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주님께만 눈 먼 행복한 바보이고 싶습니다(요6:1-14)
2023.10.15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사랑은 사람을 행복한 바보로 만든다. 사랑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이 예뻐지고 자꾸 웃는다. 사랑하면 계산을 못하는 바보가 된다. 사랑하면 할수록 아까운 줄 모르고 다 준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준다. 그러면서도 행복해 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와 보람을 느낀다. 가족 사이에도 그렇고 연인사이도 그렇고. 성도와 성도 사이에도 그렇고, 성도와 목회자 사이나 모든 인간관계가 다 그렇다.
사랑하면 왜 이렇게 점점 행복한 바보가 되어갈까? 사랑은 상대를 내 몸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상대의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가까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감이 느껴지고, 피로가 사라진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흔한 김치찌개 하나를 먹어도 마음이 편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최고 등급의 한우를 먹어도 긴장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내가 아픈 것과 같이 느낀다. 아니 내가 아픈 것보다 더하게 여긴다. 그렇기에 만약 지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존재나 일이 내 몸이나 내 일처럼 여겨진다면, 이미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어느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큰 지를 질문했다. 그랬더니 주님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몸) 같이 사랑하라”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셨다(마22:37-40). 논리적으로만 생각하면,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을 이해되기 어려운 말씀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사랑하면 내 몸처럼 여기지게 된다. 특히 나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웃도 사랑할 마음이 생긴다. 하나님도 우리를 너무 너무 사랑하셨기에, 우리의 아픔을 하나님 자신의 아픔으로 아시고, 독생자를 보내주셨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6장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오병이어(五餠二魚, 다섯 개의 떡, 두 마리의 물고기)의 기적을 기록하고 있다. 날이 저물어 갈 때, 주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한 어린아이가 드린 오병이어를 받으신 후에 축사하시고, 그것으로 남자 장정만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남은 조각만 해도 열 두 바구니에 가득 찼다(여자, 노인, 아이들까지 합하면, 약 2만 명 이상)..
그런데 예수님은 빈들에서 날이 저물어 갈 때, 무리들에게 먹을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셨을까? 모르실 리가 없다. 주님은 그들의 필요한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셨고, 이미 기적을 일으키실 마음의 준비까지 다 하고 계셨던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찾게 하셨고, 이에 호응해서 한 어린 아이가 자신의 오병이어를 아낌없이 드렸다. 이것이 기적의 마중물이 된 것이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요 6:9)
오늘 설교를 위해서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계속 생각했던 것이 “왜 이 소년은 자신의 오병이어를 아낌없이 바쳤을까?”라는 것이었다. 소년이 오병이어를 아낌없이 드렸던 이유가 바로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들에게 이 기적을 통해서 드러내고 싶으신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그러면 소년은 왜 아낌없이 자신의 오병이어를 바쳤을까? 제자들의 말에 깜빡 속아서 일까? 아니면 ‘내가 이것을 바치면 주님이 기적을 일으키실 것’ 이라는 믿음 때문일까? 아니면, 이것을 바치면 예수님께서 더 많은 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라는 계산적인 생각 때문이었을까? 어른들이라면 이러한 계산적이고, 조건적인 것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린 아이에게 그렇게 복잡한 추측까지 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사실 소년이 자신의 오병이어를 주저하지 않고 드린 이유는, 우리들이 소년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생각해 보면, 소년이 주저없이 드렸던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은 단지 주님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년은 단지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예수님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일을 내 일처럼 여겼다. 그래서 계산하지 않고,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뒷일도 생각하지 않고 드린 것이다. 그뿐이다.
이것이 어린아이들의 특징이다. 너무 순수해서 어리석어 보일 정도이다. 아이들은 누구를 좋아하고 사랑하면 잘 숨기지 못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는지 안하는지는 눈빛이나 표정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슬쩍 옆에 와서 건들고 깔깔대면서 도망가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달려와서 안기고, 작은 스티커나 아꼈던 과자 몇 개를 꺼내서 주기도 한다. 어른들이 볼 때는 유치해 보일 수 있지만, 아이들의 생각에는 그런 것들이 꾀나 소중한 것들이다.
예수님께 자신의 오병이어를 아낌없이 바친 어린 아이의 마음도 마찬가지가 아니었겠는가? 그 아이는 예수님이 정말 좋으니까, 에수님을 조건없이 사랑하는 순백의 마음이 있으니까, 예수님이 그것을 원하시니까 계산적인 생각은 1도 안하고, 드린 것이다. 그뿐이다. 그런데 바로 어린 아이가 순색의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드러내고 싶으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눈이 번쩍 뜨이는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지금도 여전히 주님은 오병이어를 드린 아이처럼 사랑에 눈 먼 행복한 바보들을 통해서 일 하시고,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도 주님을 너무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면, 주님만 생각하는 바보가 된다. 그런데 그 바보는 행복한 바보이고, 사랑의 바보이고, 주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바보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다.
“주님, 저는 늘 주님께만 눈 먼 행복한 바보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본 설교자뿐만 아니라 이 시간 우리들 모두가(본 설교문을 읽는 모든 분들까지) 오병이어의 소년처럼 순백의 마음으로 주님만 사랑하는 행복한 바보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소년이 오병이어를 바친 이유이고, 주님이 이 소년의 드림을 통해서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오병이어 소년이 자신의 것을 드리기 전에도 주님은 무리를 위해 이미 기적을 일으키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셨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확신한다. 주님은 우리(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고, 우리들이 사랑의 마음으로 반응하기를 원하신다.
지금부터 두어 달 전쯤에 있었던 일이다. 서울신대 개학을 앞두고 학교에 간 둘째 딸이 주차비 내는 방법을 카톡으로 알려왔다(본 설교자는 요즘 월요일 마다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고, 딸은 같은 학교 4학년임). 딸은 나이든 아빠가 인터넷으로 수강신청을 하거나 주차신청 하는 것들에 대해서 내심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사실은 본 설교자도 컴퓨터에 대해서 꾀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를 기억하고 생각해 주는 마음이 기특했다. 그래서 주차비 2만원을 대신 좀 내달라고 답장을 했다. 딸은 짜증내지 않고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월요일에 직접 가서 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에게 대신 내달라고 한 것은 사실은 10만을 채워서 용돈까지 더 주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아마 딸은 이런 아빠의 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새벽기도 때, 오병이어를 드린 소년과 주님의 마음에 대해 묵상하면서 기도할 때, 문득 이 일이 생각나게 하셨다. 그리고 “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도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이 우리(나)에게 뭔가를 “하라”(또는 “해보라”)는 마음을 주셨을 때, 그 순간은 이해되지 않고, 짜증나고 귀찮고, 때로는 손해 보는 것같이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이 그런 마음이나 감동을 주셨을 때는, 오병이어의 기적에서처럼 이미 내가 알지 못하는 좋은 것들을 이미 준비해 놓고 나에게 해보라고 말씀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짜증이나 의심하지 말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만 하면 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사랑은 사람을 행복한 바보로 만든다. 하나님도 우리를 너무 너무 사랑하셨기에 계산하지 않고, 독생자를 아낌없이 보내 주셨고, 십자가에서 희생시키셨다. 그리고 이 시간도 이미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으시고, 주님의 사랑에 눈 먼 행복한 바보들이 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 다 함께 믿음으로 주님을 향해 사랑에 눈 먼 행복한 바보들이 되자. 이 시간 이러한 우리들의 결심과 마음을 주님께 올려 드리자.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