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얼굴
조 수 현
환기하느라 주방 창문을 살짝 열었는데 매운바람이 훅! 하고 들어온다. 날씨를 확인하니 세상에 영하 16도란다. 집 안에서 한 발짝도 나가기 싫은 날씨인데 오늘 하필 딸아이 방과후수업이 있다. 매우 애매하게 오전 9시에 시작해서 10시 20분에 끝난다. 방학 때 하는 방과후수업은 비효율적이라고 투덜대며 딸아이를 중무장시켜 집을 나섰다.
신호등 하나만 건너면 학교지만 빈틈을 파고드는 아린 바람에 얼른 초록불이 되길 바라며 종종걸음으로 신호등 앞에 섰다. 옆을 슬쩍 보니 14층 여자가 아들딸과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휴직하면서 존재를 알게 된 14층 여자. 그 집 아들이 우리 딸과 하교 시간이 비슷해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일이 많았다. 낯가림이 많은 나이지만 인사를 안 하면 더 어색할 것 같아서 매번 먼저 인사를 했다. 처음엔 잘 못 보았나? 싶었는데 번번이 인사를 할 때마다 무반응이고, 거기다 그녀는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다가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서 인사를 해도 무반응이거나 휴대전화 화면만 들여다본다.
한두 달 전 그녀가 현관에서 장 본 것을 들고 막 들어오기에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누르고 한참 동안 기다려줬다. 눈인사나, 고맙다거나 하는 말도 없이 쌩하고 들어와 14층과 닫힘 버튼을 누르는 것을 보고 감정이 상했다. 인사하면 늘 안 받아서 가끔 맘이 생기면 하는 판이었는데 이제부터 나도 똑같이 그녀를 그림자 취급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이 학교는 방학만 되면 공사를 한다. 정문이 아니라 샛문 한곳으로만 학생들이 통행하고 있다. 그녀가 자녀들이 같이 샛문을 통과해서 학교로 가고 있는데 갑자기 그 딸 옷에서 하늘색 마스크가 떨어졌다. 순간, '어? 마스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평소의 나였다면 분명 마스크를 집어다 주고도 남았겠지만 못 본 척했다.
딸아이가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돌아서는데 그 여자는 여태 바깥에서 딸아이 점퍼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딱 봐도 마스크를 찾고 있는 모습이다.
‘아무리 찾아봐라. 나오나.’
뭔지 모를 통쾌함에 콧노래를 부르며 잰걸음으로 아파트 현관에 들어왔는데,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엘리베이터 앞을 청소하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드리니 따뜻하게 눈웃음을 지어 주시며 얼른 올라가라 하신다. 가볍게 눈인사하고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눌렀다.
한겨울 우리 집 실내 온도는 21도밖에 되지 않아서 추위를 많이 타는 남편은 불만이 있지만, 잠깐 바깥에 다녀오니 이보다 더 따뜻한 곳이 없지 않나 싶다. 점퍼를 벗고 전기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따뜻한 차 한잔해야지! 하며 싱크대 서랍을 여는데, 갑자기 좀 전에 뵈었던 청소하는 아즈ㅜ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마침 집에 두꺼운 카페용 종이컵이 있어서 2개로 겹친 다음 끓인 물을 조금 식힌 후 차를 한 잔 탔다. 그길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려갔더니 여전히 아주머니는 1층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아주머니, 오늘 날씨 너무 추워서요. 한잔 드세요. 녹차에요."
"아이고. 정말로 고마워요."
별것 아닌데 아주머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 깊은 곳에서 행복이 밀려온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와서 청소를 대충 마친 후 따뜻한 차를 마시며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켰다.
인사성 없는 14층 여자의 딸이 마스크를 떨어뜨린 것을 보고도 못 본 척한 나와 추위에 고생하시는 청소 여사님이 마음에 걸리는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민망하다. 둘 중 어느 것이 진짜 내 본성에 가까운가? 친절과 배려를 기본으로 갖추되 예의 없는 사람을 가볍게 무시하고도 양심에 찔림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죄 없는 14층 어린 딸이 마스크 없이 교실에 들어가서 혹시 감기에나 걸리지 않았을까?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