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개념
수필의 개념을 정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수필은 문학 장르의 하나는 맞지만 자기 개념을 정립할 수가 없는 문학 장르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수필, 미셀러니, 에세이, 산문 등등으로 구분되기도 하면서 경수필 중수필로 분류 되기도 한다.
피천득이 수필의 개념을 수필작품 <수필>로서 그려 놓았고 학창시절에 배웠다. 모든 수필이 난이요 학이요 청자연적이 아님에도 금아는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자 연적이라고 했다. 난이 아닌데 난의 향기를 뿜어 낼 수가 없는 것이고 학이 아닌데 학의 기품을 쓰기는 불가능 하다. 청자연적 또한 그러하다. 수필은 파초요 꿩이요 백자라고도 할 수도 있고 된장 뚝배기라고도 할 수가 있다. 금아가 이렇게 표현 한 것은 "격조 높은 산문이 수필"이라는 은유이고 당신 자신이 수필인이기에 수필에다가 극찬을 한것에 불과하다.
농담에도 격이 있고 저자거리의 삶에도 품격이 있다. 글쓴이의 깨끗한 품격이 담겨있는 글이 수필이란 뜻이다. 수필을 운문형식으로 쓰면 안되는가? 산문시가 있는데 운문 수필이 안될리가 없다. 책을 내면서 굳이 내 글은 산문이라고 발표하는 작가들을 본다. 산문은 운문에 상대적 개념이지 문학장르가 아니다. 수필은 산문이고 격이 높은 산문이 수필이다. 수필에 욕을 쓰면 품격이 떨어지는가? 그것도 아니다. 욕쟁이 할매가 욕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 할매를 품격이 없다고 하지 않는다. 욕에도 품격이 있다. 말하는 사람의 정신세계에 깊이 내재한 선한 마음을 토해 내는 욕은 욕이 아니다. "격조 높은 글"로 끌어 올리는 이 작업이 어려운 때문에 수필은 누구나 쓸수 있는 글이면서 아무나 쓸 수 없는 글이기도 하다. 필자는 "똥" 을 주제로 다섯편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좋다는 분들도 있고 "에이!" 하신 분들도 있다. 냄새나는 소재일지라도 격조 높게 끌어 올리면 멋진 문학작품이 된다는 게 필자의 소신이다.
어떤 분은 문학적 수필을 주장하는 분도 있고 창작 수필을 주장하는 분도 있다. 심지어는 수필가가 쓰는 모든 글은 수필이라고 개념지운 분도 있다. 문학성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 부활을 설명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필자도 문학성을 궁구하면서 이렇게 쓰면 문학성 높은 글인가? 저렇게 쓰면 문학성 높은 글인가? 하며 많은 실험적 작품을 쓴 경험이 있다.
필자가 최종 정리한 수필의 문학성이란 주제가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더 많은 유익(행복, 위안, 깨달음, 새로운 지적 충만 같은)을 주는 가치를 지니되, 그 표현의 수사법이 은유와 상징을 잘 썪어서 구성을 조리있게 하여 (미괄식, 두괄식, 양괄식, 기승전결, 수미상응, 발단.전개.클라이막스. 대단원 같은 소설 구성의 작법을 차용하여) 단숨에 읽히도록(지루하지 않도록) 하되 오래 기억되게 쓴 글을 문학성이 높은 글로 정리한다.
직유법은 쓰면 안되나? 된다. 꼭 스토리 중심으로 써야 하나? 그것도 아니다. 내가 체험한 이야기를 쓰다보니 스토리 중심이 되는 것이겠지만 운문성 보다는 산문성이 강한 글을 쓰면 수필이라고 정의한다. 우유체나 만연체를 선호하는 수필문학의 특성상 직유법이 부담은 주겠지만 민태원의 <청춘애찬>은 "물방아가 같이 뛰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어보라!" 같은 표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강건체로 직유법을 멋지게 활용하여 쓴 수필이다.
수필의 가장 큰 강점이 무형식의 형식미(美) 곧 틀에 붙잡히지 않는, 은유로 표현하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은 미(美)이다. 금아의 표현처럼 누에가 명주실을 토하듯이 필가는데로 술술 써지는 모든 글이 수필이다. 편지도 칼럼도 기행문도 수기도 평론도 죄다 수필이다. 이 글도 수필이다. 은유와 상징을 잘 구사하면 멋진 수필이 된다. 생활 언어에서도 은유를 잘 구사하면 멋진 사람이 된다.
수필을 쓰면서 수필을 개념 지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 필자의 지론을 적었다. 평생 수필을 썼다는 분들도 수필의 개념을 말하지 않는다. 않는게 아니라 못한다. 누가 뭐라고 하든 장르(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열심히 쓰고 싶은 것을 쓸 뿐이다.
어떤 분이 퇴고에 대해서 물었다. 이미 책으로 발표한 수필작품은 퇴고할 수 없는가? 신도 완전무결하지 못하여 이 땅에 인간을 지은 것을 후회하며 물 심판, 불 심판을 내려서 자기가 지은 창조물을 퇴고하는데 어찌 인간에게 퇴고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인쇄되었건 말건 퇴고에 퇴고를 거듭할 일이다. 죽을 때까지 내 마음과 내 표현을 퇴고하는 길이 작가의 길 곧 길 없는 길을 걷는 수필가의 길이라는 생각이다.
가르치는 글은 수필이 아닌가? 들리는 게 묘음이고 보이는 게 관음인데 천지만물에 가르치는 소리가 아닌 소리가 어디있던가? (2022.9.19)
추신) 로베스피에르는 반혁명분자로 의심되면 모조리 단두대로 올려 구 시대의 사상을 댕강댕강 잘라버리면서 세상을 혁신하려고 덤벼 들었지요. 혁명보다 더 무서운 게 전쟁이지요. 혁명을 당하지 않으려면 더 많은 생각을 소통하고 인류 정신세계의 외연을 넓혀야 해요. 현대문명은 전 세계 인류를 하나로 연결하는 소통의 다양한 수단(인터넷, 유튜브, 카톡, 문자 등등)을 개발해 놓고 있지요. 더 많은 소통과 정보의 교환이 혼돈을 일으키는 부작용도 있겠지만 현대의 인류는 인쇄술과 종이의 발명에 비교될 수가 없도록 빠르게 과거의 無明에서 크게 대오각성해서 자기 자유의지로 단두대가 없는 광명의 삶을 열어 나가고 있는 중이라 생각 합니다.
묵은 관념의 세상을 수호하려는 무당 모화와 새로운 관념의 세상을 열어가려는 그의 아들 예수교 전도자 욱이가 겪는 인간 정신세계의 갈등을 김동리는 그의 단편 <무녀도>에서 잘 그려내고 있지요. 이 여름 독서 피서법을 택하신 분들에게 김동리의 <무녀도>를 추천합니다. 양서을 읽는 것은 영혼의 양식을 풍부하게 하는 부자가 되는 지름길/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