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결자해지의 달, 2월
-3. 나의 2월도 그러했다.
분명 2월은 낀 달이 아니라 인생 절대 절명의 신중한 달이고 엄숙한 인생의 전환점에 위치한 달이다. 너무도 가혹하고 무서웠던 2월의 달. 동지섣달이 왜 그렇게 캄캄한 나락인지 생각해보는 2월, 나의 2월도 그러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2월이었고 직장에서 돌연 직책을 잃고 방황을 했던 때도 바로 그때였다. 감당하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이 컸던 2월. 나는 겨울추위보다 더한 혹독한 달이 2월이라고 생각을 한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무조건 적으로 다가온다고 말하는 봄. 봄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다. 불행 또한 온다 싶으면 기다릴 리 없는데도 기다릴 것 없이 혼연히 불시에 찾아온다. 꽃피는 계절 3월을 코밑에 두고 예견치 않게 닥친 불행은 그러기에 더욱 진저리 날 수밖에는 없다. 불행도 여러 질이 있다. 연륜으로서 겨우 얻는 행복의 꿈처럼 세월 따라 겪는 불행, 이를테면 갱년기 같은 시간의 허술 함이나 일상적 변화 생김 등으로서의 불행은 도래한 처가 어디든 그런대로 겪음을 자임한다지만 우연히 만난 행운들처럼 불시에 들이닥치는 불행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비관을 넘어 스스로 비극적인 삶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는 때론 현실과 부딪히며 머리 터져라 싸우고, 때론 험한 꼴을 당해 악몽 속에서 진저리를 치기도 한다. 이는 엄습할 것 같은 어느 불행을 막겠다는 예비훈련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준비 없이 졸지에 찾아 온 불행은 막아설 겨를도 없고 또한 평정을 잃기 십상이다. 이는 대적해봐야 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아차린 불행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비관을 넘어 스스로 비극적인 삶에 빠지기 쉬우며 세상에서 버림을 받거나, 핍박을 당하면서 정말 소외됐다는 생각에 좀처럼 빠져나오기가 쉽지도 않다. 그렇게 내 불행은 시작됐다.
2012년 2월 10일, 나는 직책을 놓으라는 통보를 받았다. 전혀 예기치 않은 것이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는 나는 더불어 근무처 지소 격인 경주 양성자 가속기 건설 현장에 파견을 명받았다. 잘은 모르지만 노조에 누가 투서를 했고 어쩔 수없이 따르는 게 좋겠다는 인사권자의 한마디 말이었다. 조직 사회에서 명에 항거할 방도가 있겠는가. 아프지만 나는 짐을 꾸려 경주로 향했다.
그리고 보름 쯤 지나서였다. 금요일이라 일과를 끝내고 고속열차를 타고 대전 집으로 오는 중이었다. 대전 본원의 현장에서 일하는 현대건설 소속 현장소장이 전화가 왔다. 꼭 좀 만나자는 것이다. 만나서 이야기 하겠다고 하였지만 나는 그의 신중함으로부터 어느 불행이 피할 수없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그의 말은 아주 간결했다. 내 뒷조사를 감사실에서 벌써 수주일 째 계속하는 중인데 나에게는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대전 근무처에는 공사가 년에 최소 두세 건은 있기 마련인데 업체들과 어울려 다니며 향응을 제공 받았다는 어느 제보에 혹여 돈까지 챙기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포함되어 주변을 샅샅이 뒤졌던 모양인데 정작 나는 하나도 모르고 경주에 틀어박힌 형국이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지은 죄 때문이 아니다. 너무 화가 나고 두려웠다. 나는 그들과 잘 어울렸다. 현장이 여러 곳이니까 저녁에 시간을 내 가끔 이야기를 들으면 그들의 고충도 이해하게 되고 또 우리가 관철시킬 것을 자연스레 수용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한결 부드러웠다.
대개의 건설현장이 그렇지만 공사를 하게 되면 돈은 자꾸 늘어난다. 특히 내 근무처 현장은 연구원들의 작은 욕심 때문에 한 번도 정한 금액내 공사가 마무리 된 적이 없는 곳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돈을 추가로 더 챙겨주지도 않는다. 건설의 특성상 현장과 소통만 잘 이루어져도 원가 절감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내역서 작성 때부터 일종의 편법 같은 절감 방식 (공사 원가에 오버헤드라는 마진을 줄이는 등등)이나 추가비용에 대한 작은 꾀가 여러 방도로 모색되는 경우가 많다. 현장에서 산 사람들은 감독들보다 난관을 헤쳐나가는 지혜가 의외로 많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 인식은 그들과 저녁 때 어울리면 뭔가가 있다고 보는 편견이 있다. 낮에는 공정회의 같은 공식적 회의 말고 그들을 대하기가 쉽지 않으며 속내를 듣기도 어렵다. 요즘 현장은 돈을 주고받지 않는다. 현장은 카드결제이고 거의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배나무 밑에서는 갓을 고쳐 매지 마라’라는 말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키자면 내 행위가 그와 거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실제 나는 근무처에 짓다 만 중성자 시설 관리동을 건설업체를 열 댓번 쫓아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에스칼레이션 없이 종전의 가격으로 완결 짓도록 한 경험이 있다. 그런 류의 일을 이상하게 나는 많이 겪었다.
노내조사시험설비란 공사도 그렇지만 내 근무처에 제2주차장이란 것도 그렇게 해서 얻은 산물이다. 정부가 주차장을 확충하라고 돈을 대줄 리는 만무고 나는 업체를 설득해 잉여금을 활용해 단번에 그 일을 해치웠었다. 그 바람에 당시 감사라는 사람에게 호되게 당했었다. 그는 내가 업체를 봐주기 위해 일을 일부러 더 준 것으로 몰아붙였다. 나로선 참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었었다. 돈이 없어 설게도 없이 한 일, 주차장을 굳이 설계까지 할 일이 뭐 있을까. 아마도 나의 흔적을 쫓았지만 업체와의 결탁은 결코 찾아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그들이 1차로 식사대접을 하면 반드시 생맥주 한 잔은 내가 샀다.
아무튼 순탄치 못한 한 겨울 같은 상황, 내 가슴 속 잔인한 겨울과 다르게 겨우내 잠잠하던 어느 기운은 온 누리에 매무새를 살랑살랑 흔들며 그 기운을 한껏 드리우고 곳곳에 아지랑이는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꽃망울마다 막 터뜨릴 채비를 서두르는 2월 끝자락에 서서 나는 그렇게 추락하고 환멸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일은 그때부터였다. 드디어 꼬투리가 잡힌 것이다. 내 팀에는 물론 나 때문에 지금은 없어졌겠지만 장부라는 게 존재했다. 내 역무는 건설도 하지만 시설관리도 하는 좀 광범위한 영역이었다. 시설 용역직 46명, 청소 용역직 까지 하면 거의100명에 육박하는 인원이다.
그들은 한 솥밥을 먹는 것으로 늘 우리를 인식을 하고 잘 따랐지만 우리는 갑으로서 행동하는 게 많았다. 나는 그게 늘 마음에 걸렸다. 내 수필집에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실린 것도 다 그러해서다. 실제 그들의 열약한 환경은 말할 수 없는 정도다. 170만원으로 온전히 가족을 꾸리기가 어려운 게 사실 아닌가. 나는 그들 현장에 신문이나 먹거리를 제공해주는 작은 기쁨이 있었다. 물론 내 사비로 해야 맞을 것인데 나는 꼭 그렇게 한 것만은 아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처럼 팀에 할당된 출방비 명목을 십분 활용해 돈 충당을 하곤 했다. 이는 바로 감사실에서 찾는 규정위반으로 큰 징계 깜에 해당 된다.
나는 사실 누군가로부터 장부를 없애 빌미를 주지 말라는 충고를 사전에 받았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오해를 살까 봐 일부러 장부를 공개적으로 한 마당에 새삼스럽게 장부가 없다고 발뺌을 한다는 것은 더 악질 같이만 느꼈다. 나는 2012년 봄 철 내내 경주와 본원을 오가며 심문 아닌 심문을 받았다. 지금도 생각하지만 당시 감사실 사람들은 내 말은 전혀 믿지도 않고 들어주지도 않으면서 검찰청 사람들인 양 격에 맞지 않는 추궁을 지속했다. 내가 용역 시설직 불쌍한 사람들에게 잘 대해준 내면에 뭔가가 있다고 아무래도 생각한 것인지 그들도 불러 엄청 따졌던 모양이다. 이 또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그 일로 6월에 이르러 파면을 당했다. 징계의 내용은 시간 흐름과 더불어 수차 바뀌었는데 최종의 주된 요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귀하는 부서장으로서 직원을 격려하고 올바른 업무수행을 지시할 의무가 있음에도 팀장 재임 시 허위출장및 업무와 무관한 출장지시(총 100건)로 연구원 예산을 8년에 걸쳐서 총 목적 외로 사용(약 1,038만원)하였으며, 이중 56건(약600만원)이 징계시효 내의 징계시효에 해당되는 바..”>
그 돈이 8년이란 긴 세월 그러니까 년에 채 백만 원 정도에 해당하는 돈이기는 하지만 나는 나의 잘못에 대해서는 유구무언이다. 가짜 출장을 끊어 그 돈을 비록 전체 시설유지를 위해 썼다지만 유용한 것이고 이는 명백한 징계감이니 더 할 말은 없다. 그런데 죄의 양정에 문제가 있다 싶었다. 나는 그 일로 파면을 당했고 또한 검찰청에 고발까지 당한 것이다. 나는 지금도 검찰청 주변에만 가도 속이 뒤틀린다. 참 사람 못 갈 곳이 바로 거기다 싶은데 아무렇지 않게 드나드는 사람들은 어찌된 인물인가 반문을 하게 된다.
감당하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이 컸던 그 무렵. 나는 그렇게 거듭 추락하고 환멸하고 있었다. 하지만 질곡 끝에선 높은 산이 있으며 분명 먼 동이 튼다. 로마인이 믿었다는 정화의 달 2월. 내게 2월이 없다면 어느 결말도 또 어느 지표를 향한 구심점도 도래하지 않았으리라. 흔들리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넘어지지 않는 삶은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다 몹시 아파하면서 이승에서의 생활을 열심히 꾸려가지 않는가. 고진감래(苦盡甘來)를 떠올리면서, 고난을 헤치고 겪으며 지내야 한다는 신조는 어쩌면 내 삶이 억울하다는 심층에서 본능처럼 욕구 적으로 분출한 삶의 실마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멋진 세상'을 한 번 다시 봐야겠다는 의지를 품고 말이다. 분명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 이 말은 진리다. 나도 이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