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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름과 우리말 / 서울 용산의 둔지산
둔지산의 ‘둔’은 산(山)
둔-둠-덤은 모두 외따로 떨어진 산을 의미
용산의 둔지산
서울 용산구에는 대표적인 산이 둘 있다. 하나는 용산(龍山)이란 산이고 다른 하나는 둔지산(屯之山.68m)이란 산이다. ‘용산’이란 산이 구용산의 산이라면 ‘둔지산’은 신용산의 산이라 할 수 있다.
둔지산은 서울 남산의 지맥이 한강으로 이어져 용산구 이태원동과 용산동 일대에 솟은 야트막한 산으로, 현재 미8군과 용산 국방부가 들어서 있어 일반인의 접근이 어렵다. 일제 강점기에 둔지산 일대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용산’이란 이름을 단 시설물들이 들어서면서 용산의 위치를 잘못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미군이 주둔한 이 일대에 용산공원이 들어서고 그 한켠에 대통령의 집무 공간이 마련되어 용산이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조선시대 이 일대에 군량을 조달하기 위한 둔전(屯田)을 두어 둔지산 이름이 나왔다고 하나, ‘둔’은 땅이름에서 언덕이나 산을 말하므로, 그와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이 산 일대에는 새말, 큰말(대촌.大村), 정자말 등의 마을들이 있었는데, 이 마을들을 모두 아울러 ‘둔지미’라고 불렀다. 일제 때 군 기지가 되면서 이곳의 주민들은 근처 보광동과 서빙고 등으로 강제 이주당하였다.
전국에는 ‘둔지미(둔지산)’란 이름이 많은데, 이 이름들은 거의 ‘산- 언덕’과 관련이 있다. 대개 외따로 따로 떨어진 산, 둥그스럼한 모양의 산들이 이런 이름을 달고 있다. ‘둔지’는 ‘둔-둠-덤-담’ 계열의 땅이름으로, 이런 지명은 산지에 많이 분포한다. 이와 연관하여 전북의 대둔산(大屯山)과 전남의 두륜산(頭輪山)의 예를 들 수 있는데, 이런 이름들이 ‘둠’계 지명에 해당한다.
둔지산 일대는 토질이 좋아 조선시대에 벽돌을 생산하였고 명동성당의 벽돌도 여기서 생산된 것이다. 둔지산 동남쪽의 서빙고초등학교 근처에는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사용하는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氷庫)가 있었다. 지금 서빙고니 동빙고니 하는 이름은 여기에 연유한다.
산 남쪽 완만한 평지에는 국립중앙박물관, 용산가족공원이 위치하고 있고, 북쪽 비탈 아래로는 전쟁기념관이 있다.
우리 조상들이 생각한 산줄기 개념
오늘날의 땅을 평야-산지 개념으로만 보면 김포평야에 산줄기가 지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산경수경(山徑水經) 개념을 바탕으로 땅을 이해 왔다. 선줄기는 물을 건너지 않고 물은 산줄기를 넘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대동여지도>와 같은 고지도를 보면 이를 엄격히 반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무리 널빤지와 같은 평평한 평지일지라도 분명히 그 땅에는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면 분기되는 지점이 꼭 있다는 것이고, 그 지점을 이어 나간 것이 바로 '산줄기'라는 이야기다. 산줄기라는 것은 산들이 주욱 이어져서, 있는 그 모양 자체를 말하겠지만. 우리 조상들은 평평한 땅에도 반드시 물이 갈라지는 지점이 있고, 그 지점을 이어나가 한 줄기의 선(線)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산맥(지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지리 개념은 우리의 전통 지리 개점에서 철저히 지켜져 왔고, 신경준의 <산경표>에도 이것이 잘 반영되어 있다.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한 예로, <대동여지도>에 김포평야 한가운데에 문수산까지 이어지는 긴 산줄기가 그어져 있다. 백두대간에서 말하는 한남정맥의 마지막 부분이 김포평야를 지나는데, 그 끝자락에 문수산(文殊山)이 위치해 있다. 말하자면 문수산은 한남정맥의 끝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테두리 안에서 본다면 서울 용산의 둔지산도 반드시 어느 산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줄기 중의 산이고, 그 줄기는 백두대간의 한 정맥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가 있다. 즉, 둔지산은 한북정맥(漢北正脈)의 한 지맥에 속한 산으로 보는 것이다.
한북정맥은 백두대간의 분수령에서 시작, 김화의 오갑산과 대성산, 포천의 운악산, 양주의 홍복산, 도봉산, 삼각산, 노고산을 거쳐 고양의 견달산, 교하의 장명산에 이르는 서남으로 뻗은 산줄기이다.
도시나 마을을 사방에서 감싸 주는 조산 중 뚜렷한 네 산을 외사산(外四山)이라 하는데, 큰 분지형 형태인 서울의 경우, 북쪽 북한산(北漢山), 남쪽 관악산(冠岳山), 동쪽 용마산(龍馬山), 서쪽 덕양산(德陽山)이 여기에 해당한다. 내사산을 잇는 경계선 내부의 면적은 약 627 제곱킬로미터로, 지금 서울시 사대문 안의 경계와 거의 일치한다.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이 인식하였던 산줄기 체계는 하나의 대간(大幹)과 하나의 정간(正幹), 그리고 이로부터 가지친 13 개의 정맥(正脈)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경표(山經表)』에 근거를 둔 이들 산줄기의 특징은 모두 강을 기준으로 한 분수산맥이다. 따라서, 그 이름도 대부분 강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면 금강 남쪽의 줄기이면 금남정맥((錦南正脈)) 식이다.
이 산줄기는 동쪽으로 회양·화천·가평·남양주, 서쪽으로 평강·철원·포천·양주 등의 경계를 이루는데, 자연히 동쪽은 한강 유역이고 서쪽은 임진강 유역이 된다.
남산과 둔지산의 연결 지맥
넓게 생각하면 우리 나라의 모든 산들은 모두 백두산을 뿌리로 한다, 즉, 백두대간의 여러 정맥에서 다시 지맥이 갈라지고, 그 지맥의 산들이 다 백두산을 뿌리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용산의 둔지산(屯芝山)도 어느 산줄기엔가 속해 있다고 볼 수가 있다,
그 줄기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지도를 보면 우선 북서쪽의 찬바람재 고개를 거쳐 남산에 닿게 됨을 알 수가 있다. 찬바람재(한풍현.寒風峴)는 서울 삼각지쪽에서 국방부 앞을 거쳐 용산구청쪽으로 가는 길목의 고개인데, 그 언저리에 녹사평역이 있다.
남산은 서울 내사산의 하나이니 북악산과 연결된 것이 확실하고, 이 북악산은 다시 탕춘대의 산줄기를 거쳐 북한산과 이어져 있다. 이 북한산이 백두대간의 한북정맥에 속하니 둔지산이 지맥상으로는 백두산과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즉, 둔지산부터 백두산까지 물을 한 군데도 건너지 않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일제 때 군 기지 들어서 둔지미 일대 훼손
둔지미가 군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그 이전까지는 둔지미 일대가 거의 훼손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임오군란 때 청나라군이 이 둔지미에 주둔하면서 이 일대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일본군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빌미로 조선에 들어와 용산의 효창공원(효창원), 만리창과 둔지미 일대에 주둔하고, 청나라군과의 전쟁을 준비했다.
조선이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고 다음해 한성부로 개칭한 뒤 서울에 중·동·남·서·북부 등 오부(五部)를 설치하였다. 이 오부 체재는 조선시대 내내 유지되었다. 즉, 지금의 구(區)와 비슷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대부터 각 지역의 훼손이 본격화되는데, 특히 서울에서도 용산 지역, 용산 하고도 둔지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 심했다. 일제의 군 기지가 들어서면서부터 훼손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둔지미 일대의 옛 마을들
<세종실록지리지>에 ‘둔지미’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 지리지는 1454년 완성된 것인데, ‘경도 한성지’편에 이 둔지산에 노인성단, 원단, 영성단, 풍운뢰우단이 모두 숭례문 밖 ‘둔지산’에 있다고 적혀 있다.
‘둔지방’은 둔지삼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한 행정구역이었다. 18세기부터 서울 각 부(部) 밑으로 방(坊)을 두었다.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5부 52방(坊)으로 했다. 이 때 현재의 용산 미군기지 일대가 둔지방이 된 것이다.
둔지방(屯芝坊)(城外):전생내계(典牲內契)의 전생동(典牲洞). 갈어리계(葛於里契)의 갈어리동(葛於里洞), 와서계(瓦署契)의 와서동(瓦署洞). 이태원계(梨太院契)의 이태원동(梨太院洞). 둔지미계(屯芝味契)의 둔지미동(屯芝味洞). 서빙일계(西氷一契)의 서빙고동(西氷庫洞). 서빙이계(西氷二契)의 서빙고동(西氷庫洞).
옛날 둔지방 안에는 여러 개의 마을이 나타난다. 갑오개혁 이전의 서울 둔지방 안의 각 마을 행정명칭은 다음과 같다.
-전생내계(典牲內契)의 전생동(典牲洞). 현 후암동
-갈어리계(葛於里契)의 갈어리동(葛於里洞), 현 후암동-동자동 일부
-와서계(瓦署契)
의 와서동(瓦署洞) 현 한강로3가
-이태원계(梨太院契)의 이태원동(梨太院洞). 현 이태원
-둔지미계(屯芝味契)의 둔지미동(屯芝味洞). 현 미군기지 안
-서빙일계(西氷一契)의 서빙고동(西氷庫洞)
-서빙이계(西氷二契)의 서빙고동(西氷庫洞)
둔지미계에는 큰말(대촌.大村)과 제단안말(단내촌), 정자골(亭子洞), 새말(신촌.新村) 등의 마을이 있었다. 이들 4개 마을에는 대략 가구 수가 300~400호 정도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촌(새말)은 현재의 미군의 드래곤힐호텔 자리에, 정자동은 국방부 남쪽에 있었다. 내촌(제단안말)은 현 국립중앙박물관 자리에, 대촌(큰말)은 박물관 바로 위 둔지산 아래에 있었다.
일제 때는 ‘둔지미’란 이름을 거의 쓰지 않고 주로 ‘용산’으로 사용해 왔다.
1906년 둔지미는 공식적으로 ‘용산’으로 바뀌었다. 당시 일본군이 둔지미 일대를 그린 지도의 이름은 <용산 군용 수용지 명세도>였다. 이 지도엔 둔지산이 적혀 있고, 일본군도 이 일대의 지명이 둔지미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지도의 제목을 ‘용산’이라 붙였다. 일제강점기 용산 기지는 대체로 ‘용산 병영’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이래서 450년 이상 사용한 지명 ‘둔지미’가 우리 입에서 멀어져 갔다.
둔-둠-덤.. 어떤 뜻인가?
‘둔지산’이란 이름이 나오게 된 배경을 대부분의 자료에서는 ‘둔전(屯田)’과 연결을 짓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금 방향을 돌려 달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둔(둠)’ 지명과 관련하여 ‘도막(돔악)’, ‘뜸’, ‘둥지’, ‘덩이(덩어리)’, ‘더미(덤+이)’, ‘덩치’, ‘둥글다’, ‘덩그렇다’ 등의 말들과 연관짓는다. 이 말들을 서로 비교하고 그 뜻을 새겨 보면 서로 통하는 점이 발견된다.
토박이 땅이름들을 살펴보면 이와 연관되었음 직한 것이 많다.
돌로 쌓은 울타리를 ‘담’이라 하는데, ‘돔’, ‘둠’과 같은 말과 연관지어 볼 만하다.
‘둠’, ‘듬’은 또 ‘뜸’이 되어 ‘사이’의 뜻을 지니게 갖게 한 듯도 하다.
- ‘이 이십리 히 이시니(離)’ <박통사신역언해>(一,13)
- ‘각(閣)애서 이 언메나 머뇨.(離閣有多少近遠)’ <노걸대언해>(上,43)
한라산을 ‘두무악(頭無岳)’ 또는 ‘원산(圓山)’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산봉우리가 둥글어 나온 이름이란 주장이 있다. 제주도의 옛이름 ‘탐라’도 섬이 둥글어 나온 이름인 ‘담나(둠나)’가 변한 이름이라고 보기도 한다. ‘둠’, ‘듬’은 ‘뜸’이 되어 마을에서 위치 개념의 집무리를 뜻하기도 해서 ‘위뜸’, ‘아래뜸’ 같은 말이 나오기도 했다. 두멍, 둠벙, 둥구럭(圓籠) 등의 말도 ‘둥금(圓)’의 뜻인 ‘둠’이 그 바탕일 것이다.
‘둠’은 ‘두르다’의 명사형 ‘두름’이 줄어 된 말이기도 해서 둘레, 두름(물고기 엮음), 들러리, 돌리다, 두르다(구르다), 도로(反.復), 도리어(反하여) 등의 말들과도 서로 먼 친족 관계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일본으로 건너간 ‘둠’계 땅이름>
다마(タマ.玉.珠),
아다마(アタマ.頭),
다무로(タムロ.屯),
쓰부라(ツブラ.圓)
<북한의 ‘둠’계 땅이름>
-두무덕(斗武德) 함남 북청 가회면
-두무산(斗霧山) 경남 거창-산청-합천 사이
-두무산(杜武山) 황해도 곡산
-두모산(頭毛山) 함남 안변
-두미산(頭尾山) 평북 안주
<‘둠’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땅이름들>
경남 거창의 흰대미산(흰독더미산.白磊山)
경북 칠곡의 숲데미산(石積山)
경남 거창-전북 무주과 경북 경산-영천의 대마산(大馬山)
경주-포항의 ‘두마니’
삼국시대의 ‘둠’ 계통 지명은 황해도와 경기도 일원에 많다. 둠나골(冬音奈忽)(강화 일부), 돔골(冬忽)(황주), 둠골(冬音忽)’(연백), 두물골(德勿縣)(개풍 일부), 두밋골(冬比忽)(개성) 등을 들 수 있다.
‘둠’ 계열의 땅이름을 한자로 음차하는 경우, ‘둔(屯), ’두무(斗霧,杜武), 두모(頭毛), 두미(頭尾)가 있고, ‘동음(冬音)으로 음차하기도 했다. ‘동(東)’을 넣기도 했는데, 이는 ‘둠’과 ‘동’의 유사성에 기인한 것이다. 산지에 많은 ‘동막(東幕)’은 ‘둠막(돔막)’이 발음 변화를 일으킨 말이라고 보기도 한다. ‘산’을 뜻하는 ‘둠’과 ‘마을’을 뜻하는 ‘막’이 합쳐진 말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동막’은 산 속의 마을이거나 산 아래 마을, 즉 ‘산촌(山村)’과 같다고 본다. 전국에 ‘동막’은 많지만 이의 상대적 지명인 ‘서막(西幕)’, ‘남막(南幕)’ 등의 이름은 별로 없다.
'둔지미'라는 토박이 땅이름은 서울 용산구의 이곳을 비롯해 전국 여러 곳에 있다.
<둔지미 이름이 붙은 곳>
대전시 서구 둔산동
대구시 동구 둔산동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고척리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하오안리
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충남 천안시 삼룡동
예산군 덕산면 둔리
경북 문경시 호계면 부곡리
전남 영광군 군서면 보라리
둔지미는 ‘둔지산’의 원래 지명일 것이다. ‘둔(둠)“계 지명으로 보는데, 대개 산이 외따로 떨어져 있거나 평지쪽에 오똑 솟은 언덕이나 산에 이런 이름이 많이 붙어 있다.
‘둔지미’란 이름이 과연 ‘둔지산(屯芝山)’이란 한자에서 나왔을까? ‘둔지산’이란 한자 지명이 ‘둔지미’로 되었다고 보기보다는 도리어 ‘둔지미’가 ‘둔지산’이란 한자 지명으로 옯겨갔을 가능성이 크다.
지명을 해석할 때 현재의 발음이나 한자의 뜻을 기준으로 지명을 해석하면 본래의 지명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뜻이 나오게 되고 만다. 의역(意譯)이기보다는 음역(音譯)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둔지산’은 한자로 屯地山, 屯芝山, 屯之山, 屯知山 등 여러 글자로 표기되어 왔는데, 음역 과정에서의 차음(借音)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둔(屯)’자를 한자 뜻으로 풀어 ‘둔전(屯田)이 있어서’라는 의견과는 뚜렷이 그 해석이 다르다. 둔전의 설치 기록이 자세히 보이지 않고 한자 ‘둔지산’의 한자 ‘지(地,芝,之,知)’의 개입도 의문시된다. 둔지산 일대의 지형을 볼 때도 둔전을 둘 만한 땅도 보이지 않는다. 또, 둔전 이전에 이름이 없었을 리도 없다. ‘둔지’는 ‘둠지’의 변음일 수 있고, ‘미’는 ‘산(山)’을 뜻하니 이를 음의역해 ‘둔지산’이 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산이나 높은 곳은 말(마루), 몰, 달(돌), 뫼(메,미), 술(수리), 부리(비로), 둠(둔) 등으로 불렀다.
둔지산이 토박이 땅이름이라면 ‘둔지’는 과연 어떤 뜻일까? ‘둔-둠-덤-담’ 계열의 땅이름으로 본다면 이는 단순히 ‘산(山)’과 연계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계열의 지명은 산지 일대에 많이 분포한다. ‘둔지(둠지)’라는 이름은 모나지 않은(둥그스럼한) 산이거나 따로 떨어져 있는 산에 많다.
대둔산과 두륜산도 ‘둠’계 지명
이와 연관하여 전북의 대둔산(大屯山)과 전남의 두륜산(頭輪山)의 예를 들어 보자.
대둔산은 '한둠산(한둔산)'인데, 이는 ‘따로 떨어져 있는 큰 산’의 뜻으로 보인다. ‘한둠산’에서 ‘한’은 ‘대(大)’, ‘둠’은 ‘둔(屯)’으로 음차된 것으로 보고 있다.
두륜산은 대둔사(大芚寺)의 이름을 따서 ‘대둔산’이라 칭하다가 대둔사가 대흥사(大興寺)로 바뀌자 ‘대흥산’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두륜산의 원이름 대둔산의 명칭은 ‘크다’는 뜻의 ‘한’과 ‘산’이란 뜻의 ‘듬(둠)’이 붙어 ‘한듬’이었고, 이것이 ‘대둔(大屯)’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과거 대둔사는 ‘한듬절’로 불리기도 했다. ‘두륜(頭輪)’의 뜻은 산 모양이 둥글게 사방으로 둘러서 솟은 ‘둥근머리산’의 의미였을 것이다. 한듬산’을 한자화한 것이 대둔산이어서 '듬'의 뜻이 들어 있지 않고 다만 '듬'과 비슷한 한자를 음화한 것이 '둔'이므로 그 한자의 뜻과는 관계가 없다.
‘둔지산’과 거의 같은 이름인, 전국에 많은 ‘둔산(屯山)’은 주로 산지에 분포해 있는데, ‘둔전(屯田)’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
<둔산 땅이름이 있는 곳>
대구시 동구의 둔산동
대전시 서구의 둔산동
충남 서산시 인지면 둔당리의 둔산
전북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의 둔산
전북 완주군 봉동읍의 둔산
전북 군산시 옥구읍 어은리의 둔산
경북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의 둔산
경남 창녕군 이방면 석리의 둔산
경남 밀양시 청도면 인산리의 둔산
친척말
덩어리 담 덤 둥글둥글 둥금
친척 땅이름
둔지미 [둔지] 【마을】 충남 천안시 삼룡동
둔지(屯地) 【마을】 경북 봉화군 소천면 대현리
둠바위 【바위】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현암리
둔말 [둔촌] 【마을】 경기도 이천t; 장호원읍 진암리
듬실 【마을】 경남 밀양t; 청도면 구기리
두무실(斗舞室) 【마을】 충북 청주시 문의면 두모리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