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37]
정대화 (鄭大和) - 내조자로서의 한평생
1. 입교 동기 - 2
11 교회는 장로교회 주일학교를 다녔다. 나의 할머니는 문씨인데 독실한 기독교인 집안에서 자라신 할머니는 법 없이도 사실 분이었으며 그런 할머니를 나는 좋아했고 많이 따랐다. 어머니보다 할머니가 더 좋았다.
12 내가 동광초등학교 6학년 때 해방이 되었다. 나는 해주의 수양여중(前 辛町女中)에 다녔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던 1948년 11월에 우리 가족은 월남을 했다.
13 월남할 때 가족 전체가 함께 내려올 수 없어서 1차로 아버지가 먼저 내려오셨고, 2차로 어머니와 남동생이, 마지막으로 내가 월남했다. 감시를 하고 있어 내려오기가 쉽지 않았었는데 나는 돈을 많이 주고 안내원에게 부탁을 하였다. 안내원은 내가 어촌으로 시집을 가는 것으로 꾸몄다.
14 17세였는데 하루 종일 100리는 걸었을 것이며 산마루에 다다르니 해는 지고 어두웠다. 도달한 곳은 어부의 집이었다. 캄캄한 밤중에 어선을 타고 월남한 곳은 옹진이란 곳이었다.
15 그곳에 가니까 고향 장연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바로 부모님이 계시는 서울로 오게 되었다. 3.8선이 금방 풀릴 줄 알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고향에 그대로 계셨다.
16 월남한 뒤 우리는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서 살았다. 나는 숙명여자중고등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다. 학교 분위기는 이북에서와 너무나 달랐다.
17 당시 학생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고 있었는데, 자기 부모가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투옥된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하는 학생도 있었다.
18 무질서한 자유로 인해 혼돈 상태에 있는 남한과 거짓이지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북한의 상황과는 대조적이었다.
19 그러던 중 6.25가 일어났다. 6.25 때 우리는 피난을 가지 못했다. 우리가 명륜동에 살다가 관철동으로 이사를 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어머니는 여동생을 출산했다.
20 그리고 여동생이 태어난 지 1주일 정도 되었을 때 6.25가 일어났던 것이다. 인민군들이 내려왔을 때 이북에서 내려와 남한에 살던 사람들은 노력동원으로 군대에 끌려가기도 하고 군대를 따라다니며 계속 일을 해야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