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1-14
엘리야의 최후 / 최승윤 목사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에는 엘리야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여정, 마지막 순간이 어떠했는지를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나라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들어올리셔서 하나님의 나라로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생각한 아합의 최후와는 너무나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받아서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대 사람이요, 그와 대면해서 사역했던 엘리야는 놀랍고 영광스러운 최후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아합이 맞이했던 최후의 순간은 그가 살아온 전 인생의 압축입니다. 엘리야의 최후 또한 그가 살아왔던 삶이 어떤 삶이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엘리야 개인 신상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것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은 엘리야가 디셉 사람이라는 것뿐입니다. 길르앗이라는 땅에 있는 디셉 마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그의 집안은 무엇을 하는 집안인지 전혀 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경로를 거쳐서 선지자가 되었는지, 몇 살부터 선지자 사역을 시작했는지, 그 어떤 것도 알려주고 있지 않습니다. 열왕기상을 기록한 역사가는 엘리야 개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보입니다. 열왕기상의 저자가 지대한 관심을 쏟아서 기록한 것은 아합 왕의 시대가 하나님을 떠나서 얼마나 악하고 타락한 시대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요, 그렇게 악하고 타락한 시대에 엘리야 선지자는 어떻게 사역을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대가 악하면 악할수록, 타락하면 타락할수록 그 시대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더욱 깨어 있어야만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특징과 정신과 흐름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하고, 보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시대와 사회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와 메시지가 성경에서 들려주고 있는 가르침과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구분할 수 있으려면 세상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면밀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 작동 원리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르면 모르는 만큼 속고 살 수밖에 없고, 세상에 휘둘리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을 제대로 알려면 또한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하나님 말씀을 모른다면, 기준점, 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알고 있으나 세상을 알지 못하면 자칫 잘못하면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과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을 알고 있어야 하며,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허공 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님을 알고 계십니다. 수많은 도전과 유혹 속에,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 가운데서 힘들게 싸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들만의 관심사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알려 주시기를 원하고 계시는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는 상상력의 근거는 출애굽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게 되거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애굽에서 종노릇하며 살다가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출애굽 사건을 잊지 말고 기억하고 있어라. 자녀들에도 그 사건을 이야기 해주어라. 유월절 예식을 치르면서 자녀들이 유월절의 의미를 묻거든 너희들은 출애굽의 역사를 너희 자녀들에게 상세하게 알려주어라” 이것을 계속해서 들려주셨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단 한 번 일어난 사건이지만 시대가 흘러가면서, 살아가는 환경과 여건이 달라지고, 부딪치는 사건이 다르다고 할찌라도 출애굽 사건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고, 해석하고, 또 해석하면서 그들은 그 사건 안에서 무한한 메시지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 메시지를 통해서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풀어갔던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이 다스렸던 시대를 단지 몇 가지 윤리적인 타락만을 보고 악한 세대라고 판단한 것이 아닙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바알과 아세라 종교를 퍼뜨릴 때, 무식한 방법으로, 폭력과 억압만으로 백성들에게 강요한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바알과 아세라를 섬길 때,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인가? 어떤 혜택을 입고, 어떤 유익이 있는가? 하는 것을 선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얼마나 손해를 보는 일인지, 얼마나 귀찮고 힘든 일인지, 얼마나 개인이나 나라를 힘들게 만드는지, 여러 가지 채널들을 통해서, 여러 사람들을 동원해서 백성들의 마음과 정신 속에 집어 넣었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듣고 본 것은 바로 아합과 이세벨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의 나라로 만들려는 모든 노력과 모든 시도들 입니다. 그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라고 하니 무작정 반대부터 해야 한다. 그런식으로 막무가내로 나아간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라고 하는 모든 메시지와 제도와 정책을 엘리야는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백성들입니다. 백성들이 우왕좌왕하고,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들도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는 그러한 무서운 현실 속에서 엘리야는 과연 무슨 말씀을 전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믿고 섬겼던 하나님은 과연 어떤 하나님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겠습니까? 지금까지 믿고 섬겼던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셨기에 그 하나님을 떠나서, 그렇게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전했던 말씀은 하나님께서 직접 들려주신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너는 이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서 들려주어라”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언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선지자가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그 이전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듣고, 배웠을 것입니다. 성경에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런 훈련을 받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한 시대를 책임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하나님의 종을 세우는데 아무런 준비도 없는 그런 사람에게 갑자기 말씀을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어떤 자리에 있었든지, 그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신다는 분명한 의식을 갖고 있지 못했던 그 때에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훈련시키시고, 인도해 주셔서 한 시대를 감당할 만한 인물로 키우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랬고, 사무엘이 그랬습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 서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완전히 다른 것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북쪽 이스라엘 나라가 처음 세워졌을 때부터 여로보암이라는 왕에 의해서 우상이 들어오고, 하나님의 종교를 우상의 종교와 혼합시키고, 아무나 제사장을 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장이 되도록 제도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때부터 이스라엘에는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아합 시대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준비시켜 두셨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알도록 하신 것이 아닙니다. 패역한 세대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담대함과 용기와 능력을 갖추도록 준비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준비는 엘리야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준비시키셨다가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패역한 이스라엘과 아합을 향해서 담대하게 전하도록 하셨고, 또한 큰 능력을 주셔서 엘리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너희들이 눈으로 보는 것처럼 놀라운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이시다. 그러니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온전하게 섬기라” 강력하게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패역한 시대에 참으로 외롭게 사역을 했습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의 선지자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있으나 마나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들이 훗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아합 시대에는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오죽 했으면 엘리야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만 달랑 혼자 남아서 아합과 이세벨의 거대한 세력들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참으로 외롭게 사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특심했습니다. 종교적인 열정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그만큼 사랑했던 것이고,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 그만큼 강렬했던 것입니다. 악하고 타락한 아합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을 아는데서 나오는 뜨거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뜨거움과 그 열정으로 엘리야는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 시대 백성들을 사랑했습니다. 비록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살고 있지만 엘리야는 그 시대를 향한 안타까움과 슬픔과 고통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찌해서 이 백성이 이리도 무지할까? 어찌해서 이 백성들이 이리도 완악할까? 어찌해서 이 백성들이 저렇게 쉽게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먹고 마시고 사는가? 엘리야의 가슴은 그런 백성들을 보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이요,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면서 엎드렸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떠나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간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여러분,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전할 때 차가운 마음으로, 냉정한 목소리로, 무섭게 말을 했을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사도 바울은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품고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의 악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 세상을 보면서 그런 심정을 갖게 될 것입니다. 바로 엘리야가 그 시대와 그 백성들을 향해서 갖고 있었던 심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와 같은 삶을 살았던 엘리야가 이제 최후의 순간을 맞게 됩니다. 한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했던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최후의 순간까지 하나님의 인도와 지시하심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지시와 인도하심을 따라서 엘리야는 길갈과 벧엘(아이)과 여리고와 요단을 방문했습니다. 생애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아보기 위해서 이곳 저곳 방문한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가 방문했던 곳, 엘리야가 방문한 순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때 순서를 꺼꾸로 되돌려서
방문을 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그와 같은 움직임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출애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놀라운 은총이요 사건입니다. 애굽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셔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과정은 출애굽-홍해-광야-요단-여리고-벧엘(아이)-그리고 길갈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지금 그 순서를 되돌려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구원을 다시 되돌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엘리야의 시대, 아합의 시대가 하나님께서 구원을 되돌리셔야 할 만큼 하나님을 떠났고, 극심하게 타락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시대에 이스라엘의 소망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이 극심하게 타락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하고, 다시 일으키고,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선지자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이 다스리는 그 악한 시대를 다시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 이외에는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시대를 비추고, 각성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고 풍성하게 전해져야 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요,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할 하나님의 사람들을 준비시키고, 훈련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사역 가운데 힘을 쓴 것이 바로 선지 학교를 세우고, 그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엘리야는 선지학교에서 훈련받고 있는 선지 생도들, 오늘날로 말하면 신학교 학생들을 찾아갑니다. 그들에게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을 말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줄을 아나이까?” (3절)
선지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그렇게 말을 한 것을 보면, 엘리야가 그 사실을 선지 생도들에게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데리고 가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아무런 염려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드러내실 것이니 하나님만을 온전하게 의지하여라”이런 말로 위로를 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끝까지 감당했습니다. 가장 패역한 세대를 살면서 외롭고, 힘들고, 지치고, 어렵게 사역을 했지만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심과 열정을 갖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서 그는 끝까지 달려간 것입니다. 그 결과 엘리야의 최후는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읽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하늘로 들어올려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들어올리신 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가 살아왔던 삶을 그만큼 인정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데리고 가신 것은 엘리야가 살았던 삶이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외로움과 고난 가운데 살았지만 참으로 영광스러운 삶을 살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보여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이 땅 위에 살면서 아합처럼 살지 않고, 엘리야처럼 살아야 한다는 확실한 근거를 오늘 우리는 엘리야의 최후의 모습을 보면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성도들을 위한 삶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보셨을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성도들을 섬기는 삶의 결국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엘리야의 최후의 모습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들은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미래의 삶이 어떻게 진행될지, 어떤 길을 걷게 될지 지금은 모른다고 하더라도 엘리야처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사명을 위해서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저와 여러분들이 걸어가는 믿음의 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 길이 결단코 허망한 길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께서 반드시 영광스럽게 인정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이길 끝에서 우리는 영광의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요, 우리 머리 위에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분명한 사실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기에 저와 여러분들은 오늘 우리가 걸어가는 이길을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열심을 품고 충성을 다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은 목적이 없는 인생이 아닙니다. 세상이 끄는대로 끌려다니는 인생이 아니요, 인생의 좌표와 푯대를 정해서 달려가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들이 사는 목적이요, 저와 여러분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삶의 의미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디모데 후서 4:7절-8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소망을 갖고 계십니까?
이 약속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들의 생애 마지막 순간에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계십니까?
정말 그렇다고, 아멘이라고 대답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사명, 우리가 달려갈 길을 포기하지 말고, 이탈하지 말고, 끝까지 달려갈 것을 결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들려주시는 한 말씀, 한 말씀을 가슴에 채우면서 그 말씀을 따라서 사는 삶이 그날을 준비하는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온 인생의 최종평가는 그날에 명백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의 최후의 승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온 인생을 영광스럽게 인정해 주실 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는 이길에서 수없이 도전해 오고 유혹하는 그 모든 시험과 도전을 믿음으로 견디고, 인내하면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과 시련과 환난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님, 우리에게 힘주시고, 위로해주시며, 끝까지 견딜 수 있도록 해주시는 주님, 우리가 살아가는 이길 끝에서 반드시 만나게 될 우리의 구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 삼아 오늘을 꿋꿋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