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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5월 1일 목요일
[(백)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사도들은 대사제의 심문에,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삼아 당신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셨는데, 성령께서 이 일의 증인이시라고 대답한다(제1독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복음).
제1독서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5,27-33
그 무렵 경비병들이 27 사도들을 데려다가
최고 의회에 세워 놓자 대사제가 신문하였다.
28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
그런데 보시오, 당신들은 온 예루살렘에 당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29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30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32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33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31-36
31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32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33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34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35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36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 나누신 대화 (요한 3,1-21 참조)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시는 분, 하늘에서 오시는 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아드님이십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태양’과 같은 분이신데, 오늘 복음은 그 큰 빛을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이들일까요? 그들은 마치, 해가 떠올라 세상이 환한데도 창문에 커튼을 치고 방에 들어앉아 어둠을 쫓는다고 촛불을 켜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오랜 장마 뒤에 뜨거운 태양이 떠올라 대지를 산뜻하게 덥힐 때 창문을 활짝 열어 햇볕을 쬐는 대신, 문을 닫아걸고 굳이 보일러를 돌리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사람이 제힘으로만, 제 잘난 것으로만 살 수 없는데도 자신의 부족함과 가난함을 인정하지 않은 채 버티는 꼴이지요. 빛 앞에서 방어하고 저항하며, 자기 혼자서도 잘해 왔노라고 자존심을 내세우며 그 미약한 힘자랑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련합니다. 넘실거리는 은총의 바다를 앞에 두고 겨우 쫄쫄 흐르는 실개천인 자신을 뽐내며 하느님 앞에서 위세를 부리는 격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이를 두고 ‘어리석다’고만 하지 않습니다. ‘악하다’고 말합니다(3,19-20 참조). 그들은 생명을 보지 못하며,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고 말합니다(3,36 참조). 이는 윤리적인 평가가 아닙니다. 영적인 평가입니다. 윤리적으로는 다른 이들보다 나은 점이 있지만, 자신은 충분하다며 더 받아들이고 배우고 변화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한 분 말고는 아무도 충분하지 않습니다.(김동희 모세 신부)
나는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제 널리 알려져 역사에 길이 남게 된 명대사가 있습니다. 한때 너무 멋있어서 어떤 분들은 홀딱 반해 잘도 속아넘어갔습니다.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 말의 원조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정말이지 사도들이야말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꽃이 잠시 피었다가 시들듯이, 사람이란 존재 역시 영원하지 않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으신 분, 충성을 다하고 철저히 순종해도 실망하지 않을 대상이신 하느님께만 신뢰를 두었습니다.
요즘 우리가 봉독하고 있는 사도행전은 성령의 은총으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도들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는데,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사도들은 더 이상 권력자들이나 적대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그들의 심기를 거스를까봐 전전긍긍하거나 하고싶은 말도 못하거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이 그렇게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대낮에 광장에서 자신들이 온몸으로 체험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당당히 선포했습니다.
강렬한 성령 체험,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과의 생생한 인격적 만남은 사도들을 완전히 딴 사람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스승님께서 항상 함께 해주실 것을 굳게 믿은 사도들이기에,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아깝지 않게 된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콜로라도 덴버에 있는 한인 성당엘 다녀왔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를 보았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있는 것을 찾으며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비교하는 사람은 없는 것을 찾으면서 불평한다고 합니다. 본당의 전례에서 신부님의 따듯한 배려와 사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연도 할 때도 신부님은 직접 선창하면서 교우들이 연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성모 신심 미사에도, 성 시간에도 신부님은 교우들이 묵상할 수 있도록 성가를 선곡해서 들려주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이렇게 정성을 다하니, 하느님께서 많은 봉사자를 보내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들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는 말하지 마라" 그러자 사도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도들은 말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실제로 감옥에도 갇히고, 매도 맞고, 심지어는 목숨의 위협까지 받으면서도, 복음을 선포하러 다시 나섭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도들의 마음속엔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진실, 그리고 그분이 정말 생명의 주님이라는 확신입니다. 그 진리를 경험하고 나니까, 세상의 권위나 명령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해졌습니다.
이런 모습은 교회 안에서만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있습니다. 그는 아테네 법정에 서서, 사람들이 왜 자꾸 철학 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신의 명령에 따라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악한 삶보다 죽는 것을 택하겠다.” 결국 그는 국가가 정한 법과 체제에 맞서 양심과 진리를 따르는 길을 택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또 한 사람, 마르틴 루터도 있습니다. 그는 중세 교회의 권위 앞에서, 잘못된 신학과 부패한 관행을 지적하며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를 도우소서.” 그의 이 말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자신의 양심에 충실히 하고자 했던 외침이었습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입니다. 히틀러의 독재 앞에서 교회가 침묵하거나 순응할 때, 그는 신학자로서 이렇게 말합니다. "침묵은 동조다. 교회는 불의 앞에 말해야 한다." 그는 결국 감옥에 갇히고, 교수형을 당합니다. 하지만 그의 신앙은 지금도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양심의 목소리로 살아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진리와 진실을 찾으려는 이들을 통해서 인류의 가슴에 묻혀있던 양심을 깨우쳐 주십니다.
대한민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결단이 내려진 적이 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을 파면한 판결이 있습니다. 당시 재판관은 "대통령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파면하지 않으면서 얻는 이익보다 크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통치권자의 권위보다 헌법적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 결정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지만, 국민을 위한, 정의를 위한, 미래를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이 두 장면은 시대도, 배경도 다르지만 하나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진리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는가?" 때로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침묵을 강요받을 수도 있고, 때로는 눈치 보지 않고 말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사도들처럼,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바라셨고, 그래서 아들 예수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아들 예수의 말을 믿는 사람은 구원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욕망, 시기, 질투, 불신, 분노, 원망의 삶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 신뢰한다면, 함께 나눈다면, 조건 없이 사랑한다면 바로 이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어두움 앞에서 진리를 외면하지 않고, 양심에 따라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말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안의 양심이 깨어 있을 때, 세상은 희망을 봅니다. 오늘도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하느님 닮은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55)
일하시는 하느님
닮은
일하는 사람
이루시는 하느님
닮은
이루는 사람
돌보시는 하느님
닮은
돌보는 사람
베푸시는 하느님
닮은
베푸는 사람
섬기시는 하느님
닮은
섬기는 사람
살리시는 하느님
닮은
살리는 사람
일하시는 하느님
닮은
일하는 사람
오늘의 성인
성 예레미야 (Jeremiah)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 650-588년경BC
성 예레미야(Jeremias)는 구약성서 예언서 중 하나인 예레미야서의 저자이다.
만일 성서에 이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유다이즘과 그리스도교는 그 종교적 본질을 아주 달리 했을 것이다. 예레미야가 마음과 인격의 종교를 주창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 이사야보다 1세기 뒤에, 그러니까 기원전 650년경 예루살렘 근교의 어느 사제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성서는 예레미야의 생애와 성격을 그 어느 예언자들 보다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예레미야를 3인칭으로 묘사하는 이야기들이 성서에 다수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26년 그러니까 요시야 왕 치세 제13년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젊은 예언자로 나섰다(예레 1,2). 그는 유대왕국의 멸망이 예견되었고 드디어는 예루살렘의 몰락을 초래한 비극적 시대를 살고 있었다. 요시야왕의 종교개혁과 주권회복은 유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지만, 불행하게도 609년에 그 왕이 므기토에서 전사하게 됨으로써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고대 중동의 세계는 또다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으니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612년에 함락됨으로써 바빌론제국이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바빌론 왕 느브갓네살은 팔레스티나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집트는 유대왕국을 사주하여 바빌론의 지배에 항거하도록 하였으니, 느브갓네살은 597년에 예루살렘을 함락하였고 주민의 일부를 유배지로 끌고 갔다. 이집트의 조종에 끝내 놀아난 유대는 또다시 바빌론 세력에 항거하였다. 587년에 바빌론 군대는 한 번 더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성전을 깡그리 파괴하였고 저항세력의 지도자들을 또다시 유형지로 끌고 갔다.
예레미야는 이 어두운 시대의 역사적 비극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가 이 비극을 좌시한 것은 아니었다. 예언자는 지도자와 민중에게 하느님 말씀의 대변자로 나서서 맹렬히 설교했고 위협했으며 왕국의 몰락을 예고했던 것이다. 다윗의 왕좌를 차지했던 유대의 왕들은 예언자의 이 불칼 같은 경고를 아예 무시했으며 또 군인들은 예레미야가 패배주의를 선동한다고 비난하며 그를 박해하고 고문하며 투옥시키기까지 하였다. 드디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 강기슭에 유배가 있던 사람들(시편 137)에게서 희망을 보았지만 망명하는 것을 끝내 거부하고 고국 땅 팔레스티나에 머무르기로 하였다. 그의 보호자는 바빌론인들이 임명한 총독 게달리야였다. 하지만 유태인의 한 무리가 총독을 암살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들은 바빌론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레미야를 인질로 삼아 이집트로 망명하였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이집트에서 소리 없이 죽어간 것 같다.
이 험난한 운명의 사나이의 드라마는 단순히 사건들만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전 생애가 일종의 비극이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끝까지 그 말씀에 충실하다 보니, 예레미야는 그야말로 ‘말씀의 고독한 예언자’가 되고만 것이다. 그는 성품이 온순했고 사랑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야훼는 그에게 ‘무너뜨리고 파괴하며 전복하고 없애버리는’ 사명(1,10)을 주셨다. 그의 예언은 끝없는 불행만을 예고하였다(20,8). 예레미야는 평화를 원했건만 자기 가족과 왕들과 사제들,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과 모든 민중을 반대하여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예레미야는 “온 나라 안에서 싸움과 불화의 사나이로 통한 것”이다(15,10). 그가 이 같은 사명을 수행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예레미야는 말씀에 의해 완전히 가루가 될 뻔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20,9). 하느님과의 내적인 대화는 온통 고통의 외침이었다. “무엇 때문에 나의 고통은 끝이 없나이까?”(15,18) 욥의 저주를 예고한 예레미야의 그 외침은 고백론의 절정이다. “내가 태어난 그날은 저주받을지어다!”(20,14 이하).
하지만 이 고통은 예레미야의 영혼을 정화시켰으니 하느님과의 내밀한 친교를 가능케 하였다. 우리에게 이 예언자가 그토록 귀중하고 가까운 인물로 나타나는 것은 새로운 계약을 성문화시켜 예고하기에 앞서(31,31-34) 자신이 먼저 마음의 종교와 내적인 종교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인격적 종교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종교의 가르침을 심화시켰다. 하느님은 마음과 콩팥을 꿰뚫어 보시는 분(11,20)이요,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시는 분이다(31,29-30). 하느님과의 우정은 인간의 거짓스러운 마음의 소산인 죄에 의해 끊어진다. 거짓말이 모든 죄의 뿌리란 것을 예레미야만큼이나 강조한 사람은 없다(4,4; 17,9; 18,12). 이 점에 관한 한 예레미야는 호세아 예언자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다. 율법은 그에 의해 내면화되었으며 또 하느님과의 모든 관계는 마음의 소산임을 그가 밝혔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인간의 개인적 인격에 큰 관심을 둔 것으로 보아 신명기(申命記)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물론 그가 신명기에 바탕을 둔 요시야왕의 개혁을 처음에는 환영하였으나 마음의 회개가 없는 제도적 개혁이 무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민중의 윤리적 종교적 삶을 변혁시키기 위하여 내적 인간의 개조 없이는 불가능함을 예레미야가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사명은 살아생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으나 죽은 뒤의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만 갔다. 마음의 종교에 기초를 둔 ‘새로운 계약의 사상’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유다이즘의 아버지가 되게 하였다. 우리는 에제키엘서와 제2 이사야서(40-55)와 시편들에서도 그의 영향을 찾아 볼 수가 있다. 마카베오 시대의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민족의 수호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꼽았다(2마카 2,1-8; 15,12-16). 예레미야는 힘과 물질보다는 영성적 가치를 더 중대시하였고 또한 영혼이 하느님과 맺은 내밀한 관계를 밝혔다 하여 이 예언자는 그리스도교의 새 계약을 준비한 인물로 통한다. 말씀에 대한 정열적인 사랑과 말씀 때문에 당한 그의 고통은 이사야서 53장의 야훼의 종의 모습을 예고하였으니, 예레미야는 그리스도의 형상(形象)을 앞질러 보여 준 것이다.
성 페레그리노 라치오시 (Peregrine Laziosi)
활동년도 : 1260-1345년
신분 : 신부
지역
같은 이름 : 라찌오시, 뻬레그리노, 뻬레그리누스, 페레그리누스, 페레그린
이탈리아 포를리(Forli)의 어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성 페레그리누스 라치오시(Peregrinus Laziosi, 또는 페레그리노 라치오시)는 젊어서 한때는 로마냐(Romagna)의 반 교황당에서 적극 활동하다가 성 필리푸스 베니티우스(Philippus Benitius, 8월 23일)를 만나면서부터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는 시에나(Siena)의 ‘마리아의 종 수도회’에 입회하여 고향으로 갔으며 그곳에 수도원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설교, 고행, 성덕 그리고 고해신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의 발에 있던 암이 기적적으로 치유된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암환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 그는 1702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726년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파나세아 (Panacea)
활동년도 : 1378-1383년
신분 : 동정 순교자
지역 : 과로나(Quarona)
같은 이름 : 파나시아, 파나씨아, 파나케아, 파넥시아
성녀 파나케아(또는 파나세아)는 이탈리아 노바라(Novara) 교구의 과로나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아기일 때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는 재혼을 했는데, 새어머니로 들어온 이는 종교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성녀 파나케아는 신심이 깊었고, 이는 새어머니의 미움을 사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그녀는 기도하던 중에 새어머니에 의해 맞아 죽었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867년에 승인되었다. 성녀 파나케아는 파넥시아(Panexia) 또는 파나시아(Panassia)로도 불린다.
성 시지스문도 (Sigismund)
활동년도 : +523/558년?
신분 : 왕, 순교자
지역 : 부르고뉴(Bourgogne)
같은 이름 : 시지스문두스
프랑스 남동부와 스위스의 남서부는 부르고뉴 왕의 휘하에 있었고, 그 당시의 통치자는 아리우스파(Arianism)에 속한 군네발드(Gunebald)였다. 그가 죽기 전 왕위를 계승한 아들 성 시지스문두스(Sigismundus, 또는 시지스문도)는 그 후 정통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이것은 비엔(Vienne)의 주교 성 아비투스(Avitus, 2월 5일)의 노력 때문이었다. 한때 그는 전쟁에서 패한 뒤에 은수자 생활을 하며 생모리스(Saint-Maurice) 수도원을 세웠으나 결국은 체포되어 오를레앙(Orleans)으로 끌려갔다. 성 아비투스가 중재하였으나 프랑스 국왕은 그를 처형하고 우물 속으로 던져버렸다. 그의 유해는 나중에 발굴되어 보헤미아(Bohemia)의 프라하(Prague) 주교좌 성당에 안장되었고,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게 되었다.
성 리카르도 팜푸리(Richard Pampuri)
활동년도 : 1897-1930년
신분 : 수사, 의사
지역
같은 이름 :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성 리카르두스 팜푸리(Richardus Pampuri, 또는 리카르도)는 1897년 8월 12일 이탈리아의 파비아(Pavia) 근처 트리볼지오(Trivolzio)에서 태어났다. 안젤라 팜푸리(Angela Pampuri)와 인노첸테 필리포(Innocente Filippo)의 11남매 중 10번째 태어난 에르미니오(Erminio)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세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인근 마을에 사는 이모 집에 맡겨졌는데 7년 후인 1907년에 아버지 또한 밀라노(Milano)에서 돌아가셨다. 그는 인근에 있는 두 곳의 초등학교를 다녔고 밀라노로 가서 중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파비아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1915년 파비아 대학의 의대에 들어갔다. 그는 1915년과 1920년 사이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하사관과 의무병으로 근무했다. 1921년 7월 6일 파비아 대학의 약학과와 외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의사로 있던 삼촌 밑에서 3년간 의료 실습을 마친 후 밀라노의 한 병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들을 돌보던 그는 그리스도교 사도직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사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선교사제가 되고 싶었지만 건강 문제 때문에 단념했었다. 젊은 시절 어느 곳을 가던지 그리스도교적 덕행의 모범이었던 그는 세상 속에 살면서도 복음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고백하고 너그러움과 열정을 갖고 자선사업을 실천했었다. 바쁜 일정 중에도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다. 열심히 미사에 참례하고 성체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성모님께 대한 깊은 신심으로 하루에 한 번 이상 묵주기도를 바쳤고, 파비아 대학 가톨릭 액션 단체의 근면한 회원이었으며,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와 작은 형제회의 3회원으로도 활동했다.
소년 시절부터 가톨릭 액션 단체에 참여했던 그는 실습을 위해 모리몬도(Morimondo)에 갔을 때 본당 신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음악 밴드와 가톨릭 액션 젊은이 단체를 조직하여 그 첫 번째 대표로서 성 비오 10세(Pius X)의 전구 아래 두 단체를 두었다. 그는 또한 본당의 선교 후원회의 간사를 맡기도 했고 자비를 들여 청년 모임과 농민과 지역 노동자들을 위한 정기 피정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의사로서 유능하며 자비로운 그는 환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의술을 베푸는 데 있어서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약과 돈 그리고 음식과 이불을 가져다주곤 하였다. 그의 자선사업은 모리몬도 근교의 도시 근로자들과 이웃의 손길이 필요한 노인들에게 퍼져나갔고 다른 마을과 도시로도 확산되었다.
6년 동안 의사로 일한 그는 수도원에 입회하고자 했고, 이에 ‘거룩한 의사’를 잃을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슬픔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컸고 지역 신문에서까지 기사화하였다. 그는 결국 1927년 6월 22일 밀라노의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에 입회하여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자신의 의학기술을 지속하고 동시에 복음적 거룩함에 더 가까이 가는 길을 택하였다. 그는 리카르두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브레시아(Brescia)에서 지원기를 마치고 1928년 10월 24일 서원을 하였다. 서원 후 그는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브레시아의 천주의 성 요한 병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곳에서 성 리카르두스 팜푸리 수사는 아름다운 자선을 실천하여 모든 이의 존경을 받았다. 수도자로서 그의 삶은 수도회에 입회하기 전에도 그랬듯이 동료, 환자, 의사, 진료 보조원, 간호사, 그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덕과 자선의 탁월한 모범이었다.
성 리카르두스 팜푸리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때 얻은 병으로 인해 일종의 폐병을 앓고 급속히 건강이 악화되었다. 밀라노로 치료를 받으러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030년 5월 1일 33살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그는 ‘자신의 전문지식을 자비의 사명으로 변형시키는 방법을 아는 의사로서, 자신 안에 천주의 성 요한의 진정한 아들로서의 카리스마를 살았던 수도자로서의 기억을 남기고’ 하느님께로 돌아간 것이다. 그의 시신은 고향에 돌아와 묻혔으며 그를 기리는 성당이 세워졌다.
그는 1981년 10월 4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는데 이날 강론에서 교황은 이렇게 말하였다. “짧지만 열정적인 삶을 산 리카르두스 팜푸리 수사는 모든 하느님 백성에게 자극이 되는데 특히 젊은이와 의사, 수도자들에게 큰 자극이 된다. 그는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인생을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기쁘고 용기 있게 살도록 초대하며,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가르침을 따라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에 스스로를 헌신하도록 초대한다.” 그는 1989년 11월 1일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녀 그라타 (Grata)
활동년도 : +4/8세기
신분 : 과부
지역 : 베르가모(Bergamo)
같은 이름 : 그라따
성녀 그라타는 이탈리아 베르가모의 성 루포(Lupo) 대공과 그의 아내 성녀 아델라이드(Adelaide)의 딸로, 그녀의 남편과 사별할 때까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성녀 그라타는 그리스도인이 된 후 그녀의 부모를 개종시켰다. 그녀는 자신의 고향에서 거룩한 부인으로 신망을 얻었고, 특별히 순교자들의 시신을 안전하게 그리스도교 전례에 따라 매장하는데 큰 열성을 지니고 있었다. 성녀 그라타는 테반 군단의 군인 순교자인 성 알렉산데르(Alexander)의 유해를 천으로 정성껏 감싸 영예롭게 매장했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 성녀 그라타는 지혜와 자비심으로 베르가모를 다스렸다. 그녀의 생애에 관한 증거는 분명하나 활동 연대에 대해서는 일치하지 않고 있다. 그녀는 베르가모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