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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이야기 - 12세기 유럽, 축성생활의 전성기] 베르나르도 성인
중세와 축성생활의 만개
누가 중세를 암흑의 시기라 했던가. 중세 수도자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교회도 없었다. 우리가 현재 누리는 신앙생활 또한 중세 축성생활에 크게 빚진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러한 전통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씨앗을 뿌린 사람이 있다면 가꾼 사람이 있고 열매를 수확하는 기쁨을 누린 이도 있다.
시토회와 카말돌리회, 카르투시오회 등을 설립한 1000년대 선각자들이 씨앗을 뿌린 이들이라면, 1100년대에는 그 씨앗을 싹틔우고 줄기를 뻗어 나가게 한 인물이 나타난다.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Bernardus Claravallensis, 1090-1153년)이 그 주인공이다.
베르나르도 성인, 시토회와 그 유산
가장 이상적인 가톨릭 수도자의 모습’이라 하면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가 떠 오르는가? 혹시 김수환 추기경이 생각나는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사제의 얼굴을 떠올릴 수도 있고, 봉쇄 수도원 수도자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본 위대한 성인의 모습을 상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가장 이상적인 축성생활(수도자)을 꼽으라 하면, 내가 속한 수도회의 사부 루이지 마리아 몬티와 함께 베르나르도 성인을 떠올린다. 20세기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영성 신학자인 데이비드 놀즈는 성인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한다.
‘시토회 수도승이자 끌레르보의 아빠스 베르나르도는 거의 30년 동안 서방 교회 안에서 교황의 명칭을 지니지 않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오히려 여러 위대한 교황이 끼친 영향력보다도 더 컸다. 그의 인격은 참으로 그 시대의 정상에 있었다. 사람들에 대한 친화력과 환대의 능력, 윤리적이고 영성적인 위대한 가치, 문학적이고 웅변가다운 재능, 현세적 야심과 물질적인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자신에 대한 큰 신뢰, 강철 같은 의지, 전술적 능력과 결합된 진실성, 형제들에 대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을 지녔던 것이다’
오늘날 영화 ‘어벤져스’의 등장인물에 비유하자면 베르나르도는 캡틴 아메리카 같은 인물이다. 그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당시 대세는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이었다. 베네딕토회 소속의 자율적인 조직체로 10세기 무렵 부르고뉴의 아키텐 공작 기욤 1세의 승인을 받은 이 수도원이 한 개혁은 유럽 곳곳 약 이천 곳으로 확산했다. 그 흐름은 베르나르도 이후 시토회로 재편된다.
1118년에 이미 첫 시토회 계열 트루아 퐁텐 수도원(Abbaye de Trois-Fontaines)을 설립했으며, 곧이어 예순여섯 곳에 대수도원(abbatia)이 설립되었다. 1153년 그가 선종할 즈음에는 이미 이탈리아와 덴마크 등 전 유럽에 343개의 시토회 수도원이 생겨난 뒤였다. 시토회가 유럽 그리스도교의 영적 중심지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후에도 시토회 수도원은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 스위스, 스페인, 아일랜드, 헝가리, 포르투갈, 스웨덴, 노르웨이, 폴란드로 뻗어나갔다. 거기에서 위대한 인물도 속속 나타났다. 모두 베르나르도의 영향이다.
베르나르도는 지신의 제자들이 아빠스와 주교, 추기경이 되는 모습을 보았으며, 직속 제자인 베르나르도 파가넬리가 에우제니오 3세 교황으로 탄생하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그는 교황이 된 제자에게 “교황의 진정한 권위는 지배와 혼동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의 봉사로서, 봉사를 위한 대리로서 실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한 시대를 움직인 교황의 영성에 그가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을지를 감안하면 그는 단순히 신비 사상가를 넘어서는, 교회의 큰 스승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영향력은 다른 수도회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모범은 앞서 살펴본 바 있는 노르베르토 성인의 프레몽트레회 규칙서와 성전 기사회의 규칙서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후 시토회는 12세기 후반까지 계속 성장했다. 베르나르도의 초창기 협력자였던 셈프링햄의 길버트가 1131년, 일곱 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봉쇄 관상 공동체를 설립하고서부터 여자 수도원 또한 수없이 늘어났다. 베르나르도의 정신을 따르는 여성들의 재속수도회와 은수생활 수녀회가 동시에 늘었다.
그중 대표적 인물은 최초의 작곡가이자 오페라의 시조로 알려진 빙엔의 힐데가르트 성녀이다. 이밖에도 쇼나우의 성녀 엘리사벳, 스페인 라스 우엘가스의 수녀원장 등이 있다.
궁극의 빛인 영성과 봉헌
이처럼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영성이 자리한다. 베르나르도는 시대의 개혁가, 조언가, 카리스마적 지도자, 설교가이자 위대한 신학자였지만, 그를 가장 빛나게 하는 것은 영성에 바탕을 둔 봉헌의 삶 자체였다.그는 극단적 한계까지 밀고 나가는 청빈을 강조하였고, 동시에 수도원 내부에 화려한 장식을 일절 금했다. 또 독지가들의 기부와 십일조, 사유재산의 소유와 수도원 재산의 임대를 포기하였고, 모든 성당을 수도회의 수호자인 성모님께 봉헌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그는 축성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직무 사제직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베르나르도는 예로니모의 말을 인용했다. “수도자의 직무는 가르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이나 세상에 대해 울며 탄식하는 데 있다.”(Monachus non doctoris, sed plangentis officium, qui vel se vel mundum lugeat)는 것이었다.
성인은 축성생활을 완성하려면 이집트 사막의 고대 교부들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와 관련해 베르나르도가 택한 축성생활 방법론은 다음의 3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 1단계: 하느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겸손과 무아.
▶ 2단계: 그럼에도 우리는 하느님의 피조물이며, 그분께서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자각. 구원에 대한 강한 열망.
▶ 3단계: 하느님께 헌신하는 사랑. 그리고 나와 하느님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하느님 안에서의 완전한 합일.
베르나르도는 하느님과 합일을 이루려면 가장 밑바탕에 겸손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유명한 트라피스트회, 곧 ‘엄률 시토회’(Ordo Cisterciensis Strictioris Observantiae)가 17세기에 나타났다. 이는 시토회의 본디 정신으로 돌아가 엄격한 수련에 임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시토회에 뿌리를 둔 이들이 전 세계적으로 발휘하는 큰 영향력을 볼 때 베르나르도 성인과 시토회가 가톨릭 교회에 얼마나 보석 같은 존재인지 알 수 있다.
[수도원 이야기 – 새로운 물결]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개혁
우산 장수가 어느 날 짚신 장수가 되려 한다면 그는 적응주의자이거나 기회주의자일 것이다. 자신의 일에 대한 가치와 철학이 없고 다만 변화에 대한 적응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산 장수가 기존의 고리타분한 우산이 아닌, 좀 더 저렴하고 안전하고 새로운 디자인의 우산을 개발했다면 그것은 개혁이다.
천 년의 마무리와 개혁
이 관점을 서기 1000년 무렵의 수도원 개혁에 대입해 보면, 당시 수도원은 새로운 우산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우산 장수였다. 올바른 개혁의 조건을 만족시켰다는 뜻이다.
샤를마뉴 대제 이후 유럽이 봉건 사회로 접어들면서 수도원은 지역 영주에 따른 세속화의 바람을 피할 수 없었으며, 수도원장의 수도원 재산 남용 또한 심심찮게 벌어졌다. 또 왕권 약화에 따른 이민족 침략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이에 첫 번째 천년기의 끝을 전후하여 유럽의 수도원은 동시다발적으로 개혁에 돌입한다. 첫 작업은 세속 권력과의 인연을 끊는 것이었다. 대표적 개혁 운동은 크게 세 군데에서 일어났다고 보는데, 오늘날 벨기에 지역에서 활동한 성 제라르도의 개혁, 룩셈부르크 남쪽 지역, 그리고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서 시작한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이 그것이다.
이러한 자극에 움찔하며 몸을 움직인 인물이 있다. 바로 그레고리오 7세 교황(1073-1086년 재위)이다.
카노사의 굴욕에 담긴 실제 의미
1077년 1월 21일 알프스 산악지대 카노사 성 앞. 역사는 그해 겨울 추위가 유난했다고 전한다. 눈이 무릎까지 쌓인 성문 밖에서 한 남자가 맨발인 채로 벌벌 떨며 서 있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였다. 황제는 그레고리오 7세의 뜻에 거스른 죄를 참회하며 사면을 청하는 중이었다. 벌써 사흘째, 동사(凍死)까지 각오한 참회였다. 그 정성이 교황의 마음을 움직였다. 결국 황제는 사면을 받고 제위를 보전할 수 있었다.
이를 두고 역사책은 대부분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기록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이는 1636년 청나라에 패한 인조가 삼전도에서 무릎 꿇은 것과 같은 그런 ‘진짜 굴욕’ 사건이 아니다. 당시 민중은 이 사건을 굴욕이 아니라 ‘승리’로 인식했다. 여론이 황제보다는 교황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민중은 그레고리오 7세의 다양한 개혁 정책이 탐욕스러운 황제의 세속 권력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황이 카노사에서 거둔 승리는 교회의 승리, 신앙의 승리였으며, 동시에 세속 지배 계층에 대한 민중의 승리였다.
청빈과 정결의 해이
‘그레고리오 개혁’은 그레고리오 7세의 이름을 바탕으로 하지만 실제로는 1046년부터 시작해 그레고리오 7세 교황 이후까지 지속된 모든 개혁을 일컫는다. 이 개혁의 초점은 교회의 외부 문제와 내부 문제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교회의 내부 문제, 곧 성직매매와 문란해진 독신제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먼저 성직매매를 보자. 조선 시대에 양반의 지위를 돈으로 사는 사례가 있었듯, 11세기 유럽에서는 성직을 돈으로 사는 사례가 있었다. 심지어는 대주교가, 선발된 주교 후보자의 서품을 거행하면서 돈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성직매매는 뿌리 뽑아야 하는 폐단이었다.
교회 안의 더 심각한 문제는 문란해진 독신제였다. 긴 박해가 끝나자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하고자 정결을 찬양하며 금욕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과정을 앞서 살펴보았다. 자연스레 교회 안에는 정결과 독신을 추구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사제 독신제를 의무화한 것은 306년 스페인 엘비라의 지역 시노드였다. 이 시노드에서는 그 지역 성직자들의 독신 의무를 결정하였고,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모든 성직자의 의무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렇게 찬양되고 잘 지켜지던 독신제는 서기 1000년을 전후해 균열이 생긴다. 사제가 농사 지어야 하는 상황, 그래서 가정을 꾸리지 않으면 기본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던 상황 등이 사제 독신제를 흐트러트리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성적 문제와 관련해 느슨해진 사회 문화, 성직자에 대한 교육의 미비, 성소가 없는 이들을 교회 직무에 임명했다는 것 등도 그 원인일 수 있다.교회 규율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분명 문제였다. 성직자가 여성과 관계했다는 문제만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생긴 자녀에 대한 문제, 그들에게 분배되는 유산, 이와 관련한 교회의 재산 관리, 이 밖에도 사목의 공백 등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교회 개혁과 축성생활의 체계화
이에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칼을 들었고 개혁 수도원이 그 의지를 뒷받침했다. 개혁적 투쟁에 나설 수 있는 사람으로는 세상의 재물이나 권력에 초연할 수 있는 수도자가 적격이었다. 이에 수도원들은 교황의 명령에 따라 성직매매를 없애고자 하는 최전선의 전사로 활동했다. 특히 그레고리오 개혁 이후 전통을 따르는 다양한 수도원이 잇달아 나타나면서 성직매매와 사제들의 쇄신 운동에 불을 지폈다.
동시에 수도원의 틀을 만드는, 이른바 제도화 작업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제1, 2차 라테란 공의회(각각 1123, 1139년)는 수도자와 성직자의 축성생활 형태를 모두 보호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수도자들에게는 성 베네딕토, 성직자들에게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규칙서를 적용하도록 하였다.
한편 교회 내 폐단을 청산하고자 수도자들도 사목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성직자들보다는 수도자들이 더 열심히 살았고 따라서 교회 개혁에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역 성직자들도 손 놓고 바라보지만은 않았다.
개혁 바람이 강하게 불던 시대였기 때문에 재속 사제와 지역 성직자 모두가 힘을 모아 개혁을 도모했고, 교회는 가능한 한 이들을 황제와 영주의 간섭에서 보호하고자 노력했다. 동시에 축성생활에 대한 법적 규정을 마련하는 작업도 함께 이뤄졌다.
그렇다 보니 많은 형태의 축성생활이 이 시기에 기원을 두기도 한다. 의전 사제단이나 재속 사제회, 은수자, 사도적 설교가와 같은 삶의 형태가 이때 법적 형식을 갖추었고 오래된 수도원들도 수도 형식을 새롭게 제도화했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개혁 결과물로 모범적인 수도회들이 나타났다. 시토회, 카르투시오회, 트라피스트회 등이 그들이다. 다음 달에는 산텐의 노르베르토 성인이 1120년 프랑스 북동부의 랑 인근에 설립한 프레몽트레회를 살펴볼 것이다.
[수도원 이야기 – 축성생활의 정착과 발전] 베네딕토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축성생활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고, 이는 다시 축성생활 공동체의 설립 열풍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이가 축성생활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되어 이집트를 탈출한 뒤에도 광야에서 우왕좌왕했고 이때 하느님께서 십계명을 내려 주신 것처럼, 세속에서 탈출한 수도자들에게도 법이 필요했다. 일상에서 탈출은 했지만 나약한 인간인 만큼 마음을 바로잡아 주는 틀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중재자가 모세였다면, 6세기 초 서방의 측성생활자와 하느님을 연결할 중재자는 베네딕토였다.
로마를 뒤로 하고
베네딕토는 480년 무렵 이탈리아 중부의 농촌 마을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농촌이긴 했지만, 경제적으로 약간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부모의 허락을 얻어 수도 로마에서 유학하게 되었다. 로마로 향하는 베네딕토의 마음은 들떠 있었다. 학문과 신앙의 중심지 로마에서 많은 것을 얻고 배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열의는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도 500년이 가까웠다. 조선왕조도 그랬지만 500년이라면 자칫 해이와 이에 따른 쇠퇴를 부를 수도 있을 만한 긴 시간이다. 당시 로마도 그러한 경향이 팽배했다.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나태와 향락의 기풍이 만연했다. 배울 것이 없었다.
베네딕토는 절망했다. 그는 엔피데라는 곳으로 장소를 옮긴다. 그곳에서는 적은 수의 사제들이 경건한 공동생활을 했다. 이제 환경이 바뀌었다. 베네딕토는 만족했다. 나날이 사제들과 함께 기도하고 묵상했다.
유혹, 고독과 난관
그러던 어느 날부터 베네딕토를 통해 여러 기적이 일어났다.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때 베네딕토의 반응이 의외다. 그는 기적에 대해 퍼지는 소문을 고통으로 여겼다. 베네딕토는 사람이 찾아올 수 없는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꼭꼭 숨었다.
이 과정에서 베네딕토는 악마로부터 큰 유혹을 당한다. 특히 정결을 위태롭게 하는 유혹이 심했다. 이에 베네딕토는 옷을 벗고 가시덤불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뒹굴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제야 악마의 유혹이 물러섰다고 한다. 이런 온수 생활은 3년간 계속되었다. 완전한 고독 속에서 명상만으로 보낸 나날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베네딕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목동을 모아 교리를 가르쳤다. 드디어 세상으로 한 발 나온 것이다. 베네딕토가 목동들을 가르친다는 소문이 퍼지자 참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몰려들었다. 베네딕토는 이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공동체를 만들이 함께 생활했다.
어느 날 인근의 수도원 원장이 서거했다. 그러자 수사들은 베네딕토를 찾아와 후일 원장에 되어 주기를 청했다. 베네딕토는 간청에 못 이겨 마침내 수락한다. 그리고 원장이 되자마자 엄격한 축성생활을 요구했다. 수도원 개혁에 나선 것이다.
타성에 젖은 일부 수도사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지금까지 잘 생활해 왔는데, 갑자기 엄격한 수도원장이 와서 우리를 못살게 군다.”고 수군거렸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결국 일을 내고 만다. 점심 식사 때 독약을 넣은 포도주를 권한 것이다. 그런데 베네딕토가 포도주를 마시기 전 성호를 긋자 잔이 깨졌다. 이 이야기는 베네딕토의 초기 수도원 생활이 얼마나 큰 고난 속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어쨌든 그러는 사이 수도자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 모두 베네딕토가 성덕으로 이끈 결과였다. 수도원 하나로는 모든 수도자를 수용할 수 없게 되자, 베네딕토는 수도원 수를 늘려 나갔다. 분가한 수도원에는 신뢰할 만한 성덕 있는 수도자를 원장으로 보냈다.
몬테 카시노와 규칙서
성인은 이후 525년 무렵 이탈리아 나부의 몬테 카시노에서 새롭게 축성생활을 하려고 마음먹는다. 몬테 카시노 인근 주민들은, 그리스 신 아폴론에게 바친 신전이 있을 정도로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다. 베네딕토는 이 신전을 곧장 파괴하고 성덕의 모범으로써 마을 주민을 모두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5년 뒤에는 이곳에 성 요한 세례자 성당과 성 마르티노 성당 그리고 수도원을 세웠다.
실로 서방 수도원의 명실상부한 발상지로 일컬을 만하다. 베네딕토는 이곳에서 금욕 생활, 기도, 공부 그리고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한 명의 원장을 둔 공동체 생활을 규정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이 「규칙서」(Regula)는 오늘날 모든 수도회 규칙의 모태가 된다. 베네딕토가 오늘날까지도 ‘축성생활의 사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규칙서」에 따르면 수도자는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며, 수도원은 주님 섬기기를 배우는 학원이다. 공동생활을 명백히 규정한 이 규칙은 순명을 최대의 덕으로 삼았다. 또 재산의 사유화를 금지했으며, 평생 한 수도원에 머무르기를 요청했다. 나아가 교회의 가르침에 따를 것을 명시하고 특히 전례를 중요시하도록 했다.
눈여겨볼 점은 축성생활의 중심을 ‘성무 일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초대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그러했듯이 수도자의 하루도 기도와 독서와 노동으로 채워졌다. 「규칙서」는 특히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독서)를 하루에 두세 시간 하도록 요구한다.
오늘날의 신앙인에게 베네딕토의 「규칙서」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감동적인 내용을 담은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글을 소개한다. “서방 수도원 제도의 창시자이며, 저의 교황 본명 주보이기도 하신 베네딕토 성인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라며 시작하는 이 글은 성현주 마리아 폴 수녀(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가 번역했다.
“오늘날 진정한 진보를 찾는 데 있어서 우리는 우리 여정에 안내의 역할을 할 빛이 될 수 있는 베네딕토 성인이 쓰신 「규칙서」에 귀를 기울이도록 합시다. 위대한 수도승이신 성 베네딕토는 오늘날에도 우리의 참스승이시며, 그가 세운 학교 교과서인 「규칙서」에서 우리는 참인간성을 잘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한국베네딕도회협의회 엮음, 「교부」(코이노니아 선집 6-1), 들숨날숨, 2017).
평생을 기도와 노동으로 지낸 베네딕토 성인은 547년 3월 21일 선종했다. 마지막 때에 성인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하지만 성인은 침대에 누워 있지 않았다. 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제대 앞에 서서 팔을 벌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 품에 안겼다.
성인의 삶은 입에서 입을 거쳐 당시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많은 신자가 축성생활의 잣대이자 올바른 신앙의 전형이었던 그의 삶을 기억하고 따르기를 원했다. 8세기 말부터 7월 11일을 그의 축일로 기념해 왔으며,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64년 10월 24일 베네딕토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했다.
[수도원 이야기 - 유럽, 축성생활에 눈뜨다] 암브로시오 · 아우구스티노
서방 교회 축성생활의 시작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지역에서 태동한 축성생활(봉헌생활)에 대한 소문은 유럽 대륙의 신앙인들에게 전해졌다. 소문은 곧 관심으로, 관심은 곧 ‘따라 하기’ 열풍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5세기 말이 되면 사막에 기원을 둔 동방의 금욕주의가 서방에 이식되는데 그 언저리에 아우구스티노 성인(왼쪽 사진 참조)이 있다. 그런데 인류 역사는 한 번에 큰 강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앞선 이들이 놓은 돌다리를 하나씩 디디며 건너기 마련이다. 아우구스티노도 한 번에 강을 뛰어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앞서 놓인 돌다리에 돌 하나를 보태었다.
아우구스티노 앞에 돌다리를 놓은 이들은 베르첼리의 에우세비오 성인과 암브로시오 성인, 놀라의 바울리노 성인 등이다. 이 가운데 에우세비오는 성직 수도회를 첫 번째로 창설한 인물이다. 축성생활에 성직 생활을 융합시킨 것이다. 이는 암브로시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축성생활의 원형
서기 340년, 박해가 막 끝난 평화의 시기, 암브로시오는 독일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지적 성취가 남달랐던 그는 성장하여 변호사의 길을 걷는다. 탁월한 사람은 언젠가는 주목받기 마련이다. 그의 뛰어난 학식과 언변에 대한 소문은 로마 제국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정치권에서도 암브로시오를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는 마침내 밀라노 총독 자리에 오른다. 오늘날로 말하면 사법계에서 주목을 받다가 정치권에 발탁되어 도지사에 당선된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고는 종교계의 수장으로 새롭게 급부상한다.
당시는 그리스도교 교리가 정립되기 전으로, 이단이 속출하던 시기였다. 이때 밀라노 주교가 갑자기 사망했는데 곧이어 후임 신발 문제로 심각한 잡음이 일었다. 우여곡절 끝에 암브로시오는 374년 12월 7일, 34세가 되던 해에 세례성사를 받고 주교직에 오른다.
지식인이었던 암브로시오는 주교가 된 뒤 열정을 다해 직무에 임했다. 그의 업적은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지만 여기서는 축성생활과 관련한 내용만 살펴보고자 한다.
암브로시오의 삶은 오늘날 수도자들 삶의 모범이다. 그는 모든 성직자에게 금욕적 쇄신을 요청했다. 스스로도 금욕적 축성생활을 철저히 견지했는데, 기도와 렉시오 디비나, 형제들에 대한 봉사에 노력했다. 단식을 실천하고 순교자들을 공경하며, 특히 신학 정립에 힘썼다. 그는 또 교리 연구와 강론에 전념하여, 가는 곳마다 그의 가르침을 들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성사와 전례에 관한 그의 다양한 저술은 오늘날 교회를 가능하게 한 초석이 된다. 암브로시오는 자선 실천에도 소홀하지 않았는데, 가난한 이들을 위해 가진 것을 내어 주었다. 오늘날 수도회들의 다양한 카리스마가 모두 그의 삶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인 셈이다.
암브로시오의 삶은 많은 이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저서 「동정녀」(De virginibus) 등은 많은 여성 성소를 이끌어 냈으며, 밀라노, 베로나 등지에서 많은 남녀 수도원이 설립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서방 교회 축성생활의 아버지
이 과정에서 축성생활과 관련하여 위대한 영적 아버지가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아우구스티노이다. 그는 친구 알리피오 성인과 함께 387년 4월 13일 파스카 성야에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오의 가르침을 통해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388년부터 고향인 타가스테에서 축성생활을 시작했다. 기도, 단식, 선행을 하는 이 공동체는 남자 수도 공동체로서 철저한 관상 생활을 하였다.
이후 391년 그는 이 공동체를 알리피오에게 맡기고 히포로 가서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얼마 뒤 알리피오는 공동체의 생활을 규정한 10개 항목의 간단한 「수도 규칙서」(Ordo Monasterii)를 가져오는데, 아우구스티노는 첫머리와 끝부분에 영성에 관한 자신의 말을 덧붙여 인가해 주었다. 사제품을 받고서도 사제 생활과 축성생활을 병행할 수 있었던 그는, 396년 히포의 교구장이 된 뒤에도 계속 축성생활을 하였다.
400년경 「계명집」(Praeceptum)을 작성했고 이후 이 두 개의 규칙서가 필사되어 유포되었는데, 놀라의 바울리노를 통해 이것들이 「규칙서」(Regula, 종종 Regula ad servos Dei[하느님의 종 규칙서]로도 알려짐)라는 이름으로 전파되었다. 이 규칙서는 서방 교회에서 첫 축성생활 규칙서로 일컬어지는데, 전체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도 겸손, 둘째도 셋째도 겸손’이다. 이 규칙서가 그리스도교 축성생활의 초석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하느님과의 친교,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 사도적 가난과 헌신, 봉사와 친절의 마음 등이 모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규칙서 구성은 1장 축성생활의 목적과 공동체 생활, 2장 기도 생활, 3장 음식과 청빈, 4장 정결, 5장 공동 소유 문제, 6장 형제애, 7장 장상, 8장 끝맺음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아우구스티노는 고행과 단식, 정결에 대한 문제를 상세히 다루었다.
“아무도 자신을 위한 일을 하지 말고 모든 일을 공동체를 위해 할 것이며 자신을 위한 개인 일을 할 때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더 기쁘게 할 것이다. … 개인의 것보다 공동체의 일을 더 염려하는 그만큼 너희가 향상됨을 깨달아서, 영원히 남을 사랑이 지나가 버릴(현세 생활) 필요에 쓰일 모든 것을 압도하도록 할 것이다”(「봉헌생활의 기원」, 허성석 엮음, 분도출판사. 2015).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사도 4,32-35 참조)를 지향하는 이 규칙서는 뒤이어 나올 「체사리오 규칙서」와 「베네딕토 규칙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축성생활과 관련한 아우구스티노의 저작은 이밖에도 히포의 수녀 공동체에 보낸 편지(편지 210과 211번), 수도 사제들에 관한 글(강론 355, 356번), 「수도승의 노동」(De opere monachorum), 「거룩한 동정 생활」(De sancta virginitate) 등이 있다. 또한 고백록(Confessiones)에 나타난 축성생활 관련 내용도 중요한데, 사제로서의 축성생활, 주교로서의 축성생활 등을 꼽을 수 있다.
박경리의 「토지」에서 한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동생이 지원병으로 나갔으면 형은 더욱 모범을 보여야 하거늘.” 이때의 모범(模範)은 ‘본받아 배울 만한 대상’이다. 그런데 한자를 바꿔 동음이의어 모범(暮帆)을 만들 수 있다. ‘저녁에 돛을 달고 가는 배’라는 뜻이다.
아우구스티노는 말과 글, 삶 전체를 통해 서방 축성생활의 모범(模範)이었다. 또한 그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큰 돛에 의지해 파도를 뚫고 우리보다 앞서 항해한 배, 곧 모범(暮帆)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