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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 KBS2TV에서 불후의명곡이 첫방송이 되었다. 2012년- TV조선에서 장성민의시사탱크가 첫 방송을 시작해 지금에 이르고있다. 2013년 -JTBC에서 유자식상팔자가 첫 방송을 시작해 지금에 이르고있다.
톈안먼 사건(중국어 간체: 天安门事件, 정체: 天安門事件)은 1989년 6월 4일, 후야오방의 사망 이후 발생한 톈안먼 광장 등지에서 시위대와 인민이 벌인 반정부 시위를 중국 정부가 유혈 진압한 사건이다. 중국의 1978년 이래의 시장 개혁 흐름이 한동안 끊기는 사태가 되었다.
"텐안먼 민주화 운동", 6·4 톈안먼 사건, 6·4 사건, 톈안먼 사태 등으로도 불린다. 애초 공식 발표로는 민간인 사망자 300여 명, 부상자 7천여 명이 발생한 사건이다. 국제적십자협회는 2,000 여명으로 사망자를 발표했다. 비공식 집계로는 5천여 명 사망, 3만여 명 부상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 후 중국 공안부가 1990년 7월 10일 제5차 국무원 보고에서 정식 발표한 것을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4,550명이었으며, 군인과 군경은 56명이 사망, 7,525명이 부상당했다.
시위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40주년, 5·4운동 70주년, 프랑스대혁명 200주년, 후야오방 전 중공 총서기 사망, 대륙 경제 통화팽창, 대륙 당내 관리들의 부패, 대륙의 대량 인민 실업 직면, 소련의 정치와 경제 개혁이 주요한 배경이다. 4월 15일에 개시된 학생 시위대의 항의 운동 이후, 6월 3일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톈안먼 일대에서 대륙 군대, 군경과 시위대가 충돌한 뒤 유혈 사태가 빚어졌다. 항의 충돌은 사태 전에도 있었고, 뒤로도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 내 자신의 지지세력인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자신의 후계자로 보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후원하였다. 하지만 후야오방은 1987년 1월 베이징에서 학생 시위대 수천명이 공안(경찰)과 충돌한 일을 계기로 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났고, 자오쯔양이 후임 당 총서기가 됐다. 이런 후야오방이 4월 중난하이에서 소집된 중앙 정치국 회의에 참석했다가 갑자기 심장병 발병으로 쓰러져 4월 15일 세상을 떠나자, 학생들은 당 중앙에 대해 후야오방에 대한 평가를 공정하게 해달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4월 17일부터 학생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시위를 계속하였으며, 참가자 수는 갈수록 늘어났다. 4월 22일 장례식을 계기로 시안(西安) 등지에서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중국 당국은 5월 20일 부분적으로 계엄령을 내렸고, 6월 3일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톈안먼 일대에서 대륙 군대, 군경과 시위대가 충돌한 뒤 유혈 사태가 빚어졌다. 반특권, 반부패 시위 확대가 후야오방의 사망이 발단이라고 하지만, 과거의 공산주의 경제 체제에 급변이 진행되고 민족 분규가 잦아지는 등의 난국에서 과감한 경제 개혁으로 개방의 폭을 넓혀온 중국 실용주의파는 계획가격에 시장가격제를 도입하고 국영근로자의 양로복지를 감축하는 쌍궤제(雙軌制)라는 정책을 실시했으나 하위 간부들의 부패가 벌어지고 인민의 항의 시위가 확대했으며, 인민들의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개혁개방 실시 뒤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격화하자 인민들이 사회적으로 동요했으며, 경제 개방을 위해 설치했던 특구가 조계지로 비판받기도 했다. 물가 상승과 분배의 불평등,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고, 많은 하강 노동자와 학생들이 단위 체제와 산업 수요가 변화해 실업 상태에 직면하였다. 항의 시위가 학생, 실업 근로자들 뿐 아니라,문화 대혁명 관련자들, 석방된 정치범들, 사회 불만세력들이 섞이며 후반에 들수록 격해지기도 했으며, 시위 사태의 수위가 높아지자 진압 결정이 내려졌다.
여러 출처에서 사망자수를 각기 다르게 추정하고 있다.
사건 이후 서양 세계와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중국 내 덩샤오핑의 정치적 입지가 축소되었다. 보수파의 압력으로 덩샤오핑은 권좌에서 물러났으며 개혁, 개방 정책들이 하나 둘씩 뒤집혔다. 시위를 방조했다고 하여 자오쯔양 총서기가 중국 정치 무대에서 떨어져 나가며 연금에 처해지고, 대륙의 시장경제 체제의 개혁이 지체되었다. 1991년, 장칭(江靑)이 사망하면서 덩샤오핑은 베이징을 떠나 군과의 유대 관계를 공고히 한 뒤, 이듬해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통해 개혁, 개방의 확대에 나서자고 했다. 자오쯔양 후임에 장쩌민이 승계하였으며, 2~3년 간 보수의 길을 걸었다. 리펑은 사태 뒤 총리를 계속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