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편지 / 이신율리
아이는 열두 컷 편지를 가졌다 그것은 열두 잎을 가진 나무의 이야기
아무도 오지 않는 저녁 잎사귀 끝에서 울면 북쪽이 될까
쌀을 씻고 침묵을 씻어내면 늙은 개처럼 차분해질까
편지는 어디든 갈 수 있다 붉은 꿩이 날아간 방향이라면
이파리들은 구름 한 채 짓고 아이는 기린이 되고 지붕에 걸린 연을 보느라 편지지 밖으로 발이 빠지고
살구나무가 좋아
저녁으로 사람들이 고인다고 아이가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 내가 화분마다 물을 준다 고장 난 시계태엽을 돌리고 저녁도 없이 밤을 부른다
물컹한 가지조림을 먹고 찬물을 마신다 발등에 앉은 어둠이 나를 올려다보고
식탁 끝이, 언제부터 절벽이었나 생각할 때
멀리서 달려오는 편지가 내게 팔베개를 한다
별을 그리면 손바닥만 하게 커지는
그 저녁이 우리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나무라 불러야 하나
열두 컷 그림 속에서 잎사귀만 한 아이가 손을 흔든다
◇이신율리=202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장환신인문학상 수상.
<해설> “아무도 오지 않는 저녁 잎사귀 끝에서 울면 북쪽이 될까”에서 “열두 컷 그림 속에서 잎사귀만 한 아이가 손을 흔든다”로 마무리되는 한편의 시이다. 어려운 단어 하나 없이 어려운 시다. “아무도 오지 않는 저녁 잎사귀 끝에서 울면 북쪽이 될까”, 쌀을 씻고 침묵을 씻어내면 늙은 개처럼 차분해질까? “물컹한 가지조림을 먹고 찬물을 마신다”는 아이가 아닌 어른의 정황이고 그림을 그리고 편지를 쓰는 건, 눈 맑은 아이다. 이 아이는 시인의 실존하는 아이일 수도 있으나 가상의 (무의식 속의) 혹은 내 안의 또 다른 존재일 수도 있다. 그런 어이가 그리고 쓰는 것을 어른 시인의 입을 빌려 진술하고 있는 시인은 그림 편지를 들여다보며 붉은 꿩이 날아간 방향을 응시하고 있다. 무엇이든 고정된 것은 없다. 단지 나무에 매달려 있는 이파리는 구름 한 채 이고, 아이는 기린이 되기도 한다. 아이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면서 누구도 오지 않는 어두운 어른의 저녁에 별을 그려 손바닥만 하게 커지는, 편지를 속 나무를 시인은 꿈꾸고 있는 건 아닐지? -박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