女眞)] 백성들을 돌려보내 주도록 하라.” 고 하였다.
치(治)는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다가 [송(宋)나라 사신] [한(韓)]국화(國華)가 도착하자 사람을 시켜 한국화(韓國華)에게 말하기를, “지난해 말 겨울에 여진(女眞)이 급히 목계(木契)를 가지고 와 고하기를 ‘거란(契丹)이 군사를 일으켜 여진(女眞) 국경을 침입하였는데,[註059] 당도(當道)가 모르고 있을까 두려워 미리 그에 대비하라’고 하였소. [그러나] 당도(當道)는 여진(女眞)과 이웃 나라이기는 하지만 길이 멀 뿐 아니라 여진(女眞)의 속셈을 처음부터 알았고, [그들은] 탐욕스럽고 속이는 것이 많아 믿을 수가 없었소.
그 후 [여진(女眞)이] 또 사람을 파견하여, ‘거란(契丹)의 기병(騎兵)들이 벌써 매하(梅河)[註060]를 건너왔다.’고 알려 왔으나 당도(當道)는 오히려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의심하였던 터라 구원해 줄 겨를이 없었소. 그런데 얼마 후 거란(契丹)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여진(女眞)을 크게 공격하여 죽이고 노획한 것이 대단히 많았소.
[여진(女眞)의] 무리들이 패전하여 흩어져 달아나자 거란(契丹)은 그들의 등뒤를 바짝 추격하여 당도(當道)의 서북 지방인 덕창(德昌)·덕성(德成)·위화(威化)·광화(光化) 등의 지경에까지 이르러 그들을 사로잡아 갔소. 그 때에 거란(契丹)의 한 기병(騎兵)이 광미하(德米河) 북쪽에 이르러 관성(關城)을 지키는 병졸에게 큰 소리로, ‘나는 거란(契丹)의 기병(騎兵)이다. 여진(女眞)이 우리 변경을 침입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왔다. 이제는 보복을 끝냈으므로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간다.’고 알렸소.
당도(當道)는 [거란(契丹)의] 군사가 물러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래도 뜻밖의 변이 있을까 염려하여, 바로 여진(女眞)에서 병란(兵亂)을 피하여 도망 온 천 여명에게 자량(資糧)을 주어 돌려보냈소. 여진(女眞)은 또 당도(當道)에게 매하(梅河)의 중요한 나루터를 봉쇄하고 성루(城壘)를 쌓아 [거란(契丹)을] 방어할 준비를 세우라고 권고하였소. 그래서 역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바야흐로 시찰하고 공사를 일으키도록 하였는데, 뜻밖에 여진(女眞)이 군사를 몰래 출동시켜 갑자기 쳐들어와 [우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고, 장정들을 사로잡아 노예(奴隷)로 삼아 다른 지방으로 돌려보냈소.
그러나 [여진(女眞)이] 중조(中朝)에 해마다 조공(朝貢)하기에 감히 병사를 징발하여 보복하지 아니하였는데, 도리어 [우리 고려(高麗)를] 무고(誣告)하여 성덕(聖德)을 현혹시킬 줄이야 어찌 생각하였겠소? 당도(當道)는 대대로 [송(宋)나라의] 정삭(正朔)을 받아[註061] 조공(朝貢)을 이행하고 있는데, 감히 두 마음을 품고 외국(外國)과 서로 내통하겠소? 더구나 거란(契丹)은 요해(遼海)의 밖에 끼어 있는데다가 또 대매(大梅)·소매(小梅) 두 강으로 막혀 있으며, 여진(女眞)·발해(渤海) 등은 본시 일정한 주거가 없는데, 어떤 경로를 따라 왔다 갔다 하겠소? 그런데 뜻밖에도 참소하니 울분으로 가슴이 꽉 막히겠소.
해와 달은 지극히 밝으니 명찰(明察)하기 바라오. 요사이는 여진(女眞)에서 난리를 피하여 온 무리를 모두 구휼하였고, 또 관직도 준 경우도 있는데 오래 우리나라에 머무르고 있소. 그 직위가 높은 사람으로는 물굴니우(勿屈尼于)·나원(郍元)·윤능달(尹能達)·나로정(郍老正)·위가야부(衞迦耶夫) 등 십여 명이나 되오. 바라건대 그들을 경사(京師)의 대궐로 불러들여 당도(當道)의 조공(朝貢)하는 사신과 더불어 [대궐] 뜰에서 그 사실을 해명하도록 한다면, 단석(丹石)같은 성심(誠心)이 아마 밝혀질 것이오.”하였다. 그러자 [한(韓)]국화(國華)는 그렇게 하겠다고 승낙하고, 바로 병사를 징발하여 서쪽으로 모이도록 하였다. 그런데 치(治)가 시일이 지체하여 곧장 조서(詔書)대로 행하지 아니하자, 한국화(韓國華)는 자주 독촉하여 병사를 징발하였다는 보고를 듣고서야 환국(還國)하여 여진(女眞)에 대한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여 아뢰었다.
○ [옹희(雍熙) 3년] 10월에 사신을 보내와 조공(朝貢)하였다. 또 본국(本國)의 학생 최한(崔罕)[註062]·왕빈(王彬)[註063] 등을 보내어 국자감(國子監)[註064]에 들어가 학업을 익히도록 하였다.
○ 단공(端拱) 원년(A.D.988; 高麗 成宗 7)에 치(治)에게 검교태위(檢校太尉)로 가배(加拜)하여, 고공공외랑(考功貢外郞) 겸시어사지잡(兼侍御史知雜) 여단(呂端)과 기거사인(起居舍人)[註065] 여우지(呂祐之) 등을 사신으로 삼아 파견하였다.[註066] [단공(端拱)] 2년(A.D.989; 高麗 成宗 8)에 사신을 보내와 조공(朝貢)하니, 조서(詔書)를 내려 고려(高麗)의 정사(正使)인 선관시랑(選官侍郞) 한린경(韓藺卿)과 부사(副使)인 병관랑중(兵官郞中)[註067] 위덕유(魏德柔)에게는 모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註068]를 제수(除授)하고, 판관(判官)[註069]인 소부승(少府丞)[註070] 이광(李光)[註071]에게는 검교수부(檢校水部)[註072] 원외랑(員外郞)을 제수(除授)하였다. 앞서 치(治)가 승(僧) 여하(如可)를 보내어 표(表)를 올리고 알현(謁見)하고서 『대장경(大藏經)[註073]』을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대장경(大藏經)』을 하사함과 아울러 여하(如可)에게 자의(紫衣)를 주어 [고려(高麗) 사신들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 순화(淳化) 원년(A.D.990; 高麗 成宗 9) 3월에 조서(詔書)를 내려 치(治)에게 식읍(食邑) 천호(千戶)를 가봉(加封)하여, 호부랑중(戶部郞中)[註074] 시성무(柴成務)와 병부외랑(兵部員外郞)[註075] 직사관(直史館)[註076] 조화성(趙化成) 등을 사신으로 보냈다. 고려(高麗)의 풍속은 음양(陰陽)과 귀신(鬼神)에 대한 일을 믿어[註077] 꺼리는 것이 매우 많아, 조정의 사신이 이를 때마다 꼭 좋은 달에 길한 날짜를 가린 뒤에야 예식을 갖추어 조서(詔書)를 받곤 하였다.
[시(柴)]성무(成務)는 객관(客館)[註078]에 있은 지 한 달이 넘자, 마침내 치(治)에게 글을 보내기를, “왕(王)이 대대로 번국(藩國)으로서 왕실(王室)을 존숭하므로 무릇 대경(大慶)을 거행할 적마다 맨 먼저 휘장(徽章)을 받곤 하였습니다. 지금 국가에서 특별히 사신을 파견하여 특수한 은총을 베품에 있어, 머나먼 물길만 경유한 것이 아니라 위험한 바다도 건너 왔으니 황조(皇朝)의 대우가 역시 융숭한 셈입니다. 그런데 금기에 얽매이고 점술에 구애받고 일자(日者)의 허튼 말에 현혹되어 천자(天子)의 명서(命書)를 지체토록 하고 있습니다. 생각컨대 전책(典册)에 쓰인 글은 점치는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에 상일(上日)[註079]만 말하였고 육갑(六甲)의 좋은 일진(日辰)은 추택하지 아니하였으며, 『예기(禮記)』에서도 중동(仲冬)을 기록하여 일양(一陽)이 [처음 생동하는] 좋은 시기만을 채택하였습니다. 이처럼 찬란한 옛날의 교훈을 밝게 상고할 수 있으니 마땅히 계획을 고쳐 황제(皇帝)가 하사한 [조서(詔書)를] 빨리 받아야 합니다. 봉발(鳳綍)을 지체시키지 않고 공극(拱極)의 정성을 나타내면, 은총(恩寵)이 빛나 칙명(勅命)을 욕되게 하였다는 책망을 모면할 것입니다. 삼가 정성스럽게 아뢰오니 왕(王)은 들어 주십시오.” 하였다. 치(治)는 이 글을 보고 부끄럽고 두렵게 여겨 [시성무(柴成務)에게] 사람을 보내어 사과하였다. 때마침 장마비가 그치지 않자 비가 개이기를 기다려 [조서(詔書)를 받겠다고] 요청하니, [시(柴)]성무(成務)가 또다시 글을 보내어 책망하였다. 치(治)는 그 이튿날 드디어 나와 칙명(勅命)을 받았다.
○ [순화(淳化)] 2년(A.D.991; 高麗 成宗 10)에 사신 한언공(韓彦恭)[註080]을 보내와 조공(朝貢)하였다. [한(韓)]언공(彦恭)이 표(表)를 올려 치(治)의 의사를 아뢰고 인간(印刊)한 불경(佛經)을 달라고 요청하므로, 조서(詔書)를 내려 『장경(藏經)』 및 어제(御製) 『비장전(祕藏詮)』·『소요영(逍遙詠)』· 『연화심륜(蓮華心輪)』등을 하사하였다. [순화(淳化)] 4년(A.D.993; 高麗 成宗 12) 정월에 치(治)가 사신 백사유(白思柔)[註081]를 보내와 방물(方物)을 바치고 아울러 불경(佛經) 및 어제(御製) 등을 하사한 것에 대하여 사례하였다. 2월에 비서승(祕書丞) 직사관(直史館) 진정(陳靖)[註082]과 비서승(祕書丞)[註083] 유식(劉式) 등을 사신으로 파견하여,[註084] 치(治)에게 검교태사(檢校太師)를 가책(加册)하고 아울러 조서(詔書)를 내려 군리(軍吏)와 기로(耆老)들을 위문하였다.
[이 때에] [진(陳)]정(靖) 등은 동모(東牟)에서 팔각해(八角海) 포구로 가 백사유(白思柔)가 탄 선박(船舶) 및 고려(高麗)의 뱃사공들을 만나 그 배를 타고서 지강도(芝岡島)를 출발, 순풍(順風)에 큰 바다를 항해하여 이틀 후에 옹진(甕津) 포구에 닿아 육지로 올라갔다.[註085] [거기서부터] 백 60리를 가 고려(高麗)의 지경인 해주(海州)에 도달하였고, 다시 백리를 가 염주(閻州)에, 다시 40리를 가 백주(白州)에, 다시 40리를 가 고려(高麗)의 [도읍지에] 도착하였다. 치(治)는 교외(郊外)에서 사신들을 영접하여[註086] 번국(藩國)의 예의를 다하고, 진정(陳靖) 등을 70여일 동안이나 머무르게 하다가 돌려보내면서, [註087] 습의(襲衣)·금대(金帶)·금기(金器)·은기(銀器) 수백벌과 포(布) 3만여필[註088] 등을 주고 표(表)도 곁들여 사례하였다.
○ 앞서 [순화(淳化)] 3년(A.D.992; 高麗 成宗 11) 에 상(上)이 제도(諸道)의 공거인(貢擧人)[註089]을 친히 시험하면서 조서(詔書)를 내려 고려(高麗)의 빈공진사(賓貢進士) 왕빈(王彬)·최한(崔罕) 등을 급제(及第)시키고 얼마 후에는 관직을 제수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 때에 이르러 진정(陳靖) 등의 사신이 환국하였는데 치(治)는 표(表)에서 사례하기를, “학생(學生) 왕빈(王彬)·최한(崔罕) 등이 조정(朝廷)에 들어가 학업을 익혀 은혜를 입는 데다가 급제(及第)까지 시켜주시고 장사랑(將仕郞)[註090]·수비서성(守祕書省)[註091] 교서랑(校書郞)으로 임명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셨습니다. 가만히 생각컨대, 당도(當道)가 조공(朝貢)을 계속하여 온 지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그러나 상국(上國)은 하늘처럼 높고 고려(高麗)는 바다로 막혀 있어, 금궐(金闕)에 친히 나아가 옥계(玉堦) 아래에서 머리를 조아려 알현하지 못하고, 오직 공극(拱極)의 정성만 깊을 뿐 궁정(宮庭)에서 조회하는 예절도 실현하지 못하였습니다. 왕빈(王彬)·최한(崔罕) 등은 어려서부터 포계(匏繫)를 따라 우이(嵎夷)에 섞여 있는 것이 안타깝더니, [외국(外國)에] 표랑하는 것을 꺼리지 않고 일찍이 천읍(天邑)에 빈공(賓貢)으로 들어갔었습니다. 그들은 솜옷과 짧은 털옷을 입고 옥립(玉粒)과 계신(桂薪)에 대한 걱정 속에 가난하게 생활하면서 유학기간을 마칠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환제(皇帝) 폐하(陛下)께서 하늘같은 인자(仁慈)로 그들을 양성하고 바다 같은 아량으로 너그러이 포옹하여 관곡(館穀)의 물자를 넉넉하게 하사하여 예문(藝文)의 학업을 권면하여 주셨습니다. 작년에는 헌감(軒鑑)을 높이 걸어 놓고 성대하게 노유(魯儒)를 선발하는데 [왕(王)]빈(彬)·[최(崔)]한(罕) 등이 택궁(澤宮)에 접하여 감히 중곡(中鵠)할 마음이 생겼고, 중국에서 외람되게 폭건(幅巾)을 쓰고서 부질없이 이어(羡魚)에 뜻을 두었던 것입니다.
폐하(陛下)께서는 그들이 만리 밖에 가정을 이별하고 10년 동안 중국에 유학하였다고 하여, 계적(桂籍)에 이름을 올리도록 함과 아울러 예대(藝臺)의 관직에 임명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국(故國)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들의 부모가] 대문에 기대어 자식들을 기다림을 위로해 주려고, 특별히 신지(宸旨)를 내려 [그들로 하여금] 고향(故鄕)으로 돌아가도록 하여 주셨습니다. 하늘의 조화처럼 곡진하게 [소원을] 이루어 주어 그 큰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신(臣)은 하늘에 감사하고 폐하(陛下)를 존숭하는 지극한 마음을 이루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 또 장인전(張仁銓)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진봉사(進奉使) 백사유(白思柔)를 [따라온] 공목리(孔目吏)[註092]로서, [송(宋)나라 조정에] 임의대로 글을 올렸다. 백사유(白思柔)는 그가 고려국(高麗國)의 기밀(機密)에 관한 것을 아뢰었다고 생각하여 장인전(張仁銓)이 두려워 감히 귀국하지 못하자 상(上)이 진정(陳靖) 등에게 명하여 장인전(張仁銓)을 데리고 가도록 하고 치(治)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장인전(張仁銓)의 죄를 풀어 주도록 하였다. 치(治)는 또 표(表)를 올려 사례하기를, “관고(官告)를 지닌 국신사(國信使) 진정(陳靖)·유식(劉式)[註093] 등이 도착하여 폐하(陛下)의 명령을 전달하였습니다. 당도(當道)의 진봉사(進奉使)를 종행한 공목관(孔目官) 장인전(張仁銓)이 [폐하(陛下)의] 대궐에 이르러 함부로 자신의 생각대로 말씀을 드렸다가 도리어 두려움을 품고 있는 것을 이제 사신 편에 딸려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셨습니다. 장인전(張仁銓)은 우댁(嵎宅)의 변변치 못한 백성이며 해동(海東)의 미천한 관리인데, 상국(上國)에 나아가 감히 어리석은 정성을 바치고자 망녕된 생각이 들어 함부로 제 소견을 아뢰어 폐하(陛下)를 번거롭게 하고 위로는 조정(朝廷)을 더럽혔습니다.
[그런데] 지금 윤언(綸言)을 받자오니, 장인전(張仁銓)의 죄를 풀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소인,小人은 이욕,利慾을 따르거니 어찌 참람되게 요구하는 것을 두려워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성주(聖主)께서는 관대하고 인자하여 그를 불쌍히 여기라는 명령을 멀리서 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장인전(張仁)銓은 조지(詔旨)에 따라 그 죄를 용서하여 주었고, 예전처럼 사무도 관장하도록 하였습니다.”하였다.
또 상언(上言)하여, 판각(板刻)된 구경(九經) 서책을 하사하여 유교(儒敎)를 진흥시켜 달라고 청원하니 허락하였다. 앞서 [송(宋)나라 사신] 유식(劉式) 등이 복명(復命)하기를 치(治)가 원증연(元證衍)[註094]으로 하여금 이들을 호송하도록 하였는데, 증연(證衍)이 안향포(安香浦) 포구에 이르러 풍랑을 만나 배가 파손되는 바람에 가지고 온 물품들이 침몰하여 버렸다고 하였다. [송 태종(宋 太宗)은] 등주(登州)에 조칙(詔勅)을 내려 [원(元)]증연(證衍)에게 문거(文據)를 발급하여 환국(還國)시키도록 하고, 치(治)에게 옷감 2백필·은기(銀器) 2백량·양(羊) 5십 마리를 하사하였다.
○ [순화(淳化)] 5년(A.D.994; 高麗 成宗 13) 6월에 사신 원욱(元郁)을 보내와 구원병(救援兵)을 요청하면서, 거란(契丹)이 국경을 침입하였다고 하소연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북쪽 지방이 겨우 평온하여졌으므로 경솔하게 전쟁을 일으켜 국가에 일을 일으킬 수 없다고 하여, 다만 조서(詔書)를 내려 위무하고 사신을 정중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이로부터는 [고려(高麗)가] 거란(契丹)의 압박을 받아 조공(朝貢)이 중단되었다. 치(治)가 졸(卒)하자 아우 송(誦)[註095]이 즉위하였다. [송(誦)이] 일찍이 병교(兵校) 서원(徐遠)을 조정(朝廷)에 파견하여 덕음(德音)을 살피도록 하였는데, 서원(徐遠)이 오래도록 도착하지 아니하였다.
○ [함평(咸平)] 3년(A.D.1000; 高麗 穆宗 3)에 고려(高麗) 신하 이부시랑(吏部侍郞)[註096] 조지린(趙之遴)[註097]이 아장(牙將) 주인소(朱仁紹)로 하여금 등주(登州)로 가 [송(宋)나라의 사정을] 정탐하도록 하였다. 등주(登州)의 장수가 이 사실을 알리자 상(上)이 [주(朱)]인소(仁紹)를 특별히 불러들여 접견하였다. 이에 [주인소(朱仁紹)가] 고려(高麗) 사람들이 황제(皇帝)의 교화를 사모하고 있으나 거란(契丹)의 제재를 받고 있다는 상황을 스스로 아뢰니, 송(誦)에게 전함(鈿凾)에 담은 조서(詔書) 1통을 [주(朱)]인소(仁紹)에게 주어 돌아가도록 하였다.
○ [함평(咸平)] 6년(A.D.1003; 高麗 穆宗 6)에 송(誦)이 사신 호부랑중(戶部郞中) 이선고(李宣古)를 보내와 조공(朝貢)하고 은혜에 사례하였다. 또 말하기를,“[후(後)]진(晋)이 연(燕)·계(薊) 지방을 떼어서 거란(契丹)에게 넘겨주었으므로,[註098] [거란(契丹)이] 결국에는 현도(玄菟)를 거쳐 자주 침공하며 요구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왕사(王師)가 국경에 주둔하여 거란(契丹)을 견제하여 주십시오.”라고 하니, 정중한 조서(詔書)를 내려 답하였다. 송(誦)이 졸(卒)하자 아우 순(詢)[註099]이 권지국사(權知國事)가 되었다. 앞서 거란(契丹)이 고려(高麗)를 기습하자,[註100] 마침내 국경에다 흥주성(興州城)·철주성(鐵州城)·통주성(通州城)·용주성(龍州城)·귀주성(龜州城)·곽주성(郭州城) 등의 6성(城)을 쌓았다.[註101] 그러나 거란(契丹)이 자기를 배반한다고 하여 사신을 보내어 6성(城)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으나[註102] 순(詢)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거란(契丹)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갑자기 [고려(高麗)] 도성(都城)으로 쳐들어가 [註103] 궁실(宮室)을 불사르고 주민들을 겁탈하니, 순(詢)은 승라주(昇羅州)로 옮겨 피난하였다.[註104] [거란(契丹)] 병사가 물러가자 [고려(高麗)에서] 곧 사신을 파견하여 강화(講和)하자고 요청하였으나 거란(契丹)은 굳이 6성(城)을 내놓으라고 고집하였다. 그 뒤부터는 [고려(高麗)가] 군대를 파견하여 6성(城)을 지켰다.
○ 대중상부(大中祥符) 3년(A.D.1010; 高麗 顯宗 1)에 [거란(契丹)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려(高麗)를] 공격하자 순(詢)이 여진(女眞)과 함께 기병(奇兵)을 배치, 반격하여 거란군(契丹軍) 태반을 죽였다. [註105] 순(詢)은 또 압록강(鴨綠江) 동쪽에 성을 쌓고 [그 성과] 더불어 왕래하기에 먼 성이 서로 바라보고 있는데 강을 가로질러 다리를 놓고 몰래 군사를 보내 새 성을 굳게 지켰다. [대중상부(大中祥符)] 7년(A.D.1014; 高麗 顯宗 5)에 [고려(高麗)가] 비로소 고주사(吿奏使)로 어사(御事) 공부시랑(工部侍郞) 윤증고(尹證古)[註106]를 보내와 금실로 짜서 만든 용봉안복(龍鳳鞍幞) 및 수놓아 만든 용봉안복(龍鳳鞍㡤) 각각 2벌과 세마(細馬) 2필·산마(散馬) 20필 등을 조공(朝貢)하였다. 윤증고(尹證古)가 환국(還國)하게 되자 순(詢)에게 조서(詔書) 7통 및 의대(衣帶)·은채(銀綵)·안륵마(鞍勒馬) 등을 하사하였다.
○ [대중상부(大中祥符)] 8년(A.D.1015; 高麗 顯宗 6)에 등주(登州)에 조서(詔書)를 내려 해구(海口)에다 객관(客館)을 설치하여 사신들을 대접하도록 하였다. 그 해에 또 어사(御事) 민관시랑(民官侍郞)[註107] 곽원(郭元)을 보내와 조공(朝貢)하였다.[註108] 곽원(郭元)이 스스로 아뢰기를, “본국의 도성(都城)에는 원장(垣牆)이 없습니다. 부(府)는 개성(開城)으로서[註109] 6현(縣)을 관할하고 주민은 3~5천[호(戶)를] 내려가지 않습니다. 주(州)마다 군사 백여 명씩을 두고 10로(路)에 전운사(轉運司)[註110]를 설치하여 그들을 통할하고 있습니다. 주(州)마다 5~6현(縣)을 관할하는데[註111] 적은 주(州)는 3~4현(縣)이 되며, 현(縣)마다 3~4백호(戶)가 됩니다. 국경은 남북의 [거리가] 천 5백리이며, 동서는 2천리입니다. [국경에는] 군사와 백성들이 섞여 거주하고, 군사에 편입된 자에 대하여 얼굴에 자자(경,黥)[註112]는 하지 않습니다. 시장은 한낮에 열며, 돈은 사용하지 않고 베나 쌀로만 교역(交易)합니다. 토질은 메벼가 적합하고, 풍속은 중국과 비슷하나 양(羊)·토끼·낙타·물소·당나귀 등은 없습니다.
기후는 추운 기간이 짧고 더운 날이 조금 긴 편이며, 승려(僧侶)는 있어도 도사(道士)는 없습니다.[註113] 민가(民家)의 그릇들은 모두 구리로 만듭니다.[註114] 음악은 두 종류가 있는데, 당악(唐樂)[註115]과 향악(鄕樂)입니다. 3년마다 한번씩 거인(擧人)을 시험보이는데, 진사과(進士科)·제과(諸科)·산학과(算學科)[註116] 등이 있습니다. 매번 백여명씩 시험을 보는데, 급제한 사람은 10~20명에 불과합니다. 매년 정월 초하룻날과 5월 5일에는 조상(祖上)의 사당에 제사지냅니다. 또 정월 7일에는 집집마다 서왕모(西王母)[註117]의 초상(肖像)을 [그려] 받들고, 2월 보름날에는 유려(儒侶)의 풍속으로서 연등(燃燈)하는 것이 중국의 상원절(上元節)과 같습니다. 상사일(上巳日)에는 푸른 쑥떡을 음식상에서 으뜸으로 꼽고, 단오(端午)에는 그네 뛰는 놀이도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옷은 흰 것을 숭상합니다. 땅에서는 용수도(龍鬚度)· 등도(藤度)· 백추지(白硾紙)· 서미필(鼠尾筆)· 낭미필(狼尾筆) 따위가 생산됩니다.” 하였다. 곽원(郭元)은 말과 용모가 공손하고 단정하며, 연회(宴會)를 받으면 그때마다 반드시 감사의 표(表)를 지어 올렸는데, 제법 문장을 지을 줄 알았으므로 조정에서도 후하게 대우하였다.
○ [대중상부(大中祥符)] 9년(A.D.1016; 高麗 顯宗 7)에 [곽원(郭元)이] 하직하고 귀국할 때 [진종(眞宗)은] 순(詢)에게 조서(詔書) 7함(凾)과 습의(襲衣)· 금대(金帶)· 기폐(器幣)·안마(鞍馬) 및 경사(經史)· 역일(曆日)·『성혜방(聖惠方)』등을 하사하였다. 곽원(郭元)이 또 『국조등과기(國朝登科記)』및 하사한 어시(御詩) 등을 베껴서 귀국하겠다고 주청하므로 허락하였다.
○ 천희(天禧) 원년(A.D.1017; 高麗 顯宗 8)에 어사(御事) 형관시랑(刑官侍郞) 서눌(徐訥)[註118]을 보내왔는데, 숭정전(崇政殿)에서 표(表)를 올리고 방물(方物)도 바쳤다. 또 수춘군왕(壽春郡王)[註119]을 봉건(封建)한 것에 대해서도 축하하였다. [천희(天禧)] 3년(A.D.1019; 高麗 顯宗 10) 9월에 등주(登州)에서, “고려(高麗)의 진봉사(進奉使)인 예빈경(禮賓卿)[註120] 최원신(崔元信)[註121]이 진왕수(秦王水) 어구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표류하여 공물(貢物)을 잃어버렸습니다.” 하고 아뢰니, [진종(眞宗)은] 조칙(詔勅)을 내려 내신(內臣)을 파견하여 그를 위로하게 하였다. 11월에 최원신(崔元信) 등이 [대궐로] 들어와 알현하고서 계금의(罽錦衣)· 계금욕(罽錦褥)·오칠갑(烏漆甲)· 금으로 장식한 마도(馬刀)· 비수(匕首)· 계금안마(罽錦鞍馬)· 저포(紵布)·약물(藥物) 등을 바쳤다. 또 중포(中布) 2천단(端)을 바치며 불경(佛經) 1장(藏)을 달라고 요청하니, 조칙(詔勅)을 내려 불경(佛經)을 하사하고 중포(中布)는 돌려주도록 하였다. 최신원(崔元信)의 [배가] 침몰하여 일용품이 떨어진 까닭에 의복(衣服)과 증채(繒綵) 등을 별도로 하사하였다. 명주(明州)[註122]· 등주(登州)[註123]에서, “고려(高麗)의 해선(海船)이 풍랑에 표류하여 국경 연안에 다다른 선박이 있습니다.”하고 자주 아뢰었는데, 그때마다 조칙(詔勅)을 내려 위문하는 동시에 바다를 건너갈 식량을 주어 귀국시키도록 하고 이에 대한 준례를 만들었다.
○ [천희(天禧)] 5년(A.D.1021; 高麗 顯宗 12)에 순(詢)이 고주사(告奏使)로서 어사(御事) 예부시랑(禮部侍郞) 한조(韓祚) 등 백 79명을 보내와 사은(謝恩)하였다.[註124] 그리고 거란(契丹)과 수호(修好)한다고 하였다. 또 표(表)를 올려 『음양(陰陽)[註125] 지리지(地理書)[註126]』및『성혜방(聖惠方)』을 달라고 하여 모두 하사하였다.
○ 김행성(金行成)[註127]은 벼슬이 전중승(殿中丞)[註128]에 이르렀는데, 치(治)가 표(表)를 올려 그를 귀국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김행성(金行成)은 조정에서 벼슬한 후부터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부모가 늙었기 때문에 해외(海外)에 있으면서도 아침저녁으로 부모를 사모하고, 녹봉(祿俸)이 부모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긴 나머지 화공(畵工)을 시켜 그 부모의 초상(肖像)을 그리도록 하여 정침(正寢)에다 걸어 놓고, 그의 아내 사씨(史氏)와 함께 옆방에 거처하면서 새벽과 저녁으로 안부를 살피고 밥상도 올리기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 순화(淳化)(A.D.990~994; 高麗 成宗 9~13) 초기에 [김행성(金行成)이] 안주(安州)[註129]의 통판(通判)[註130]으로 있다가 병에 걸렸는데, 지주(知州)[註131] 이범(李範)이 요좌(僚佐) 두어 사람과 문병을 가니 김행성(金行成)의 병은 벌써 위독하였다. 울면서 말하기를, “행성(行成)은 외국(外國) 사람으로서 조정의 벼슬아치가 되어 군정(郡政)을 보좌하다가 병들어 죽게 되어 폐하(陛下)의 은혜를 갚지 못하게 되었으니 비록 눈을 감고 죽어도 유한이 많습니다. 두 아들 종민(宗敏)· 종눌(宗訥) 등은 모두 어리고 가정은 본시 가난한 데다가 의탁할 만한 다른 친척도 없으니 곧 구렁텅이에 떨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얼마 후 김행성(金行成)이 죽고 말았는데, 그의 아내는 두 아들들을 키우면서 재가(再嫁)하지 않기로 맹세하고 신을 짜 생활하였다. 이범(李範)이 그 사실을 밝히니 조칙(詔勅)을 내려 종민(宗敏)을 태묘재랑(太廟齋郞)[註132]으로 보직(補職)시키는 동시에 안주(安州) [고을]로 하여금 매월 그 집에 돈 3민(緡)·쌀 5곡(斛)씩을 지급하고 세시(歲時)마다 장리(長吏)가 [그 집을] 위문하도록 하였다.
○ 또 고려(高麗)의 신주(信州)[註133] 영녕(永寧)[註134] 사람인 강전(康戩)은 자(字)가 휴우(休祐)요, 그의 아버지는 윤(允)인데, 3대가 병부시랑(兵部侍郞)이 되었다. 강전(康戩)[註135]은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때마침 흘승(紇升)이 거란(契丹)과 전쟁을 하자, 강전(康戩)은 [그의 아버지] 강윤(康允)을 따라 목엽산(木葉山) 밑에서 전투하였는데 화살 두 개를 연거푸 맞았어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 그 뒤 [흘승(紇升)이] 거란(契丹)을 함락시키자 강전(康戩)은 묵두령(墨斗嶺)으로 도망가 살다가 다시 황룡부(黃龍府)[註136]로 와 샛길을 따라 고려(高麗)로 돌아가니, 그때까지 강윤(康允)도 생존하여 있었다.
개보(開寶) 연간(A.D.968~975; 高麗 光宗 19~26) 강윤(康允)은 강전(康戩)을 빈공(賓貢)으로 [송(宋)나라에] 따라가게 하여 국학(國學)에서 학업을 익히도록 하였다.[註137] 태평흥국(太平興國) 5년(A.D.980; 高麗 景宗 5)에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여 대리평사(大理評事)[註138]로 첫 벼슬길에 오른 후 상향현(湘鄕縣)의 지사(知事)가 되었고, 저작좌랑(著作佐郞)으로 두 차례나 전임하였
으며, 강음(江陰)[註139] 군(軍)· 강주(江州)의 지사(知事)도 되었다.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청백(淸白)하고 유능하다는 소문이 나 태상박사(太常博士)[註140]로 승진하였다. 소역간(蘇易簡)이 한림(翰林)[註141]으로 재임 중 강전(康戩)이 관리로써 유능하다고 아뢰니, 그를 광남서로(廣南西路) 전운부사(轉運副使)로 임명하는 동시에 비어(緋魚)를 하사하고[註142] [얼마후에는] 정사(正使)로 승진시켰으며, 도지원외부(度支員外部)· 호부판관(戶部判官)[註143]으로 전임되었다.
지방으로 나가서는 협주(峽州)· 월주(越州)[註144] 2주(州)의 지사(知事)가 되어 정사(政事)에 유능하다고 조포(詔襃)를 연거푸 받았다. 또 [그를] 서경(京西) 전운사(轉運使)[註145]로 임명하였다가 공부랑중(工部郞中)[註146]으로 승진시켜 금자(金紫)를 하사하였다.
강전(康戩)은 부임하는 곳마다 일을 시행하는 것을 좋아하여 소장(疏章)을 올려 건의한 것도 많아, 지극한 충성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 경덕(景德) 3년(A.D.1006; 高麗 穆宗 9)에 [강전(康戩)이] 졸(卒)하자, 진종(眞宗)은 특별히 그의 아들 희령(希齡)을 태상사(太常寺) 봉례랑(奉禮郞)[註147]으로 임명하고 봉록(俸祿)을 주어 상(喪)을 마치도록 하였다. 건흥(乾興) 원년(A.D.1022; 高麗 顯宗 13) 2월에 [고려(高麗) 사신] 한조(韓祚) 등이 하직하고 귀국하자, 순(詢)에게 구례(舊例)와 같이 물품을 하사하였다. 때마침 진종(眞宗)이 안가(晏駕)하자 또 그의 견물(遣物)을 싸서 순(詢)에게 하사하였다.
○ 천성(天聖) 8년(A.D.1030; 高麗 顯宗 21)에 순(詢)이 또 어사(御事) 민관시랑(民官侍郞) 원영(元穎)등 2백93명을 파견하니 장춘전(長春殿)에서 표(表)를 올려 알현하고,[註148] 금기(金器)· 은계도검(銀罽刀劍)· 안륵마(鞍勒馬)· 향유(香油)· 인삼(人蔘)· 세포(細布)· 동기(銅器)· 유황(磂黃)· 청서피(靑鼠皮) 등의 물건을 바쳤다. 그 이듬해 2월에 [원영(元穎) 등이] 하직하고 돌아갈 적에 물품을 등급이 있게 하사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원영(元穎) 등을] 등주(登州)까지 호송하였다. 그 후로는 사신이 끊어져 중국과 통하지 못한 지 43년간이 된다.[註149] 순(詢)의 손자 휘(徽)가 계승하여 즉위하니 이가 바로 문왕(文王)이다.[註150]
○ 희녕(熙寧) 2년(A.D.1069; 高麗 文宗 23)에 고려(高麗)의 예빈성(禮賓省)[註151]에서 복건(福建)[註152] 전운사(轉運使) 나증(羅拯)[註153]에게 공첩(公牒)을 보내어 말하기를,[註154] “본조(本朝)의 상인(商人) 황진(黃眞)[註155]· 홍만(洪萬) 등이 와서, ‘전운사(轉運使)가 [폐하(陛下)의] 밀지(密旨)를 받았는데,[註156] [고려(高麗)와] 접촉하여 우호관계를 맺도록 하라’는 내용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국왕(國王)의 뜻을 받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고려(高麗)가 궁벽하게 양곡(暘谷)에 위치하면서도 멀리 천조(天朝)를 연모하여 조상(祖上) 적부터 항상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사신이] 왕래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평양(平壤)이 큰 요(遼)나라에 가까워 그를 친근히 하면 화목한 이웃이 되고 소원하게 하면 강한 적이 되곤 합니다. 그래서 변방의 난리가 그치지 않을까 염려스러워 국력을 키우느라 한가하지 못하였으며, 오래도록 [요(遼)나라의] 견제에 시달리면서도 그를 불친절하게 대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까닭에 술직(述職)을 어긴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상서로운 구름이 여러 번 중국(中國)에 드리워 중국(中國)을 아름답게 하였지만 세월이 오래되어 장안(長安)의 옛길을 헤맬 것 같습니다. 좋은 운(運)이 펼쳐졌으니 예를 갖추어 경축하고자 합니다. 대조(大朝)의 교화는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도량은 넓어 원방(遠方)까지 포용하니, 태산(泰山)은 미세한 티끌도 거절하지 않으며 바다는 가느다란 물줄기도 마다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삼가 통행할 수 있는 도로를 따라 고가(稾街)에 빨리 나아가야 하겠으나, 단지 천리 밖에서 전해들은 소문이지 [송(宋)나라에서] 은혜롭게 알려준 것은 아닌 듯합니다. 지금 [황(黃)]진(眞)·[홍(洪)]만(萬) 등이 서쪽으로 귀국하는 판에 공장(公狀)을 부치니, 답장을 받아 보고서 즉시 예(禮)를 갖추어 조공(朝貢)하겠습니다.” 하였다. 휘(徽)는 또 과거에 꿈속에서 중국에 갔었다고 말하며 시(詩)를 지어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 [희녕(熙寧)] 3년(A.D.1070; 高麗 文宗 24) 에 [나(羅)]증(拯)이 이 사실을 아뢰자, 조정(朝廷)에서 의논한 사람들도 거란(契丹)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기 위하여 고려와 우호(友好)를 맺어야 한다고 하니, 신종(神宗)은 그렇게 하도록 윤허하고, [나(羅)]증(拯)에게는 대우를 후하게 하겠다는 뜻을 [고려(高麗)에] 알리도록 하였다. 휘(徽)가 마침내 민관시랑(民官侍郞) 김제(金悌) 등 백여 명을 파견하니,[註157] 그들을 하국(夏國)[註158]의 사신들과 똑같이 대우하도록 조칙(詔勅)하였다.[註159] 과거에 고려(高麗) 사신들이 오갈 적에는 모두 등주(登州)를 경유하였는데, [희녕(熙寧)] 7년(A.D.1074; 高麗 文宗 28)에 그의 신하 김량감(金良鑑)[註160]을 보내와 아뢰기를,[註161] “거란(契丹)을 멀리하고 싶으니 길을 바꾸어 명주(明州)를 경유하여 대궐에 이르겠습니다.”[註162] 하니,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 군(郡)·현(縣)에서 [고려(高麗)의 사신을] 접대하는 옛 준례가 없어 백성들이 퍽 괴로웠는데, 규정을 만들어 반포(頒布)하고, 비용은 모두 관(官)에서 지급하도록 조칙(詔勅)하였다. 또 고려(高麗) 사신이 중국말에 익숙하지 못한 까닭으로 재리(財利)를 엿보는 자들이 사사로이 왕래할까 염려하여 [고려(高麗) 사신이] 이르는 곳 마다 왕래를 금지시켰다.[註163] 휘(徽)가 이부(二府)[註164]에 물품을 보낸 것이 많자, 조칙(詔勅)을 내려 시장(市場)에 위임하여 되도록이면 겸백(縑帛)을 팔아서 보답하도록 하였다.[註165] 휘(徽)가 또 표(表)를 올려 의약(醫藥) 및 고려 사람을 가르칠 화공(畵工)· 소공(塑工) 등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니 나증(羅拯)에게 조칙(詔勅)을 내려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모집하도록 하였다.[註166]
○ [희녕(熙寧)] 9년(A.D.1076; 高麗 文宗 30) 에 또 최사훈(崔思訓)을 보내 오자, 중귀인(中貴人)에게 명하여 도정(都亭)· 서역(西驛)의 예(例)에 따라 객관(客館)을 수리하여[註167] 고려(高麗) 사신들을 더욱 후하게 대우하도록 하니, 사신으로 오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고려(高麗)에서] 일찍이 영관(伶官)[註168] 10여명을 바치면서, “고려(高麗) 음악이 보잘 것은 없지만, 다만 국사(國史)를 빛내려고 한 것 뿐입니다.” 하였다. 황제(皇帝)는 고려(高麗)가 글을 숭상하는 까닭으로,[註169] 조서(詔書)를 내릴 때마다 꼭 문학(文學)에 종사
하는 신하들을 뽑아 조서(詔書)를 짓도록 하여 그 중에서 우수 작품을 가려 사용하곤 하였다.
○ 원풍(元豊) 원년(A.D.1078; 高麗 文宗 32)에 처음으로 가좌간의대부(假左諫議大夫)[註170] 안도(安燾)[註171]· 가기거사인(假起居舍人) 진목(陳睦) 등을 [고려(高麗)에] 파견하여 빙문(聘問)하였다.[註172] 명주(明州)에서 배 두 척을 제조하였는데, 하나는 능허치원안제(凌虛致遠安濟)요[註173] 다른 하나는 영비순제(靈飛順濟)로서 모두 신주(神舟)[註174]라고 불렀다. 정해(定海)에서 바다를 횡단하여 동쪽으로 가 도착하니, 고려(高麗) 사람들이 환호하면서 나와 맞이하였다. 휘(徽)가 포홀(袍笏)· 옥대(玉帶) 등을 갖추어 조서(詔書)를 절하여 받고, 안도(安燾)· 진목(陳睦) 등에 대한 대우도 더욱 예를 지켜 그들을 별관(別宮)에다 유숙시키고 현판을 순천관(順天館)[註175]이라고 붙였다. 이는 중국을 하늘처럼 높이고 따른다는 뜻이다. 휘(徽)가 병이 들어 겨우 칙명(勅命)만을 받고, 또 의약(醫藥)을 보내 달라고 하였다.
○ [원풍(元豊)] 2년(A.D.1079; 高麗 文宗 33)에 왕순봉(王舜封)을 파견하여[註176] 의원을 데리고 가서 진찰하고 치료해 주도록 하였다.[註177] 휘(徽)가 또 유홍(柳洪)[註178]을 사신으로 보내와 사은(謝恩)하도록 하였는데, 그는 해중(海中)에서 풍랑을 만나 조공(朝貢)할 물품들을 잃어버렸다.[註179] 유홍(柳洪)이 글을 올려 자신을 탄핵하니 칙서(勅書)를 내려 위로하였다. 얼마후 일본(日本)에서 만든 수레를 바치면서 아뢰기를, “제후(諸侯)는 거복(車服)을 바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감히 토산(土産) 공물(貢物)과 함께 바치지 못하였습니다.”하였다. 이에 앞서서는 공물(貢物)이 올 때마다 유사(有司)에게 넘겨 그 값을 평정하되 만겸(萬縑)으로 보상하도록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다시는 공물(貢物) 값을 평정하지 말고 만겸(萬縑)을 정수(定數)로 삼도록 명하였다.
○ [원풍(元豊)] 6년(A.D.1083; 高麗 文宗 37)에 휘(徽)가 졸(卒)하였다. 38년간 재위하면서 어질고 너그럽게 다스려 동이(東夷)의 훌륭한 임금이라 할 수 있다.[註180] 그러나 그들의 풍습을 그대로 따라 임금의 딸은 신하나 서인(庶人)에게 시집보내지 않고 꼭 형제(兄弟)에게 시집보내며,[註181] 종친(宗親)· 귀신(貴臣)들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그의 둘째 아들 운(運)이, “기왕에 중국과 통한 이상 마땅히 예의로써 옛날 풍습을 개혁하여야 합니다.” 하고 간하니, 휘(徽)는 노하여 그를 밖으로 축출하였다. 휘(徽)의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천자(天子)는 그를 가엾게 여겨 명주(明州)에 조칙(詔勅)하여 부도(浮屠)를 수리하여 [휘(徽)를 위해] 한달 동안 불공을 드리도록 하는 한편 양경략(楊景略)· 왕순봉(王舜封) 등은 제전(祭奠)을 올리고, 전협(錢勰)· 송구(宋球) 등은 적위(吊慰)하도록 파견하였다.
양경략(楊景略)이 이지의(李之儀)를 서장관(書狀官)[註182]으로 부르니, [신종(神宗)]황제(皇帝)는 이지의(李之儀)가 문명(文名)이 드러나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물리치고] 학문이 넓고 기국(器局)에 뛰어난 사람을 구하여 중서(中書)[성(省)]으로 나오도록 하여 글을 시험한 뒤 파견하도록 하였다. 또 고려(高麗)에 완비(完備)한 것을 바랄 수 없다고 하여, 사신에게 서로 접견하는 처소의 전명(殿名)이나 치문(鴟吻) 등에 혐의를 두지 말고 사용하도록 승낙해 주도록 타일렀다. 휘(徽)의 아들 순왕(順王) 훈(勳)이 왕위(王位)를 계승한 지 백일 만에 졸(卒)하니, 아우 선왕(宣王) 운(運)이 왕위(王位)를 계승하였다. 운(運)은 어진 사람을 사랑하고 글을 좋아하며 품행이 근신하여 상인이 서책을 팔려고 올 때마다 의복을 깨끗이 하고 향불을 피우고서 서책을 대하곤 하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