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베(大麻) 길쌈하기
<4> 삼베 짜기
베틀의 모습<상당히 복잡하고 각 부분의 명칭도 재미있다.>
베틀(끌) 신 / 부테(허리테)
이렇게 삼베 실이 베틀에 오르기까지는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의외로 복잡한 과정이 많고 상당히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과정이 많은데 조금이라도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짤 수가 없다.
그 복잡한 과정을 옛 여인네들은 어찌 익혔는지 길쌈하기와 바느질(옷 만들기)은 전국 어느 곳을 막론하고 여인네들이 익히는 필수 항목이었으니.....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이렇게 베틀에 걸기만 하면 이제 ‘다 먹은 길이다.’라 하셨으니 아마 90% 과정은 끝났다는 의미겠다.
우리 어머니는 낮에는 밭에도 나가시고 집안일로 쉴 틈이 없으셨을 터인데도 짬만 나면 베틀에 올라 베를 짜셨는데 저녁이면 밤이 이슥할 때까지 베를 짜서 나는 찰칵거리는 바디소리를 들으며 잠에 빠져들곤 했다. 팔 남매의 막내인 나는 대여섯 살까지 젖을 먹었던 모양으로 누님들 말에 의하면 베틀 옆에 서서 어머니를 쳐다보며 ‘어머이, 얼릉 내려와서 젖 주게....’하고 졸랐다고 한다. 강릉지방 말투는 어머니에게 하는 말이 아랫사람들에게 하는 ‘하게’ 비슷하게 말을 해서 경인지방 사람들이 들으면 이상하다고 한다. ‘어머이, 업어주게, 어머이, 밥 먹게....’
삼베는 마흔 자가 한 필인데 실을 걸 때 보통 마흔두 자를 걸어서 여분으로 두 자를 더 넣는다고 하셨다. 솜씨가 좋은 사람은 이틀이면 한 필을 짜냈지만 보통 한 필을 짜려면 사나흘, 혹은 닷새쯤 걸렸던 것 같다. 집에서 하는 길쌈으로는 삼베(麻) 외에도 모시(모시풀/여름옷감)와 무명(목화/겨울 옷감)도 짰고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내어 비단(緋緞/Silk/겨울옷감)도 짰는데 명주는 길쌈이라 하지 않고 ‘명주를 난다. 명주를 짠다.’라고 했던 것 같다.
명주(明紬)는 누에고치에서 뺀 실을 일컫는 말로 천으로 짜면 비단(緋緞)이 된다. 어머님 말씀으로 여자들 머리를 묶는 댕기나 치마저고리는 ‘철두고사’를 노란색이나 남색으로 염색해서 많이 해 입었다는데 ‘철두고사’가 무엇인지 인터넷을 뒤져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남자들의 바지저고리는 삼팔주(三八紬)로 지었다는데 아주 고운 명주(明紬)를 삼팔주(三八紬)라고 한다.
<5> 여러 가지 옷감과 자수 놓기
수(繡)틀 / 베개(木枕/退枕) 마구리 / 밥상보 / 부전 노리개 / 횃대보
그 밖에도 공단(貢緞)으로 지은 남자들 조끼를 최상급으로 쳤고, 광목(廣木/무명의 일종)이 대량으로 나오면서 옷감의 혁명을 이루어지는데 옥양목(玉洋木)은 무명 중에서 발이 고운 것을 말한다.
인조견(人造絹/사람이 짠 비단)은 여자아이들 겨울 댕기로, 갑사(甲紗/결이 고운 비단)는 여름 댕기 감으로 인기가 많았다고 하고, 인조견(비단)과 달리 인조옷감이라 부르는 재생 섬유로 짠 옷감도 있었는데 질기지 못해 인기가 없었다.
일본 침략기 영등포에 있었던 ‘경성방직(京城紡織)’이 우리나라 최초의 방직공장이라는데, 1951년 ‘전남방직(全南紡織)’이 설립되는데 1961년에 ‘일신방직(日新紡織)’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연이어 1964년 마산에 ‘한일합섬(韓一合纖)’이 생기면서 본격적인 기계화가 이루어져 수공업 형태인 길쌈은 1960년대로 들어서면서 갑자기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양단(洋緞/무늬를 넣은 두꺼운 비단), 모본단(模本緞/무늬를 넣은 얇은 비단), 뉴똥(비단의 한 종류), 쎄루(면직물의 일종), 뽀뿌링(Poplin/여러가지 실로 섞어 짬), 데드롱(폴리에스터/화학섬유), 나이롱(Nylon/합성섬유), 고루뎅(Corded Velveteen/올이 굵은 골이지게 짠 옷감)이 유행하였고 모직(毛織/짐승의 털로 짠 옷감)이 나오면서 양복(기성복)이 일반화된다.
당시 처녀들은 시집가기 전에 자수(刺繡)를 놓았는데 시집갈 때 가지고 가는 필수 품목이었다.
동그란 수틀에다 옥양목을 메우고(끼우고) 색실로 수를 놓는데 베갯모(베갯마구리), 횃대보, 밥상보, 주머니 등이었다. 그 밖에도 아이들 노리개로 색깔이 예쁜 천에다 수를 놓고 고추, 만두, 나비 모양을 만들어 도톰하게 솜을 넣으면 깜찍한 모양이 되는데 ‘부전’이라고 했다.
나비의 한 종(種)인 ‘부전나비’는 모양이 이 노리개 부전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繡) 놓는 실은 처음에는 명주실에 물을 들여서 놓았다는데 색색의 수실이 판매되면서 사다가 수를 놓았는데 누님들은 ‘구뎡불란사’라는 실을 사다 쓰시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