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3부 일통 천하 (153)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 17장 범수(范睢)의 복수극 (5)
- 장경(張卿).
진소양왕(秦昭襄王)이 범수를 부를 때의 호칭이다.
그는 범수의 이름이 장록인줄로만 알고 그렇게 칭한 것이다.
진소양왕의 범수(范睢)에 대한 신임과 총애는 대단했다.
날마다 궁으로 불러 천하 패업에 관한 일을 의논했다.
그렇게 2년여가 흘렀다.
범수(范睢)는 이제 진소양왕이 자신에 대해 추호도 의심이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말고기를 쇠고기라 해도 믿어줄 정도였다.
'이제 내부의 일을 정리할 때가 왔다.'
어느 날, 범수(范睢)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진소양왕에게 낮은 음성으로 아뢰었다.
"지난날 신이 산동에 있을 때 제(齊)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 제나라에는 맹상군(孟嘗君)만 있을 뿐 제나라 왕은 없다. 그런데 함양에 와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들었습니다.
- 진나라에는 선태후, 양후(위염), 화양군, 고릉군, 경양군만이 있을 뿐 진(秦)나라 왕은 없다."
"대왕께서는 어째서 이런 말이 항간(巷間)에 나돌고 있는가 그 이유를 아셔야 합니다.
모름지기 나라의 정사를 마음대로 하는 것을 왕이라 하며, 사람들에게 이익과 해를 줄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을 왕이라 부르며,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위력을 지닌 사람을 왕(王)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진(秦)나라는 어떻습니까?
대왕의 모친이신 태후(太后)는 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양후(穰侯)는 나라 일을 왕에게 보고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양후의 당(黨)인 화양군과 고릉군과 경양군마저 자기들 멋대로 백성들을 벌주고 살육하는 행동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래서야 어디 진(秦)나라에 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기려지신(羈旅之臣) 장록은 아뢰겠습니다.
왕께서 일통천하 할 뜻을 버리지 않으셨다면 왕으로서의 자리부터 확고히 다지십시오.
그것만이 대왕의 자손이 만세 후에까지 진(秦)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길입니다."
이말을 들은 진소양왕(秦昭襄王)은 머리끝이 쭈뼛 섰다.
"실은 나도 전부터 그 점을 염려했었소. 어찌하면 좋겠소?“
"간단합니다. 그들의 벼슬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함양성에서 추방하십시오.“
"선생의 가르침에 따르겠소."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신속히 움직였다.
먼저 군부에 경계령을 내린 후 승상 위염(魏冉)을 불렀다.
"외숙께서는 그동안 나라 일을 돌보느라 많은 수고를 하셨습니다.
이제 기력도 쇠진하셨으니 승상의 인(印)을 내놓고 식읍인 도읍(陶邑)으로 내려가 여생을 편히 보내십시오."
위염에게는 파직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위염(魏冉)은 속으로 분노했으나 때가 너무 늦었다.
어느새 군부는 진소양왕과 범수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앗,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승상의 인수를 반납한 후 도읍(陶邑)으로 내려갔다.
이때 위염(魏冉)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도읍으로 옮겨갔는데 짐을 실은 수레가 1천 수레가 넘었다.
이어 며칠 후에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선태후를 심궁(深宮)으로 옮겨 나라 일에 일절 관여하지 못하게 했다.
그 심복인 화양군(華陽君), 고릉군(高陵君), 경양군(逕陽君)도 다 함곡관 밖으로 추방했다.
이로써 진(秦)나라 조정에는 선태후를 비롯한 외척 세력이 일시에 사라지고 새로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은 마침내 조정으로 나가 신료들에게 선포했다.
- 장록(張祿)을 새 승상에 임명하노라!
아울러 응읍(應邑)을 식읍으로 하사하고 응후(應侯)라는 작호도 내려주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범수를 일컬어 '응후'라고 불렀다.
객경(客卿)에 오른지 2년 후인 BC 266년(진소양왕 41년)의 일이었다.
범수(范睢)가 진나라 승상에 오른 후에 재미난 일화가 있다.
자신을 모함하여 고발한 위나라 대부 수가(須賈)와 자신의 목숨을 앗으려 했던 위나라 재상 위제(魏齊)에 대한 복수극이다.
범수(范睢)는 승상이 되자 곧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정책'을 구체적으로 입안하기 시작했다.
- 한(韓)나라와 위(魏)나라부터 치리라!
이러한 소식은 즉각 위나라에도 전해졌다.
그때 위나라 재상은 변함없이 위제(魏齊)였고, 수가(須賈) 또한 대부로서 여전히 외교를 담당하고 있었다.
재상 위제(魏齊)가 위안리왕에게 대안을 아뢰었다.
"듣기로 이번에 진나라 승상에 오른 장록(張祿)은 바로 우리 위(魏)나라 사람이라고 합니다.
장록에게도 부모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있을 터. 사신을 보내어 예물을 바치고 화평을 청하면 그가 어찌 무력으로써 고국을 치려 들겠습니까?"
위안리왕(魏安釐王)은 위제의 의견에 따라 중대부 수가를 사신에 임명했다.
수가(須賈)는 예물을 잔뜩 싣고 진나라를 향해 떠나갔다.
함양에 당도한 그는 객관에 머물며 승상 범수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 따로이 장(張) 승상을 만나뵙고 긴밀히 의논드릴 일이 있습니다.
통지를 받은 범수(范睢)는 빙긋 웃었다.
'이제야 지난날에 진 빚을 갚을 때가 왔구나.'
범수(范睢), 다 떨어진 옷으로 갈아입고 신분을 숨긴 채 인적 뜸한 길을 통해 객관으로 찾아가 수가(須賈)를 만나다.
<사기(史記)>는 범수의 원수 갚음 시작을 이렇듯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고 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