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자기 우산
이선형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오는데 난데없이 소나기가 쏟아진다. 흙냄새가 피어오르고 금세 바닥이 젖어 번들거린다. 둘러보아도 얼굴 하나 없고 언제 그칠지 몰라 마냥 기다릴 수만 없는 시간대였다. 우산이 없어 급한 대로 구석에 놓인 빈 종이 상자를 접어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집까지 오는데 어깨와 바짓가랑이가 다 젖었다. 빗줄기의 그물망에 보자기 우산에 대한 생각들이 딸려나온다.
엄마에게 보자기가 한때 우산이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아버지가 광산 사고로 세상을 떠 엄마는 남편이라는 우산을 잃었다. 아버지는 동료들을 내보내고 천 길 갱도 속을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아버지의 주검 앞에 함께 일했던 동료는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서른여섯 살 엄마와 눈자라기 막내를 두고 아버지는 어찌 먼 길을 가셨을까.
살림만 알던 엄마가 광산에 취업하였다. 배운 것이나 가진 것 없이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남편 잃은 그곳에 쪼그려 앉아 막노동을 해야 했다. 선광장 컨테이너 벨트에 매달려 갈탄과 분탄 등을 골라내는 일로, 고운 얼굴에 화장품 대신 석탄가루를 바른 것이다. 선광장 일은 피곤에 절여져야 엄마를 놓아주었다. 그렇게 한생을 보냈기에 쉰 살쯤에 양쪽 무릎이 다 망가졌다. 목에 걸린 수건은 땀인지 눈물인지에 젖어 있었다.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는 할머니의 성치 않은 몸이 양철지붕에 빗물 떨어지는 소리를 냈다.
까맣게 탄 비 내리던 날 맏이인 나부터 우산 하나씩 골라 들고 학교로 가면 나중에 나오는 동생에겐 살 부러진 우산만 남았다. 신문지 한 장도 귀하던 시절, 엄마는 보자기를 쓰고 2킬로나 되는 일터로 향했다. 젖은 몸이야 시간이 말려주겠으나 보자기를 쓰고 가는 심정은 무엇으로 말려야 했을까. 비가 오면 나비도 나뭇잎 우산을 쓰고 벌들도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다. 곤충들도 그러한데 엄마에겐 보자기 말고 우산이 없었다.
엄마가 아기였을 때 외할머니가 산후병을 얻어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기 때부터 받쳐 줄 엄마라는 우산을 잃었다. 계모 밑에서 머리 빗는 일조차도 자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불쌍히 여기는 이웃집에 가서 빗질을 하였다 하니 사랑받는 게 뭔지도 모르고 살아온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풍수를 보고 서당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쪼들리는 형편과 새로 온 외할머니한테 태어난 외삼촌이 모든 관심을 가져갔다고 한다. 고아나 다름없이 자라 남편마저 잃은 엄마는 시계추처럼 집과 일터를 오가는 게 삶의 전부였다. 엄마의 앞치마에선 항상 겨울바람 냄새가 났다.
출렁다리를 사이에 두고 마을과 광산이 자리했다. 철길엔 석탄 실은 화물열차가 기적소리를 내며 강을 가로질러 갔다. 다리 밑으로는 검은 강물이 흐르고, 구름이 흘러가고 물고기들도 헤엄쳐 갔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만은 제자리였다. 누군가 출렁다리를 흔들며 지나가고, 다리 위에 쇠로 된 밧줄을 두손으로 꽉 잡고 있어도 광산 쪽을 바라보면 멀미가 났다. 탄 먼지는 폭설처럼 발을 빠지게 했고 까만 바람이 마을을 향해 불었다. 엄마는 비바람 들이치는 곳에서 3교대. 밤 열한 시에 출근하는 날이면 밤새 일을 하고 아침이면 밥을 하러 달려왔다. 나는 반찬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시락을 놓고 가기 일쑤였다. 빈혈로 얼굴이 핼쑥하고 어지럼증이 와 엄마를 걱정시켰다.
탄 더미 같은 구름 속, 그 틈으로 얼비치는 빛같이 자식들을 바라보는 엄마 속은 젖은 보자기 빛일 것이다. 지금은 흔해서 남아도는 우산을 보면 후미진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엄마 생각에 눈가가 먼저 젖는다. 무릎과 발가락 등 여러 차례 수술로 실버카에 의지해 보행하는 엄마, 계단에서 넘어지는 낙상사고도 자식들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감내한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어 놀랐다. 엄마는 장독대 곁에 저절로 나서 자라는 들깨나 결명자 같은 것도 뽑지 않고 가지를 손으로 밀며 다닌다. 사람이 다니는 길목을 차지한 식물에게도 매몰차지 못하다. 그들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때까지 지켜주는 것이다. 결명자는 해가 저물면 잎새를 포갠다. 마치 엄마가 우리를 위해 손 모아 기도하듯.
제대로 된 우산 없이 한생을 버텨온 엄마. 사그랑이가 된 채로 바람벽을 막고 서 있다. 삶의 고독한 순간에 엄마의 보자기 우산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는 힘이 나온다. 우산대를 중심으로 우산살이 모이듯 엄마 곁에 형제들이 머리를 맞대면 어떤 폭풍우도 이젠 두렵지 않다. 우리의 웃음소리에 엄마의 젖은 눈귀가 마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