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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들의 질문 : 이혼
마태복음 19장 1-12절 / 1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2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3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5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10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11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12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찌어다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셔서 병 고치는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
예수께서 갈릴리(의 가버나움)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셨습니다. 마가는 이때의 기록을“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막 10:1)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가버나움1)을 떠나 유대 지방 남쪽을 거쳐 요단 강 동편에 가신 것입니다.
이때는 마태가 기록하고 있는 바인‘이 말씀을 마치시고’에 있은 시점입니다. 예수께서 18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에 대헤서 말씀하시며 일곱 번의 일흔 번이라도 죄 용서함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자비에 대한 가르침을 주신 후에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뒤를 그 전과 다름없이 수많은 무리들이 모여 따랐습니다. 예수께 이처럼 큰 무리가 뒤따른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자 하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병을 고쳐주실 것을 바래서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늘 하시던 대로 이곳에서도 일일이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셨으며. 또한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할 목적으로 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바리새인들의 첫 번째 질문 : 그러한 예수님에게 바리새인 몇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은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또는 예수님에게서 병 고쳐주실 것을 바라서도 아닙니다. 그들은 다른 목적으로 예수님에게로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할 의도에서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대답하여 말씀하셨습니다.“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두 번째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 :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다시 물었습니다.“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습니까?”예수님은 다시 대답하여 말씀하셨습니다.“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간에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가는 이갸기를 곁에서 들은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생각을 예수께 말하였습니다.“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그러자 예수께서“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 것이다.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신들은 장가 드는 것보다 차라리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갖는 것에 대해 예수님은 가르침을 주시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이상에서 예수님은 두 번의 답변을 통해서 질문을 하는 바리새인들과 그들을 따름에 있는 유대인들의 악함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시는 것을 통해서는 이에 대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질문한 의도
본문의 내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할 의도로 모세의 율법을 들어 이혼에 대하여 질문을 한 것에 예수께서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본래의 뜻을 말씀해 주심으로 그들의 시험을 물리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구속주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하시게 될 시점에 이르러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 중에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신 것을 연상케 합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할 의도를 품고 질문한 것은 선한 목적에서가 아닌 악한 목적에서였습니다.“바리새인들이……그(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란 말은“바리새인들이 말로 올무를 걸어 그(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하는 뜻입니다. 이를 보면 그들은 자기들이 궁금해 하여서 알고자 하는 선한 의도에서가 아닌, 처음부터 예수님을 곤란케 하고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는 아주 악한 의도로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답변을 빌미로 걸고넘어져 고소할 죄목의 건을 찾고자 해서입니다. 그러한 그들은 3절과 7절에서 두 번에 걸쳐 (1)“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2)“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답변을 통해 가르쳐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본의
이처럼 예수님을 시험할 의도로 바리새인들이 찾아와 질문한 것은 이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습니까?”이 둘의 질문에서 보듯이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는 여느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이혼이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가름할 수 없으나“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에서‘연고’가 법적인 용어로 쓰일 때는 고소의 근가가 되는‘죄목’을 말하며,‘아무’는‘모든’을 뜻하여‘모든 죄목으로’를 의미하는 것인데,‘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아내와의 이혼’을 뜻하는 것에서이므로“무엇이든지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죄목의 이유가 되기만 하면 남편이 아내를 내버리는 것이 옳습니까?”를 묻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경우에서든지 이유가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으며 상관없는 것인지를 묻는 것에서 이혼이 유대에서 사회적 병폐의 현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이 악한 생각의 의도에서 되어지고 있는 것임을 간파하시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사람을 만드시며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그 둘을 한 몸이 되게 하신 것과 모세를 통하여 이혼법을 주신 것에서 하나님의 참된 뜻을 설명해 주십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본의를 따르지 않음에 있는 바리새인들의 악함을 드러내 부끄러움에 두십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답변에서 보는 하나님의 본의인 혼인의 원리 : 먼저, 첫 번째 답변에서 혼인의 원리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목적이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에서 보는 바, 유대인 사회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내버리는 일인 이혼이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이 이혼이 세상에서의 일반적인 상황에서 볼 때 결혼하기 전의 사람도 그렇고, 결혼을 한 사람도 그렇고 이혼을 염두에 두고서 가정의 불행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혼을 막으려 하며, 화목한 결혼 생활을 하고자 합니다. 언젠가 본 인터넷의 뉴스에서는 탤런트 OOO가 아내와 세 번 이혼하고 세 번 재결합한 사유가 소개되기도 했었는데, 그와 같이 이혼을 거듭하면서도 다시 거듭 재결합에 이른 것은 결국은 가정의 행복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주변 사람들도 애를 써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혼에까지 이르기도 하며 설사 이혼 상태에 이르지는 않아도 이것을 수시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이는 자기가 손해 등의 피해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 보호 본능에 의해서입니다. 경제적 이유로, 성격적 이유로, 신체적 이유로, 부정한 행위의 이유로 등등에 의해서 가정불화를 갖게 됨으로 해서 불행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음으로 자신이 여기에 더 이상 희생되지 않으려는 심리가 깔려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혼하는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이혼으로 겪는 아픔과 고통을 비이혼자가 헤아릴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만, 그러한 이혼을 결정하고 진행해 나가는 그들의 생각 저변에는 자기가 지켜야 할 것을 위함이란 속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혼 문제는 인류의 역사에서 혼인과 함께 등장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주전 15C에 기록된 모세오경에서도 이혼에 대한 규례가 다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이혼을 다루고 있는 것은 이것이 이스라엘 안에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광야에 있을 때 받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혼에 관하여 다루고 있는 것은 인간의 악한 죄성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서 그들이 가진 악한 생각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그들에게 혼인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사람 창조를 들어 말씀해 주십니다.“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처음 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는‘사람은 그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그들은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인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합하여 부부가 되는 혼인(결혼)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며 사람을 지으신 때부터 만들어 놓으신 원리입니다(창 2:21-24). (1)하나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남자의 몸에서 여자가 나왔습니다. (2)하나님은 여자를 이끌어 그녀가 나온 남자에게로 오게 하여서 그녀에게서 사람인 자기의 모습을 보게 하시면서 이 사람(여자)은‘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곧 자기 뼈에서 나온 뼈이며 자기 살에서 나온 살인‘한 몸’, 곧 하나 된 몸인 것을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3)그래서“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라고 말씀하심으로 한 몸의 부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4)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짝지어 주심에 있는 혼인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 19:6; 막 10:9)고 해석적 의미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람의 창조에서 남자에게서 여자를 나오게 하여 만드시고 남자에게로 여자를 이끌어 그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하신 것은 (1)만드신 남자를‘돕는 배필’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남자를 돕게 하기 위해서 남자와 같은 ‘사람’인 여자를 만드신 것입니다. (2)하나님은 이 둘을 한 몸이 되게 하심으로써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같은 존재로서 같은 운명의 몸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남자에게서 나온 여자인‘돕는 배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에 대하여 김영철은 그의 저서『성경정독집 신약(1)』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돕는 배필’을 일반적으로는‘남편을 잘 내조하기에 알맞은 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해에 의하면,‘아내’는 남편 내조의 능력에 따라 평가될 수밖에 없고 자연히 남편과 종속적인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돕는 배필’이란 성경의 원 뜻은‘그와 상응하는 조력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내는 남편과 동등한 가치와 위치를 차지한 존재인 것입니다.‘조력자’라는 용어의 의미도 ‘힘(능력)을 지닌 자’이므로 오늘날 개념으로 말하자면‘보조자’가 아니라‘동업자’또는‘분업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조력자’라 하는 것은 아내는 대표(代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을 창설하시고 아담을 그곳으로 데려와 거기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할 임무를 주셨습니다.“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그리고 아담에게 필요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창 2:16-17).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맡은 임무를 책임질 대표는 아담 자신인 것입니다.
간추리자면 남편과 아내로서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마치 두 눈 또는 두 손이나 두 발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상응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만물을 다스리는’임무를 감당하기 위해 공동사역을 합니다. 어떤 종류의 일을 하든 그들은 상응하는 존재로서 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 임무의 책임을 지는 대표의 역할은 아담에게 주어진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아내는‘조력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둘의 관계는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인 것입니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인 남자와 여자는‘만물을 다스리는’임무 속에서 대표자 및 돕는 배필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맡은 임무인 만물을 다스리는 일은 그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며 그 속에서 그 혜택을 누리는 차원에서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의 예정을 이루어 가는 것에서의 함께 그들에게 맡겨진 역할의 관계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런 남자와 여자는 둘이 아닌 한 몸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섬기는 존재이기에, 즉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섬길 자로서 사람인 남자를 만드시고 또한 그와 상응하는 여자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여 이 둘을 한 몸이 되게 하신 것이기에 사람은 그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둘이 아니라 한 몸입니다. 이러하므로“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합니다.”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둘을 한 몸인 부부가 되게 하여서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나오게 하여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케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의 백성을 이룰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답변에서 보는 하나님의 본의인 연약한 여자(아내)의 보호 : 다음으로, 예수님은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이유에 대해서 알려 주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첫 번째 답변에 질문한 바리새인들이“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고 명하였습니까?”라고 재질문한 것에 대한 재답변에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에서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해“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막 10:3) 라고 되물음을 하심으로“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습니다”(막 10:4)라고 그들이 알고 있는 바의 대답을 이끌어 내시며, 하나님께서 그들 마음의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음을 지적하면서 혼인에 대한 하나님의 본의를 설명해 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태의 기록과 마가의 기록은 서로 내용이 도치되어 있는 것으로,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태의 기록에서 예수님은 창조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이 둘을 한 몸이 되게 하신 연합(혼인)의 원리를 먼저 말씀해 주신 후에, 이어서 모세가 이혼 증서를 주어서 아내와 이혼할 것을 명한 이유를 알려 주시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아내와 이혼할 것을 명하였습니까?”라고 재질문하자 예수님은“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여 답변해 주셨습니다. 이는“모세가 왜 그처럼 이혼법을 기록하여 말해 주고 있겠느냐? 그것은 너희 마음이 완악한 때문에 그렇게 허락한 것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처음 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는‘사람은 그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따라서 그들은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고 첫 번째 답변에서 말씀해 주신 것의 재차 확인에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사람에게 들어와 사람이 범죄하여 타락함으로써 사람인 남자와 여자는 자신들을 한 몸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짓고 타락한 이후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떠나고 더 이상 함께 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시는 것이 더 이상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두 가지의 현상을 띱니다.
(1)첫째, 혼인하여 부부가 되었으나 둘이 한 몸 된 원리에서 이탈하여 각자의 마음과 힘에 의해서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한 사람은 이미 그 상태가 하나 된 몸으로 있지를 못하다는 것을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을 꾄 하와를 심판하시는 저주의 선언에서 계시해 주셨었습니다.“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 이 말씀은“너는 남편을 네 마음대로 하면서 다스리고 싶겠지만 오히려 남편이 너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남편에 대한 여자에게서‘돕는 배필’의 의미는 타락한 사람에게서는 상실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서 혼인에 남아 있는 것은 여자는 자기를 위하여, 남자 또한 자기를 위하여 지배함에 있는 것입니다. 서로가 상위에 있으면서 지배하려는 논리만이 있습니다. 사람의 혼인은 이처럼 처음부터 각각의 존재로 갈라서져 있습니다. 혼인을 통해서 한 몸의 연합된 부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혼인 전에도 그렇거니와 혼인 후에도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별적 존재가 혼인을 통해서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려는 육체의 욕망을 이루고자 할 뿐입니다.
(2)둘째, 하나님이 짝지어 남자와 여자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하시는 원리에서 떠나 있음으로‘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뼈에서 뼈를 갈라내고 살에서 살을 갈라내는 악을 행합니다. 사람은 이 완악함으로 하나님의 짝지어 주심에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짝지어 주심에서 갈라서는‘간음’의 죄를 짓고 있습니다. 타락한 사람의 마음의 본성은 죄성에 의해서 육체의 정욕을 좇아 살기에 남자와 여자가 창조 시의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심에 의한 한 몸 된 부부로 살지를 못하고 갈라서 있는 마음으로 삽니다. 그래서 아내를 두고서도 음욕을 품습니다. 또한 남편을 두고서도 음욕을 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에는“아내와 갈라서려거든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하였으나,“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은 자마다 간음하는 죄를 저지른 것이다”라고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게 살아가는 사람의 악한 죄성을 다루셨습니다. 이혼이란 사람이 혼인을 통해서도 결코 하나 된 몸으로 있지를 못하고 실상은 갈라서져 있는 것의 한 현상에 불과합니다. 혼인한 사람에게서 마음의 악한 생각이 행동화되어 갈라서는 이혼인데, 이 이혼으로 행동화되기 전 마음에 처음부터 자리하고 있는 것이‘음욕’입니다. 이 음욕은 사람의 마음에 자리한 죄에 의한 악한 본성에 품고 있는 정욕(욕구, 욕심)이 표출되고 있는 다양한 것의 하나입니다.
이 정욕에 의해서 둘이 한 몸이 되게 한 혼인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거역함으로 음욕을 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마음에 좋은 대로 아내를 거느리는 일을 합니다. 그에 따라서 두 아내를 거느리는 중혼(重婚)을 하는가 하면, 혼인한 아내와 갈라서는 이혼(離婚)을 행하고, 또한 재혼(再婚)하는 악을 행하였습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거느린 것에서(창 4:19, 23) 중혼의 첫 예를 볼 수가 있으며, 아브라함 당시에 애굽 왕은 자기 눈에 띠는 아름다운 여인을 자기 마음에 좋은 대로 취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곤경에 처하게 되었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화를 면하는 일이 있었습니다(창 12:10-20). 이렇게 사람은 (1)자기들의 마음에 좋은 대로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을 뿐만 아니라, (2)모세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아내를 버리는 일이 함부로 자행되므로, (3)그들이 함부로 아내를 버리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하여, (4)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아내가 무슨 부정한 일을 저지름으로 정결한 혼인(한 몸의 연합) 관계가 유지될 수 없는 것에 한해서 이혼증서를 써주고 집에서 내보낼 수 있게 하였습니다(신 24:1).
이처럼 바리새인이 알고 있는 모세의 율법에 자기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줄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은 사람이 악하므로 자기들의 육체의 정욕을 위하여서 아내와 갈라서는 것을 쉽게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내신 제도였습니다. 마태복음 5:31-32에서의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당시 유대인들에게서는 자기들의 아내가 음행을 저지른 일도 없는데 아내와 이혼함으로써 그 여자를 간음하게 만들며, 또한 그 여자와 혼인을 하는 사람 역시 간음을 하게 하는 일들이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한지 자기 아내를 내버릴 만큼 그 마음이 완악합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은 항상 악할 뿐인데 사랑을 고백했던 자기 아내를 내버리는 악한 생각과 행동을 서슴치 않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 상태는 참으로 완악합니다. 이혼을 허용하지 않으면 사람은 물건을 버리듯 함부로 아내를 내버릴 만큼 완악한 것을 아시기에,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한 연약한 여자(아내)의 권익(權益)을 위하여 합당한 절차를 밟도록 하심으로써 더 큰 악을 막으려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율법을 통해서 드러내신 하나님의 선한 뜻을 거역하고서 이를 악용하여 모세가 이혼을 하여도 좋다고 허락한 것으로 몰고 가 자기 아내에게 이혼장만 써주면 아내를 버리는 악한 죄에 있으므로 자신의 몸을 죄의 자유한 것으로 오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에서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주어 아내를 내버릴 수 있도록 한 것은 사람이 자기 아내를 내버리는 것의 정당성을 받아주기 위한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악한 마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임을 말씀하심으로써 실은 모세의 율법에서 다루고 있는 이혼에 관한 것을 가지고 예수께 올무를 걸어 함정에 빠뜨리려는 바리새인의 완악함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이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사람의 완악한 실상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사람에게서“선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께서 한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셨듯이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그러니 사람에게서는 영생을 생각해 볼 수가 없습니다. 영생은 오직 선하신 하나님 한 분에게서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주셔서 다만 그 분만을 바라보게 하는 믿음에 있게 하신 것은 그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생을 얻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에서 보는‘인생의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
마태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인 이혼에 하나님의 본의가 무엇인지를 예수께서 바르게 잡아 주시는 것을 통해서 그들의 완악함을 말씀하신 이후에 있은 제자들과 나눈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19:10-12입니다. 여기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쭉 듣고는 그렇다면“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사람은 날 때부터 고자 된 사람도 있고, 사람에 의해서 고자 된 사람도 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 된 사람도 있다”라고 말씀하시면서,“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왜 이 이야기를 하는지를 알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취지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그러면 혼인해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함으로, 이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고쳐주시는 것으로 사람이 사는 목적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사람이 사는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질문을 하게 된 것은 바리새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곁에서 들으면서 혼인에 대한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이혼법에 의해서 비록 합법적으로 정당하게 하는 것일지라도 간음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버리고 장가 드는 자는 재혼한 여자와 간음하는 것 - 이는 또한 이혼하여 다른 남자와 재혼한 아내도 역시 간음함에 있는 것이다 - 이라는 관점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짝지어 주심에서의 관계인 혼인이어야 비로소 두 사람이 한 몸 된 것이 서로에게 인식되고 여자가 남자를 돕는 배필로서의 위치에 있게 되는데, 이 관계가 깨진 것에서의 이혼과 재혼이란 자체가 모두가 간음한 것이기에 사실상 어떤 이유로도 이혼의 근거가 되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이혼을 허락한 법에 의해서 이혼장을 써주고서 아내를 내버리는 이혼의 근거를 배척하셨습니다. 이혼장이 결코 아내와 갈라서는 정당성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를 내세워 아내와 갈라서든지 간에 그러한 행동은‘하나님의 짝지어 주심’을 깨뜨리는 것에서 나와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혼하여 아내를 내어버리는 행동은 선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아닌, 저들의 완악함을 인하여서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지만,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이혼장을 써주고서도 그것이 간음하는 죄에 걸린다면, 그렇다면 이는 천국의 제자들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혼인함으로써 죄를 짓게 될 그런 큰 위험부담을 안기보다는“차라리 혼인하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다”라는 인식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간음하는 죄는 짓지 않을 것이니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의 생각이 잘못되어 있으므로 이를 바로 잡아 주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차라리 혼인하지 않는 것이 더 낫겠다고 말하였습니다만, 예수님은 그들의 말대로 사람이 혼인하지 않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을 계획하시고 준비하신데 따라서 허락됨으로 할 수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의 말처럼 그들의 생각과 의지에 의한, 저들 마음대로 혼인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에 대한 설명으로“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미의 태로부터 고자인 사람은 혼인에 의한 부부 관계가 불가능하여 자식을 낳을 수 없으므로 날 때부터 혼인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며, 사람이 만든 고자인 사람은 처음부터 고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성기를 강제로 거세한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되었으니(여기에는 예기치 않은 사건 사고에 의하여 부득이 하게 성적 불능이 된 것도 포함된다) 후천적입니다만 그 역시 혼인하지 못할 몸이 되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어떤 사람은 고자가 아닌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스스로 혼인을 포기하여서 혼인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두의 공통점은 혼인하지 않는 몸으로 있는 것이 자신의 생각과 의지로서가 아니라, 혼인하지 않는 몸으로 있어야만 하는 어떤 외부적인 요인이 작용한 데 따라서 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인에 있을 수 없거나 혼인에 있지 않고자 하는 이 세 가지의 고자가 된 예(例) 중에서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주안점은 세 번째의 경우입니다. 제자들이“그러면 차라리 혼인하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다”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것이‘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 된 자’가 되고자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혼인을 하여 아내를 두고 있는 것이나 독신으로 있어 혼자의 몸으로 있는 것이나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혼인을 해도 되고 독신으로 살아도 됩니다. 그가 무엇을 원하든지 간에 원하는 그것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혼인이든 독신이든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하든지 간에 거기에는‘하나님과 그의 나라’가 중심으로 있어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하여 살고자 하는 생각에서 결정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말한 바인“차라리 혼인하지 않는 것이 낫겟습니다”는 말은 곧“차라리 독신으로 사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는 말이니, 이는 혼인을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혼인을 할 수 있는 몸인데도 혼인을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혼인의 포기가 무엇에 의한 것인지를 인식하는 것에서여야 합니다. 제자들이 생각한 것에서 볼 수 있는, 간음죄에서 사람이 벗어날 수 없다면, 그래서 간음죄를 짓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면, 차라리 혼인하는 것을 포기하고서 혼인하지 않겠다는 것이 과연 그들을 선하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독신으로 살아도 혼인한 자에게서 발생하는 다른 여자에 대한 음욕으로 아내를 내어버리는 일을 하는 육체의 정욕은 동일합니다.
해서 기꺼이 혼인을 포기하는 것이‘자기를 위하여’에 있다면, 그는 비록 아무리 그러한 큰 희생을 감수할지라도 그것으로 그는 전혀 선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과 그 나라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그 처신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혼인을 원치 않아서가 아니라, 혼인을 원해도 태어날 때부터 고자인 사람인 혼인을 할 수 없는 몸이라 못하고, 사람의 손으로 고자 된 사람도 혼인할 수 없는 몸이라 하지를 못하는데, 이들이 혼인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몸 상태가 그래서인 것뿐이지 실상은 그들의 마음마저 혼인을 원하지 않아서 혼인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혼인을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이혼함으로써 죄를 짓게 될 것의 염려로“차라리 혼인하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독신으로 사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그것조차가‘자기를 위하여’의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 바탕을 둔 것으로 하나님과 그 나라와 대립되는 관계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결코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은 만일 스스로 혼인을 포기하면서까지 독신으로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혼인이 하나님 나라를 향한 그들의 추구를 방해하거나, 혹은 하나님 나라의 소명을 성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혼인을 포기하고서 독신으로 살고자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 때문이어야 하지 다른 이유로 인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즉 혼인하지 않고서 혼자 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다른 구절들에서는 예수님은‘천국’때문이라는 단어 대신에‘나를 인하여’(마 5:11),‘의를 인하여’(마 5:10), 또는‘나와 복음을 위하여’(막 8:35) 라는 말씀을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 자신과 예수께서 가져온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것은,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하는 것은, 이 하나님 나라가 요구하는 의를 위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 하고자 하는 혼인을 포기하고서까지라도 할 만한 고귀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너희가 차라리 장가 들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서이냐?”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혼인을 하지 않고 홀로 산 인물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과 바울입니다. 이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독신자가 되어서 홀로 살았는지요. 이들이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독신으로 산 것은 주님과 주님의 복음,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해서 입니다. 이들은 혼자 있게 된 몸으로, 혼인한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예속되어 있는 자가 아니라 참으로 자유한 자가 되어서 평생을 수고하여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였습니다.
만일에 말입니다.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혼인을 포기한다면, 그래서 혼인하지 않고 오직 주님과 주님의 복음의 전파를 위하여 평생을 수고하여 헌신한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큰 희생을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전적으로 자신을 드려 살고자 하는 사람은, 그래서 카톨릭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신부로 살고 수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독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독신이란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사는, 그래서 하나님과 그 나라 중심적인 사고의 삶으로 갖는 것 중에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그 나라 중심적인 사고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희생 중 하나가 혼인의 포기에 의한 헌신입니다. 따라서 이‘하나’의 희생에 전부를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삶으로 갖는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하는 그 모두에서 혼인 포기라는 이 하나의 희생도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 희를 아끼노라.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17-31). 이 긴 이야기를 한 마디로 말하면“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라고 말씀하시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에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구속의 보혈로“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라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혼인을 한 상태이든 아니면 독신의 상태이든, 또는 남자이든 아니면 여자이든, 또는 여기에 확대하여 젊든 그렇지 못하든,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든 아니면 무할례의 이방인이든, 또는 교회의 직분을 맡고 있든 그렇지 않고 있든, 또는 직장에 자유롭든 아니면 매여 있는 몸이든,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삶의 상태에 놓여 있든지 간에 그 모두는 다 가한데, 그 모두의 상태에서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주어진 삶인 것을 받아들여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섬김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우리를 무서운 죄의 세력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고 산 몸이므로 그리스도의 것이지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던 당시의 처지가 어떻든지 간에 부름을 받은 그대로의 상태에서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며 온 마음을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는 일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는 삶에 온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 삶을 살아감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이 말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여야 할 일을 팽개치고 오직 주님의 일만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생활하면서 갖는 어떤 일에 있든지 간에 그 모든 일을 하는 것에서 우리가 사는 삶의 중심이 되는 목적이 주님과 주님의 복음에 있으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든지 간에 우리의 생명의 주는 주님이시기에 하는 말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참 자유한 자로서 온전히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여 혼인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고자 한다면 이는 더욱 잘하는 일일 것입니다. 무릇 이렇게 살 마음을 품음으로써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바칠 인생의 계획을 갖고 있다면 그는 혼인하여서 사는 사람보다 더 좋을 것입니다. 혼인함으로써 매여 있으며 제한을 받음으로써 할 수 없는 상태로부터 자유하여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혼인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세상에 빼앗기지 않고 주님 섬기는 일에 온 마음과 정신을 기울일 수 있다면 그렇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고전7:35-40). 그 어떤 것에 있든지 간에“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고 하는 삶을 살아감에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 삶을 살아감에 있는 자가 그리스도인 된 인생, 곧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허락 받은 참으로 복 있는 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