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의 은혜를 회복하자
시편 84: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오늘 본문 말씀을 기록한 시편 기자는 지금 성전을 멀리 떠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에 있습니다. 그는 성전을 사모하여 마음이 병들고 몸도 쇠약해질 정도가 되어 있습니다. 그는 심지어 참새와 제비조차 부러워할 정도입니다. 자기에게 참새와 제비처럼 날개가 있다면, 마음껏 날아가서 성전에 처마 밑에 집을 짓고 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몸이 아파서인지, 외국에 포로가 끌려간 상황에서인지, 아니면 대적으로 인하여 멀리 피신을 가게 된 처지가 되어서인지, 성전에 갈 수 없고 성전에서 봉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시온 곧 하나님의 성전에서 거하는 사람들을 너무 부러워 견딜 수 없습니다. 그렇게 성전에서 거하는 사람이 부러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는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이 시편을 쓴 분이 ‘고라 자손’이라는 것을 보면, 이렇게 고백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고라 자손은 본래 레위 지파 중에 고핫 자손으로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 이후로 하나님의 성전에서 찬양하는 귀한 직분을 맡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대에서 봉사하면서 나팔과 수금과 비파를 연주하며 하나님을 날마다 찬양하는 귀한 사역을 감당했던 지파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전으로부터 멀리 있는 상황에서 주의 집에 살면서 항상 주를 찬송하는 것을 부러워하였던 것입니다.
찬양하는 것이 왜 그렇게 소중한 것일까요? 이는 하나님의 백성의 존재 목적이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3:21 말씀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가야바 대제사장이 심문하였을 때 언급한 말이, “네가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을 두고 ‘찬송받을 이’라고 부른 것은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받은 신약 성도들의 존재 목적도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6절에서 이르기를,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11절과 14절 말씀에서도 반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신 뜻과 성령의 보증하심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함이라고 반복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성숙해질 때 그 성도에게 궁극적으로 맺히는 열매가 하나님께 대한 풍성한 감사함과 넘치는 찬양 생활입니다.
골로새서 2:6,7 말씀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하였고, 골로새서 3:16,17 말씀에서도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3:15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인한 찬양의 제사를 늘 드림이 구원받은 자의 입술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찬양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진정한 제사의 본질입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의 종류로 속죄제, 속건제, 번제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화목제가 있었는데, 화목제는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드리는 것이 있고, 서원한 것을 갚는 의미로 드리는 것이 있고, 소원을 담아 드리는 것이 있고, 자원하여 헌신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화목제물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드리는 속건제나 속죄제와 다릅니다. 속건제와 속죄제는 죄를 씻는 회개의 제사라고 한다면, 화목제는 죄와 상관없는 감사의 제사, 찬양의 제사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고 깨달은 죄를 고백하는 회개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지만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늘 받은 은혜 기억하며 드리는 찬양과 감사의 제사는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찬양 드릴 때 하나님께서도 매우 기뻐하시고 충만한 은혜와 축복과 구원을 베풀어주시곤 합니다.
유다의 여호사밧 왕 때에 모압, 암몬, 세일 산 사람들이 함께 연합군을 편성하여 엄청난 군사력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쳐들어왔을 때이니다.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께 백성들과 함께 금식한 후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너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을 보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여호사밧 왕은 그 말씀을 믿고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들로 나가면서 군대 앞에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여호와를 찬송하였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라는 노래와 찬송을 시작하자, 하나님께서 암몬, 모압 세일 산 사이에 복병을 두어 서로 쳐죽이도록 역사해주셨습니다. 그 결과 여호사밧은 아무런 칼과 창 없이 삼일 동안 적들이 다 죽고 난 노략물을 거두는 일을 하는 데만 삼일을 걸릴 정도로 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들은 돌아올 때에도 비파와 수금과 나팔을 합주하며 예루살렘에 돌아와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 찬양하며 감사를 올려드렸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성에 전도하다가 무고하게 고발당해 붙잡혀서 옷을 벗겨진 채 매를 많이 받고 만신창이가 되어 깊은 감옥에 착고를 채인 채 수감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에 일어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놀랍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이 매인 것이 다 풀어졌습니다. 그날 밤 간수장이 회개하고 바울 일행을 집에 모셔 대접하고 다음날 풀려나는 은혜가 일어났습니다.
또한, 찬양 생활에 힘쓰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영적 감동을 새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엘리사가 거문고를 타게 한 후에 예언의 영이 임하여 예언한 것처럼, 찬양을 힘쓰는 성도에게 성령의 감동 감화가 늘 새롭게 임할 것입니다.
찬양은 신앙의 궁극적인 열매입니다. 천국에 들어가서 우리가 하는 영원한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택하시고 불러주신 은혜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영원히 찬양하는 일입니다. 우리 성령님의 우리를 용납하시고 인내하심과 끝까지 도와주심을 인하여 영원히 찬양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 기억하면서 날마다 찬양하는 입술들이 됩시다. 매일 생활하면서 여러분이 즐겨하는 찬양의 십팔번을 자주 입술로 올려 드리십시오. 즐거울 때만 아니라 고난 중에도 바울과 실라처럼 찬양을 올려드립시오. 그러할 때 하나님은 고난 중에 우리의 찬양을 들으시고 임재하시고 기적적인 도우심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신앙의 궁극적 목적이자 가장 성숙한 열매인 찬양 생활이 풍성해짐으로써 이전보다 더 놀라운 영적 은혜와 생활의 은총들을 경험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이 말씀대로 우리가 항상 주를 찬송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