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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4장 10-21절. 바울이 벨릭스 앞에서 변호함
10절.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en the governor had nodded for him to speak, Paul responded: "Knowing that for many years you have been a judge to this nation, I cheerfully make my defense,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Ἀπεκρίθη τε ὁ Παῦλος, νεύσαντος αὐτῷ τοῦ ἡγεμόνος λέγειν
answered then the Paul, having made sign to him the governor to speak,
직역하면 ‘총독이 그에게 말하라고 표시하니, 바울이 대답했다’는 뜻입니다.
‘말하라고’(λέγειν)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이고(to speak), ‘표시하니’(νεύσαντο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made sign) 분명하게 표시한 것을 가리키고, 원형(νεύω)은 ‘손이나 머리로 표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make a sign with hand or head),
‘대답하되’(Ἀπεκρίθη)는 부정과거로서(answered) 바울이 분명하게 대답한 것을 가리킵니다.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Ἐκ πολλῶν ἐτῶν, ὄντα σε κριτὴν τῷ ἔθνει τούτῳ, ἐπιστάμενος
for many years, being you judge to nation this, knowing
‘재판장 된 것을’에서 동사(ὄντα)는 현재분사이고(being), ‘내가 알고’(ἐπιστάμενος)도 현재분사인데(knowing) 의미상 주어는 남성 단수이기 때문에 ‘내가’로 번역한 것입니다.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εὐθύμως τὰ περὶ ἐμαυτοῦ ἀπολογοῦμαι,
cheerfully to the things concerning myself I make defense
직역하면 ‘내 자신에 대한 것들을 기쁘게 변호하나이다’란 뜻입니다.
‘변명하나이다’( ἀπολογοῦμαι)는 현재형입니다(I make defense).
1. 벨릭스 총독은 더둘로의 아첨하는 말을 듣고 거만해졌습니다.
그래서 벨릭스 총독은 바울에게 머리짓을 하면서 말하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벨릭스의 태도는 거만한 자세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황제라도 자기를 치료해주는 의사 앞에서는 옷을 벗으라면 벗고, 누우라면 눕고, 입을 벌리라면 벌리면서 겸손히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자기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지옥을 다루는 바울 사도 앞에서 벨릭스가 교만한 태도를 보인 것은 참으로 무례한 죄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마치 영원한 진리 되시는 예수님 앞에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은 총독 빌라도의 모습과 같습니다.
2. 그런데 바울은 교만한 벨릭스 앞에서도 아부성 발언이 아니라, 사실대로 벨릭스가 오래전부터 유대 민족의 재판장이 되어서 유대 나라 풍속을 알기 때문에 기쁨으로 변호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때가 AD 57년이고, 벨릭스가 부임한 때가 AD 52년이므로 벨릭스는 벌써 5년째 유대 나라 총독으로 일해 왔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벨릭스 총독의 실제적인 장점을 말함으로써 변론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바울은 벨릭스가 유대인들을 압제한 학정을 다 알고 있었지만, 그런 압제와 학정을 잘했다고 더둘로처럼 아부하지는 않았습니다.
과연 사람은 아무리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도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므로, 나쁜 점을 좋다고 아부할 필요는 없지만, 장점을 들어서 좋게 말한 것은 지혜로운 처사입니다.
11절.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since you can take note of the fact that no more than twelve days ago I went up to Jerusalem to worship.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δυναμένου σου ἐπιγνῶναι
being able you to know
‘당신’(σου, you)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알 수 있는 바와 같이’에서 앞의 동사(δυναμένου)는 현재분사이고(being able) 뒤의 동사(ἐπιγνῶν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know) 확실히 아는 것을 가리키는데, 둘을 합쳐서 ‘알 수 있는 대로’란 뜻입니다.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
ὅτι οὐ πλείους εἰσίν μοι ἡμέραι δώδεκα
that not more than there are to me days twelve
직역하면 ‘나에게 열이틀 이상이 아니었고’란 뜻입니다.
여기 동사(εἰσίν)는 현재형입니다(there are).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ἀφ’ ἧς ἀνέβην προσκυνήσων εἰς Ἱερουσαλήμ,
from which I went up to worship in Jerusalem
‘예배하러 올라간지’에서 앞의 동사(ἀνέβην)는 부정과거로서(I went up) 확실히 올라간 것을 가리키고, 뒤의 동사(προσκυνήσων)는 미래분사로서(to worship), 여기서 미래분사는 목적을 표시하기 위해서 사용한 것입니다(used to express purpose). Linguistic Key. 330.
1. 바울은 첫 번째 소요죄에 대한 변론을 하면서, 자신이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온 지가 열이틀밖에 안 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결례를 행하느라고 7일이 걸렸고(행 21:27),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에 온지가 5일 되었기(행 24:1) 때문에, 바울이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온 지가 12일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하루도 소요죄를 일으킨 적이 없다고 증언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이 12일 동안 한 일을 밝힘으로써 명백히 알리바이를 입증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벨릭스 총독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만도 5일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12절. 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either in the temple, nor in the synagogues, nor in the city itself did they find me carrying on a discussion with anyone or causing a riot.
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καὶ οὔτε ἐν τῷ ἱερῷ εὗρόν με πρός τινα διαλεγόμενον
and neither in the temple did they find me with anyone reasoning
직역하면 ‘그들은 성전에서 내가 누구와 변론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는 뜻입니다.
‘변론하는 것’(διαλεγόμενον)은 현재분사로서(reasoning) 변론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보지 못하였다’에서 동사(ὗρόν)는 부정과거로서(did they find) 보지 못한 틀림없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ἢ ἐπίστασιν ποιοῦντα ὄχλου,
or tumultuous gathering making of crowd
직역하면 ‘내가 무리를 소동하게 만들고 있는 것을 (그들은 보지 못했다)’란 뜻입니다.
동사(ποιοῦντα)는 현재분사로서(making) 소동하게 만들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회당 또는 시중에서
οὔτε ἐν ταῖς συναγωγαῖς οὔτε κατὰ τὴν πόλιν,
nor in the synagogue nor in the city
1. 바울은 성전을 모독했다는 두 번째 고발 내용에 대해서 변론합니다.
즉 바울은 일주일 동안 예루살렘 성전에서 결례 제사를 드리는 동안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유대인과 성전 모독 문제로 누구와 변론하는 일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바울이 성전을 모독하는 일을 했다면, 그때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과 다투고 변론이 일어났을 것이나, 그런 일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 시내에서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데리고 다닌 것을 보고서, 바울이 성전에도 드로비모를 데리고 들어간 줄로 착각하여 소동을 일으키고,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행 21:29).
2.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바울은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곧바로 성전 결례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회당이나 시중에서 전도하지도 않았고, 소동케 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바울은 다른 지역에서는 복음 전도를 하면서, 유대인들과 부딪히고 소요 사태가 일어난 적이 많았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데살로니가, 베뢰아, 고린도, 에베소 전도시에 유대인들의 소요사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루살렘에 와서는 아무런 전도도 하지 않았고, 유대인들과 충돌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처럼 성전에서 양 잡아서 결례 제사를 드렸을 뿐입니다.
13절. 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or can they prove to you the charges of which they now accuse me.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οὐδὲ παραστῆσαι δύνανταί σοι
nor to prove are they able to you
직역하면 ‘또한 그들은 당신에게 내세울 수 없습니다’란 뜻입니다.
한글 번역을 좋은 번역입니다.
‘내세울 수 없다’(παραστῆσαι δύνανταί)에서 앞의 동사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prove) 확실하게 내세우는 것을 가리키고, 뒤의 동사는 현재형으로서(are they able) 둘을 합하고 맨 앞의 단어(οὐδὲ: nor)와 합하여 ‘내 세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περὶ ὧν νυνὶ κατηγοροῦσίν μου.
concerning (the things) of which now they accuse me
직역하면 ‘그들이 나를 고발하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란 뜻입니다.
‘고발하는’(ατηγοροῦσίν)은 현재형으로서(they accuse) ‘고발하고 있는’이란 뜻입니다.
1. 더둘로가 세 가지 이유를 들어서 바울을 고발했지만, 바울이 조목조목 변론을 했고, 더둘로는 바울을 고발하는 세 가지 사항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나 증인도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이 12일 동안 한 일을 명백히 입증했으므로, 소요죄나 성전 모독죄에 대해서 증인이나 증거를 대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명백히 무죄를 입증했습니다.
그러나 더둘로와 아나니아는 자기들의 고발 내용에 대해서 아무런 증인이나 증거를 댈 수 없었습니다.
14절.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this I admit to you, that according to the Way which they call a sect I do serve the God of our fathers, believing everything that is in accordance with the Law and that is written in the Prophets;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ὁμολογῶ δὲ τοῦτό σοι,
I confess but this to you
‘고백하리이다’(ὁμολογῶ)는 현재형입니다(I confess).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ὅτι κατὰ τὴν Ὁδὸν ἣν λέγουσιν αἵρεσιν, οὕτως λατρεύω τῷ πατρῴῳ Θεῷ,
that according to the Way which they call sect, so I serve the of fathers God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에서 동사(έγουσιν)는 현재형이고(they call), ‘하나님을 섬기고’에서 동사(λατρεύω)도 현재형입니다(I serve).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πιστεύων πᾶσι τοῖς κατὰ τὸν νόμον, καὶ τοῖς ἐν τοῖς προφήταις γεγραμμένοις,
believing all things the throughout the law, and that in the Prophets having been written
직역하면 ‘율법 전체와 선지서들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으며’란 뜻입니다.
‘기록된’(γεγραμμένοις)은 완료 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written) 이미 기록되어 있는 것을 가리키며, ‘믿으며’(πιστεύων)는 현재분사로서(believing) 믿고 있다는 뜻입니다.
1. 세 번째로 바울은 자신의 신앙이 이단이 아니라, 정통신앙이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즉 바울은 유대인 조상들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신의 신관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정통 유대인들처럼 자신은 율법서뿐만 아니라 선지서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성경관을 말했습니다.
사두개파는 모세 오경만 믿었으나, 바리새파는 선지서 등 모든 성경을 다 믿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정통 유대인들처럼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는다고 내세관을 밝혔습니다.
이것은 정통 유대교인들의 신앙관과 일치하고, 오히려 대제사장과 사두개파가 이단처럼 인식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의 신앙관을 밝힘으로써, 자신이 정통 유대인의 신관과 바리새파 신관과 같음을 입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두개파가 나사렛 이단이라는 기독교는 실상 이단이 아니고, 정통 신학을 따른 올바른 신앙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변증가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의 신앙관을 밝힘으로써 벨릭스나 대제사장이나 재판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 전도를 한 셈입니다.
15절.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having a hope in God, which these men cherish themselves, that there shall certainly be a resurrection of both the righteous and the wicked.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ἐλπίδα ἔχων εἰς τὸν Θεόν, ἣν καὶ αὐτοὶ οὗτοι προσδέχονται,
hope having in the God, which also they themselves await
직역하면 ‘역시 그들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나도 가지고 있으니’란 뜻입니다.
‘그들 자신(αὐτοὶ οὗτοι, they themselves)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기다리는‘(προσδέχονται)은 현재형으로서(await) ’기다리고 있는‘이란 뜻이고, ’나도 가지고 있으니‘(ἔχων)는 의미상 주어가 남성 단수이므로 ’나도‘라고 번역했고, 현재분사로서(ἔχων) 나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ἀνάστασιν μέλλειν ἔσεσθαι δικαίων τε καὶ ἀδίκων.
resurrection there is about to be of (the) just both and of (the) unjust
직역하면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을 것이란 것입니다‘란 뜻입니다.
’있으리라‘(μέλλειν ἔσεσθαι)에서 앞의 동사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로서(to be about) ’있을 것이다‘는 뜻이고, 뒤의 동사는 미래 부정사형 동사로서(to be) 둘을 합하여 ’있을 것이다‘란 뜻입니다.
1. 바울의 내세관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조상들이 가졌던 부활의 소망을 자신도 믿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즉 바울은 구약 성도들이 바랐던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자기도 그대로 믿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정통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사두개파는 신관은 같았지만, 성경관은 모세 5경만 믿고 선지서는 믿지 않은 이단적인 사람들이었고, 내세관도 구약 성도들과 달리 부활을 믿지 않는 이단자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더둘로는 바울에게 정통신앙을 벗어난 나사렛 이단이라고 주장했지만, 바울은 대제사장과 사두개파가 정통신앙에서 벗어난 이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바울은 자신이 정통신앙인이라고 변호하고, 대제사장과 사두개파를 이단이라고까지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부활에 대한 신앙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고린도전서 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빌립보서 3:10-1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데살로니가전서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또한 성경에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12:1-3.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요한복음 5:28-29.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마태복음 25:31-34.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마태복음 15장 41절.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요한계시록 20:12-15.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그런데 의인의 부활은 당연한 것이지만, 악인의 부활이란 무슨 말입니까?
네, 의인이 부활하여 영생 천국에서 복락을 누리는 것은 당연하고 감사할 일이지만, 만일 악인이 부활하여 영원한 형벌을 당하지 않고, 그대로 소멸되어 버린다면, 의인들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의인의 부활에 참여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자기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됩니다.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너무도 중대한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 전도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16절.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In view of this, I also do my best to maintain always a blameless conscience both before God and before men.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힘쓰나이다.
ἐν τούτῳ καὶ αὐτὸς ἀσκῶ
in this also I myself strive
’나도‘(αὐτὸς, I myself)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힘쓰나이다‘(ἀσκῶ)는 현재형입니다(strive).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ἀπρόσκοπον συνείδησιν ἔχειν πρὸς τὸν Θεὸν, καὶ τοὺς ἀνθρώπους διὰ παντός.
without offense conscience to have toward the God, and the men through everything
직역하면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해서 모든 일에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갖기를 (힘쓴다)‘란 뜻입니다.
’갖기를‘(ἔχειν)은 현재 부정사형 동사입니다(to have).
1. <이것으로 말미암아>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즉 바울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아가기를 힘쓴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사람의 눈을 속여서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세의 심판을 앞에 두고 하나님 앞에서 항상 깨끗한 삶을 살아간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진실한 신앙적인 고백은 객관적인 증거들과 더불어 참으로 재판관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훌륭한 변론이었습니다.
앞에서도 23장 1절에서 바울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들도 바울처럼 내세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 앞에서 양심을 따라 신앙생활 하는 것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양심을 따라 신앙생활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베드로전서 3: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전서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디모데전서 3:9. (집사들은)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불신자들도 로마서 2장 15절에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 9절에는 예수님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시자, 여자를 돌로 치려던 자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부터 아이까지 하나씩 떠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5장 11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려지고, 너희 양심에도 알려지기를 바라노라>고 했습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디모데후서 1장 3절에서 <너희 외조모 로이스와 모친 유니게로부터 조상적부터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을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 2절에서 <어떤 이들은 정통신앙에서 벗어나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22절에는 <양심의 악을 깨닫고 물로 씻어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17절.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ow after several years I came to bring alms to my nation and to present offerings;
여러 해 만에
δι’ ἐτῶν δὲ πλειόνων
after years now many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ἐλεημοσύνας ποιήσων εἰς τὸ ἔθνος μου, παρεγενόμην καὶ προσφοράς,
alms to bring to the nation of me, I arrived and offerings
직역하면 ‘내 민족에 대한 구제금과 제물들을 드리기 위해 내가 도착했다’는 뜻입니다.
‘드리기 위해’(ποιήσων)는 미래 분사형인데(to bring) 미래 분사형은 목적을 표현하기 위한 것입니다(used to express purpose). Linguistic Key. 330.
‘내가 도착했다’(παρεγενόμην)는 부정과거로서(I arrived) 확실히 도착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1. 여러 해 만에
바울은 여러 해 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8절에서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믿은 후 3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 1절에 말씀한 대로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본 후 14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이때는 AD 46년경이었습니다.
이 때 예루살렘에 올라간 사건이 사도행전 11장 30절에 안디옥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헌금을 보낸 사건이었습니다.
그 후로 바울은 1차 전도여행을 하고, 사도행전 15장에서 AD 50년(혹은 49년)에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하려고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2차 전도 여행에서 고린도 교회를 설립했고, 2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사도행전 18장 22절에서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교회의 안부를 물었다고 했습니다.
이 때 교회가 가이사랴 교회인지 아니면 예루살렘 교회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만일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반바울파 문제 때문에 속이 상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율법주의자들을 만나기 싫어서 그냥 가이사랴 교회에서 교회들의 안부만 묻고, 안디옥교회로 돌아갔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여 선교 보고를 한 후에 안디옥교회로 돌아갔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18장 22절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지 않았다면, 사도행전 21장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이 50년에서 57년까지 7년 만의 방문이 됩니다.
그리고 18장 22절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다면, 21장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한 것이 53년에서 57년까지 4년 만의 방문이 됩니다.
그런데 18장 22절에서 <가이사랴에서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었다>는 말씀에서 <올라가>란 표현은 예루살렘으로 간 것을 나타내므로(21:12, 25:1, 9, 마 16:21, 마 20:17-18, 등) 여기서 <교회>란 예루살렘 교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24장 17절에서 <여러 해 만에>라고 한 것은 4년 만의 방문을 가리킵니다.
2.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바울이 4년 만에 예루살렘에 방문한 것은 예루살렘 교인들이 기근으로 매우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이방인들 교회에서 구제헌금을 걷어 가지고, 거액의 구제헌금을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율법주의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 간에 불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유대 민족을 사랑하여 거액의 구제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배은망덕하게 바울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결례 제사드리는 비용을 대납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성전에 가서 결례 제사를 드리려면 한 사람당 양 3마리씩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의 제사 비용만이 아니라, 4명의 다른 사람 제사 비용까지 부담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양 15마리 비용 즉 약 1천만 원에 해당하는 제사 비용을 대납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제사 비용을 대납하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 대단히 선한 행위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기가 성전을 모독한 것이 아니라, 일반 유대인들도 하기 어려운 제사 비용 대납까지 했다고 변론한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자기 민족을 구제한 것과 제물을 드린 일은 바울을 죽이려고 고발한 유대인들에게 감동과 부끄러움을 줄 만한 선한 행동이었습니다.
18절.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in which they found me occupied in the temple, having been purified, without any crowd or uproar. But there were some Jews from Asia--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ἐν αἷς εὗρόν με ἡγνισμένον ἐν τῷ ἱερῷ,
during which they found me having been purified in the temple
직역하면 ‘그 동안에 내가 성전에서 결례를 행하고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습니다’란 뜻입니다.
‘결례를 행하고 있는 것을’(ἡγνισμένον)은 완료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purified) ‘정결하게 되는 것을’이란 뜻이고, ‘그들이 보았나이다’(εὗρόν)는 부정과거로서(they found) 확실히 본 것을 가리킵니다.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οὐ μετὰ ὄχλου οὐδὲ μετὰ θορύβου,
not with crowd nor in tumult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τινὲς δὲ ἀπὸ τῆς Ἀσίας Ἰουδαῖοι,
some however from the Asia Jews
동사가 없으나 좋은 번역입니다.
1.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저희가 보았나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7일 동안 성전에서 결례 제사를 드릴 때, 아무런 모임이나 소동이 없었음을 고소자들도 다 보았다고 했습니다.
즉 바울은 서원한 네 사람과 함께 조용히 제사만 드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는 복음 전도의 집회를 했지만, 예루살렘에서는 전혀 복음 전도 집회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소요 사태를 일으켰다는 고발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2.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이 있으니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가 오순절이기 때문에 아시아 지방 에베소에 살던 유대인들도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이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사도행전 19장 33절에서 말씀한 대로 아데미 우상 숭배자들과 함께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 데모를 했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와서 바울을 보자 다시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 난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나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난동을 부릴 때,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서 성전을 모독했다는 말은 잘못 보고 추측으로 난동을 부린 것이었습니다.
즉 바울이 예루살렘 시내에서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데리고 다닌 것을 보고, 바울이 이방인 드로비모를 성전에까지 데리고 들어간 줄로 잘못 추측한 것이었습니다(행 21:29).
19절. 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o ought to have been present before you and to make accusation, if they should have anything against me.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οὓς ἔδει ἐπὶ σοῦ παρεῖναι καὶ κατηγορεῖν
who are being necessary before you to be present and to make accusation
직역하면 ‘그들이 당신 앞에 서서 고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와서’(παρεῖναι)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이고(to be present), ‘고발하는 것이’(κατηγορεῖν)도 현재 부정사형 동사이고(to make accusation), ‘마땅하다’(ἔδει)는 미완료과거로서(are being necessary) 언제나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법을 잘 알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데, 로마법에는 소송 사건을 고소하는 당사자가 참여하지 않는 것을 굉장히 엄하게 처벌했기 때문입니다. (The Roman law was very strong against accusers who abandoned their charges). Linguistic Key. 331.
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εἴ τι ἔχοιεν πρὸς ἐμέ,
if anything they may have against me
직역하면 ‘만일 그들이 나를 대항할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면’이란 뜻입니다.
‘가지고 있다면’(ἔχοιεν)은 현재 기원격(optative) 동사로서, ‘가지려고 한다면’이란 뜻입니다.
1.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만일 정말 바울이 성전 모독죄를 범했다는 증거가 있다면, 정당한 재판 절차를 통해서 총독에게 고발해야지 무법적으로 난동을 일으키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은 정당한 재판 절차를 무시하고, 폭동을 일으킨 그들이 바로 소요죄를 범한 사회사범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만일 에베소 유대인들이 정당하게 바울을 고소할 일이 있다면 그들이 직접 총독에게 와서 고발할 일이지, 자기들은 뒤로 숨고 대제사장과 더둘로를 앞세워서 고발하는 것은 아무런 증거를 댈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20절.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New American Standard Bible: "Or else let these men themselves tell what misdeed they found when I stood before the Council,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ἢ αὐτοὶ οὗτοι εἰπάτωσαν τί εὗρον ἀδίκημα
otherwise themselves it let them say any they found unrighteousness
직역하면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어떤 불의함을 보았는지 그들 자신이 그것을 말하게 하소서’란 뜻입니다.
‘보았는가’(εὗρον)는 부정과거로서(they found) 확실히 본 것을 뜻하고, ‘말하라 하소서’(εἰπάτωσαν)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let them say) 확실히 말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στάντος μου ἐπὶ τοῦ συνεδρίου,
having stood in me before the synagogues
‘섰을 때’(στάντο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stood) 과거에 공회 앞에 선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1. 앞에서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을 향해서 변론했고, 여기서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향해서 변론하는 내용입니다.
즉 5일 전에 있었던 산헤드린 공회 재판 시에 바울이 잘못한 일이 있었는지,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고발할 내용이 있으면 해보라는 말입니다.
즉 산헤드린 공회 재판 시에도 바울은 어떤 형사적인 잘못을 범한 일이 없고, 다만 정통신앙에 입각해서 바울이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재판을 받는다고 말하니까,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싸웠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에서 바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절반이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절반이어서 결국 바울을 정죄하지 못했지 않느냐는 반론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1차 재판(산헤드린 재판)의 무죄를 가지고 2차 재판(총독 재판)에서도 무죄를 변론했습니다.
21절.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other than for this one statement which I shouted out while standing among them, 'For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I am on trial before you today.'“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ἢ περὶ μιᾶς ταύτης φωνῆς ἧς ἐκέκραξα ἐν αὐτοῖς ἑστὼς ὅτι
(other) than concerning one this voice which I cried out among them having stood that
직역하면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친 것은 오직 이 한 소리뿐입니다’란 뜻입니다.
‘서서’(ἑστὼς)는 완료분사로서(having stood) 이미 서 있는 것을 가리키고, ‘외치기를’(ἐκέκραξα)은 부정과거로서(I cried out) 확실하게 외친 것을 가리킵니다.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Περὶ ἀναστάσεως νεκρῶν ἐγὼ κρίνομαι σήμερον ἐφ’ ὑμῶν.
about resurrection of dead I I am judged this day before you
‘내가 심문을 받는다고’(ἐγὼ κρίνομαι)에서 ‘내가’(ἐγὼ, I)가 강조되어 있고, 동사는 현재 수동태로서(I am judged) 지금 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1.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받을 때, 내가 죽은 자의 부활 때문에 심문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죽은 자의 부활이란 물론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사건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또한 이 죽은 자의 부활은 구약 성경에서도 말씀한 내용입니다.
즉 시편 16편 10절에서 메시아를 썩지 않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 12장 2절에서도 죽은 자들이 일어나서 영생을 얻기도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 모두가 부활한다는 사실을 입증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부활하여 영생 천국에 들어가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벨릭스 총독의 재판정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증언했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와같이 바울은 벨릭스 총독의 재판정에서도 담대하게 자신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심문을 당한다고 선포했습니다.
다른 아무런 소요죄나 성전 모독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대제사장이나 총독이나 더둘로나 장로들이나 높은 고관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도 기가 죽지 않고 변호사 더둘로가 반박할 수 없는 달변을 성령님이 주셨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0장 19-20절에서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무슨 말할 것을 하나님이 주시리라는 약속의 성취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1장 15절에서 <너희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반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주시리라>는 약속의 성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인들의 고발 사항에 대해서 바울이 조목조목 반박하고, 이단이라고 비난받는 자신의 부활 신앙에 대해서 잘 증언한 것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불신자들이 반박할 수 없는 성령님의 지혜와 달변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핍박 속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증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억울한 모함과 핍박을 이기고, 날마다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형통한 생활 하시고, 가정과 자손들이 다 잘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