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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찾아가는 그 길 위에서
초가을이라 부르건만 가을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무덥던 여름 그리고 가는 여름이 못내 아쉬운지 걷는 내내 굵은 땀은 비 오듯 흐르고
몸에서 쉰네가 풀풀 풍기니 어디서 날아왔는지 수많은 날파리들이 앞에서 알짱거린다.
오늘 걷는 이 길은 "살생(殺生) 하지 말라"시던 부처님 찾아가는 길이니 "저리 가라"며 이리저리 손사래를 쳐보지만 이 녀석들이
착한 맘(心)을 알아 들을리 만무하다.
그만 쫓아 오라며 도망치듯 뛰어가보기도 하는데 인간이 날개 날린 짐승을 이길 수가 있나
고공비행으로 적을 기습하듯 앵앵거리며 따라오는 놈과 배낭에 찰싹 달라붙어 무임승차 하는 놈...
결국 인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살생을 저지른다
아미타불
얼굴 앞에서 양 손바닥과 날파리의 피 터지는 전투를 하며
"부처님 오늘 내손에 객사한 날파리 제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 용서해 주십시오!, "라며
깨알 같은 날파리를 저세상으로 보낸다
국립공원 팔공산
끝에서 끝까지 그 속에 자리하는 5천 종 이상의 동, 식물과 수많은 전설 그리고 시(市)와 군(郡)을 넘나들며 뭇 생명을 살리는 근원(根源)이 숨겨져 있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1천500년이 되었음에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천초목이 바뀌어도 단 한 번도 간절함을 꺼트리지 않고, 중생 구제에 마음속에 밝은 불을 켜는 수행자들과 중생 구제란 신의 뜻인가! 인간의 의무인가! 를 생각게 한다
간절했던 마음은 돌(石)이 부처(佛)가 되고 그렇게 후대로 전해진다.
팔공산 종주에 앞서 천년 사찰 종주를 해보며 :제2 석굴암-오도암-청운대-비로봉-동봉-삿갓봉-능성재-중암암-은해사-갓바위-북지정사-동화사-부인사-파계사-송림사 62km
출발과 함께 첫날 동화사 저녁 예불시간(7시 무렵) 새벽 예불시간(04시 20분)에 일정을 맞추다 보니
대한 불교 조계종 10교구 본사인 은해사(銀海寺) 말사의 암자 중에서 중암암과 비구니 사찰인 백흥암(일 년에 단 두 번 문 여는 절)을 찾고 기기암과 묘봉암은 시간 관계상 훗날로 기약한다
천사종주 지나간 경로
군위군 부계면 제2 석굴암 (통일신라시대)
경주 토함산 석굴암보다 100년 전에 만들었다는 아미타여래 삼존석굴
지상에서 20미터 높이의 자연 석굴에 부처님을 모셨으며 국보를 보존하기 위해서 계단을 통해서 오르지 못한다.
가운데 본존불인 석가모니 부처님이시고, 좌측에 극락왕생길로 인도하신다는 관음보살
우측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대세지 보살이 협시불로 서있다
비로전과 모전석탑이 보이고 그 앞 바위 절벽에 아미타여래 삼존석굴이 있고
법당 안에서 스님의 독경소리가 은은하게 들린다.
잠시 들어가 3배하며 "오늘 갈 길에 꼬물거리며 기어 다니는 짐승만 안 보이게 해 달라"며 부처님께 절하고 나와 본격적인 순례길로 향한다
이제 걸음은 멀리 보이는 팔공산 청운대로 옮겨가며
주위로 큼지막한 사과가 주링주렁 매달린 과수원을
지나고 한여름 피서철 많은 행락객들이 다녀간 동산 계곡길로 진행한다
원효대사께서 걸음 하신 그 길 위를 지나며
대사께서는 무슨 연유로 이 높은 곳에 암자를 지으실 생각이셨는지
중생 구제에 힘을 쓰셨는지 아니면 개인의 수행 정진이셨는지
그 길에 서고 보니 그분의 수행 정진길이 애잔한 마음으로 느껴진다.
정상으로 오르는 도로길을 벗어나 오도암 1,5km로 산길로 접어들고 보니 누군가 깨끗하게 정리를 한 길이 이어지고
암자로 오르는 길은 한발 한 발이 수행이었을 것 같고
내일은 음력 칠월 부모님께 감사드리는 (백중) 날이라 오도암 스님께서 등로를
다듬어 놓았나 싶어 걸음걸음이 조심스럽다
오래전 절에서 가꾸던 묵은 밭인 듯 보이는데
고지대에 약간의 경사만 있는 평지 같은 곳이다.
원효께서 농사지었을 리 만무하고 누군가의 고된 노동의 흔적이 이렇게 남는구나!
그리고 삶이란 언제나 녹녹하지 않구나 이런 생각을 해본다
오도암 출입문은 싸리로 엮은 사립문이며 작은 고리로 걸려 있다.
참배객들에게는 허락한다는 글귀가 곱게 써져 있어 사립문을 살포시 들어 올리고 들어서니 청운대와 그 옆의 봉이 기백이 당당하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우와!~ 소리가 나온다
뾰족한 암릉의 봉(峰)과 허리처럼 휘어진 능선이 곁에 있고 그위로 구름이 걸려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서고 보니 과연 원효대사다
팔공산 최고의 비경 속에 봉황이 알을 품는 곳에 절을 숨기고 만들었다.
팔공산에 이보다 더 빼어난 곳과 명당이 있을 순 없다
동화사가 비록 병풍 같은 바위아래 자리를 잡았다 하고
인종대왕의 태를 묻은 곳이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하나 이곳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청운대의 암벽이 길게 이어지고
저 가운데 원효께서 수도했다는 굴이 자리한다
찾아오는 이 조심해서 지나라며 넓적한 돌이 징검다리가 되어 이어지고
단조로운 생활에 활력을 줄만한 작은 텃밭이 꼬물 거리듯 길게 이어지도록 만들어 두었다
원효께서 멀리 양산시 천성산에서 천명(千名)의 스님을 성인(聖人)으로 만들면서 도를 늦게 깨우친 여덟 제자를 이곳에 데려와
그중 다섯 분을 도(道)를 깨우치게 하셨고, 나머지 세분은 서봉 아래 삼성암에서 도를 깨우쳤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누구나 도를 깨우칠 것만 같은 풍경이다
국내 어지간한 사찰은 원효 아니면 의상인데
원효대사께서 전국을 다니시다가 말년에 신라 왕궁에서 강의를 하셨고 이후 70세의 나이로 입적하셨는데
아들 설총이 아버지의 유해를 분항사에 봉안하셨다고 한다
청운대 아래 자리하는 오도암
안 가보신 분들 많으실 텐데 꼭 한번 가보시기 바라고
이제 까칠한 714 계단이 기다리는 청운대아래 원효굴로 오른다
도를 찾는 길에 오르막이 대수일까
비탈진 오르막은 쉬운 걸음이 아닌데
한 계단 오를 때마다 갈비뼈가 아파 숨이 막혀온다
다시 집으로 가야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나무계단만 오르면 괜찮겠지 생각을 해보고 다시 오른다.
원효굴
지난번에 찾았을 때는 작은 부처와 파란 쪽박이 있더니 누군가 가지고 간듯하다
몇 번 글을 썼기에 넘어가고
원효굴에서 본 팔공산
청운대와 천년 소나무
오도암에서 714 계단을 오르면 청운대 정상이다
정상에는 잘 생긴 소나무 한그루가 푸른 하늘을 이고 서있듯 산객을 맞이한다
산정으로 가을의 전령사인 억새가 보라색 꽃대를 자랑하고
잔잔한 바람은 선하고 햇살은 무척이나 따갑게 느껴진다.
청운대와 원효굴이 있고
멀리 위천 수계인 군위땅과 의성땅이 펼쳐진다
팔공산 종주길에 꼭 들러봐야 할 청운대를 뒤로 하고
잠시 정자에 걸터앉아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쉬었다가
팔공산에 오시면 꼭 가봐야 할 곳이 세 곳 있는데
첫 번째 청운대 아래 오도암
두 번째 한 가지 소원은 들어주신다는 갓바위
그리고 나머지 한 곳은 중암암(돌구멍절)이다
이 세 곳을 보지 않았다면 팔공산을 다 보았다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비로봉에서 본 청운대와 절벽아래 작은 오도암이 보인다.
팔공산 정상 비로봉
서쪽 지역의 파계봉과 한티재 그 너머에는 가산과 유학산이 있고...
동봉 방향으로 진행
석조여래 입상의 부처님은 늘 온화한 미소로 아래를 내려다보시고
국립공원이지만 어째 산객 한분 안 보이니
사람 없는 산길은 쓸쓸하기만 하여 동봉으로 천천히 걸음 한다
서봉과 가산 그리고 유학산 방향
그러고 보니 너무 오랜만에 주능선을 찾는 건 아닌지
나이 60을 바라보는 시점에 이르러 나를 바라보니 실로 무능하고 이룬것 없는 인생을 살았다 싶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내가 가진걸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할 시점이 찾아온듯하다
깊은 가을날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듯 온몸 구석구석 세포 하나하나 사라져 가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
한때는 갓바위에서 동봉까지 한 시간도 길게 느꼈는데 지금은 하루 종일 걸어도 짧게만 느껴지니
나이가 든다는 순간을 알아간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자연의 순리인 것 같다
갓바위 7,3km 방향으로
군부대가 보이고
동봉 정상
저짝으로 갓바위 방향
맑은 하늘 아래 떠도는 구름 그 아래에 이어지는 능선은
한 마리의 용이 굼틀대는 모습인데
동화사 봉황문(鳳凰門)의 글귀나
오도암의 봉황이 알을 낳는 (金鳳抱卵形) 형세라면 팔공산은주능선은 봉황에 빗댈 수 있겠다
누군가 그런다
팔공산에는 다른 국립공원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유니크한 CC조망이 펼쳐진다고
뭔 소리냐 하시겠지만 골프장 조망도 조망이라고 CC조망이란다
이제부터 암릉길이며 조망이 좋고 암릉을 즐길 수 있는 구간이다
지나온 비로봉과 거칠고 재미난 암릉길인 동봉
신령재(도마재)
코끼리봉의 암릉
며느리 밥풀꽃
어느 착한 며느리가 밥하고 난 뒤 밥이 잘 된 건지 밥알 두 개를 입에 넣어 보는데 마침 부엌에 오던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버릇없이 밥을 먼저 먹는다며 두들겨 패서 죽였다
너무 억울하게 죽은 며느리 무덤가에 밥풀 두 개 물고 피어난 꽃이 바로 며느리 밥풀꽃이다
꽃잎 속에 하안 밥 두 알을 물고 있는 며느리의 억울함이 엿 보이는데 그래서 그럴까 앙다문 입술과 살짝 벌어진 입속에 밥알 두 개가 처량하게 보인다
며느리 밥풀꽃이야기는 잔혹동화 같은 전설로만 보기에 과거나 현재의 우리들 곁에 사는 며느리의 깊은 애환이 담겨있다.
바른재
식수위치가 표시되어 있지만 갈수기에는 물이 없을듯하여 포기하고
동봉에서 이곳 바른재까지 거의 평지 거나 내리막길이 길게 이어져왔다
이제 갓바위까지 살짝 오름길이 기다리지만 그렇다고 숨을 헐떡이며 오를 정도는 아니다
삿갓봉에서 본 지나온 능선길
거칠 것 같지만 거의 내리막이며 등로는 아주 좋다
삿갓봉
유니크한 CC조망이라
한때 7,8km 주능길을 뛰어다니며 보던 골프장
골프장이 보기 싫어 찾지 않았는데 팔공산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어 보이나 세월 지남에 따라 한 올 한 올 보이던
흰머리는 이제 머리 위에 소금 꽃이 피듯 빼곡하게 자리를 잡았다
보이지 않은 바람처럼 세월 빠름이 불어오는 바람과 같다는 생각이다.
갓바위를 코앞에 두고 방향을 은해사로 향한다
조짝에 건물 보이는 곳에 갓바위가 있고 그 너머에 환성산이 자리한다
갓바위로 곧바로 가면 금방이지만 은해사에 갔다가 다시 갓바위로 올라와야 동화사 저녁 예불시간을 맞출 것 같다
지나온 능성재
가야 할 중암과 백흥암 그리고 은해사까지
등로는 아주 편안하게 이어지는 내림의 산길이다
스님의 식기인 바루(鉢盂)를 닮은 바위 속으로 겨우 지나가면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만년송이 기다리고
긴 세월을 이긴 덕분에 멋진 이름하나 건진 만년송
삼인암(三印岩)이라 쓴 글이 보이는데
어느 처녀가 자식이 귀한 집안에 시집을 갔으나 여러 해가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자 이곳에 와서 치성을 드린 뒤
아들 셋을 낳았다는 곳이다.
극락굴
한줄기 빛이 보이지만 굴내부는 어둡고 겨우 지날 정도로 좁은 곳이다
그럼에도 불자라면 누구나 지날 수 있다고 한다
한때는 원효 대사도 이곳에서 수행정진 하셨다고 하니 이 굴을 지나는 자 누구나 천성이 착하고 부처가 될 상인듯 하다
극락굴 아래에 자리 잡은 고려 초기의 3층 석탑이 서있고
돌구멍 철로 유명한 중암암
한 사람 겨우 빠져나갈 만한 구멍 위에 수문장인듯한 나무가 서있고 그 속으로 중암암이 자리한다
신라 흥덕왕 때 심지대사가 창건한 절이며
마치 제비가 처마아래 집을 지은듯한 형상인데 절의 규모는 작으나 팔공산 자락에서 유명한 절이다.
대웅전에 들러 3배 하고 나와 1,200년 된 해우소를 찾아본다.
돌구멍 절의 해우소
지금은 사용하지 않으나 이곳 절에서 유명한 곳이라
떠도는 이야기로 통도사 스님, 해인사 스님, 이곳 중암암 스님이 모여 각기 자기 사찰이 얼마나 크고 대단한지 이야기를 하는데
통도사 스님께서 "우리 통도사 법당문이 어찌나 큰지 열고 닫을 때 문고리에서 쇠가루가 한 말은 족히 떨어진다"고 하니
해인사 스님께서 "우리 절에 가마솥이 얼마나 큰지 동짓날 팥죽 끓일 때면 배를 타고 노를 젖는다"고 하자
듣고 있던 중암암 스님께서 두스님의 허풍에 기죽을 수 없어 "우리 절은 비록 코딱지 만한데 천년 넘은 해우소(화장실)가 얼마나 깊은지 정월 초하룻날 볼일을 보면 그해 섣달 그믐날 바닥에 떨어진다고 했다는 전설이다.
실제로 화장실은 어둡컴컴하고 볼일 보고 난 후 허리띠를 졸라맬 무렵에 땅에 떨어질 정도라고 한다.
중암암 바로 아래는 임도길이 백흥암까지 이어지지만 다시 올라가 나무테크길을 지나 산길로 내려온다.
백흥암
용이 쉬는 곳에 절을 만들었다
신라 경문왕때 국사(國師) 해철이 창건하셨으며 일 년에 단 두 번만 산문을 여는 비구니 전통 사찰로써
칠월 백중과 부처님 오신날에 개방하는데 오늘은 닫혀있고 내일 백중날 문을 연다.
아쉽지만 산문 밖에서 부처님께 합장하고, 발길을 조선 12대 임금이셨으나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승하하신
가장 불쌍하고 착하셨던 인종대왕 태실로 돌린다.
12대 임금 인종의 태실(胎室)이 모져져 있는 곳
태(胎)는 엄마 배속에서 아기와 연결하는 고리로서 생명력을 부여받은 태실은 아기가 출산된 후에도 버리지 않고 보관하는데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르다고 전한다
왕실일 경우는 국운과 관련이 있어 아주 소중하게 다루었는데 산신과 토지신께 제사를 지내고 태실 주위에 출입을 금한다는
금표(禁標)를 세우고 벌목이나 개간등 일체의 행위를 금지시켰다.
조선 제12대 임금이셨던 인종임금 중종의 맏아들로서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승하하셨는데
인종 임금께서는 11대 임금 중종과 장경 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난 분이셨으나 장경왕후께서 산후병으로 일찍 돌아가시자
왕위 계승 0순위의 적장자였음에도 궁궐에서 친모가 없다는 건 불행이라 이때부터 불행이 시작되어 궁궐에서 벗어나 여기저기 다른 사람의 손에 자란다
이후에 총명함 덕분에 다시 궁궐로 돌아왔으나 중종의 계비였던 문정 왕후의 영향아래 자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늘 독살의 위험 때문인지 음식을 자주 거부 하시곤 했다
어린 세자(인종)를 돌보며 기회를 엿보던 문정왕후는 딸만 셋 낳는 동안에는 인종(세자)을 보호를 차처 하였지만
이후에 아들 (명종)을 낳으면서 모든 게 변하였고
인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8개월 만에 돌아가시면서 어린 명종이 왕위에 오른다.
드라마에서 보던 문정왕후와 정난정 그리고 복성군의 어머니 경빈 박씨 아주 독하디 독한 사람들 아니던가
그 틈에서 어머니도 없이 자란 인종은 총명했으나 독살 위험으로부터 눈치만 봐야 했던 착한 국왕으로 오래 기억될 분이다.
참고로 조선 왕조 (태조-순종까지 27명) 시기에 다음 왕 순위 0순위인 적장자는 몇 명이었을까?
5대 문종, 6대 단종, 10대 연산군, 12대 인종, 18대 현종, 19대 숙종, 27대 순종이며, 19대 숙종을 제하고 나면 모두가 단명(短命)하는 불운을 격은 분들이니 평균 수명으로는 33세이며, 정치 생명은 불과 5년이다.
인종 임금의 정치생명은 8개월이다.
이곳 태실은 일제 강점기 무렵인 1928년에 일제가 전국에 흩어져 있던 태실의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태 항아리와 각종 유물을 경기도 서삼릉으로 옮겼다
이후 1999년도에 허물어지고 방치된 태실을 발굴 조사하고 2007년도에 복원했는데 사진에서 보는 것과 태실 주위의 난간석과 비석이 가봉(加封 비석)이 서로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태실 뒤편에 복원하고 남은 가봉(加封)이 흩어져 있다
세상에 태어났으나 어머니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비운의 왕으로 그리고 착한 임금으로 기억될 임금
인종 임금을 뒤로하고 산아래 은해사로 향한다
추사 선생께서 쓰셨다는 보화루(寶華樓) 현판
팔공산 자락에는 두 개의 큰 본사가 자리하는데 남쪽에는 동화사 총림이 자리하고
동쪽에는 이곳 은해사가 있다.
은해사는 왕실 사찰(태실 관리 )로써 조선시대 31 본사였으며, 경북 5대 본사(동화사, 은해사, 불국사, 직지사, 고운사)중 하나이며, 8개의 부속 암자와 50개의 말사(영천,군위 청송,군위)를 거느렸으며 승가대학(삼장 박사과정)이 있다
날아갈듯한 지붕아래 극락보전에 들러 3배 하고 나와 이제 어디로 갈까나
오라는 곳은 이미 정해져 있건만
다시 산으로 올라 기기암이나 묘봉암을 오르기에는 이리저리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무엇보다
선본사나 갓바위를 지나 북지정사 그리고 동화사 저녁예불 시간을 맞추지 못할 것 같아 작은 암자 두 곳에 대한 미련은 버린다.
은해사 앞의 대소인 하마비(大小人下馬碑)
어른,아이 할것 없이 걸어서 들어오란 뜻이라...
말 타고는 들어가지 못하지만, 차타고 들어가면 되는 세상이다
하마비 유래는 고려 인종때부터 라는설이 있지만 정확한 근거는없고 조선 태종때 예조에서 중국제도에서 모방하여 궁궐밖에서부터 말에서 내려란 기록이 있다
하마비는 처음부터 불교의 유물이 아니라 궁궐에서 사용하던 제도였는데 이후 명종때 유생들이 능침사인 정암사와 회암사에 난입 기물을 부수고 사찰의 보물을 훔치는 일이 있어 문정왕후께서 유생들을 하옥 시켜버렸다
봉은사와 봉선에에는 유생들의 출입을 금지 시켰고
이후에 전국 각지 큰 사찰 입구에 하마비를 설치케 하였다
팔공산 은해사 일주문
갓바위 부처님 뵈러 가는 길에 어디 가서 밥을 먹으면 좋으련만
갓바위 -노적봉 아래 북지정사 그리고 동화사 저녁 예불 시간을 맞추려면 시간이 빠듯하니 식사는 없던 걸로 하고 도로길을 이용한다.
한낮의 도로길은 ...너무 덥다
팔공산 갓바위를 관리하는 선본사에 들러
신라 소지왕 때 동화사를 창건하신 극달화상에 의해 창건된 선본사로 천년 고찰이다.
부처님께 3배 하고 나와 갓바위로 향한다
갓바위 부처님의 천년미소를 보며
선본사에서 잠시 산길로 오르면 갓바위 부처님을 뵐 수 있으며
전국의 수많은 고3 수험생 부모님들이 즐겨 찾는 곳이고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고 하셨으니
"이 길을 지나는이 아무런 사고 없이 무탈하게 집으로 갈 수 있게 해 주세요!"라며 3배 하고 일어선다.
갓바위에서 돌계단 조금 내려서서 비로봉이나 능성재 방향으로 올라가는데
돌 계단 따라 쭉~~~내려가면 1천 365개의 돌 계단이 기다린다.
능선에 올라와 본 팔공산 주능선
바로 앞은 노적봉이며 저기까지 가야 북지정사로 내려갈 수 있다
북지정사로 내려가는 계곡길
장마철에 빗물에 낙엽이 모이고 쌓여 등로는 알 수 없고 무작정 내려가기만 한다.
숲에 들고 보니 가을은 이미 우리들 곁에 와있는 느낌이 들고
바람은 없어도 조금 시원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아침에 팔공산 능선에서 주워온 부채하나
세상 모든 바람이 내 손안에 있소이다
날파리로부터 해방된 시간이었으며 부채로 인해 더 이상 날파리를 죽이는 일은 없었다
간절한 마음인가
북지정사에는 소나무가 많이 자리하는데 주위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북지정사 3층 탑과 대웅전
예전에는 지장사란 절이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복원한 절이다.
절의 정확한 연대는 알길 없으나 대웅전 앞바당을 지키는 3층 석탑은 통일 신라시대 때 만들었으며
북지정사가 예전에는 동화사를 말사로 거느릴 만큼 대단한 절이었다는 기록은 남아있다
그렇지만 옛날은 옛날이고 지금은 동화사 말사의 절이다
북지정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보물로 지정된 지장전
"내!~ 지옥이 비지 않는 한 성불 하지 않을 것이며 그 끝에서도 너를 구하리라"
잠시 들어갔다가 나와
북지정사의 장독대
북지정사에서 내려서면 80년생 정도로 추정되는 소나무가 끝없이 이어진다.
천천히 걸음 하며 동화사로 향한다
돌과 시
팔공산 동화사 봉황문을 지나고
저녁 예불시간은 맞출 것 같아 느리던 발걸음이 빨라지고
산신각에도 들렀다가
동화사 대웅전
저녁 예불시간 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여 3배 하고 나온다.
배는 고프고 저녁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동화문을 지나 산문(山門) 밖으로 나가면 밥이야 먹겠지만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기도 귀찮고
이곳 동화사 입구 작은 **에 문이 열려있어 쪼그려 잠을 자는데 뭔 고양이들의 극성인지
잠은 오지 않고 새벽 일찍 밖으로 나오니 밤하늘 별들이 맑고 총총하다
새벽 04시 20분
새벽 예불시간에 다시 대웅전을 찾는다.
새벽에 다시 찾은 대웅전
간절함
절에서는 예불로 시작해서 예불로 끝난다
서슬 퍼런 면도날 같은 수행자께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할 때
반듯하게 일어섰다가 다시 무릎을 굽혀 엎드릴 때 유심히 지켜보면 절하는 모습이 너무 멋지게 보인다
특히 비구니절의 스님이 살며시 절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존경심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데
혹시라도 몇몇 사찰의 비구님 스님의 절하는 모습을 한번 보시기 바란다
통일 범종루
새벽 예불을 알리는 스님의 독경소리가 끝나고
세상 모든 사물을 깨우는 소리가 울릴 무렵
극락에 온듯한 소리
세분의 스님들께서 돌아가며 법고를 치시는데 웅장한 소리는 마음을 맑게 하기에 충분하다
心을 그리며 치는 소리는 때로는 천둥소리처럼 웅장하게
때로는 조용한 해안가에 들러오는 파도 소리로 들린다.
15분 정도 넋 놓고 듣고 있다가
법고 소리가 끝날 때쯤 이어받은 묵어 소리는 뼈를 일으켜 세우는듯하고
범종소리 마치 심장이 터질 듯 머리가 맑아진다.
범종 28번 타종 소리가 끝나고 대웅전에 들어서니 많은 스님들과 신도분들이 예불 준비로 서 계신다
새벽 예불이 끝날 때쯤 밖으로 나와 이제 부인사로 향한다.
부인사로 향하는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도로에 선정될 만큼 멋진 길이긴 하나
걷는 이에게는 날파리의 극성으로 그저 답답하고 지루할 뿐
팔공산 정상 부근이 보이는데 다시 찾을 때는 팔공산도 많이 가까워져 있을 것 같고
부인사와 석탑 그리고 중생의 마음에 불력(佛力)을 밝히기 위한 석등(石燈)이 가운데 서있다
부인사는 선덕여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인데 그녀의 명복을 100년간 기려온 절로서 부인이란(苻仁) 선덕여왕을 뜻한다고... 세월이 흘러 어떤 연유에서 그러했는지 모르겠으나 고려 때 부인사(夫人寺)로 개명되었다
고려 때는 무신정권에 항거하기 위한 승려들의 본거지였으며,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을 보관한 장소였으나 고려 고종 때인 1232년 몽골 침입 때 부인사와 함께 모두 불타버렸다.
고려와 거란전쟁은 1차ㅡ3차까지 26년간 이어졌는데 1차 서희의 외교,2차 양규, 김숙흥,지체문 3차 강감찬 장군으로 이어졌다
현재 해인사에 보관 중인 팔만대장경은 모두 81,352장이며 평균 무게 3,5kg & 286톤 , 길게 줄지어 놓으면 60km
글 자수는 52,729,000자 그중에 오타는 158자다
그리고 책으로 엮으면 6천8백2권이며 한문에 능통한 분이 하루에 한 권씩 읽는다 하더라도 18년이 걸리는데
어느 스님께서 하루 7시간씩 30년이 걸려서 모두 읽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대장경은 2차, 3차에 걸친 여, 몽전쟁으로 지칠 대로 지친 고려인들의 절박하고 간절했던 염원과 마음
몽고의 침략을 불심으로 맞서기 위해 제작된 판전은 16년간 연인원 50만 명이 동원되어 만든 것이니 불법승(佛法僧)중 부처님의 법(法)을 보관한 해인사에 한번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부인사 대웅전에 들러 3배 하고 나와
예전 동화사를 말사로 거느릴 만큼 컸다는 부인사는 사찰이 얼마나 컸던지 볶은 콩 한 되를 먹으며 돌아도 다 못 돌았을 정도였으며
스님이 들판에서 법문을 할 때면 그야말로 야단법석(野壇法席)이라 하였다
팔공산 자락에는 가을이라 벌써 패딩옷을 입으시고 잔디밭에 물을...
그렇게 극성이던 모기 날개도 부러지고 주댕이는 구부러져 모기가 없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도 모기가 없었던 것 같았는데 이유 아닌 이유가 추워서 그런 것 같다.
이제 발걸음은 파계봉 아래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파계사로 향한다.
팔공산 서쪽 자락의 파계봉에서 흘러온 9골의 물줄기 파계(把溪) 물결을 한 곳으로 모았다는 뜻에서 유래한 절이다.
파계사 진동루
9개의 흩어져 있는 물줄기를 한 곳으로 모은다는 뜻을 가졌으며
진동루는 9 물줄기를 진압하는데 파계사라는 이름으로도 부족해서 지었다고 한다.
백중날이라 많은 불자님들께서 찾아 주셔서 열혈 신도분들의 바쁘게 움직이는 몸짓에 잠시만 이곳에 머물게 한다
원통전
통일신라시대 애장왕 때 심지 왕사가 창건하였고, 영조 출생 설화가 전해지는 사찰로써 숙종의 부탁을 받은 현응 조사께서
농산 스님과 함께 백일기도를 드렸고 기도가 끝날 무렵 숙빈 최 씨에게 현몽하여 태어난 아들(꽃도령 영인군)이 후일 영조였다는 것이다.
숙종은 이에 보답하고자 파계사 인근의 땅 40리의 조세를 받아 쓰라고 하였으나 현응 스님은 이를 거절하고 선대의 위패를 모시기를 청하였고 조선왕실의 원찰이 되었다고 전한다.
산신각에 들러 저위 팔공산 능선으로 지나는 이의 안전산행을 위해 합장하고 나온다.
기영각
조선 왕실의 위패를 모시던 전각이다.
숙종 때 인근땅 40리의 조세를 받는 것보다 유자(儒子)들의 불교 탄압과 횡포로부터 안전을 확보하고자 왕실의 위패를 모신 것으로 보인다
이제 마지막 천년고찰 송림사를 두고 있고 산문을 내려가며
점심때가 다되어가니 날파리떼의 극성에 차마 살생은 못 하고 아미타불만 읊조리며
어제 종일 들고 다니던 부채는 어디에 두고 왔는지 기억에도 없고
날파리 직이느냐 그냥 두느냐...
송림사 절 앞인데 미나리 수확 중인 아주머니도 만나고
집에 가서 밥에 고추장 넣고 비벼 먹으면 좋을 것 같아 한 움큼 사 오고 싶었지만 집에 도착할 무렵이면 시들어 먹지 못할 것 같아 눈으로만 맛을 본다.
팔공산 송림사 일주문
이곳 송림사는 동화사 말사의 절이며 신라 진흥왕 때 진나라 사신이 불서(佛書) 2천700권과 불사리를 가져와 세운 절이다
돌담장과 맞배지붕의 일주문을 들어서면 기존이 사찰과 다른 풍경의 절을 만날 수 있으며 참 아름다운 사찰이구나 하는 걸
느끼기에 충분하다
보물인 5층탑과 대웅전
절의 규모도 크지만 잔디가 곱게 깔려있어 무척 아름답고
오늘은 음력 칠월 백중날이라 많은 신도분들이 찾아오셨고
대웅전에 들러 부처님께 인사드리고 이틀간의 일정을 마무리한다
쌀구경 못해서 배는 고프고 일주문 근처에서 잠시 기다려 버스 타고 집으로 향한다
팔공산 천년 여행길에 만났던 고찰들은 한번쯤 찾아보면 좋을 것 같아 걸어 봤으며
이제 다음 여정은 팔공산 종주길과 내년에 국립공원이 될 금정산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첫댓글 팔공산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방장님 다니신 길을 몰라 카카오맵을 보면서 따라갔습니다.ㅠㅠ
제2석굴암에서 오도암, 카카오맵에 청운대는 안나오구요! 저 동쪽 끝에 은해사로 가셨다가 다시 동화사로 그리고 또 서쪽으로 진행하셔서 파계사로~ 지도보랴! 글보랴! 정신이 없습니다. ㅠㅠ
더운날 이열치열 하신 방장님!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설악산들어가기전 팔공산골짜기는 다 파보았습니다
국립공원이 되니 즐겁기도합니다
일주일에3번은 팔공산 구석구석 다 돌아본게 지금 부듯한것 같습니다 ㅋ
ㅎㅎㅎ제가 다닌 길 정신없죠
나름 정신 차리고 걸었는데 ...
팔공산 북-동-남-서로 진행하며 천년 고찰을 두루 다녀봤는데 중복된 길은 가지 않고 이어보았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지맥 아! 팔공산도 파보셨군요!ㅎㅎ 주 3회면.... 미주선배님의 넓은마음을 알것 같습니다.ㅎㅎ
10월에 종주하면 좋으련만..... 와이프가 어디 해외학회라도 가면 참석이 가능한데......ㅠㅠ
암튼 대단하십니다.ㅎㅎ
오도암 입구들어서면 왼쪽
1000년동안 아직도 항아리 물이 흐르는데
철분맛이 강합니다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모든산은 원효대사님 흔적을 연관시키는게 너무전설로 역은것이
원효굴은 후세 자연지물을
인간이 붙인것이지
실제 수련할려고 올라가다가는 추락사 하기 ㅎ 암벽으로도 올라가기 거의 불가능입니다
오랜많에 본 오도암암자
싸리문은 아직도 있을듯
수고하셨습니다
2009년도 신축하기전 오도암모습입니다
우리나라 불교에서 보는 동시대에 사셨던 원효,의상이 라는 이름의 상품성은 아마도 유명 상표인 에르메스급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누가 창건했고 수도를 했느냐에 따라 불자들이 많이 찾고,찾지 않으니까
실제 절벽에 뚫린 비좁은 원효굴에 수도한다는 자체가 어불 성설이죠
오래된 사진 한장 을 보며 그래도 오도암은 명당터로 보입니다.
글 감사합니다.
정독하였습니다.
절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며 산길을 길게 걷는 기분이 듭니다.
팔공산 빼어난 풍광위에 사찰들이 많군요.
'팔공산 천년 사찰길'은 방장님께서 명명하신 건가요?
찾아보니 '조계산 천년불심길', '북한산 12사찰길', '지리산 7암자순례길', '통도사 암자순례길' 등 사찰 연계 길이 많은데
'천년사찰길'은 없네요.
다녀오신 길을 잘 정리하고 다듬어서 "팔공산 천년사찰길"로 내놓아도 멋질것 같아요.
(국공에 또는 대구시에 제안해볼까요?)
단지 아쉬운 것은 방장님 걸어가신 길을 지도에 표시하거나 도표로 정리해주시면 다음 따라 가시는 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물론 길안내를 위한 글을 쓰신건 아니지만 방장님께서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쫓아가려면 최소한의 길안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래 그림처럼요....
'팔공천사(천년사찰) 순례길'~
후기 읽어가며
제가 팔공산쪽을 잘 모르니 지도 같이 찾아보며...
지도 올리신 것도 나중에 보니
이렇게 가신 걸음
참 멀리멀리도 걸음하셨구나...
허리 갈비뼈도 금가서 안좋으신 몸 상태로
방장님도 참 대단하십니다.
부처님이 어머니의 자궁같던
자연 석굴 안에서 깊은 잠을 깨어
팔공산의 절을 둘러보듯
방장님의 걸음을 함께해 봤습니다.
후기 보며 가신 걸음마다 한번 가서 직접 만나보고 싶다~
그런 마음이 꿈틀꿈틀~
팔공산의 물줄기와 사찰을 모두 돌아보시느라
욕 많이 보셨구요.
일단 방장님이 적극 추천한
3곳은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저장도 해 봅니다.
좋은 자료 남겨주심 감사합니다.
법고 소리, 목어 소리도 얼마나 좋았을까...
^^
천하무적 상남자가 날파리한마리 살생도 제데로못하는 새가슴~(그뜻은 알지만)
덕분에 며느리꽃 한번더 펼쳐보았고요~
팔공산종주와 환종주도 해봤지만...
중암암은 생소한듯 합니다.
아픈가슴 언능쾌차 하시고요~
(노숙은 누가말릴수 없으니까요 ㅎ)
방장님! 부상 소식에 안부 못드려
맘에 걸렸었는 데, 차도는 좀 어떠신지요!
조심, 쉬엄 하셔요~.
각기 다른 산행때 지나쳐 온 곳들이지만,
방장님의 걸음으로 시선으로 소개해 주시는
순례길에 이어 쭈욱 걸어 보고 싶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흐르는 날씨에
간간이 불어 주었을지 모를 바람에
청아한 풍경 소리 상상해 보며
팔공산 종주길과 금정산 여정도 조심하셔요
무더위에 팔공산 천년 사찰길 행보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덕분에 주변 멋진 경관에 설명까지 잘둘러 보네요
팔공산 가야할 세군데 기억하겠습니다
J3 클럽 방장님 !
방장님의 산행기를 볼 때 마다...
인간의 능력은 과연 어디까지인가 ?
반문해 보곤합니다.
지칠줄 모르는 극기의 산행과정에 더해...
수려한 글로서 남긴 산행후기를 저 같은 초보 산꾼도 흥미롭게 접할 수 있음에 늘 고마움을 느낍니다.
조선팔도를 두발로 걸은 후...
그 결과로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 김정호님을 닮아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방장님의 산행후기...
시간날 때 마다 틈틈히 보고 있는 초보 산꾼이 느낌 감정을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