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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 빌립보서 3:1b-16 □
최원준 (장로회신학대학교 박사과정・신약학)
I. 개 관 - 빌립보서의 배경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이 목회자나 신학생이시기 때문에 이미 빌립보서에 대해 잘 알고 계시겠지만 오늘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빌립보서에 대해 간략하게 개관해 보겠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바울 서신을 읽으실 때마다 그 본문의 배후에 있는 여러 상황을 염두해 두시거나 혹은 다시 한 번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빌립보서는 바울이 옥에 갇혀있는 동안에 빌립보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행16장에 따르면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때 세운 교회입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경의 첫 성으로서, 바울의 빌립보 선교는 유럽 대륙의 시작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루디아라는 여인을 전도하게 되었고, 이 루디아를 중심으로 빌립보 교회가 개척된 것입니다. 유럽 교회의 첫 교회라고 할 수 있는 빌립보 교회가 여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 역시 눈여겨 볼 만합니다. 실제로 빌립보 교회는 여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에 등장하는 유오디아Εὐοδία, 순두게 Συντύχη 가 여성이며(헬라어에서 - α나 - η로 끝나면 여성명사입니다), 또 여러 여인들이 “복음에 나(바울)와 함께 힘썼”(빌4:3)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에서 오래 머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행16:39). 점치는 여종을 이용하여 이윤을 착복하던 여종의 주인들이 박해가 심했기 때문입니다(cf. 바울은 살전2:2에서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다”고 말합니다). 한편 고전16:5; 고후2:13; 7:5; 행20:6을 미루어 보건대 바울은 그 후에 몇 차례 빌립보를 방문했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빌립보서를 쓸 때 바울의 상황입니다. 당시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빌1:12-14; 4:10-18). 그는 자기가 풀려 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1:19 - 여기서 구원이란 석방을 의미함). 그러나 그는 언제 순교할지라도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2:17; 1:20-23).
셋째, 빌립보 교회와 바울의 관계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속을 많이 썩혔던 반면에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매우 우호적이고 순종적이었습니다. 먼저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2:12)로 언급하고,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4:1)로 부르고 있으며, 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1:8)라고 말하는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을 재정적으로 후원하였습니다(빌4:15-16. 15절에서 “주고 받는”의 의미는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빌립보 교인들은 재정적 후원을 하였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또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 형제들을 위한 구제 헌금에 적극적이었습니다(고후8:1-2; 9:1-5).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들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쓸 것”(영치금)을 보냈습니다(4:18). 바울이 빌립보 교회 외에 다른 교회들로부터는 “복음을 인하여” 돈을 받지 않았다(고전9:18; cf. 살전2:9)는 사실을 고려할 때 바울과 빌립보 교회간의 신뢰와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유럽 선교의 처음 열매이므로, 그들의 첫 사랑은 순수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넷째,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당시 빌립보 교회의 상황입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는 빌립보서 본문을 통해 추측할 수 밖에 없는데, 아마도 다음 3가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1) 분열의 문제(4:2-3; 2:1-4).
4:2와 2:1-4를 근거로 하여 볼 때 당시 빌립보 교회는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여인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들의 반목으로 교회가 분열되는 위기에 처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마음을 같이 하라고 권면하였고(2:2; 4:2), 분열의 원인으로 다툼과 허영을 지적하면서(2:3),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세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세”를 보인 대표적 예로 그리스도를 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2:6-11의 그리스도 찬가 Carmen Christi 입니다.
(2) 외부의 박해
바울은 1:27-30에서 교회의 단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심으로,” “한뜻으로”라는 표현은 단합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단합은 위에서 언급한 교회 자체의 분열보다 외부의 적들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즉 신앙을 위협하는 외부 대적자들의 박해에 대항하여 단결하여 싸우라는 권고입니다. 27절의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라” συναθλούντες 는 말은 ‘함께 싸우다’라는 뜻입니다.
(3) 거짓 교사(3:2-4:1)
바울이 개척하는 교회에는 언제나 그를 비방하고 교인들을 잘못된 가르침으로 미혹케 하는 적대자들이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도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이 앞서 말한 외부의 박해자들과 동일인물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두 본문을 통해 이들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3:2에서 바울은 그들을 “개들”(3:2); “행악하는 자들”(3:2); “손할례당”(3:2)로 부릅니다. 이들의 구체적인 정체에 대해서는 아래 주석을 참조하십시오.
다음으로 3:18-19에서 바울은 적대자들을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3:18)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십자가 신학을 거부했던 것 같습니다. 즉 죽음, 고난을 거부하고 예수의 부활과 영광만 강조한 것 같습니다. 또 그들의 신은 배다(19절)이라는 표현은 이들은 쾌락주의를 추구한 것 같습니다(고전6:13). 셋째, 또 이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골3:2(“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을 연상케 하는데, 골3:5에 따르면 땅에 있는 지체는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등 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헬라의 영지주의 사상에 물들어 육체를 아무렇게 생각하고 방종한 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상의 3가지 상황이 동시적으로 발생했는지 아니면 어느 정도 시간적 차이를 두고 발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바울은 이상의 상황에 대해 자신의 목회적, 신학적 견해를 서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보서를 가만히 읽어보면 위 빌립보서의 상황과 바울의 수감 상황이 서로 엇갈려 나오면서 갑작스런 분위기 전환이 이루어 지고 있는 곳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오늘 본문입니다. 3:1a와 3:1b-3의 분위기는 확연하게 차이가 납니다. 실제로 3:1a의 “종말로”라는 말은 서신을 끝낼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편지 내용을 계속되고 있습니다(이러한 차이를 인식하여 표준새번역은 2:19-3:1a까지 한 개의 단락으로 끊고 3:1b부터 “하나님의 의”라는 제목하에 11절까지를 별개의 단락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서 4:8-9의 경우를 들 수 있는데, 이 두 구절 역시 “종말로”라는 편지 종결어구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4:10이하를 계속해서 쓰고 있고, 21절에 가서야 편지를 끝맺는 문안 인사를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많은 학자들은 빌립보서가 두 개 혹은 세 개의 서신 단편이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슈미탈스 Schmithals, 퀘스터 Koester, 그닐카 Gnilka, 한국 학자로서는 서울신학대학교의 김연태 교수. 이 문제에 관해서는 김연태 교수의 『성서주석:빌립보서 -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주석 시리즈 42번』(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4), pp.40-46을 참조하십시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바울의 문체상의 특징, 즉 급격한 주제나 분위기의 전환을 그 이유로 제시합니다.
필자는 두 주장 모두 타당성이 있으나 후자의 견해를 지지합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정경으로서 가지고 있는 빌립보서가 내용적, 문학적 차이점을 그대로 안은채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석의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아래서 본문에 대한 석의 역시 이와 같은 입장에 따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II. 본문의 단락 구분, 구조, 줄거리
1. 3:1b-16으로 단락을 구분한 이유
먼저 왜 본문을 3:1b-16으로 잡았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3:1절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그 분위기와 내용상 구분된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습니다. 즉 3:1b부터 빌립보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고와 이들의 주장이 헛되다는 것을 바울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17-21은 16절이전의 내용과 구분됨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3:14에서 끊기도 하는데,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단락 구분입니다. 왜냐하면 15-16절은 실제로 12-14절과 긴밀히 연결되어있으며, 12-14절을 근거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궁극적 완성은 미래에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본문의 구조
본문이 당시 빌립보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을 비판하는 내용임은 앞의 개관에서 살펴본바 있습니다. 이제 본문의 줄거리와 그 내용을 세분하여 구조를 파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용 분해는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읽고 그 구조를 확실하게 파악한다는 점에서 좋은 훈련입니다. 아래의 내용 분해는 필자 나름대로 해 본 것이며, 독자마다 그 견해가 다를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가능하다면 필자의 내용 분해를 보기 전에 먼저 스스로 내용 분해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1) 1b-3 거짓교사에 대한 경고와 참 할례당의 의미
1b -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고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음
2 - 거짓 교사들을 삼가라
3 - 참 할례당의 의미
(2) 4-11 바울의 가치전환 : 참된 의의 발견
4 - 육체를 신뢰하는 데 있어서 바울은 결코 뒤지지 않음
5~6 - 바울의 자랑할만한 육체적 측면들
7 - 바울의 가치 전환과 그 계기 : 그리스도 때문 (과거의 다메섹 체험)
8a - 바울의 가치 전환과 그 이유 :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현재적 관점)
8b - 바울의 가치 전환과 그 목적(1) :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
9a - 바울의 가치 전환과 그 목적(2) :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
9b - 바울이 가지게 된 새로운 의
10~11 - 바울의 가치전환과 그 목적(3) :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고자 소망함
(3) 12-16 궁극적 완성은 미래에 있음
12~14 - 바울이 소망하는 목표는 아직 진행중인 것이며
이미 획득된 것이 아님
15~16 - 완전한 자는 궁극적 완성을 위해 달려가야 함을 권면
3. 본문의 줄거리
먼저 1b-16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겠는데, 첫번째 부분은 거짓교사에 대한 경고와 참할례당의 의미가 무엇인지 3가지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4-11절은 바울의 가치전환과 참된 의의 발견을 자서전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4-14절까지 계속해서 ‘나’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육체를 신뢰하는 데 있어서 결코 남에게 뒤질 것이 없었던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코페르니쿠스적 가치 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주님을 만나기전까지 ‘모든 것’으로 여겨졌던 것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고,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해’가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이전에 자기가 박해했던 주님은 그 분을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길 만큼 바울에게 있어서 유일한 지고의 가치가 되었습니다. 또 그는 주님을 만남으로 참된 의가 무엇인지 깨달았는데, 그것은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입니다.
또 바울은 자신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려고 결단한 목적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얻는 것, (최후의 심판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 그리고 그의 부활의 권능과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12-16절이 4-11절과 구분되는 이유는 그 주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4-11절의 경우 그리스도 예수가 지고의 가치라는 것과 참된 의를 깨달았음이 주제라면 12-16절은 그의 궁극적 목표는 아직 진행중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당시 빌립보 교회안에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현세의 삶에서 완전해 질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이 2절에서 바울이 욕하는 적대자들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는 않지만 바울은 비록 자신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180도 가치의 전환을 이루게 되었고,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9절)를 가지게 되었으나 궁극적인 완성, 곧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14절) 달려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제 아래서는 이상의 내용 분해에 기초하여 각 절을 주석하도록 하겠습니다.
III. 본문 석의
※ 본문 사역(私譯)은 하지 않고, 개역 성경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필요한 경우 각 절에 대한 주석에서 언급하겠습니다.
▣ 1b - 3 : 거짓교사에 대한 경고와 참 할례당의 의미
< 1b절 >
여기서 “같은 말”(정확한 번역은 “같은 것”)이란 1b이하에 기록된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고를 말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 전에 거짓교사에 대한 경고를 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이전에 그와 경고로 볼 수 있는 것은 1:28 뿐인데, 1:28에서 말하는 “대적하는 자”와 3:2에서 열거된 거짓 교사들이 동일하다면 1b의 “같은 말”이란 1:28의 경고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1:28과 3:2의 인물이 서로 다르다면 지금은 상실된 어떤 편지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에게 거짓 교사를 경계하라는 글을 썼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라는 말은 거짓 교사에 대해 재차 경고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그렇게 해야 빌립보 교인들이 참 복음안에 바로 서도록 하는데 안전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목회자로서 양들을 아끼고 염려하는 바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또 이단을 경고하고 양들이 미혹되지 않도록 목회자가 주의를 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 2절 >
2절에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을 세 가지 호칭으로 “욕”하면서 이들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헬라어 원문에 따르면 “명령형 동사+정관사+목적어” 형식으로 세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 “조심하라 그 개들을, 조심하라 그 행악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자기 육체를 잘라내는 자들을.” 또 “조심하라”(⌈브레페테⌋ βλέπετε)라는 단일한 동사가 사용되고 있고, 아래에서 보이듯이 개, 행악하는 자들, 손할례당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κ-로 시작하는 단어들입니다. 짧은 명령문 세 개를 운율에 맞추어 연속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정관사가 붙어있다는 것은 지금 바울이 말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빌립보 교인들이 이미 알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수사학적 기법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청중히 확실하게 인식하게 하는데 효과적입니다. 이제 아래서 적대자들에 대한 호칭 세 개를 상술하겠습니다.
① “개”(⌈퀴나스⌋ κύνας)는 우리말에서도 그러하듯이 상대방에 대한 심한 욕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경멸적으로 부를 때 “개”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만 가지고 거짓 교사들의 구체적인 모습은 확인하기가 어려습니다. 다만 바울이 이런 심한 욕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바울이 매우 흥분해 있고, 거짓 교사들에 대한 적대감이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② “행악하는 자들” (⌈카쿠스 에르카타스⌋ κακοὺς ἐργάτας) 에서 ⌈에르가타스⌋ ἐργάτας 는 일꾼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그들의 사역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고후11:13에서 바울은 그의 적대자들은 “궤휼의 일꾼” deceitful workmen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③ “손할례당(⌈카타토멘⌋ κατατομήν)”이란 할례(⌈페리토메⌋ περι- τομή)를 비꼬아 하는 말입니다. “카타토메”는 “잘라내는 것”을 뜻하는데, 개역 성경의 번역 “손할례당”에서 손은 ‘잃다’라는 뜻의 ‘손’(損)입니다. 아마도 할례라는 것이 육체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번역한 것 같습니다. 한편 NIV는 mutilators of the flesh로, RSV는 those who mutilate the flesh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말은 “육체를 자르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할례를 강조한 자들로서 유대교를 따르는 자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④ 3절에 따르면 그들은 육체를 신뢰하였습니다. 여기서 육체란 무엇일까요? 5절이하에 나타난 바울의 자기 변호에서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할례, 가문, 율법 등을 의미합니다.
이상을 종합해 본다면 바울이 지금 심한 욕설을 퍼붓고 있는 적대자들은 할례를 강조하고, 가문이나 율법 준수등을 신뢰하던 자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당시 유대교안에서 의롭게 여겨지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들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7-9절에서 이러한 모든 것은 해가 될 뿐이며, 그것을 통해 얻게 되는 의는 참된 의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 3절 >
3절은 참 할례받은 자의 의미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자입니다. 여기서 “봉사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라트류에인⌋ λατρεύειν 은 70인역에서 예배하다의 뜻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실제로 RSV나 NIV 등 영어성경은 worship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참 할례받은 자는 외면적인 종교 의식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요4:23-24)으로 예배드리는 자입니다. 둘째, 참 할례받은 자는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자입니다. 할례나 율법, 가문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여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만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자랑하는 자입니다. 셋째,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입니다. 이것은 앞의 두 내용을 부정적인 표현으로 총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4 - 11 : 바울의 가치전환 : 참된 의의 발견
< 4절 >
앞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거짓 교사들의 특징으로서 “육체를 신뢰함”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고 교만한 것인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하려고 합니다. 4절의 어법은 상대방보다 자신이 훨씬 낫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당시 수사학의 한 방법입니다.
<5~6절>
바울은 여기서 자기가 육체를 신뢰하는 데 있어서 남들보다 낫다는 점을 몇 가지 측면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①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자신은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의식을 치루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할례 의식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는 외적인 징표였습니다. ② “이스라엘의 족속”이라는 것은 자신이 죄인 이방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민족적 우월성을 뜻합니다. ③ 바울이 “베냐민 지파”라는 것은 자신이 훌륭한 가문의 후예라는 말입니다.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베냐민만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태어났습니다(창35:9-19). 또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을 배출한 지파입니다(삼상9:1,2). 예루살렘성과 성전은 베냐민 지파에게 할당된 땅안에 있었습니다(삿1:21). 남북왕조 갈라질 때 베냐민 지파는 다윗 가문에 계속 충성했습니다(왕상12:21). 모르드개는 베냐민 지파였습니다(에2:5).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헬레니즘이 팔레스틴을 휩쓸 때 베냐민 지파는 이에 저항하고 순수함을 보존했다고 합니다. 이상과 같은 점에서 자신의 가문으로 베냐민 지파임을 내세우는 것은 큰 자랑이었을 것입니다. ④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라는 자랑은 자신의 부모가 순수한 히브리인이라는 뜻입니다. 또 그는 히브리어를 말할 수 있고, 히브리식 교육과 문화를 배우고 지킨 “신토불이 히브리인”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그레코-로만 세계에서 혼합주의적 헬레니즘 문화에 맞서 민족적 순수성을 지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⑤ 바울은 “율법으로 바리새인”이었다고 자랑합니다. 바리새인은 모세의 율법과 구전 율법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것들을 철저히 준수하던 사람이었습니다. ⑥ 바울은 구약의 비느하스와 신구약 중간기의 마카비 형제의 전통을 이어받아 유대교의 교리와 전통에서 벗어난 신흥 종교 기독교 교회를 핍박하는데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⑦ 그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로 자랑합니다. 즉 자신은 율법의 요구사항을 다 지켰다는 말인데, 눅18:21에 따르면 한 관원 역시 십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 7절 >
5~6절에서 열거된 바울의 자랑은 유대교 안에서는 그에게 큰 유익이 되었습니다. 유대교가 말하는 의로운 사람,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유익”(⌈케르도스⌋ κέρδος)이란 단어와 “해”(⌈제미아⌋ ζημία)는 경제 용어입니다. 기업에서 흔히 쓰는 대차 대조표의 자산과 부채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단어들을 사용한 것은 그의 실존적 체험을 보다 실감있게 묘사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바울이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을 해로 여기게 된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때문”입니다. 개역성경은 “그리스도를 위하여”라고 번역되었는데, 원문 ⌈디아 톤 크리스톤⌋ διὰ τὸν Χριστόν 은 원칙적으로 “… 때문에”와 “… 위하여” 모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을 가만히 읽어보면 바울의 가치 전환은 결국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 때문에”가 적합한 번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이것만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재고케 하고 새로운 가치, 곧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보여주신 영원한 생명과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는 유일하고도 근원적인 요인입니다.
또 주목해야 할 점은 “여긴다”(⌈헤게마이⌋ ἥγημαι)라는 동사에서 그의 의지적 결단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만나 그가 변화하였으나 바울의 혁명적 가치전환에는 바울의 의지적 결단이 함께 수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과거에 그에게 유익했던 것의 일부가 아니라 “무엇이든지” 다 해로 여겼다는 언급은 그의 가치 전환의 근본적 성격을 말해줍니다.
< 8절 >
8a에서 바울은 다시 한 번은 이전의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긴다”라는 동사가 7절의 “여긴다”와 똑같은 동사이기는 하지만 그 시제가 현재 시제(⌈헤구마이⌋ ἡγούμαι)라는 점이 다릅니다. 다메섹 체험을 통해 이전의 모든 것을 해로 여길 것을 결단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날마다 지속적이고도 의식적이며 의지적인 결단을 통해 그는 모든 것을 다 해로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는 모두가 다 한 번의 결정적인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만남으로 인한 새로운 변화가 지속되려면 계속적인 의지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7절에서 바울이 이전에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긴 이유가 다메섹에서의 예수님과의 만남이라면 8절에서 모든 것을 해로 여기게 된 이유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입니다. 이 표현의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의 지식의 가장 뛰어남 때문에”가 됩니다. 각 단어가 속격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특히 “그리스도 예수의 지식”의 의미가 그러합니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 예수가 바울을 앎”이라고 주격적 속격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문맥상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를 앎”이라고 목적격적 속격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봅니다. 여기서 “지식, 앎”이란 지적인 측면이 아닐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에 서로 아는 것이 경험적이고 실존적이 차원이듯이 바울과 예수님의 앎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은혜로 다가오시는 예수님, 이에 대해 회개와 순종과 충성과 섬김으로 응답하는 바울, 이 둘 간의 친밀하고도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를 뜻합니다. 바울이 9절에서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는데서도 이러한 지식의 뜻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같은 그리스도 예수를 앎이 가장 고상하다고, 가장 뛰어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른 것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낫다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없으면 모든 것이 있어도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에서 가장 뛰어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만 있고 다른 것은 전혀 없어도 무관하다는 점에서 가장 고상한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를 위하여,” 즉 그리스도 예수의 지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처럼 여기겠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도 ‘여기다’는 그 시제가 현재 시제(⌈헤구마이⌋ ἡγούμαι)로서 그의 의지적 결단의 항구성을 보여줍니다. 마치 음악의 ‘크레센도’ cre-scendo 표시처럼 7절부터 시작된 이 단어는 8절 앞부분을 거쳐 지금 8절 후반부에와서 그 절정을 이루는 듯합니다. 또한 바울이 8절 앞부분에서 사용된 “해”(제미아:ζημία)라는 명사를 “잃어버리고”(⌈에제미오쎈⌋ ἐζημιώθην)라는 동사로 반복하여 말하고 있는 것, 그리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배설물”이라는 세속어까지 동원하고 있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철저히 자신의 과거와 단절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며,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이 얼마나 고상한지를 말해줍니다.
바울은 8절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이 왜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는지 그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헬라어 원문 자체가 목적절을 뜻하는 ⌈히나⌋ ἵνα 절입니다). 그 목적이란 “그리스도를 얻는 것”입니다. 여기서 “얻다”라는 동사의 헬라어 ⌈케르다이네인⌋ κερδαίνειν 은 7절에서 나온 “유익”(⌈케르도스⌋ κέρδος)의 동사형입니다. 바울이 이 단어를 쓴 것은 일종의 “언어 유희” wordplay 입니다. 즉 바울은 과거 자신이 유익했던 모든 것을 해로, 배설물로 여긴다고 선언하면서, 그 목적은 참된 유익이 되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얻는 것, 그리스도가 나에게 참된 유익이 되는 것은 과거에 자신에게 유익했던 것으로 착각했던 그 모든 것과 철저히 대립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9절 >
“그 안에서 발견됨”은 바울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취급한 두 번째 목적이 됩니다. 여기서 “그”란 그리스도를 말하며, “그 안에서 발견된다”는 말은 심판날까지 그리스도 안에 굳건히 서있는다는 뜻입니다(cf.고후5:3)
바울이 9절에서 자신이 가진 의를 설명하고 있는 것도 “그 안에서 발견됨”과 관련지어 생각해야 합니다. 앞서 말한대로 “발견됨”은 최후의 심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심판이란 심판받는 자가 의로운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심판날에 심판주 하나님께 보일 자신의 의가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로 난 의”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의는 유대교에서 말하는 할례, 절기 및 율법을 지킴으로써 얻게 되는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의,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의요 믿음을 통해서 받게 된 의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10절 >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는 바울이 모든 것을 잃고 배설물로 여기는 세번째 목적에 해당됩니다(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구문이 속격 부정사 구문으로서 목적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개역 성경은 “안다”의 목적어로서 그리스도(헬라어 원문은 인칭대명사 ‘그’), 부활의 권능, 고난에 참예함 등 세 가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를 통해 그리스도를 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바울은 먼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영원토록 존재하시는 그리스도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또 롬6:4과 갈2:20의 말씀대로 죄속에 빠진 옛 자아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신 그 부활의 능력을 알고 싶어했습니다.
바울은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기를 바랬습니다. 개역성경이 “참예함”으로 번역하고 있는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교제, 참여, 공유”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전도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해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것과 순교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으며(특히 바울이 지금 수감된 상황을 고려한다면), 또한 앞의 “부활의 권능을 앎”이 내면적 의미로 해석되는 것처럼 “고난에 참예함”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이라는 실존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도 타당하겠습니다(롬6:8 참조).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에서 개역성경의 번역은 마치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고, 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고자 한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가 속격의 부정사 구문으로 되어 있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는 분사 구문으로 되어 있어서 그 관계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사역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
“(모든 것을 … 배설물로 여김은 …) 내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그의 고난의 참여를 통해 그를 알고자 함입니다. 나는 그의 죽음을 본받고자하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기를 소망합니다”
즉 바울은 ‘부활 - 죽음 - 죽음 - 부활’이라는 교차댓구법의 형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의 부활과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유일한 통로를 말하고 있다면, 뒤의 죽음과 부활은 바울의 미래 삶의 방향과 내용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2 - 16 : 궁극적 완성은 미래에 있음
12-16절은 앞에서 말한 바울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는 목적 3가지(그리스도를 얻는 것, 심판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 그의 부활과 죽음을 통해 그를 아는 것)가 일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 12절 >
12절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얻었다”의 목적어가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체 문맥을 참조하여 그 의미를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얻었다”의 목적어는 문맥상 8-11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를 얻음, 그의 부활의 권능 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얻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람바네인⌋ λαμβάνειν 은 “파악하다, 이해하다”의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또 12절, 13절의 “잡힌 바 되다,”“잡다” 역시 이런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나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혹은 “내가 완전해졌다는 것은 아니라”)라는 말은 비록 그가 다메섹 체험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주님이요 구세주임을 알았지만, 그것으로 예수님을 온전히 알아 영적인 완전함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메섹 체험으로 예수님을 더욱 강렬하게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그래서 그 이전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지만, 동시에 바울은 예수님을 온전히 아는 것을 미래로 남겨두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신학에서 이야기 하는 “이미”와 “아직 아니”간의 변증법적 긴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취지의 말을 고전13:12에서도 한 바 있습니다 :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한편 개역성경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라고 번역하여 “그리스도 예수가 잡힌 바 된 것”이 “잡다”의 목적어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번역하면 “나는 (사냥군이 표적물을 잡으려고 좇아가듯이) 잡으려고 좇아갑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 사로 잡힌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가 됩니다. 즉 “잡다”의 목적어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 목적어 역시 바로 앞의 “얻다”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과 십자가의 고난 안에서 그 분을 이해하고픈 열망으로 가득차 있고, 이것만이 그의 삶의 유일한 의미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을 다메섹에서 만나고, 또 그 분을 온전히 알려고 하기 전에 이미 바울 자신이 예수님에 의해 “사로 잡힌 바” 되었습니다. 혹은 예수님에 의해 “안 바” 되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다메섹 체험을 염두해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는 데 누구에게 뒤지지 않던 그를 사랑하셔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맡기신 그 은혜가 예수님을 더욱 알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를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예수님에 의해 안 바 된 자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 13절 >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삶의 방향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겠다고 합니다. “뒤에 있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그의 삶을 말할 것입니다. 교회의 박해자였다는 자신의 과거 전력때문에 더 이상 죄책감과 실의에 빠져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자신을 받아주신 주님께 감사함으로 그 과거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이것이 “잊는다”의 첫째 의미일 것입니다. 또 “잊는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심판을 뜻합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거기에 대해 교만한 마음을 갖도록 만드는 것, 인간으로 하여금 거기에 안주하고 안심하며 안전을 구하게 하는 것 등을 완전히 포기하고 오직 믿음과 소망만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하겠다는 뜻입니다(“잊는다”의 의미를 신학적, 철학적으로 깊이 분석한 글로서 불트만 저, 손규태 역, 『차안과 피안』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6, pp.63-72와 Paul Tillich, The Eternal Now, 26-35를 참조하십시오).
그러면 “앞에 있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전체의 맥락을 고려할 때 그리스도 예수를 완전히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여기서 “잡다”라는 동사는 “두 팔을 길게 뻗혀서 잡다”라는 뜻입니다. 마치 수영선수가 골인 지점을 향해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온 몸을 앞쪽으로 기울이고, 양팔을 앞쪽으로 최대한 뻗쳐 나가는 모습입니다.
< 14절 >
“푯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코포스⌋ σκόπος 의 정확한 의미는 “골인 지점을 표시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상황에 비유한다면 육상 경기에서 골인 지점에 있는 결승 테이프를 뜻합니다. 운동 선수가 그 테이프를 똑바로 쳐다보고 나가는 것처럼, 바울에게도 분명한 삶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또 골인 지점에 다가가면서 힘이 떨어지지만 결승 테이프를 보고 ‘이제 다 왔다. 힘내자!’라고 분발하는 것처럼 바울은 자신의 푯대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몸을 추스렸을 것입니다.
바울이 얻고자 했던 상을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고 말합니다.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자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위로부터의 부름의 상”입니다. “위로부터 부름” upward call 의 의미에 대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초청”,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하는 천국의 삶” 등의 견해가 제시되었습니다. 이 해석들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 정확한 의미는 당시 헬라시대의 올림픽 경기를 알아보면 파악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의 올림픽 경기에는 ⌈헬레노디카이⌋ Hellenodikai = agonothete 라고 불리우는 경기 주관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올림픽 경기를 구성하고 주관하는 자로서, 경기가 끝날 때마다 승자의 이름, 승자의 아버지의 이름, 그의 고향 등을 발표케 했습니다. 승리한 선수는 이 발표 소리를 듣고 시상대 앞으로 나아가 상을 받았던 것입니다. “위에서부터의 부름”이란 바로 이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지금 한평생을 예수님을 위해 일한 후 마지막 심판 날에 마치 올림픽 경기의 주관자 Agonothete 처럼 하나님께서 바울의 이름을 부르시며 앞으로 나와 상을 받으라고 하실 그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15-16>
12-14절을 통해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은 이 땅에 살면서 완전히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 날 그 날까지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임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빌립보 교회에는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았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향해 자신이 지금 12-14절에서 말한 바를 생각하고 계속해서 그러한 노력을 해나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IV. 결 론
오늘 본문은 바울이 어떻게, 어느 정도나 변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써 그 이전에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고, 자신이 가치있다고 여겼던 것이 사실은 해가 될 뿐임을 알았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음속에서 그를 더욱 아는 것이 되었습니다. 또 그가 맡긴 이방인의 사도 직분을 죽는 날까지 충실히 감당함으로써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친히 승리한 자신의 이름을 부를 그 날을 소망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신학적으로 소화한 이 사실을 지금 거짓 교사의 침입앞에서 흔들리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해줌으로써 그들 역시 그가 전해 준 참 복음안에 굳게 설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 참고 문헌
김연태.『성서주석 - 빌립보서』.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주석 시리즈 제42번.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Hawthorne, Gerald F. Word Biblical Commentary 43 : Philippians. Waco, Texas,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