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백여 년 전에 드린 존 후스의 기도와 화형 당한 존 후스
어제 존 후스의 기도문을 읽었다.
500여 년 전에 로마 교회의 부패와 비성서적인 교황의 권력을 비판하면서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1415년 7월 6일에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한 신앙의 대선배 후스를 생각하며 몇 번이고 반복해서 큰 소리로 읽었다. 반복해서 읽노라니 그가 아브라함처럼 신앙의 조상으로 다가왔고 그의 죽음이 우리 한국 교회 초창기에 순교당한 조상들의 죽음처럼 절절하게 느껴졌다.
그의 기도문이 헤른후트 성경묵상집 293판 4월 18일자에 실려 있다.
“자비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여!
우리를 당신에게로 이끌어 주십시오!
당신께서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당신의 길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강하고 온유한 영과 어떤 저항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주셔서
믿고 옳은 일을 하게 해주십시오!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희망을 주셔서
우리가 당신을 위해 더 많은 것들을 견뎌내게 해주십시오!”
후스가 언제 어디서 바친 기도문인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로 적혀진 기도문을 “저”로 바꾸어 읽으며 그의 마음의 절규를 더욱 깊이 느꼈다. 이 짤막한 기도문에서 성서를 무기로 교황과 세속적인 교회 성직 조직의 막강한 권력 앞에서 불굴의 신앙으로 저항한 그의 고뇌와 고통, 고독과 불안을 느끼며 울었다. 그의 기도가 오늘 우리 모두의 기도라는 사실에 우리가 다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자녀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감사를 드렸다.
“자비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를 당신에게로 이끌어 주십시오!
당신께서 저를 인도하지 않으면 저는 (당신의 길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 강하고 온유한 영과 어떤 저항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주셔서
믿고 옳은 일을 하게 해주십시오!
저에게 흔들리지 않는 희망을 주셔서
제가 당신을 위해 더 많은 것들을 견뎌내게 해주십시오!”
존 후스는 1373년에 보헤미아의 후시네츠의 평범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394년 프라하 대학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았고 1396년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1401년 신부로 안수되었고 1402년에는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다.
그는 위클리프를 만난 적이 없지만 1834년에 죽은 영국의 위클리프의 사상적 제자였다. 그러나 그는 화체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도 위클리프처럼 교회는 예정된 자들로 구성되며 교회의 진정한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요, 신약성서가 교회의 유일한 법칙이며 그리스도와 같은 청빈이 교회와 성직자의 길이라고 설파하였다.
1402년 후스는 프라하의 베들레헴교회의 설교자가 되어 보헤미아어로 불같은 설교를 토하여 많은 지지를 받았다. 처음에 그의 설교는 보헤미아 교회의 츠비네크 대주교의 지지를 받았으나 그의 성직에 대한 비판이 거세어지면서 위클리프와 같은 그의 신학의 본질이 드러나자 츠비네크는 호의를 거두었고 갈등과 대적 관계에 들어갔다.
교황청이 두 개로 분열되었을 때 보헤미아 교회, 츠비네크 대주교, 독일 신부들 그리고 독일계 대학들은 로마 교황 그레고리 12세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보헤미아 왕 벤첼은 중립정책을 취하였고 후스와 대학의 보헤미아계는 벤첼의 중립정책을 지지하였다. 벤첼은 그 때를 기점으로 해서 1409년 대학 학제를 고치고 외국인에게는 한 표의 결정권, 보헤미아인들에게는 세 표의 결정권을 주었다. 그 결과로 후스는 라이프치히 대학의 1대 총장으로 취임하였으며 그의 개혁 사상은 전 보헤미아에 퍼져 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피사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츠비네크 대주교는 교황 알렉산더 5세를 지지하고 그로부터 위클리프의 위험한 사상(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교황이 아니다. 성서가 유일한 법칙이다. 교회는 모든 세속적 영적 소유주가 아니라 청지기에 불과하다, 성서는 번역되어 모국어로 읽혀져야 하며 설교되어야 한다는 등) 을 근절하라는 위임을 받았다. 츠비네크는 위클리프의 모든 책을 수거하여 폐기하였으며 책을 넘기지 않은 4명의 신학자들을 고소하고 그들의 설교를 금지하였다..
위클리프 사상으로 확고해진 후스는 1410년 츠비네크 대주교로부터 파문을 당하였다. 결과적으로 대중들은 그를 더욱 지지하며 따랐고 보헤미아왕 벤첼도 그를 지지하였다.
1412년 교황 요한 23세가 자신에게 반기를 든 나폴리 왕 라디슬라우스를 징벌하려 하면서 그 전쟁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약속하였다. 후스는 이에 대하여 교황은 무력을 사용할 권리가 없으며 돈으로 진정한 죄 사함을 받을 수 없고 면죄부는 구원이 예정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외쳤다. 그러자 보헤미아 교회에 폭동이 일어났고 성난 대중들은 교황의 교서를 불살랐다.
분노한 교황은 프라하 교회에 성찬 정지 처벌을 내렸으며 그로인하여 후스의 친구들과 지지자들까지 파문의 대상이 되었고 그는 여러 대학과 다른 지방에서 지지를 잃게 되었다. 보헤미아의 왕 벤첼은 그를 설득해서 프라하를 떠나게 하였고 그는 고향인 후세니쯔로 물러가서 위클리프를 옹호하는 글들과 교회와 시대를 타락의 길로 이끌어가는 부패한 교황과 추기경들과 성직자들의 타락상을 담대하게 비판하였다.
1414년 독일 콘스탄스에서 공의회가 열렸다. 공의회는 당시 교황 자리로 분열된 교회의 분쟁을 마무리 하고자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가톨릭교회의 근간을 흔드는 종교개혁을 뿌리째 뽑으려고 하였다.
존 후스는 공의회에 출두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로부터 안전을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으나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요 사명임과 공의회에서 대적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길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그의 보헤미아 교회 안의 대적들, 프라하 성직자들에게 고용된 스티븐 팔레쯔와 미카엘 드 카시스에 의해 고발을 당하였으며 콘스탄스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투옥되었다.
1415년 공의회는 라틴어 불가타 성서를 영어로 번역한 위클리프는 45개조 조항으로 단죄 당하고 이단으로 선포되었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위클리프의 저작을 불태우고 그의 시체를 파내어 불사르라고 명령하였다. 후스 역시 그의 글에서 발췌된 30개 조항으로 정죄 당하였고 이단으로 내몰렸다. 그러나 그는 공의회 결정에 불복하였다. 그에 대한 공의회의 정죄는 거짓 고발과 잘못을 판가름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앙 양심에 따라 공의회의 위세에 굴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1415년 7월 6일 자신의 신앙 양심을 굽히지 않고 화형을 당하였다.
자신을 정죄하는 공의회 성직자들 앞에서 후스는 홀로 외롭게 자신을 변호하였다.
“지금은 죽고 없지만 내 문제를 아직까지도 미결 상태로 남겨 놓은 그 교황에게 진실로 상소하였으며, 또한 그의 후임자 요한 23세에게도 상소하였습니다. 2년 동안이나 나의 명분을 옹호해줄 지지자들과 함께 그 분들 앞에 설 수 없었을 때, 나는 최고의 재판관이신 그리스도께 상소했습니다.”
후스는 ‘교황으로부터 면죄를 받았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심문관에게 ‘그리스도께 상소한 것이 합법적인 일이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진실로 나는 그리스도께 드려지는 상소보다 더 정당하고 효과적인 상소는 없다는 것을 이곳에 계신 여러분들에게 단언하는 바입니다. …생략…
그리스도보다 더 높은 재판관이 누구겠습니까? 단언하지만, 그 분 안에 어떤 속임수도 없고, 누구에게도 속지 않으시는 주님이신데 주님 외에 누가 그 문제를 더 정확히 알고서 더 공평하게 재판할 수 있으며, 또 주님보다 비참하고 억눌린 자들을 잘 도와 줄 수 있는 이가 누구란 말입니까?”라고 대답하였다.
후스가 말하는 동안 공의회 회원들은 하나 같이 그를 비웃으며 조롱했다. 마침내 공의회가 임명한 주교가 그의 사제복을 벗겨서 그를 강직시켰고 “이단들의 주모자”라는 글이 쓰여 있고, 마귀가 그려진 종이 머리띠를 그의 이마에 씌웠다. 그리고 그 주교가 “지금 우리는 너의 혼을 마귀에게 넘겨주노라.”라고 말하자 후스는 “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진정으로 저를 주님의 손에 의탁하나이다. 주님께서 구원하신 제 영혼을 받아주소서.”라고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화형대가 세워지고 나뭇단이 그의 목 높이까지 쌓이자 바바리아 공작이 그에게 믿음을 버릴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는 단호히 거부하였다. “나는 악에 치우치는 어떤 교리도 결코 설교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제 나는 내 입술로 가르친 것을 내 피로 확증하겠다.”
불이 나뭇단에 붙었을 때는 그는 찬송을 불렀고 그의 찬송은 격렬한 불길 속에서 사라졌다.
그를 불태운 이들은 그의 시신의 재를 모아서 라인 강물 속에 던졌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보헤미아인들의 가슴 속에 씨알로 떨어졌다.
후스가 콘스탄스에서 죄수로 있는 동안 프라하의 그의 제자들과 지지자들은 성찬(주의 만찬)에서 잔을 평신도에게 주었고 그 소식을 들은 후스는 평신도의 배잔을 승인하였고 이는 후스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후스의 사상을 씨알로 받은 지지자들이 모여서 보헤미아형제단이 되었다.
보헤미아 형제단은 성경을 유일한 규준으로 삼으면서 소박하고 겸손한 비폭력의 삶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도시생활과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엄격한 금욕주의를 주장하였으나 후에는 완화하여 루터교회와 연합하였다.
후스의 유산을 이어받은 보헤미아 교회 중에는 동부의 모라비아인들이 있는데 그들은 교황의 박해를 피해 모라비아에서 독일의 동쪽 작센지역인 베르텔스도르프에 이주하였다. 그들은 그곳의 대지주인 진젠도르프의 영지에서 살게 되었다. 그 때부터 후스의 후계자인 그들이 보헤미아의 모라비아지역에서 왔기 때문에 모라비아형제단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모라비아형제단의 경건한 공동생활이 진젠도르프 백작을 감화시켜 그를 모라비아 교회를 이끄는 감독으로 만들었으며 그를 18세기 선교와 경건주의 운동의 대표자로 만들었다.
그 뿐 아니라 모라비아 교단은 1732년 최초의 선교사를 서인도제도로 파송하였으며 그들은 흑인 노예에게 전도하며 감옥에 갇혀 대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기도 하였고 노예의 주인인 네델란드인에게 추방을 당하기도 하였다. 남아프리카에서 모라비안 선교사가 최초로 흑인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북아메리카 북동부의 허드슨만과 대서양 사이의 반도인 래브라도로 간 선교사들은 풍토병으로 전원이 사망하였다. 1733년 그들은 그린랜드로 갔다. 계속하여 이집트, 중앙 아메리카, 알라스카, 남아메리카 북동부의 기아나, 그리고 수리남 등지로 갔다. 1735년, 스팡겐베르고는 현재 미국 남동부 연안 조지아로 갔다. 그는 젊은 성공회 목사인 요한 웨슬리를 만나 그를 감리교 창시자의 길로 인도하였다. 헨리 라우흐는 인디언 원주민들에게 들어가서 추장인 트스훕을 비롯하여 수 많은 인디언들을 개종시켰다.
기록에 의하면 모라비안 교도들은 처음 28년 동안에 28개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교인 13명 가운데 한 명이 선교사가 되어 외국으로 갔으며 그들은 자립 선교를 하였으며 독일에 있는 교회로부터 일체 도움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원주민들과 같은 생활을 하였으며 원주민들의 문화와 생활 방식을 존중하였다.
1760년 진젠도르프가 헤른후트에서 죽을 때까지 모라비안형제단은 전 세계에 226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이 개신교 선교의 기폭제가 되었다. 모라비안의 가장 큰 선교 영향력은 그들이 요한 웨슬리에게 준 영향을 통해 나타났다. 웨슬리는 세계에 감리교회를 남겼고, 감리교에서 파생되어 나온 나사렛 교단, 구세군, 성결운동, 그리고 오순절 전통을 유산으로 남겼다.
후스는 부패한 교권과 성직자들에게 모독과 조롱을 받고 불길 속에 휩싸여 한 줌의 재가 되었으나 그의 믿음은 살아서 신대륙으로, 아프리카로 거침없이 흘러 들어갔으며 수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복음, 수난과 부활 의 길로 인도하였다.
2023.4.20.목.인시
우담초라하니
참고서적
윌시스턴 워커 저, 강근환 외 3인 번역 < 신판 세계기독교회사> 대한기독교서회, 2002
헤른후트 형제단 편, 김상기 홍주민 번역 <2023 말씀, 그리고 하루>, 한국디아코니아연구소, 2023
폴 피어슨 저, 임윤택 번역 <선교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 선교운동사>, CLC, 2009
유재덕 저, <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 브니엘, 2018
P.S
세계 정치와 경제가 보수화되면서 나라들이 새 판을 짜며 냉전 무드로 급전환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모국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기까지
로마 교황청의 라틴어 예배 고수와 번역 불가의 가혹한 정죄와 이단 선포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단으로 몰려 피를 흘리며 죽었는가?
평신도들이 성찬식에 참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로마교회의 도그마에 저항하며 순교하였는가?
오죽하면 개신교도를 '저항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프로테스탄트" 불렀겠는가? 를 깊이 묵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