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
2025.7.24.
진나라 이래 한반도와 중국 주변의 국가와 주민은 중국의 문물이나 사상을 숭모했다. 이에 따라, 중화의 제도와 문화를 전형으로 배우고 답습해야 했다. 그러니, 중국이란 큰 나라를 조선 같은 작은 나라가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2천 년의 세월을 살았는데 청이 무너지고,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강점을 끝장내 조선인을 일제로부터 해방하며 새로운 대국으로 등장했다. 더구나 미국은 북한과 중국의 남침을 막아 주기도 했다. 이러니, 명나라가 무너질 때 소중화를 내세웠던 우리 민족은 어느새 서양 오랑캐를 우러러보고 어느 나라보다 열심히 흉내 내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서양화되고, 미국과 닮은 비서양 국가가 되었다. 지금 K-culture는 세계인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한류라고도 하는 대한민국 문화, 특히 음악, 영화, 드라마, 화장품과 패션, 그리고 음식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자부심을 느낄만하다. 그러나, 이는 70여 년 철저히 미국을 흠모한 우리의 성과가 아닐까? 이제 우리는 소중화를 내세우면서 문화 민족이란 자부심을 가졌던 조선의 지배층처럼 서양과 같은 문화 민족이 되었다고 긍지를 가질 만한가? 그리고, 우리보다 서양화가 덜 된 나라와 사회를 후진국, 야만 사회라 멸시하는 것은 아닌가?
도대체 문명화된 사회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영국인이지만 주류 영국인에게는 온전한 영국인이 아닌 Subhadra Das가 쓴 <<Uncivilised: Ten Lies That Made the West>>을 통해 서양의 10가지 기본 가치의 허구를 살펴보자.
영국 the Royal Society의 신조 "Nullius in verba"는 누구의 말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권위나 전통보다 실험과 증거에 기반해 검증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University College of London 박물관에 있는 Eugen Fischer의 합성 모발 견본은 과학이 종종 인종 차별의 도구였음을 보여 준다. 이런 왜곡된 과학을 토대로 서구는 우생학이란 거짓 학문을 창조하고, 인종 차별을 합리화했다.
Knowledge is power(지식은 힘이다)라며 Francis Bacon은 지식의 가치를 강조했다. 하지만, Paulo Freire의 말대로 (가치) 중립적 교육이란 없다. 교육이란 순응하게 하거나 자유를 가져오는 도구로 기능할 뿐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서양은 그리스와 로마의 지식과 학문을 계층(class)과 야만인과 문화 인종(uncivilized and civilized race)을 나누는 수단으로 써 왔다. 서양인이 말하는 지식과 지능은 바로 이런 서양 고전을 잣대 삼아 다른 문화와 전통을 철저히 야만으로 여긴다.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펜은 검보다 강하다)라고 하지만, 이는 강자가 약자를 제거하고 강자를 미화한 기록을 보전했음을 말할 뿐이다. 스페인이 Inca의 기록 수단인 khipu를 다룬 것처럼 강자는 자기의 기준으로 세상을 정의하고, 판단하고, 기록을 남기고, 패배자의 것을 말살하고, 지우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이 한 것처럼 서구도 이렇게 세계를 식민화하고, 그 주민과 문화를 다뤘다.
Justice is blind(편견 없는 정의)처럼 정말 사법 체계는 신분, 지위, 부 등과 무관하게 만인에게 공평한가? Cherokee 부족은 미국과 더불어 싸우고, 스스로 서구화를 하면서 공존하려고 했지만, Andrew Jackson 대통령을 포함한 미국 정치가들은 그들을 동등한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고, 오클라호마로 쫓아냈다. 이 과정에서 Cherokee 부족은 고향에서 추방당하고, 무수한 부족민이 죽고, 문화와 전통이 짓밟혔다. 이처럼 서구인은 다른 민족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으니, 그들이 권리 청원(Petition of Right) 같은 입법을 통해 이룩한 인권 보장도 사법 체계도 오직 서구인만을, 그것도 처음에는 소수의 특권층에게만 적용, 위한 것이었다.
Power to the People(권력은 국민에게)이 말하듯이 링컨 대통령은 Gettysburg 연설에서 그 유명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라고 민주주의를 정의했다. 하지만, 고대 아테네와 같은 직접 민주주의는 미국에서도 영국에서도 실현된 적이 없다. 영국의 대표(발언권) 없는 과세를 거부하면서 시작된 미국의 민주주의는 사실 로마의 공화정 체제와 가깝다. 소수의 정치 엘리트를 선출해, 그들의 뜻대로 정부를 이끌어 가는 정치 체계이다. 그래서, 현재의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권력은 늘 소수에게 집중되고, 대다수의 국민은 그 소수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 이는 미국을 건국한 지도자들(founding fathers)이 비이성적인 대중의 지배(mob rule)를 막는 정치 체계를 고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연방주의는 각주의 자치를 허용하기 위해 백인들이 야만인이라고 무시한 Iroquois League (Haudenosaunee)를 모방해 설계됐다.
Time is Money는 산업 사회에서 기본적 시간 개념이다. 서구 계몽주의가 고안한 이 개념은 우리를 가두는 틀(trap)이 되었다. 철도의 등장이 시간의 표준화를 가져왔고, 산업화로 일하는 시간의 유연성은 점점 없어졌다. 1920년대 Frederic Wilson Taylor는 작업의 요소 동작을 분석해 작업을 최대한 효율화(생산성 향상)했다. 이런 효율성 향상 시도는 작업자를 시간에 매어 기계처럼 일하게 했다. 효율성만 중시하느라 늘 바쁜 현대 사회의 시간은 우리의 족쇄다.
국가는 당신을 필요로 하는가(Your Country Needs You)? 벵골계 영국인을 부모로 아부다비에서 태어나 영국식 교육을 받고 철저히 영국인으로 자랐지만, 영국 국적을 취득해야만 하는 저자는 국가란 무엇인가 묻는다. 사회적으로 상상해 낸(socially constructed) 공동체인 국가는 영국 등의 이민 제도에서 볼 수 있듯이 문화적 동질성보다 인종적 동질성을 중시한다. 그것이 인도계 영국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철저히 문화적으로 영국인인 저자가 영국 국적을 자동 부여 받지 못하는 이유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 탈레반 지배로 아프가니스탄인이 겪는 가혹한 시련에 무관심하던 서구 사회에서 2001년 탈레반의 불상 파괴는 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예술은 서구인의 우월성을 보여 주는 것으로 무엇이 예술인지는 서구인이 정의하고 박물관은 문명(civilized 서구)과 야만(uncivilized 비서구)을 구분함으로써 서구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이를 위해 비서구의 유물을 약탈(사하라 남쪽 유물의 90%가 서구 박물관 소장)해 자신들만이 이들을 제대로 보존할 수 있다며 전시한다.
죽음은 만인에게 평등한가(Death is the Great Equalizer)? 해부학은 의학 발전에 기여했지만, 18세기 영국은 처형된 살인자의 시체만 합법적으로 이용할 수 있어서 시신 도둑이 유행했다. 이를 막기 위해 Jeremy Bentham의 아이디어처럼 해부학 법령으로 시신을 의학 연구에 쓰도록 했지만, 불평등하게도 대부분 하류층의 시신이었다. 현대 서구사회에서 죽음은 집 밖의 일(병원에서 죽고, 장의사가 사후 처리를 하는 등)이고, 가능한 한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모두 함께 하는 거야(We’re All in This Together)는 구호일 뿐 실제로 사람들은 불공정한 여건에서 삶을 시작한다. 개인 중심인 서구보다 공동체로 함께 나누고 도우며 사는 인디언 부족이 훨씬 온전한 사회다. 이런 사회와 삶을 지향해야. 서구에서 높이 인정받는 Abraham Maslow의 Hierarchy of needs는 Blackfood Confederacy의 일원인 Alberta Siksika Nation과 함께했던 경험에서 나온 이론이다. 서구는 개인의 능력(부, 권력 등 meritocracy)에 따라 대우받고, 서열이 정해지는 데 반해 Blackfood Nation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모두 동등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그렇게 산다. Margaret Mead는 문명사회란 곤경에 처한 이를 돕는 사회라고 했다.
이처럼 Das의 책에 따르면 서구의 기본 가치는 모순덩어리이고, 가짜 학문인 인종학에 기반한 백인 우월주의이다. 서구에서 진보와 발전으로 받아들인 개인 중심주의는 공동체를 버리고, 개인을 중심에 놓아 건강한 사회에 위협이다. 하지만, 서구는 서구의 기여가 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산업 혁명, 그리고 합리적 사고를 통해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다수의 인류를 부양하고,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다. 농경 사회에 머무른 전통 사회의 빈곤과 궁핍을 고려하면 이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업적이다. 또, 과도한 사회의 통제에서 개인이 자유를 누릴 공간을 열었다. 더군다나, Das의 미화대로 원주민의 사회가 결점 없는 완벽한 사회는 분명 아니다.
우리 조상은 조선 시대까지 중국을 따르다 이를 철저히 배척하고, 살아남기 위해 서구를 맹종했다. 그 덕분에 우리나라는 서구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인류학자 Franz Boas는 문화적 상대주의와 역사적 특수성 (cultural relativism and historical particularism)이 존재하지, 어느 특정 사회나 문화가 우월하다는 주장을 부정했다. 그의 이론대로 문명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중국과 로마가 주변 국가와 부족을 야만으로 취급한 것은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시도였다. 로마의 식민지였던 근대 서구 국가들은 과학과 산업 발전에 힘입어 세계 곳곳에 진출해 식민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서구는 자신들의 인종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사이비 학문인 인종론을 만들어냈다. 그런 인종론이 다윈의 적자생존 등의 과학적 발견을 왜곡 적용해 생겨났다는 사실은 얼마나 우리의 사고와 과학 수단조차 시대의 흐름과 의도에 묶여 있는지를 보여 준다.
서구의 현대 생활 방식을 수용한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은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병든 사회가 되었다. 문명이란 문화란 환경에 적응해 사람이 일궈낸 것일 뿐, 어느 문명이 우월하고 열등하다 할 수 없다. 서구의 과학과 산업 기술은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지만, 세계의 다양한 사회가 이룩한 전통과 장점을 무시하고, 개인의 능력과 경쟁을 중시하며 서로 신뢰하고 도우며 공존하는 사회 체제를 붕괴시켰다. 이제 인류는 서구가 다른 사회를 야만으로 몰며 초래한 약탈과 말살을 넘어서야 한다. 그러려면 지탱할 수 없는 환경 파괴를 불러온 물질 만능, 자연 정복의 서구 자본주의를 지양해야 한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서구 문명에서 가족을 포함한 공동체에 더는 진정한 우리가 존재하는지, 서구가 진정 온전한 선진 문명인지 숙고해야 한다. 그리고, 서양 이외의 인류 사회가 빚어낸 문화와 지혜를 박물관의 전시품으로 만들지 말고, 함께 존중하고 활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