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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詩 스크랩 김순남의 봄꽃 시
김창집 추천 1 조회 192 18.03.27 13:46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얼음새꽃

 

흙은 아직 얼음덩이다

 

온갖 계산 다 두들기며

이빨을 앙 다물고

길을 재촉했다

 

송곳 같은 바람살에 눈 흘기다가

뽀얗게 덮쳐오는 눈보라,

하늘이 노랗게 흔들리는 걸 보았지

 

그토록 단단하고 야무지게 동여맨 계산에도

불쑥! 나타나는 복병에

도리 없이 당하는 걸 보면

사는 데는 아무래도

완전무장이란 게 없나 보다

 

지난해 떨어져 누운 나뭇잎들을 베고

조용히 눕는 게 상책이긴 한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렁그렁한 사슴 눈으로 오는 이 있어

 

끝내, 햇살 한 줌 품에 넣고

실오라기 하나 없는 숲에서

황금빛 꽃송이로 방실거리는 거지.

   

 

개불알풀꽃

 

사월 황사 길에

쪼르르 저희끼리 나앉아

하늘색 꽃잎을 땅 위에 풀어놓으면

성산포 순생이네 어머니

유수암리 하린이 어머니도

겨우내 구들 목에 지진 엉덩짝

흔들며 밭일 가는 중,

가만히 웃고 섰으면

말 같지 않은 세상일도 다

사람의 일이라는 말이

찰박찰박 빗방울 소리를 낸다.

놓이는 자리마다 색깔을 덧칠하는

잘난 사람들의 공터에서

실눈 뜨지 않고

낫날도 두려워할 줄 모르더니

사뿐히 계절을 비워놓을 줄 아는

그 푸르른 목숨을

누가 함부로 검질*이라 했는지

덩달아는 나도 말 못하겠다.

---

*검질 : 제주방언으로 김을 뜻함.

   

 

 

남산제비꽃

 

잔설을 녹이다 지친

너도바람꽃이 지고 나면

차가운 바람살이 산그늘에 남아

손끝을 아리게 하는데도

남산제비는 꽃 핀다.

 

하얀 꽃잎을 붙들고

지상의 맑은 바람으로 와서

저만의 사랑을 까맣게 품다가

여름하고도 햇살 뜨거운 날

화들짜!

동토의 땅으로 간다

 

시멘트 독 가루에 갇혀 잠을 자고

자동차 매연가스 밥 먹듯 하니

아토피란 놈이 사타구니에 숨어들어

격렬하게

피가 나거나 말거나

골백번도 더 긁어라 한다

 

이제는 맛을 잊은 혓바닥에 속지 않을래!

 

바람 끝에서

저 연하고 가녀린 목숨도

거칠고 새까만 내손을 잡고

곱고 고운 반지 하나 얹어줄 줄 안다.

   

 

 

큰앵초

 

마음은 이미

수만 말의 콩을 볶았다지요

 

사랑도 미움도

전농로 왕벚나무 새하얀 꽃비 날리듯

지우고 나면

그대 마음에 깊은 강물로

흐르고 싶었다지요

 

그래요

Y계곡 푸른 이끼를 딛고 선

작은 꽃잎의

발그레한 외로움도 괜찮지요

그런 호사도 어디예요

 

그만 하면

내 영원한 잠마저 흔들어 깨워

오라동 웃체오름 언덕을

기꺼이 내려서겠습니다.

   

 

 

개족도리

 

씨앗은 남겨야 한다고

잠시만 있다 오라고

등 떠밀더니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어인 산폭도 어미 애비 되어

서청놈*들에 차이고

검은 개*, 노랑 개*에 물리고 뜯기다가

온전한 살점 하나 어디로 갔나,

 

당신 죽고, 나 죽고

차마 못 건져 올릴 캄캄한 세상

사월의 봄은

허옇게 무늬진 개족도리 넓적다리 속에

그리운 씨앗 검붉게 태우며

한라산 숲 그늘을 고이고이

내려서고 있다.

 

---

*서청놈 : 서북청년단

*검은 개 : 경찰

*노랑 개 : 군인


  

솜방망이꽃

 

짚줄로 동여맨

아담한 초가집 처마 밑으로

물동이 져 나르더니

 

보리밭 이랑마다

엉덩이 흙 마를 날 없이 살더니

 

누가

이만한 사랑을 거둘 수 있는지

이른 봄 날 마른 풀밭을

포시시 털어내고 있는

솜방망이 꽃

어머니 고운 웃음으로

피었습니다

 

용눈이오름에 무릎 세워 앉아서

멀리 일출봉 아랫도리 휘감고 도는

하얀 물보라도

솜방망이 꽃바람에

노랗게 노랗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산자고

 

어쩌라고

테역뿔린 영도 발목 휘감는지

 

어쩌자고

어쩌자고 소웽이 가신 찔르고 들엄신지

아명 고랏자도

어멍 아방

발창에 굉이지멍

손창에 굉이지멍

사름 사는 세상 맹그라 놓은 땅인디

 

지발

무지막지한 포컨가 바가진가

그놈만 오지 밀게 해줍서

기벨 어시 연기 팡팡 내왕으네

흙 검질 확확 모사그네

들이랑 말앙

산인들 베겨 나지 못허쿠다

 

시상 뒤집지랑 말아사

삼촌 궨당 모다들어

식게멩질 허멍 삽니다

고사리 절절한 기도로도

딸꾹딸꾹 일어설 수 있어마씀.

   

 

 

분홍새끼노루귀

 

찬바람이 귓불 문지르거나

잔설은 제풀에 젖은 나뭇잎 뒤로 쓰러지고

누가 들을까 봐

누가 들을까 봐

후우 후

솔깍지에 입김 불어요

 

오랫동안 아껴둔 백록의 눈 언덕

한 아이가서 있네요

 

그대의 향기란

등 뒤에서

발그레 꽃이 되네요.

 

 

                     * 김순남 시집그대가 부르지 않아도 나는 그대에게 간다

                                                                      (각 시선집, 201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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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8.03.28 17:38

    첫댓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김순남선생만 가능한 시 쓰기. 앉아서 눈 호강하고 갑니다.

  • 18.03.29 20:13

    오랫만에 보니 더 새롭네요
    꽃은 왜이리도 고운지 ... 역시 꽃은 봄인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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