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지 못한 반지 / 박용수〈
세월이 흘렀다. 역사驛舍도 광장에 앉았던 의자도 낡았지만 예전 그대로다. 잔잔한 그리움이 일렁인다. 주말마다 사랑탑을 쌓으며 배웅하던 청춘이 어제 같은데, 그 풋풋하던 까까중 남학생이 세월에 밀려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으로 서 있다. 승객 없는 대합실, 기념관이 된 개표구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본다. 순수했던 지난 시간이 그리움 되어 주마등처럼 내 기억의 뜰에 물안개로 피어오른다.
기적이 울렸다. 객차를 줄줄이 단 거대한 비둘기호가 머리를 앞세우고 지축을 흔들며 천천히 홈으로 들어온다. 대기실 안내 방송에 여기저기 흩어져 기다리던 길 떠날 사람들이 개표구를 향한다. 줄 선 끝부분에 조금은 상기된 얼굴, 수줍은 듯 손바닥으로 살근살짝 인사하고 개표구로 들어가는 단발머리 여학생을 멀찍이 선 까까중 남학생이 남의 눈에 띌까 봐 조심스럽게 눈으로 배웅한다.
여고생이 있었다. 걸음마다 단발머리가 찰랑거렸고, 갸름한 얼굴에 쌍꺼풀진 눈은 맑고 순한 사슴을 닮았다. 검은색 치마 교복에 우윳빛 목선을 따라 둘러싼 흰 옷깃이 더없이 청순했다. 예쁘게 접어 올린 흰 양말목은 검정 운동화와 잘 어울렸고, 오른손엔 감색 가방을, 왼 손목엔 콩알만 한 손목시계를 찬 손이 희고 고왔다. 역 광장으로 사뿐사뿐 들어서는 여학생을 먼저 와 벤치에 앉아 기다리던 남학생이 일어서서 맞이하였다.
남녀가 유별하던 시절, 우리는 다니는 학교도 달랐다. 지나다니며 힐끗힐끗 쳐다보는 어른들을 의식하며 ‘이마에 쇠똥도 마르지 않은 놈이 연애질한다.’고 할까 봐 거리를 두고 앉았다. 다소곳이 숙인 머리, 손에 쥔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는 K와 지난 한 주간의 학교생활과 친구 이야기를 하며 기차 시간을 기다렸다. 언뜻언뜻 스치는 미소와 주고받는 눈길에 마음 설레었다.
우리는 주말마다 고향집에 다녀오는 지방 학생이었다. K는 기차를, 나는 버스를 이용했다. 그러다 기차 출발 시간이 되면 먼저 떠나는 K를 배웅했다. 해거름, 늦은 버스를 타고 나도 집으로 갔다. 서편 산등성이 석양에 벌겋게 물들고, 산비탈 옹기종기 엎드린 마을에는 저녁밥 짓는 연기가 초가지붕 모퉁이 굴뚝마다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반변천半邊川을 따라 달리는 차창 너머, 저녁 강에 반사되는 은빛 물비늘과 저녁노을에 눈 맞추며 집으로 가는 내내 내 얼굴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주말마다 K를 만나는 기대와 설렘으로 마음은 언제나 흰구름 위를 떠다녔다. 무슨 생각을 하며 한 주간을 보냈는지? 공부는 어떤 과목을 좋아하는지? 연예인은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 노래를 즐겨 부르는지? 좋아하는 음식은, 영화는, 친구는…. K의 모든 것이 궁금했고 지켜주고 싶었고, 내 온 마음과 생각이 K를 향했다. 우리는 주말마다 만나서 서로를 바라보며 마음을 키우고 보내기를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K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보고 싶지만, 당분간 만나지 말자. 내년에 대학 들어가서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했다. 결연함이 보였다. 거부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전해왔다. “그래! 알았다…. 너, 약속 꼭 지켜야 한다.” 그렇게 헤어졌다. 서로의 눈에 왠지 모를 슬픔의 안개가 뿌옇게 묻어와 얼른 몸을 돌렸다.
시간이 흘렀다. 대학생이 되어 만나자고 약속한 날이다. 토요일마다 앉았던 그 벤치에 보고 싶던 그녀가 앉아 있다. 오랜 시간 기다렸나 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가라앉고 지친 모습이다. 멀리 소화물을 내리는 창고 뒤의 나는 그리움을 담은 서럽고 슬픈 얼굴로 진즉부터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약속을 지키려 노력했었다. 시간 날 때마다 형들에게 얻은 탄피로 반지를 만들어 끼워주려고 닦고 광을 내며 그리움을 달랬었다. 재회의 기대로 행복했었다. 그러나 대학 관문을 지키는 신은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대학이 무엇인지! 합격하지 못한 나는 만날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스스로 자신을 옭아맸다. ‘나가 볼까. 아니야.’를 수없이 반복하다 포기했다. 알량한 자존심이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축 처진 어깨에 달린 거추장스러운 양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푹 질렀다. 전해주지 못할 탄피 반지를 주머니에서 꺼내지 못하고 만지작거렸다. 영역 다툼에서 패한 길고양이처럼 고개 숙인 채, 그렇게 그리워하던 여학생을 뒤로하고 쓸쓸히 자리를 떴다. 훗날 후회와 아픔이 얼마나 크고 아린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우리는 누군가 또는 자신과 약속하며 그 약속을 지키려고 애쓰며 살아간다. 지켜지지 못한 약속일지라도 그 약속을 위해 바친 열정과 노력은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약속의 진정한 의미와 결과는 지켜지는 데 있다지만, 지켜지지 못한 약속도 내 삶의 한 부분이고 아픈 흔적이다.
중년이 서 있다. 어제 같았던 청춘의 한때, 전하지 못한 반지와 토요일마다 만나던 역사와 광장의 의자도 그 자리에 있는데, 기억은 지나온 시간만큼 녹슬고 퇴색되어 그리운 얼굴과 함께 희미해져 간다. 싱그러운 젊은 시절 순수했던 까까중 남학생의 풋풋한 사랑과 지켜지지 못한 약속이 잔잔한 그리움으로 일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