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17주일 다해
기도의 힘, 하느님 사랑의 표징인 기적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성서의 말씀은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말하는데 문제는 하느님에게 있지 않고 인간에게 있습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실 자세가 되어 있고 열린 마음으로 우리들을 향하고 계시지만 우리들은 마음의 문을 닫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기도하기에 그 기도가 진정한 기도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에서 구하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간청은 의인 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그리고 10명의 숫자까지 내려가면서 하느님의 도움을 청합니다. 하느님은 끝까지 인내로이 아브라함의 청을 거절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10명의 의인도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기도의 중재적 힘은 우리의 관심 자체와 한계를 훨씬 넘어섬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거의 거리낌없이 표현되고있는 듯한 기도의 대담성은 아브라함이 하느님께서 아무 것도 거절하실 수 없을 만큼 무한히 깊은 '신앙심'을 갖춘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이 말씀(18,20-32)을 통해 참된 '기도자'는 오직 거룩한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떤 방법으로든 하느님과 진실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기도는 우리 삶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생활 곧 슬픔과 기쁨이 기도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기도는우 리가 하느님과 만나는 방법이고 수단입니다.
루가 복음에서나오는 주님의 기도(11,1-13)는 우리가 살아야 할 길이 어떤 길인가를 잘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이름 자체가 구원을 주시는 샘물이며 사랑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신뢰와 애정으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바로 기도의 시작임을 알게 해줍니다. 이 기도는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으로 하는 기도가 바로 그분께서 원하시는 기도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러한 기도에 임하기 위해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것이다."(마태 6,6)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영성의대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을 탐구하는 데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지상의 것을 멀리하는 것이며 둘째는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울러 "가까이하기 어려운 진리와 함축성 깊은 말씀에 귀를 기울여라. 다른 아무것에도 마음의 만족을 찾으려하지 말고 그대가 알아야 할 이상의 것을 맛보려고 하거나 알아들으려 하지 말고 오직 신앙과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라." 하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기도는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찾지 않고 하느님을 찾으며 자기 만족이 아니고 하느님의 뜻을 채워드리고자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자기를 떠나서 오직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기도가 이루어진다면 그 기도는 완전한 기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청원을 올려 청원이 이루어져 우리 마음의 만족을 얻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그분께 맡겨드린 채 바치는 감사와 흠숭의 기도, 이 기도야말로 우리가 주님께 바쳐야 할 선물입니다
기도의 힘, 하느님 사랑의 표징인 기적
오늘날 이 시대에도 다음과 같이 말하며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 혹시 신이 내게 기적을 보여 준다면 그때는 믿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런 불신앙을 가진 이들은 정작 기적을 본다 해도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으며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다면 굳이 표징이 없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기적 자체가 믿음의 대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이 우리가 기적을 믿지 않는다거나 허투루 여겨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조건으로 기적을 요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일본의 영적 멘토 스즈키 히데코 수녀님이 들려주는 생생한 증인입니다.
2004년 말, 나는 수마트라 지진으로 쓰나미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태국을 방문했습니다. 쓰나미의 엄청난 공포를 겪으면서도 목숨을 건진 사람들을 여러 명 만나,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분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힘이 되어 준 것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젊은 일본인 여성이 대답했습니다.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다고 느낀 순간, 매일 아침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나한테는 기도해 주는 사람이 있다’라는 확신이 저를 구해 주었어요.”
프랑스 여성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커다란 파도의 무서운 기운을 등 뒤로 느끼면서 산으로 도망치고 있을 때, 나는 날마다 성당에서 바쳐지는 기도의 힘을 느꼈습니다. 그 기도가 내 등을 밀어 줘서 밀어닥치는 파도보다 빨리 도망칠 수 있었어요.”
이 사람들의 체험을 들으면서,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도가 언제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닿아 있음을 확신했습니다.(스즈키 히데코, “행복을 발견하는 시간” 참조)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을 때, 그 기적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셨던 것은 고통에 시달리는 인간 불행에 대한 하느님의 연민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기적은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는’ 표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 안에서 사랑을 드러내는 표징으로써 기적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적을 믿고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출처 : 2015 사순묵상 - 이루신 일 놀랍네, 김포(미래사목연구소)]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곧 주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바칠 때 영적, 물적 모든 바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충만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하늘'만도 아니고 '땅'만도 아닌,하늘과 땅이 함께 일치되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당장 필요로 하는 의·식·주의 문제 곧 인간 생존의 문제는 오늘, 여기서 우리가 잘 살고, 잘 먹고 편안히 지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현재의 삶을 바탕으로 해서 보다 높고 고귀한 가치의 완성과 지향을 위해, 즉 인간다운 삶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몸부림인 것입니다. 우리의 일방적인 만족만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는 신앙도, 사랑도 없는 껍데기의 기도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씀처럼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고 신뢰하는 신앙의 자세로, 그리고 그분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사랑 안에서 우리의 기도는 완성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인간들 사이의 용서와 화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죄를 항상 용서해 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용서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화해의 참 기쁨 속에서 일치를 느끼고 아버지께 모든 일에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사랑스런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