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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및 남부지역 작전
제 1 절 작전 개요
이 부분의 작전은 이미 "서남부지역 지연 작전(일본 전사 요약)"에서 1차 언급이 되었다. 따라서 간략하게 우리 전사를 요약하되 유해발굴 관련 탐사 및 탐문활동 결과는 앞장 것과 중복이 있을 수 있으니 참고 하며, 주로 분석된 전사 문제점을 기록하려 한다.
서부 및 남부지역 작전은 '50. 8.1~9.14일까지 부산에 이르는 창녕-영산축선과 진주-마산 축선에서 미 제1해병여단으로 증강된 미 3개 보병사단(제2.제24.제25사단)과 전차로 증강된 북한군 5개사단(제2.4.6.7.9사단)이 벌인 45일간의 공방전을 일컫는다.
낙동강 돌출부, 창녕-영산 축선을 담당한 미 제24사단은 대전 전투 이후 전투력이 약화된 상태였으나, 미 제1해병여단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 제4사단의 8월 공세를 저지하였다. 이후 이 지역을 미 제2사단에 인계하고 미 제8군의 예비가 되어 경산으로 이동하였다. 8월 20일 이 지역의 방어임무를 인수한 미 제2사단도 새로 투입된 북한군 제2.9사단의 9월 공세를 맞아 대구-부산간의 미 제8군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북한군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마산 서쪽지역의 방어 임무는 미 제25사단이 맡고 있으면서 이 지역에서의 북한군 제6.7사단의 8월 및 9월 공세를 모두 저지하였다. 미 제25사단은 상주에서 이곳으로 이동하여 낙동강 방어작전에 투입되었다.
서부 및 남부지역 작전('50.8.1-9.14)
적10사(무주에서 7.30) 적2사(김천에서 8.3) 대구 대구방위사
육본, 미 제8군, 미 제1기병사
적9사(대전에서 8.21) 고령 영27여 경산
적10사(8.10) 미1기병 미2사
ㅐ 미24사(8.25)
미 24사(8.24에 미 2사와 교대) 청도
국17연(8.6배속해제), 미 제2-23연
거창 적4사
권빈리 만대산
적2사(8.25)
미24-21연 미2-23연
합천 창녕 미24-19연 재편성
적4사 미24-34연 미2-9연 밀양
영산 미24사
미2사(8.24교대)
강리
적9사
미24사(8.24에 미2사로)
ㅐ
미25사
제 2 절 창녕-영산 전투
1. 전투 개요
창녕-영산 전투는 '50.8.5~9.6일까지 미군 2개사단(제24.제2)은 미 해병제1여단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 3개 사단(제2.4.9)이 33일간 벌인 공방전이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대구-부산에간 퇴로를 차단하려는 북한군의 기도를 좌절시키고 북한군 3개 사단을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었다.
이 지역의 낙동강은 동으로 굽어져 남강과 합류하는 지점으로 반월형으로 굽어져 흐르는데 이곳을 미군은 "낙동강 돌출부"라고 불렀다.
2. 북한군과 미군 상황
1) 북한군 상황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보고서에 의하면,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 제4사단의 임무는 금산, 거창, 진주를 거쳐 마산으로 진출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미군이 파괴한 도로를 복구하며 느린 속도로 진격하여 '50.7.25일에 금산, 7월 26일에 장계리, 7월 27일에 육십령을 넘었고, 7월 27일에 안의를 점령한다.
한편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북한군 제6사단이 진주를 점령하자, 북한군 제4사단에게 낙동강을 신속히 도하하여 영산과 밀양을 점령하고 부산-대구간 도로를 차단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북한군은 7월 28일에 합천을 향해 진격하여 29일에는 거창을 점령하고 오후에 합천 북방 권빈리까지 진출한다. 그리고 8월 2일에 합천을 점령한다.
북한군 제4사단은 합천 남쪽 지역의 황강 남쪽 강변에 교두보를 확보한 후 8월 3일에 철수하는 미군을 추격하여 초곡리까지 진출하여 도하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왜관 북쪽에서 제15사단이 도하하고, 마산 서부에서 제6사단이 공격하자 이에 호응하여 8월 5~6일 야간에 도하하였다.
북한군 제4사단은 이때부터 8월 18일까지 전투를 하고, 이후에는 제2.9사단이 북한군 제4사단의 일부를 배속받아 낙오강 돌출부에서 미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북한군 제2사단은 보은을 점령한 후에 7월 30일에 황간에 도달하여 북한군 제3사단과 함께 김천을 점령한 후 8월 중순 김천에서 재편성하여 8월 30일에 신반리에 집결하였다. 그리고 8월 31일부터 미제 23연대를 공격하기 위해 내재나루터. 적포교. 삼밭머리 나루터에서 도하 준비를 했다.
북한군 제9사단은 최초 평양을 출발하여 1개 연대를 인천방어 부대로 남겨놓고, 8월 23일 합천에 집결 하였다. 이들은 신반리에 사단 사령부를 설치하고, 미 제9연대의 방어지역인 영산 정면에서 도하준비를 하였다.
이 당시의 북한군 제2사단장은 최현 소장, 제4사단장은 이권무 소장, 제9사단장은 박효삼 소장이었으며 제2.9사단은 8월 20일 북한군 전선 사령관 김책의 총공격 명령에 따라 영산과 밀양을 동시에 공격하기 위해서 8월 31일 22:00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2) 미군 상황
(1) 미 제24사단의 방어배치와 전투력
미 제24사단은 딘소장의 실종으로 '50. 7. 26일 처치 소장이 새로운 사단장으로 부임하였으며 그는 북한군의 주공방향은 창녕 정면이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사단은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점에서 현풍에 이르는 약 60km의 하천선을 방어하게 되었다.
'50. 7월 말 합천 산제리 일대에서 지연전을 수행한 미 제24-34연대는 8월 2일 영산으로, 제21연대는 창녕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국군 제17연대가 미 제21연대에 배속되어 미군의 도하를 엄호한 후에 8월 3일 새벽에 낙동강을 도하하여 현풍 서측방 강변에 배치되었다. 미 제19연대는 8월 3일 미 제25사단에 배속되어 마산-진주간 도로에서 방어전을 수행하다 미 제25사단 제35연대에 인계한 후에 창녕에 도착하여 재편성에 들어간다.
이에따라 사단은 남강 합류지점에서 북으로 37km를 담당하게 되고 제34연대는 낙동강 돌출부의 영산 서쪽으로 오항나루터와 박진 나루터가 포함되어 있었다. 제21연대는 창녕 서쪽을 담당하였다. 그 북쪽은 국군 제17연대가 담당하였다.
(2) 미 제2사단의 방어배치와 전투력
북한군의 8월 공세를 저지한 미 제24사단은 이곳 방어지역을 미국 본토에서 도착한 미 제2사단에게 인계하였다. 미 제2사단은 8월 24일 진지를 인수하였다. 사단장 카이저 소장은 사단 에하의 제9연대를 영산 정면의 낙동강 돌출부에, 제23연대를 창녕 정면에, 제38연대는 그 북쪽 현풍 정면에 배치하였다.
3.. 전투 경과 (유해발굴 관련 탐사/ 탐문 결과 포함)
서부 및 남부지역 작전('50.8.1-9.14)
적10사(무주에서 7.30) 적2사(김천에서 8.3) 대구 대구방위사
육본, 미 제8군, 미 제1기병사
적9사(대전에서 8.21) 고령 영27여 경산
적10사(8.10) 미1기병 미2사
ㅐ 미24사(8.25)
미 24사(8.24에 미 2사와 교대) 청도
국17연(8.6배속해제), 미 제2-23연
거창 적4사
권빈리 만대산
적2사(8.25)
미24-21연 미2-23연
합천 창녕 미24-19연 재편성
적4사 미24-34연 미2-9연 밀양
영산 미24사
미2사(8.24교대)
강리
적9사
미24사(8.24에 미2사로)
ㅐ
미25사
1) 미 제24사단의 8월 영산 전투
미 제24사단의 영산 전투 ('50.8.5-19)
낙 M중대
K중대 창녕 수색중대, 제19연대
8.8일 미2사단 9연대 창녕 도착
박격포 중대
미21연
부곡리 ㅐ
미34연
적4-16연
신반리 적4사 밀양 미24사
오항
동
미34연
223 ㅐ
L중대 미9연
강 박진 쇠실 클로버고지 영산 미34연
미34연 고곡 미9연
적4-18연 ㅐ 오봉리 ㅐ 8.13증원
적4-5연 5해병 5해병 23-1대대
27-2대대
8.15증원 5해병
낙 K-34
기항
남지
미24사
ㅐ
미25사
(1) 북한군 제4사단의 낙동강 돌출부 공격
이 일대의 지형은 강폭이 300~400m이고, 수심은 2~4m로 "S" 모양으로 흐르고 있고 여러 곳에 돌출부를 형성하였다.
미 제24사단은 전투력이 40%수준으로 8월 2일부터 3일까지 산제리에서 지연전을 마감하고 낙동강을 도하하여 제34연대가 영산, 제21연대가 창녕, 배속된 국군 제17연대가 현풍의 강변고지를 중심으로 병력을 배치하였다. 작전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지역내의 주민들을 소개하였고 피난민의 도하도 엄격히 통제하였다.
사단 정면의 북한군 제4사단은 8월 5일 자정무렵 그동안의 탐색전을 마치고 도하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사단의 판단과는 달리 주공을 창녕이 아닌 영산 정면의 오항 나루터에 두고, 그 일부는 북쪽의 부곡리에서 도하공격이 감행되었다.
제34연대는 강변의 130고지에만 병력을 배치하고 오항나루터에는 경계병을 배치하지 않아서 기습공격이 성공하여 오봉리의 포병진지도 위협을 받게 된다. 8월 6일에 165고지(클로버고지)로 역습을 감행하지만 먼저 적의 기습을 받아 실패하게 된다.
이에 사단은 예비인 제19연대를 오항리로 사단 수색대를 부곡리로 역습을 감행하여 클로버고지는 탈환하였으나 부곡리 일대는 회복하지 못했다.
(2) 북한군 제4사단의 클로버고지-오봉리 능선 점령
이 당시에 혹심한 더위와 식량과 식수가 부족하고 여기에 비행기 오폭사고 까지 이어지면서 북한군이 클로버고지-오봉리 능선으로 진출한다.
한편 현풍 정면에서는 8월 7일에 도하공격을 감행한 북한군은 국군 제17연대의 도하저지사격으로 격퇴되었다. 이후 제17연대가 대구로 떠나자 사단장은 "하이저 특수임무 부대"를 사단 수색중대. 제3공병대대(-). 제78전차대대(-)로 구성하여 현풍일대를 담당토록 하였다. 미 제8군은 현풍지구의 전력 증강을 위해 군 예비인 미 제2사단 9연대 제1대대를 미 제24사단에 배속하여 8월 6일 창녕에 도착하고 제9연대(-)도 8월 8일 도착하였다.
미 제24사단장 처치 소장은 제9연대장에게 클로버고지와 오봉리 능선을 목표로 공격토록 하였고 8월 10일에 오항 일대의 고지를 배속된 제19연대 제2대대가 한때 탈환하고 제9연대는 클로버고지를 일부 탈환하였다.
(3) "힐"특수임무부대의 공격
미 제24사단장은 공격부대의 진출이 더디자 제9연대장 힐 대령에게 특수임무부대의 지휘권을 부여하였다. 편성은 제9.34.19연대, 미 21연대 제1대대, 그리고 기타 배속 부대로 이루어졌다.
한편 북한군은 8월 10일경에 오항나루터와 박진 나루터에 수중교 가설작업을 완료하고 다음날 11일 새벽까지 대규모 병력과 전차. 박격포. 야포를 도하시켰다.
8월 11일 힐 특수임무부대는 아침 공격개시선에 대기하고 있을 때에 갑자기 북하군의 기습 공격으로 제21-1대대가 와해되는 등 공격이 좌절 되었다.
(4) 북한군 제4사단의 영산 점령
8월 11일 미 제24사단과 25사단의 전투지경선의 협조점에 위치한 남지교가 피탈되고, 영산이 포위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미 제8군은 군 예비인 제27연대 제2대대를 남지교에 투입하였다.
미 제27-2대대는 피난민 대열속에 들어온 게릴라로 진출이 지연되고 영산 정면의 힐 특수임무부대는 고전을 면치못하면서 영산 동쪽의 주보급로가 적에게 피탈 되었다.
한편 밀양의 제24사단 사령부 본부 중대장이 행정병, 취사병, 헌병 등 135명을 지휘하여 전차 2대를 이용, 침투한 적의 진출을 저지하고 8군사령부는 군 예비인 제27연대를 12일 제24사단에 배속하여 영산 북쪽에서 적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당일날 13일에 영산의 적을 완전히 소탕하여 위기를 타개하였다.
(5) 클로버고지-오봉리의 제2차 전투
미 제24사단장 처치 소장은 영산 위기가 해소되자 8월 14일 힐 특수임무부대에 총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러나 주공인 제2-9연대가 클로버고지 일부를 탈환했으나 다음날까지 수차례 쟁탈전이 계속되면서 많은 장교들의 희생을 가져왔고 오봉리 남쪽의 제21-1대대는 적에게 포위되어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철수해야 했다.
이에따라 사단은 전투력이 회복될때까지 잠정 공격을 중단키로 한다. 그러나 미 제8군사령관은 군 예비인 미 제1해병여단을 사단에 배속시켜 17일 계속 공격할 것을 요구하고 마산에서 밀양-영산으로 이동 시켰다.
이러한 역습이 개시되기 전에 16일 북한군의 역습으로 제9연대가 클로버고지에서 철수하고 미 제34연대도 오항고지를 상실하였다. 이때 우전방 현풍 정면에는 북한군 제10사단이 도하하여 강변고지를 점령하고 위기가 고조 되었으나 더 이상 진출하지 않았다.
(6) 미 해병대의 오봉리 점령
이 당시에 북한군도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보충된 남한지역에서 동원된 의용군들이 많은 수가 도주하여 전투력이 40% 수준이었다고 한다.
미군은 8월 17일 미 해병연대와 제9연대의 협조된 공격으로 오봉리 능선과 클로버고지를 탈환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해병이 먼저 공격을 한다하여 8월 17일 07:35분에 전폭기 18대의 지원하에 공격이 개시 해병 2대대가 전진하였으나 두곡 부락과 오봉리 부락으로부터 북한군의 사격을 받으며 전진하여 전진하는 소대중 신카 소대는 20명만이 고지정상에 진입하였으나 다시 역습을 받고 철수하는 등의 어려움 속에 해병 2대대는 60%의 손실을 입었다.
8월 17일 16:00시에 부대를 교대하여 다시 공격이 진행되고 최초로 VT신관이 사용되어 참호속의 적을 살상하게 되며 제9연대가 클로버고지를 해병대가 오봉리 능선을 탈한하였다. 이때 한국인 노무자들이 오봉리 능선에 보급품을 추진하고 부상자를 후송하였다.
8월 17일 저녁 무렵에 북한군 제4사단은 전차 4대를 투입하여 역습을 가해왔으나 모두 파괴되고 황혼 무렵에 미 제19연대도 항공기지원하에 오항고지를 탈환하였다. 미 해병은 19일 작전이 종료되자 창원으로 이동하여 군 예비가 되었다.
북하군 제4사단은 이때의 피해로 다시는 낙동강 전투에 참전할 수 없게 되었다.
2) 미 제2사단의 창녕-영산전투
(1) 미 제23연대의 창녕지역 전투('50.8.31~9.9)
미 제2사단은 8월 하순에 미 제24사단으로부터 작전지역을 인수받아 제9연대를 영산 정면의 부곡리에서 남지까지, 미 제23연대를 창녕정면에, 그리고 미 제38연대를 현풍정면의 강안고지에 각각 배치 하였다.
강 미 제23연대의 창녕지역 전투('50.8.31-9.9)
낙
미1기병
동 ㅐ
강 미2사
적10사 현풍
낙
동
강 미38연
ㅐ
미23-A중 미23연
초계
미23-B중
적2사 낙
모산리
미23-C중 본초리 창녕 밀양 미2사
동 부곡리 미23연 8.24일 미24와 교대
강 ㅐ
미9연
낙
적9사
반면 북한군은 제1군단 예하 제2공격집단은 북한군 제9사단(-)이 영산 정면에, 김천에서 재편성을 완료한 제2사단이 창녕정면에, 북한군 제10사단이 현풍정면 낙동강 대안에 집결하였다.
'50. 8. 31일 밤 야간에 북한군이 도하 공격을 감행하였다. 미 제23연대는 주매리와 모산리, 본초리에서 북한군에게 포위되어 고전하였다. 9월 1일에 북한군은 정면 10km, 종심 13km를 돌파하여 미 제2사단을 창녕과 영산으로 양분 하였다.
이에 사단은 남북에 두개의 특수임무부대, 현풍정면에는 포병사령관인 하인즈 준장으로 하인즈특수임무부대를, 영산정면에는 부사단장인 브래들리 준장으로 브래들리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돌파구 확대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50. 9. 2일에 북한군이 창녕을 향해 공격해 왔으며 배속된 미 제38연대 제2대대 1개 중대가 구룡산(209m)에서 격파당하였다.
한편 현풍정면에서도 북한군 제10사단의 도하공격으로 미 제38연대 제1대대는 현풍일대로 물러났으나 더이상 북한군의 진출이 없었다. 이는 차후에 밝혀진 바로는 북한군 제2군단이 대구를 점령할 때까지 현풍에 집결해 있도록 명령을 받고 있었으며 15일까지 머물렀다.
9월 3일과 4일에 미 제23연대는 주매리와 모산리 및 본초리 3개소에서 북한군의 포위망을 뚫고 반격을 감행하려 했으나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북한군의 공격은 9월 5일부터 대체로 중단되었으나, 창녕 정면의 북한군 제2사단이 9월 8일 마지막 공격을 감행하여 미 제23연대를 돌파하고 본초리까지 진출하여 창녕을 5km 남겨놓았다. 그러나 미 제23연대는 9월 9일까지의 공격을 잘 지켜냈으며 남은 병력이 38%수준이었다.
(2) 미 제9연대와 미 해병대의 영산 전투
미 제9연대와 미 해병대의 영산지역 전투('50.8.31-9.5)
적2사 낙
창녕
동 미23연
ㅐ 밀양 미2사
미9-G중 미9연
강 오항 강리 영산 미해병5연 9.2일영산 투입
미9-F중 클로보고지
낙 박진 미9-B중 고곡
오봉리
동 미 특 슈미트중
적9사
강
미9-,C중
낙 미9-A중
기항
동 미2사
ㅐ
미25사
8월 전반기 공세가 실패하자 북한군 전선 사령관 김책 대장은 8월 20일 각 군단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이에 영산정면의 북한군 제9사단은 영산지구를 거쳐 밀양에 진출, 대구와 부산간 도로를 차단할 임무를 맡았다. 이를 위해 신반리에 진출한 9사단은 8월 31일 22:00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영산정면의 미 제9연대는 북한군의 기습공격에 박진나루와 클로버고지, 오봉리 능선을 유린 당하였다. 9월 1일 아침 무렵까지 미 제2사단은 전 지역이 돌파당하여 창녕과 영산으로 양분되었다.
이에 사단장은 현풍일대는 사단포병사령관 하인즈 준장에게, 영산정면의 부대는 부사단장 브래들리 준장으로 지휘토록 하였다.
그동안 영산정면에는 "만주특수임무부대(적진 수색팀)"가 9월 3일까지 수차례의 근접전투에서 부대장 슈미트 중위를 포함하여 대부분이 전사하고 22명만이 철수하였다. 북한군은 전차 4대로 증강하여 1개 대대가 영산을 점령하였다.
9월 4일 미 제9연대장은 철수부대로 재편성하고 전차의 지원을 받아 영산을 탈환하였다. 미 공병대대가 공격에 가담하여 영산서쪽에서 북한군 전차 대를 격파하면서 공격에 가담하였다.
이에 앞서 9월 2일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미 제1해병여단을 미 제2사단에 배속시키고 낙동강 방어선을 확보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미 해병대가 중앙에서 영산 서쪽으로, 이와 병행하여 제9연대가 북서쪽으로 진출하여 제23연대와 연결하고 남쪽에서는 제9연대 1대대 잔존 병력, 공병대대, 제72전차대대(-)가 공격하여 미 제25사단과 연결토록 하였다.
드디어 9월 5일, 미 해병대는 폭우에도 불구하고 전진을 계속하여 오봉리 능선을 점령하고 제9연대는 클로버고지를 탈환한다.
이후에 미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9월 5일 00:이분에 미 제2사단에서 배속이 해제되고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4. 전투 결과
북한군은 측방공격으로 밀양과 삼랑진을 점령함과 동시에 미군을 격멸하여 대구와 부산간의 미 제8군의 퇴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3개 사단을 투입하여 공격하였다. 이를 위해 북한구는 야포 2개 대대와 제16기갑여단을 배속받은 제9사단을 제2공격집단의 주공부대로 삼고 낙동강돌출부를 돌파한 다음 영산을 점령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9월 3일부터 5일까지 미구늬 과감한 역습으로 북한군의 기도는 좌절되었다. 북한군 T-34전차도 기간 중에 대부분 파괴되었다.
따라서 9월 3일부터 감행된 미 해병대의 과감한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이에 북한군은 9월 6일 클로보고지와 대봉리 고지를 연결하는 조그만 교두보를 간신히 혹보하면서 미군의 역습을 막아내고 있었다. 미군은 북한군을 낙동강선에서 되도록 많은 적을 견제함으로써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유리하게 전개하돌고 하였다.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된 북한군 제2사단 제17연대 군의간의 진술에 의하면 북한군 제2사단은 그동안 전사 1,300명, 부상 2,500명으로 공격력을 상실하였다. 반면 미 제2사단도 미 제1해병여단도 많은 손실을 입엇고 특히 미 제23연대는 전투력이 38%로 감소한다.
5. 유해발굴 탐사 및 탐문 결과
2000년 발굴 작전이 개시되면서 사실 이곳 창녕-영산일대는 발굴가능 지역에서 제외 되어 있었다. 이유는 국군이 전투를 하지 안했다는 사실에서다. 물론 국군 제17연대가 현풍지역에서 잠간 머문적은 있지만 전투는 미미했다.
그런데 박진나루 대곡리에서 민원이 접수 되었다. 본인의 선산이 있는 곳에 미군 1구가 가매장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달려갔더니 새로운 사실을 접수했다. 전투경찰이 오항나루터 인근 야산에 들어왔다가 나갔다는 이야기다.
"고곡리 절(호암사)에 스님이 동네분들을 불러 모았다"
영산에서 대곡리로 들어가는 길에 고곡
리 마을 바로 길 옆에 절이 있어 들어갔다. 혹시나 노스님이 계신다면 관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었다.
"혹시 이곳이 전쟁터인데 국군이나 경찰이 전사하여 묻혀있는 곳을 알고 계시는지요?"
"저기 대나무 숲에 가매장지역이 있고 구진산에 올라가면 북한군 장군 묘가 있는데 아시는지요?"
"네, 올라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북한군은 우리가 발굴하지는 않습니다. 자료는 정리합니다. 다른 곳에 관한 미군들은 없습니까?"
"미군들 명단을 주면 우리가 불사를 새로 하는데 범종에 새겨 넣을테니 미군에게 협조를 부탁합니다. 하지만 이곳은 미군에 대한 나쁜 감정이 많아서 동네 분들이 좋아하질 않습니다."
"그러면 미군이 묻혀있는 곳은 있는데 주민들이 말을 하지않는다는 말씀인데 참 거시기 합니다."
"기다려 보세요, 아랫마을에서 나이드신 분 몇분이 여기 공사관계로 올 시간이니 좋은 대화가 되리나 봅니다. 아마 게중에는 현장을 함께 갈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 아낙네 등뒤에 총을 쏘는 그런 비인간적인 놈들이 어디 있습니까?"
대여섯명의 어른들이 바로 절 마당에 나타나 함께 주지스님 방으로 들어가 앉아 차를 마셨다. 모두가 6.25전쟁을 어려서 경험한 분들이다.
"골안골에서 아낙이 피난을 가는데 아기를 안고 뛰는데 미군이 뭐라고 소리치는데 알겠어요. 그것이 "STOP, 멈춰"라는 뜻인지. 그랬더니 바로 등 뒤에다 사격을 하여 절명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아기는 살았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요. 그런 놈들이 사람입니까?"
"듣고 보니 아마도 그쪽이 나루터로 피난민들이 쏟아져 내려오니 그대열에 오열들이 숨어들어와 미군 기지를 습격하거나 위치를 알려주어 적의 박격포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검색하려고 멈춰라고 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스톱'이 뭔지 알겠어요.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나 봅니다. 고의는 아닐 겁니다."
"미군 짚차가 날아갔는데 한국인도 있었는데 죽겠다고 하는데 놔두고 미군만 후송했어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글쎄 짚차에 미군 여럿과 동네사람이 한 분 동승했는데 달리다 지뢰가 터져 다 죽어가는데 글쎄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한국사람은 놓아두고 미군만 실고 나가는 놈들입니다."
"동네사람이 왜 타고 가는지 아시는지요?"
"그 분이 어부인데 새벽에 그물을 거두러 갔다가 북한군이 강물 속을 건너오는 것을 보았나봐요. 그래서 정찰 나온 미군과 카츄사인가 하는 한국인에게 북한군이 몰래 강을 건너 왔다고 말을하니 현장에 가보자하여 가다가 매복한 북한군의 지뢰에 걸려들었지 뭡니까!"
"그럼 한국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되긴 허부적 거리다 죽었지~!"
"크로버 고지 아시나, 그 곳에는 북한군이 쌓여 있어요."
"지금도 말입니까?"
"어디로 갔을까,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데 휴전되는 해에 국군이 파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국군이 왜 적군을 파 갔을 까요?"
"저기 구진산도 공산당 장군이라나 파 갔는데?"
대곡리에 민원을 해결하러 왔다가 무슨 성토장에 나간 기분이었다. 증언을 들어보니 휴전 협정 당시에 일부 유해교환이 실제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실제 유해를 발굴하여 실어서 개성까지 드나들었던 참전용사님이 서울 이화동에 지금까지 살고 계시다. 이화동에 있는 참전용사 전우회에 나가면('18년도) 만나 뵈었는데 '07년도에도 무려 4시간이나 인터뷰를 우리집에서 했었다.
믿거나 말거나가 아니라 이분들은 본인들이 직접 목격한 사실을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10~13살 정도로 모르는 것 빼고 다 알고 있는 나이다.
"혹시 저랑 구진산에 올라갈 수 있으실 분이 계시는지요?"
모두가 스님을 바라본다.
"저기 가장 건강하신 고곡 아저씨가 갔다 오시지. 괜찮아요. 일당 그대로 드릴테니까."
"여기가 그 공산당 장군묘입니다"
우린 절에서 나와 먼저 동정리 뒷산을 올랐다. 차를 이용하여 시남리에서 임도로 능선 정상에 올랐다. 이곳은 전사에는 "오봉리 능선"이라 불리는 곳이다. 올라서는데 벌써 발밑에 탄피가 걸리고 파편이 보인다. 이 지역은 북쪽 광신리 진실재에서 올라서면 남쪽으로 대봉리 대성고개까지 10km에 이르는 종격실 능선으로 이곳이 낙동강을 따라서 동서로 피아가 갈라져 전투를 했으므로 차지하는 쪽이 방어에 유리하다.
그런데 기습적으로 북한군이 먼저 장악했으니 이걸 탈환하느라 미국의 젊은이들이 많이 희생되어야 했다. 이곳을 빼앗기면 바로 5번도로, 마산-대구에 이르는 길이 차단 및 보급로가 단절되고 부산이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능선의 서쪽은 바로 지방도 27번도로로 유어면 광산에서 남지읍 신선리에 이르는 곳으로 그 서쪽에 그 유명한 클로버고지가 있고 구진산(308m)이 있고 박진나루, 오항나루가 있으니 낙동강돌출부로써 지형적 가치가 중요한 곳이다. 여기서 낙동강을 건너면 바로 북한군의 사단사령부등 주요 지휘소가 위치하던 의령군 신반리가 10km 이내에 들어온다.
"여기는 내가 11살 시절에 올라와서 탄피를 캐내다 해골을 파낸 곳이요"
산의 높이는 150m 내외로 높지는 않으나 경사가 급한데 특히 동쪽에서 서쪽으로 오르는 방향이 심하여 미군들이 고생했다.상이곡 뒷산에 올랐는데 정말 개인호가 즐비하다. 50여년의 세월을 안고 있는 호안에는 사실 다른 나무들이 자라지도 않았다.
물론 모두 아무것도 자라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개인호에 어쩌다 소나무나 잡목이 자라는 경우가 있긴 한데 이런 경우는 거의 유해가 그 뿌리밑에 있거나 나무 뿌리가 유해를 안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곳 창녕이나 영산지역의 산들은 썩돌들이 많아서 그런지 땅을굴토 하기도 힘들고 다른 것들이 자라지않고 원형 그대로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앞서 걷는 아저씨가 한 개인호에 멈춰선다. 본인이 직접 이 호에서 탄피를 엄청 발굴해서 어린 나이라도 최고의 수확을 자랑했던 기억을 명확히 기억하고 계셨다.
"저기 호에 북한군이 있었고 저기 호에는 사람이 까맣게 따서 죽었지. 여긴 미군이 있었는데 나중에 미군은 찾아 갔어요."
"아니 그렇게 정확하게 기억이 나십니까?"
"이곳은 주에 대여섯번 올라오니 동네 우리 또래는 다 알아요."
그러나 우리는 계속되는 발굴에도 이 일대에서 10여구의 유해만 발굴했다.
우리는 산을 신구리 미곡으로 내려서 짚차를 이용하여 구진산으로 이동했다. 고곡에서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정상에 쉽게 올라간다고 한다. 평생을 같은 지역에 사시니 아닌 말로 도사이시다.
구진산(308m)에 올라가는데 여기도 8부능선에 도달하자 보이는 것은 개인호다. 말로는 호마다 북한군이 죽어 있고 미군도 어저다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 10년이 지나 군에 갔다오니, 그러니까 60년대 중반인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라고 한다.
당시는 나무를 산에서 해서 불을 지펴 밥을 해먹곤 했는데 그러나 박정희 장군이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뒤에 재건운동을 하면서 산에 사방공사도 하고 나무를 심으면서 나무를 못가져가게 강력히 통제하면서 거의 산에 들어가지 않았다 한다.
"이겁니다, 반으로 절개하여 들어있던 시체를 단가로 담아 들고 나가 차로 옮겨져 갔어요"
"와~, 이렇게 묘가 컷습니까?"
"누가 발굴하지 못하도록 밤새 병력을 수백명 동원하여 깊게 파고 왕무덤처럼 만들었답니다."
"아니 미군이 곧 역습으로 공격을 할텐데 아무리 장군이라도 그렇치 미친 놈들이구만."
"선생님,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이놈들은 명령에 죽고사는 철저한 상명하복의 군대입니다. 우린 요즘 빠져가지고 하극상도 생기고 요즘 군인들 보면 웃겨요. 싸워 이기겠어요?"
정말 엄청나게 컷다. 임금님들 묘보다 컷다. 분명 무슨 사연이 있을거다. 그러니 죽자사자 무덤을 만들었을 것이다. 구진산 정상 주위에도 개인호는 거의 몇백개는 있었다.
이곳에서도 소문이나 개인호 분포와는 달리 10여구의 유해만 발굴 했다.
산에서 내려와 아저씨를 호암사에 모셔다 들이고 대곡리로 향했다. 호암사 스님께는 나가는 길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마을 입구에 큰 저주지가 있어 쉽게 찾아가서 민원인을 만났다. 1008번 지방도에서 바라보이는 묘지군이 우리가 올라가 관찰해야 하는 곳이다.
"직접 목격하신 겁니까, 아니면 전해들은 겁니까?"
"내가 어려서 직접 묻지는 안했고 아버지께서 직접 묻으셨는데 가서 보면 알겠지만 "조상묘지"라 일련의 순서가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만들어진 것이 있어요. 몇구를 묻었다고 하던데."
"그럼 미군입니까, 북한군이나 국군입니까?"
"내가 듣기로는 얼굴이 까만 흑인들이라고 아버지가 말했어요. 하지만 옷을 다 벗겨가고 신발도 벗겨가 아무것도 없다고 했어요."
우리는 주고받는 대화속에 벌써 묘지에 올라섰다. 앞에 낙동강이 훤히 바라보이는 뒤에는 고랑산(210m)이고 우측은 구진산이 좌청룡이고 바로 서쪽은 우백호이고 앞은 호수에 길이고 낙동강이라 선산묘로써 자격이 있지만 균형은 맞지않았다(나의 개인 소견이니 놀라지 말기).
정말 알려주는 묘가 한쪽에 동떨어져 있고 납작하게 봉분이 가라앉아버려 대충 만들어진 모습이다. 그렇다고 바로 파묘할 수는 없어 지역경찰과 관공서에 신고를 하라고 알려드리고 절차를 거쳐 상부승인을 득하여 '00년도에 파본결과 그 자리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파서 가져간 것이다.
우리가 현장을 굴토하고 있을 당시에 동네분 한분이 올라오셔 전쟁이 끝나갈 무렵 미군이 와서 굴토하여 뭔가를 옮겨갔다고 한다. 과연 미군일까, 북한군일까~!"
그러나 우린 '02년도에 그 인접에서 4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도대체 무엇이 진짜인지~~~.
"국군 유해 발굴사에 최초로 발굴된 미군 릴리 에드먼드 소위"
대곡리 위로 올라서면 210고지 고랑산에 이른다. 박진전쟁기념관에서 올라서도 된다. 낙동강변 월평마을의 뱀산에서부터 고랑산 - 대곡고개 - 대곡리 하담마을에 이르는 종격실 능선은 박진나루에서 올라서는 북한군에게는 횡격실 능선으로 공격에 불리하였지만 기습적이고 미군 부대들의 전투지경선을 이용하여 쉽게 침투가 이루어져졌다.
그 다음은 바로 칠현리으 큰담실에서 165고지 - 구진산 - 매봉 - 이목나루터에 이르는 종격실능선이 발달하고 바로 뒤에 1008번 도로와 27번 도로가 칠곡천을 끼고 발달했다. 그 다음이 창녕 광신리 진실재 - 173고지 - 신구리 뒤산 - 장마 동정리 뒤산 - 대봉리 가림고개로 이어지는 종격실 능선이 발달하여 측방공격을 감행하는 북한군에게는 불리하건만 미군의 경계태만과 북한군의 성동격서에 방어망이 뚫려 미군은 많은 희생을 치르며 북한군의 8월공세와 9월 공세를 막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이곳이 낙동강 돌출부이다.
그런데 2000년도 대곡리 마을 민원을 해결하는 과정에 올라선 고랑산 능선에 너무 많은 개인호가 있어 결국 2002년도에 발굴 작전을 감행하였다. 위치적으로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8부 정도의 위치(박진기념관 위 월상리)에 요란한 금속탐지기 발신음이 울렸다.
"미군 인식표가 발굴되다"
개인호에서 완전유해 1구가 발굴 되었다. 인식표가 발굴되어 포병소위 "릴리 에드먼드 3세"로 미군측에 신원을 조회해봉 결과 이곳 전투에서 실종된 것이 맞았다.
"신원 확인을 위해 헬리곱터가 날아와 봉송해 갔다."
이 지역 창녕에서의 발굴 작전이 종료되고 23구의 유해가 발굴 되었는데 구진산 제보지역에서는 3구가 발굴 되었다. 대합면 합리의 태백산(284m)에서 7구의 유해가 15~17세로 추정되는 유해가 발굴 되었다.
결국 이 지역에서의 유해발굴은 미군 추정유해를 제외하고는 모두 북한군으로 처리되었다. ㅏㄹ굴 지역에서의 영결식이 끝나고 미군은 용산에서 멋진 헬리고버가 날아와 봉송해 갔고 다시 하와이 히캄 공군기지에 있는 미군 유해 감식소에서 정밀 감식을 해당 유족들과 진행한 결과 맞아서 최초로 확인되는 기록을 남겼다.
"태백산에 나타난 7인의 소년병"
이지역에서 특이한 발굴이 많았다. 창녕 대합면 합리에 태백산이 있다. 탐사하는 우리들을지역주민들이 말을 하지않고 지켜보고만 있는데 그러다 누군가 살며시 다가서서 알려준다.
지역 주민이 본인이 직접 목격했다며 꼭대기 큰바위 밑에 20여명의 어린 군인이 묻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발굴결과 대부분 유품이 북한군 소지품들이고 별표모장, 모시나칸트탄, 소련제 전투화(밑창이 물방울 형태, 미군은 다이아먼드 형태)등이 나왔다. 나이가 너무 어려서 국군이나 카츄사에는 이런 경우가 드물것이란 판단에 지역주민을 다시 만나 상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북한군 의용군으로 어린 학생들이 끌려와 발목에 쇠고랑까지 차고 죽어갔다 한다. 이걸 동네에서 주민들이 올라와 괭이로 한곳에 묻었다는 곳이 바위밑인 것이다.
"북한군인지, 대한민국 국군인지 우린 무척이나 고민해야 했다."
집이 서울인데 철원에 끌려와 사고가 나면 서울사람 사고, 아니면 철원사람 사고? 여러 갑론을박이 넘치겠지만 그때만 해도 쥐고리같은 판단기준으로 북한군이라 분류하였다. 지역으로 따지면 위의 말이 옳을지 몰라도 국군은 우리편에서 북한군은 적군편에 있는게 분명했다.
"초곡리에서 만난 농부, 이곳이 화전밭이요?"
지역탐문을 하던중에 이방면 성산의 적포교를 넘어 부림의 신반리에 들어갔다. 한지로 유명했던 지역인데 전쟁때는 북한군의 주요 지휘소가 있던 곳이다. 창녕에서 79번도로를 따라 유어를 거쳐 성산에서 적포교를 건너면 바로 일대가 유흥가다. 아마도 강변의 수려함이라 그런지 모텔이나 여관이 몇있고 음식점도 시골치곤 다양하게 있다.
이곳 자체가 북한군이 도하하고 미군이 도하를 차단하기 위해 엄청난 화력을 퍼부은 곳인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그러한 사실을 아는 이도 별로 없다. 관심이 없는건지 아니면 모른체 하는건지.
그런데 내 등뒤에서 식사하는 분이 나이가 들어보여 식사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인사를 드렸다.
"혹시 6.25전쟁때에 군인이나 미군들이 전사한 곳을 알고 계신지요?"
"초곡리에 살았는데 화전밭을 일구던 아버지 괭이에 많은 시체들의 옷가지가 걸려 나왔는데 그저 긁어서 한쪽에 모아 불지르고 말았지요. 그때 내 나이 12살입니다"
"묻어 놓아야 소용없어요. 여우들이 다 파내어 난리치는데"
우리는 초곡리로 달렸다. 가는 길에 필재라는 고개가 나오는데 위치가 범상치가 않았다. 그래서 차를 세우고 주위를 살피는데 인접 밭에 일하는 분이 계셔서 찾아갔다. 나이는 80이 되신 분인데 전쟁때는 부모님을 따라 피난을 합천으로 갔다고 한다. 아니 남쪽으로 간 것이 아니라 북쪽으로 들어갔다니 의아한 모습을 지었더니 합천에 외가가 있어서 그곳으로 갔는데 갔더니 그쪽에도 북한군이 우굴거려 꼼짝하지 못하고 집에만 있다가 9월을 넘어서 집에 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고개를 넘는데 어찌나 죽은 사람이 많은지 온통 시체천지였다고 한다. 사는 곳이 바로 강변 앙진리라며 밤마다 인민군이 강을 건너가는라 여기저기서 많은 군인들이 있었고 비행기의 폭격으로 얼마나 죽었는지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전쟁이 북으로 간 다음에 강변은 시신을 거둬서 묻는 일이 당시의 어른들이 울력으로 나가 이곳저곳에 매장했는데 대부분 여러번의 수해로 모두 유실되고 말았다고 한다.
초곡리 지동골에 들어갔다. 바로 우측밭에 어르신이 계셔 올라갔다.
"어르신, 우리 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단입니다. 혹시 6.25전쟁때 이곳에 사셨나요?"
"그래요, 여기가 우리밭인데 이곳에 시체가 수없이 많았는데 지금은 다 어디로 갔나 안보입니다"
"직접 보셨어요?"
"내가 아버지를 따라 이밭에 일하러와서 많이 보고 아버지가 불질러 태워버리기도 했지"
"혹시 어디에 묻어놓은 곳은 모르세요?"
"묻어 놓아야 소용없어요. 여우들이 다 파내어 난리치는데"
불에 타버린 그 영혼이 어디에 가서 통곡하고 있는지 안타갑다. 여우의 발톱에 찟기고 날카로운 이빨에 찟어지던 그 고통을 누가 알랴~!
그 다음 유학천이 흐르는 여배리도 같은 내용의 사연을 들었다. 사실 군인인지 민간인지 구별도 못한다고 한다. 그당시에는 우리편이 있고 남의편이 있기에 보복성 살인이 서슴없이 자행되었다. 소위 빨갱이라고하는 좌익들의 무자비한 양민학살도 있었고 이에 뒤질세라 우익에서 군경의 힘을 빌어 빨갱이라하여 잡아다가 여기저기서 또한 죽여버린 비극의 현장이 전국 도처에 다 있다.
비록 현재 내가 달리고 있는 20번도로 주변도 남쪽이지만 전쟁의 상처는 어디에도 다 있다. 낙동강 돌출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부산으로 향하는 길목을 장악하여 조기에 전쟁을 종식하려던 북한군의 지휘부가 바로 이곳 부림면 신반리에 위치하면서 무모한 공격을 지휘통제하였다. 그러니 이일대는 미군의 비행기 폭격에 많은 곳이 폭삭주저앉는 민간인 피해도 생긴 것은 당연하다.
신반리는 우리가 지나온 적포교에 이르고 박진교에 이르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나는 이곳에서 합천 묘산면에서 살았다는 한 노인을 만나 거산리에 많은 미군과 국군, 경찰이 전사했다는 제보를 받고 거산리에서 지역주민 간담회를 가졌다.
"김석재(78세)어르신: 인민군이 철수할 때에 해인사 가야산 방향으로 철수했고 잔당들이 만대산(689m)으로 들어가 잔류했으며 밤이면 내려와 민가에서 먹을 것을 약탈해 갔다. 인민군이 물러나면서 경찰 1개중대 병력이 들어왔다가 잔당의 습격을 받아 많이 상했으며 그 당시에 주민들이 탄박스를 날라 주었다. 후퇴 당시는 미군이 먼저 거쳐가고 국군도 거쳐갔다.
"임초지(72세): 동원훈련장 계곡에서 북한군이 폭격으로 많이 죽었다. 합천읍과 임북사이에 다리가 하나 있는데(지금은 없어짐) 대포와 탱크등이 강물속으로 떨어져 죽은 군인을 꺼내는 것을 목격했다.
"김화수(72세): 내곡에서 만대산 오르다 보면 넓은 공간이 나오는데 그 일대가 전투를 했고 주로 경찰과 빨치산이 했다. 만대산에서 노태산(498m)에 이르는 능선에 당시에는 시체가 있었는데 국군인지 인민군인지 알지는 못하고 수복후 얼마 있어 가보니 아무것도 보이지않았다.
사실 이곳은 당시만해도 첩첩산골인지라 공비들이 밤이면 판을 쳤고 일부 거기에 동조한 주민들은 대부분 동네를 떠서 이곳에는 살지않는다.
우리는 큰성과는 없었지만 북한군이 8월과 9월 공세를 통하여 낙동강 돌출부를 통과하여 부산으로 향하려던 계획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곳에 북한군의 최전선 훈련소도 반포리 일대에 있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본초리에서 만난 참전용사님, 그리고 발굴되는 유해의 국적은?"
나는 다시 차를 몰아 낙동강을 건너 창녕 본초리로 갔다. 지역주민의 제보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다시 적포교를 지나 유어 면소재지로 해서 선소리를 거쳐 본초리에 이르는데 대지면 용소리에서 뜻밖의 엄청난 제보와 증언을 청취하게 되었다.
길을 거고 있던 한 아저씨가 우리를 보더니 차를 멈추게 하였다. 본인이 전쟁 당시에 이곳에 살았으며 동네 앞산에 가면 무전기도 있고 총을 여기저기 쉽게 목격하였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몇을 보았는데 까맣게 부풀린 모습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이 군대에 전쟁후에 갔다 오니 보이지않았다면서 개인호도 있고 철모도 있다한다. 그러면서 앞에 동네에 전쟁을 참여한 참전용사님이 계시는데 바로 길옆이라고 알려 주었다.
우린 차를 한곳에 주차하고 그 동네 앞산을 탐사했다. 언덕이 수루재이고 낮은 산이 길 남과 북에 발달했는데 많은 부분이 밭으로 일궈지고 있었다. 보이는 개인호는 탐지기를 대어보니 별로 발신음이 없다. 동네사람들 이야기가 이미 전쟁나고 북한군이 간다음에 사람들이 탄피를 캐러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본초리로 들어가 바로 길옆에 산다는 참전용사님을 찾았다.동네 이장을 만나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하고 함께 집으로 가는데 마침 대문을 열어놓고 뭘 하고 계셨다.
"아니 이장이 웬 군인들과 함께 우리집에 오셨소?"
"이분들이 유해발굴단인데 아저씨가 참전용사라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해서 함께 왔어요"
"나야 뭐 아는게 있는가, 학도병으로 8월에 대구에서 교육받고 영천전투에 참가했지"
"혹시 그 당시에 어디에서 많이 전사했는지 기억에 있으신지요?"
"아니 비내리는데 캄캄해요. 그런데 어딜올라가는데 알지도 못해. 싸워보지도 못하고 후퇴했어"
"그럼 어디 전투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보았나요?"
"인제, 원통이라고 있잖아요. 그곳에서 우리 5사단이 녹았어. 개고개인가 금강산 밑이라는데 함께간 군인은 다시는 얼굴을 본적이 없으니까"
"아 예, 이 동네에는 미군이 싸웠다는데 아시는 곳은 없습니까?"
"저기 바로 저 산인데 전쟁갔다 제대해 나와서 가보니 미군 전투화가 있고 아예 산이 모두 탄피가 수두룩하게 널려있어요. 이 일대 산은 다 그렇다고 봐야지. 죽은 군인은 못보았는데 북한군이 물러간 후에 마을에서 사람들이 올라가 보이는 호마다 북한군을 괭이나 쇠스랑으로 끌어서 묻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내가 듣고 싶어하는 국군이나 경찰의 전투사실은 듣지를 못했다.
"이장님, 혹시 이 일대에 국군이나 경찰이 들어왔었다는 이야기는 못들었습니까?"
"그런 이야기는 못들었고 북한군이 어린 학도의용군을 끌어다 이곳에 미군 총알받이로 밀어넣었다는 소문과 미군이 주로 길을 따라 이동하는데 북한군이 이미 들어와 여기저기 잠복하고 있다 공격하여 미군이 많이 죽었고 이를 보복하기 위해 미군이 엄청난 불폭탄을 투하하여 다 까맣게 타 죽었고 집이 모두 폭격으로 불타버려 한채도 남아있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미군은 종종 발굴하러 왔겠내요?"
"미군은 연에 한번 이상은 이곳을 찾아와서 주민들을 상대로 묻고 발굴도 하는데 근래에 찾았다는 이야기는 못들었어요"
우리는 수리재 주위로부터 시작하여 바로 동네 뒷산인 106고지도 올라가 보았다.
얼마나 많은 호들이 구축되어 있는지 옹기종기 호가 파져있어 호인지 폭격이 이루어진 탄흔인지 수없이 있고 정말 탐지기를 대면 발신음이 들려놀랐다.
"왜 이렇게 낮은 산에 많은 전투 흔적이 있는데 미군이 발굴하지 않았을까?"
나는 2008년까지는 이 일대의 발굴에 신중을 기했다. 왜냐하면 모두가 북한군과 미군이 전투했다고 하며 미군은 대부분 발굴해 갔다고 하는데 누굴발굴하는가가 모호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2007년도에 부산에 있는 유엔군 묘지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곳에 국군이 있다는 제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부산에 내려가 확인해 보니 국군이 아닌 카츄사신분의 한국군이었다. 창녕지구등에서 '50.8월과 9월 전투에 미군에 배속되어 전사한 인원으로 미군 소속이었다. 그렇다면 이곳 전투에 참여한 미군에 과연 카츄사가 얼마나 배속되어 갔는지 알아보았다.
"다시 한번 알아보는 카투사제도의 기원"
카투사는 '50년 8월 15일 이승만대통령과 맥아더 원수 간의 합의에 다라 미군 사단의 부족병력을 보충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에따라 8월 16일 313명의 카추사가 일본행 선박에 승선한 이후에 8월 24일까지 총 8,637명이 일본으로 건너가 교육을 받고 미 제7사단에 배속되어 훈련을 받았으며 대부분 장진호지구 전투시 미 제1해병 사단의 우측 사단으로 진출하는 사단과 함께하며 중공군 침투시 많은 피해를 본다. 그 외에도 한반도에 이미 들어온 미 제1기병사단, 제2사단, 제24사단, 제25사단에도 구포리(제3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카추사들이 8월 20일에 최초로 각각 250명씩 보충되었다.
이후 카추사는 소총중대 및 포대에 100명씩배정되었고 각 사단은 4일마다 500명식 총 8,300명을 보충받았다. 카추사는 제도적으로 국군의 일원이었기에 봉급과 행정처리가 한국정부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급식과 일용품에 한해 미군으로부터 지원받았다. 전쟁 기간중43,660명의 카투사들이 유엔군과 함께 전투를 벌였고 이 가운데 11,365명이 전사하거나 실종 처리되었다.
하지만 유엔묘지에 있는 분들은 아마도 이 카추사제도가 시행되기 전에 어떤 연유로 미군에 들어가 창녕지역에서 전사한 인원으로 미군에 의해 유해가 처리된 특별한 경우로 그동안 우리 정부에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용사들이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미 제2사단도 제24사단도 전투를 했으니 혹시나 이러한 성격의 한국군이 있을 수 있다는 판단아래 다시금 주변에 대한 정확한 탐문 및 탐사활동을 게을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찾는 제보나 관련 내용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역에서 계속하여 지역책임부대에 민원을 올려 유해목격 사실을 제보하다보니 우린 사실 확인차 한번 발굴해 보기로 한 것이 2009년도다. 이전까지는도 이곳 경남일대는 기동발굴로 발굴을 했고 함안지역 전투산 일원은 대규모 발굴을 했다. 이유는 그곳은 국군 해병대와 전투경찰이 전투한 기록과 지역주민의 목격담이 많아서였다.
2009년도 제보지역을 중심으로 8구의 유해를 발굴하였는데 나오는 유품이 모시나칸트탄이 많아 아무래도 북한군일 확률이 높아보였다. 그러다 어찌된 영문인지 갑짝스레 지역에서 국군이 미군과 전투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제보와 미군이 유해를 찾으면서 미군만 발굴하고 기타는 그 자리에 다시 묻어버렸다는 몇건의 유익한 제보가 들어왔다. 그래서 발굴팀을 파견하여 발굴에 들어가 '10년도에는 무려 45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문제는 발굴되는 유품중에는 미군것도 있고 소련제나 중공군것이 많이 나와 다른 곳과 별 차이가 없으나 일부 구두가 발견되기도 하여 혹시 이곳 일대에서 집단 학살이 있었는지 의문케하였다. 하지만 지역탐문결과 창녕의 구창락초등학교 자리 일대가 '50년 후반부터 국민방위군 훈련장소(대지면 일대)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2011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이곳 일대에서 거의 200여구의 유해가 발굴되어 감식을 기다리고 있다. 이걸 통해서 우린 창녕을 지키려는 유엔군과 창녕을 강탈하려는 북한군의 전쟁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가늠이 되었다.
"그렇수도 있는데 아마도 대부분 북한군일 겁니다"
이어서 제보가 들어와 적포교 넘어가지전 낙동강변에 수백구의 시신을 묻었다는 제보가 날아들었다. 우린 다시 적포교에 가서 제보자를 만났다.
"어르신이 직접 보셨습니까?"
"내가 7살 먹던 해가 전쟁인데 우리집이 바로 저기 있었지요. 지금은 밭으로 변했지만. 피난을 가지않고 집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랑 남아 있는데 인민군이 정말 쌔까맣게 강을 건너와 창녕쪽으로 밀고 가는데 얼마되지않아 다시 강너머로 밀려가는데 뗏목도 없고 그냥 물속으로 뛰어들어요. 미군이 탱크도 오고 하늘에서 비행기가 포격을 하는데 저기 강변이 벌겋게 불길이 솟아올라 몰려들던 북한군이 모두 불타죽기도 했어요"
"그럼 누가 저 모래사장에 죽은자를 파묻었습니까?"
"파 묻는 것은 못보았고 미군이 시체발굴하러 와서 저곳을 모두 파헤치고 미군을 찾아냈어요. 그리고 다시 묻어버렸는데 그때 멀리서 바라보았지요"
"국군인지 북한군인지, 아니면 장마로 수해가 발생하여 다른 곳에서 죽은 자를 이곳에서 건져서 묻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수도 있는데 아마도 대부분 북한군일 겁니다"
"창락초등학교(지금은 유치원)에 진혼곡"
곧 통일이 된다고하더니 뙤놈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군에 가지않은 대부분의 성년남자들이 다시 군에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바로 국민방위군 소집이다.
"실미도 사건"을 조사하다
나는 갑작스레 과거사 진상규명 위원회에서 "실미도 사건"의 현장조사를 부탁받고 오류동으로 향했다.
2006년도 5월쯤 이야기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가 70년도 초인데 그때에 내가 타고 가던 버스가 지금은 없어진 서울 노량진 고가도로에 멈첬다. 앞에서 전쟁이 나서 차들이 다 서있다고 한다. 도대체 전쟁이란 알지 못하는 우리다.
차에서 나오는 긴급 뉴스에 노량진 유한양행 앞에서 무장간첩단이 우리 버스를 탈취하여 서울로 들어오다 군경과 총격전이 벌어져 20여명이 사살 되었다는 뉴스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노량진 수원지에서 내려 걸어서 노량진역 부근으로 걸었다. 차량들이 서서히 움직이고 군인들 차량이 빠져나가고 있다. 현장근처에 가니 검은 연기에 그을린 자국이 도로주변에 선명하고 바리게이트가 아직 주변에 남아서 나를 맞이했다. 이 소식에 호기심 많은 지역 주민들이 모여들어 나름 아는 이야기로 주변이 시끄럽게 변해가는데 소방차가 와서 물을 뿌리고 갔다.
이 사실은 그후에 아무런 나의 의식에 남아있지 않했는데 갑작스레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는 영화와 책이 발간되어 흥미를 더했다.
그런 어느날 그 유족분들이 요구하여 당시에 현장에서 죽지않고 차후에 사형을 당하여 죽은 유해를 찾아내라는 요구가 국방부에 접수되었다. 마침 "보도연맹사건" 위주로 현장조사와 발굴 작업을하던 과거사에서 국방부에 요청이 들어왔고 우리에게 현장조사를 하도록 했던 것이다.
당시 나의 직책은 발굴이나 조사팀이 아니고 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 위한 국방부 조사팀 T/F에 편성되어 중사 2명을 지원받아 전국의 주요 격전지를 샅샅이 탐사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래서 현장에 가보라는 지시로 발굴팀을 따라 현장에 가 보았던 것이다. 가보니 당시의 운전하신 분이나 동네에서 이상한 사람들을 목격했다는 식의 몇몇 증언자나 제보자가 나와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과거사 조사팀장은 여성이었는데 얼굴이 기억에 아주 날카롭게 좀 마른 편의 모습으로 현장에 있고 얼마 있어 장관급인 그 위원장이란 분도 왔다.
그러나 먼저 산에 올라 현장을 분석해 보니 아니 5구의 시신이 묻혔다면 상당히 큰 봉분이 있어야 하고 만약 각개로 묻혔다면 올망졸망 아기 묘같은 봉분이 주변에 있어야 하지만 경험상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말없이 현장을 빠져나가려는데 위원장을 동행한 비서가 잘 아는 후배 삼식이었다.
"어 형 여기 왠 일로?"
"아니 너는 여기 어떻게 왔어?"
"국민방위군은 발굴하지 않으세요?"
알고보니 특수임수수행자 모집에 참여하여 군복을 벗고 들어가 위원장 비서직을 수행한다고 한다. 부관병과였는데 적성에 잘 맞는다고 덕담을 서로 주고 받는 도중에 "국민방위군 사건"을 아느냐며 창녕에 가면 주변에 그런 분들이 억울하게 묻혀있는 곳이 많이 있다고 한다.
이미 국민방위군은 영천 치일리에서 발굴한 사실이 있기에 당연히 발굴한다고 하니 보도연맹만 많이 억울하게 전국에 묻혀있는 것이 아니고 "국민 방위군"도 경북과 경남 일원에 많이 묻혀 있다는 것이다. 그걸 과거사에서 조사도 한다고 한다.
사실 이 당시까지 국방부의 공식입장은 솔직히 말하면 "모르쇠"였다고 봐야 한다. 아무런 자료가 남아 있지않다는 것이 해명이었다.
이미 공표가 되었지만 다시한번 상기하는 의미에서 이 사건을 규명해보면 국민방위군 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이래 초대의 비리 사건"으로 관련 사령관등 5명이 사형되고 방위군은 전투에 참여도 못하고(극히 일부는 참여) 해체되는 비극적인 사건이다.
강제 징집된 국민 방위군 수만명이 군 고위층의 예산횡령 및 뇌물 범죄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창고나 학교 시설에 아무런 월동대책도 없이 몰아 넣고 굶기고 병이 생겨도 치료도 안하여 아사로 대부분 죽어가고 임의의 장소에 묻혀지는 비극을 맞이했다.
모집되는 시기는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서 한만국경선으로 진격하던, 유엔군을 몰아붙이는 시기로 '50년도 12월 15일 만 17세이상~40살 이하의 장정을 제2국민병에 편입하고 21일 첫 징집자들이 서울 창덕궁에서 소집되어 육로로 걸어서 교육대가 있는 남쪽 경상도로 내려가게 된다.
이 사건으로 소집된 장정, 제2국민역이 68만여 명이고 군이 발표한 사망자는 1234명이고 그 외 상세불명의 행려 사망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집돈 인원중에 교육대 입소인원은 29만 8천여 명이고 경상도 일대에 51개, 제주도에 1개하여 총 52개 장소에 소집되어 도보로 행군 도중에 굶주리고 돌림병이 돌아죽기도 하고 집단으로 수용하다보니 질병이 확산되어 그 죽은 숫자가 당시의 공식 기록은 1234명 이지만 실제는 수만명으로 당시 소문으로는 5만~10만이라 했는데 노무현 정권에서 조사한 결과로 5만~8만이 사망했다고 추산했다.
그렇다면 군인이 전쟁기간중 전사한 인원이 18만여 명이란 사실에서 그 얼마나 엄청난 사건이었는지 알 수 있다.
100여 일만의 기간에 병력이 먹고 입어야할 것들을 빼돌려 정치자금으로 유용하는데 무려 현금횡령이 23억, 양곡횡령액이 20억, 공제액이란 명목으로 예하의 공금을 횡령한 액수가 29억 등 73억원에 이르다 보니 윤익현대령이라는 부사령관은 약 3억원을 옆에 쌓아놓고 기생집에 뿌리는 등 희대의 사건이었다.
그 수장 김윤근은 사실 아무런 군관련 경력이 없음에도 당시 신성모 국방장관의 사위란 것에 별을 하나 달고 직책을 수행했다고 하니 뭣이 되었겠는가.
그러나 사후 조사에 8만여 명이 죽었다고 하지만 실제는 그 병력의 40%인 10만여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것이 타당하다고 보는 것이 걸어가다 죽고 얼어죽고 문제가 발생하여 무도 귀향조치가 되었을 때에 아무런 수송대책이 없는 쌀 몇 말을 주어 등에 메고 떠나게 했으니 오다가다 행려자가 되어 길거리에 쓰러져 귀한 목숨을 총 한방 쏘아보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거창 신원리 양민학살사건('51..9~11, 노약자와 부녀자 719명 학살. 보병 제11사단/ 지역 주민이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실제는 1500여 명이 피해) : 사단장 최덕신 직위 해제(견벽 청야 전법(손자병법) 지시, 제3공화국시절 북으로 월북한 자임), 제9연대장과 제3대대장은 징역 3년, 해당지역 게엄사령관 김중원(국회 조사단에게 빨치산으로 위장한 병력을 침투시킴. 하지만 모두 이후에 원대 복귀됨))보다 먼저 발생한 북한 공산군보다 더한 사건으로 비록 주모자들이 공개 처형되고 장관이 경질 되었다고 하지만 정말 숨겨서는 안되는 엄청난 것인데 아직도 우린 공개적으로 이 사건의 진실에 접근해 가는 것을 군은 꺼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눈이 번쩍뜨여 얼마후 바로 창녕으로 달려갔다.
창녕 창락초등교는 없어지고 지금 유치원이 있다. 그래서 주변의 연세 드신분을 만나 관련 사실을 들으니 정말 비참히 굶어 죽어갔고 병들어 죽은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어르신 기억에 남는 몇가지만 말씀해 주세요?"
"기가 막히는 노릇입니다. 내나이 12살에 이곳 학교에 들어가 그 방위군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어요. 그런데 먹을 것이 없어서 때가 되면 동네로 구걸하러 나가고 그러다 상급자에게 걸리면 죽도록 매를 맞아요. 당시는 약도 없는데 무슨 환자들이 많은지 한쪽에 가마니로 덥혀져 있는데 가지 말라고 하여 바라만 보았는데 밤이 되면 형들이 들것에다 들고 나와서 저 앞산에 갔다 묻엇지요. 12월에 왔다가 이듬해 4월인가 다 떠났는데 소문에 반은 죽었다고 해요"
"그럼 혹시 그분들이 묻힌 장소를 알고 계시나요?"
"그럼 산 능성이를 타고 오르면서 애기들묘처럼 생긴 것은 다 방위군 묘야!"
"산 오솔길을 따라 여기저기묻혀진 영혼들!"
나는 어르신을 앞에 세우고 산을 올랐다. 바로 길건너 학교 앞산이라 평이한 산이다. 하지만 오르는 길은 무거웠다. 도대체 어찌 이렇게 되었단 말인지. 파면 팔수록 너무 억울하고기가 막힌다.
계속하여 산 정상까지 오르는데 그리 뭘지도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이 그리 많아 보이지도않았다.
"어르신, 여기 의심스러운 곳을 다 합쳐도 삼십명도 않될거 같은데요?"
"표시가 남아 보이기도 하지만 대충 묻고 갔으니 아예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곳도 많이 있어요. 우리가 어려서 보면 온통 조그만 묘들이 많았는데 이 세월이 얼마요? 다 씻기어 흔적도 없지"
"그럼 어르신 말고 또 아시는 분이 동네에 없나요?"
"왜 또 있지. 나보다 한두살 많은 형들이 몇 있어요. 내려가면 알려주지"
나는 산에서 내려와 또 한사람의 제보자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 분보다 나이가 5살이 많은데 어떻게 군대도 방위군도 안들어갔다
"북한군은 돌림병을 두려워 했다"
"어르신은 어떻게 군에 안들어갔어요?"
"그때만 해도 키가 작아서 나이가 어리다고 부모님들이 방패막이를 하셨고 마침 아파서 골골 했어요. 그러니 잡으러 왔다가도 그냥갔고 인민군이 한번은 처들어와 가자고 했는데 돌림병에 걸렸다는 어머니말에 도망치듯 가버렸지뭐야, 하하"
"그럼 군대는 안가신거네요?"
"전쟁 끝나고 인제가서 3년살고 나왔지요"
"산능산 뿐만아니라 저기 동네 공동묘지에도 수백병이 묻혀 있어요"
어르신을 따라 동네 공동묘지에 갔다. 바로 앞서서 갔던 산의 남서쪽 평탄한 지형이다. 집을 나와서 큰길을 건너 마을을 우회하여 논길을 따라 들어갔다.
"아니 여기에 묻힌 것은 어떻게 아셨나요?"
"군인들이 뭘 싸서 들것에 들고 가는데 늘늘이 그것도 해질 무렵이면 매일 이곳을 오는데 많게는 10명이 넘을 때도 있어요. 와서는 괭이나 삽으로 땅을 파고 들고 온 것을 밀어넣고 흙을 덥고서 경례를 하고 떠나갔지"
"그러면 나중에 누가와서 발굴같은 것을 하지않했나요?
"내가 군에 가 있을 때면 몰라도 적어도 '53년 10월까지는 그런적 없어요. 어쩌다 유족이란 분들이 동네에 와서 물어보기는 했는데 그때는 묘에 동네에서도 어린애들이 많이 죽었어요. 그러니 누가 누군지 푯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누가 이런 것을 잘 말하려고 하나요?"
"여기 이런 형태는 전부 의심해봐야 할 것들이네요"
"그렇다고 봐야지요. 헌데 여기만 조사합니까?"
"또 알고 계신 곳이 있어요?"
"저 바로 윗동네 직교리와 술정리, 지금 저수지가 있고 학교가 있는 곳에도 많은 방위군들이 들어와 머물다 간 곳으로 이일대도 여기저기 묻혀있다고 들었고 대지면 석리가 있어요. 양파가 전국에서 최초로 재배된 곳인데 그곳에 대지초등학교 자리(앞장에서 언급, 석리 대지초교 ,모산리 공동묘지)도 방위군이 엄청난 숫자가 들어왔다가 돌림병으로 많이도 죽었다고 들었는데~"
아뿔사 도대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죄송스럽다.
아니 전쟁통에 죽어간 군인이 17만 여명인데 교육시킨다는 핑계로 끌여들인 방위군의 사망이 전국적으로 보면 52개 집결장소 및 교육장에서 그저 굶어서 죽고 병들어 죽고 내팽개쳐진 숫자가 전사자 숫자를 상회 할 수도 있다는 나름의 결론에 눈을 감고 명복을 빌어야 했다.
"국민방위군의 발굴 기록"
제1차(최초) : 영천 치일리 지역 43구 발굴
그런데 만약 확인이 된다면 발굴하겠다는 것이 국방부의 공식 입장이었다. 영천 치일리 건도 그런 수준에서 지역주민의 제보로 시작하여 사실관계를 면밀히 조사하여 장관의 별도 승인을 받아 2002년도 10월에 43구를 발굴하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국민방위군 발굴이다.
제보 내용은 치일리 안으로 들어가면 은혜사란 고찰이 있는데 이곳에 방위군들이 집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곳도 제대로 통제되고 치료를 하는 병원등이 없어서 결국 아사로 100여명이 죽어서 발굴 되는 장소 아래 길가에 야밤에 동료들이 들고 나와 몇 삽 파고 묻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청통 치일간 도로 확장공사로 매장지역이 훼손 위기에 몰리어 동네분들이 나서서 이장을 해 놓았다는 것이다.
발굴결과 많은 훼손이 있었는지 우린 완전유해 6구등 너무 보존상태가 나쁜 43구를 발굴했다. 모두가 강원 정선과 영월, 그리고 충북지역 인원들이란다.
제2차 : 제주 강정리 지역 43구 발굴 ( 김흥순:유전자 감식으로 아버지를 찾다)
제주도에도 2~3천명의 방위군이 육지에서 배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지금의 공항주변등에 훈련소가 있었고 이들중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을 이곳 강정초등학교에 수용하엿고 죽으면 도순동 상수도 보호구역 하천변에 묻었다는 유가족의 진정에 따른 발굴이었다.
유족 김흥순씨가 본인의 아버지를 발굴해 달라는 진정으로 2003년 6월에 첫 발굴이 시작되어 44구의 유해를 발굴하였고 실제 유전자 감식으로 아버지를 찾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곳은 실제 매장에 참여한 문동필(당시 16세)씨의 증언등이 결정적 근거가 되었고 이후에도 3차례에 걸쳐 추가 발굴이 진해되어 10여구의 유해를 더 찾아냈다.
이후로 나는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와 협조하여 52개 교육대에 대한 자료를 확보, 많은 시간을 방위군을 찾으려 탐문과 탐사(울주 서생리, 김해 지내동, 영천 고경 옥녀봉 사격장내, 제주지역 일원, 경산 사과밭 일대(현재 삼성박물관 건립지역 일대) 활동을 다녔다.
그리고 인터넷상에 있는 관련된 자료를 읽고 그분들의 애환을 들으며 많은 몸부림을 쳤다. RO군번의 실체를 이해하며 건장하다하여 일부는 현역으로 편입되어 가고 일부는 RO군번으로 노무사단에 들어가고 대부분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길거리에 버려진 그 아픔을 기억하려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실미도건을 좀더 언급해야겠다.
아마도 군 수사관이아닌 이상 내가 가장 많이 그 유가족들과 대면을 많이 했으리라 본다. 이미 앞에서 언급도 했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 설치 주무부서와 목적이 명확하게 국가 기관에서 시행한 사실이다.
그러다 그 목적이 상실되었다면 당연히 거기에 합당한 배상을 하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책없이 젊은이 들을 모아서 특수교육을 시켜 놓고 돌아가라니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겠는가.
이것만이 아니다 훈련이 북한지역에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라 고난도의 목숨을 건 훈련이였다. 그러다 사고로 죽기도 하고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믿기어려운 별별 사건들이 많았다. 그러나 어떻게 사고가 제대로 처리되었는지도 모른다. 훈련장소(실미도내 훈련장)에 매장된 인원들의 옳바른, 유가족에게 통보나 보상등이 전무하거나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근거를 남기지않고 비밀에 붙이고 소명시켰으니 말이다.
모집과정도 사실 불법적이고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모집관들을 전국 몇군데의 사람들이 운집하는 항구나 역전주위에 파견하여 방랑하는 사람(피를 팔고 있는 인원 등)을 골라 달콤한 꼬시기(목적을 달성하면 엄청난 부를 준다는 등)로 끌여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몇몇은 소문대로 어떤 사건과 연관된(범죄등) 인원이 동원되었다는 확인되지 않는 여러사항이 국민적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다. 비밀리에 오류동에 있는(지금의 평강 제일교회 위치) 공군 특수부대로 편성하여 북한에 침투해 들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극비의 비공식 집단이다.
그러다 보니 인생막판에 한판 승부를 위해 물불안가리고 찾아든 젊은이들에게 정말 해서는 안되는 극악무도한 훈련을 시켰다. 그러다 갑작스레 '이제 할 일이 없어졌다. 모두 돌아가라'니 기가 막히지 않겠는가!
직장도 없고 집안에 먹고 살아갈 농토나 재산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젊은 청춘을 불살랐는데 어디로 가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적절한 보상이라도 해줘야 하는데 아무런 대책도 없다고 하니 이건 공산당보다도 더한 것이다. 결코 나는 미화하고픈 뜻은 없다. 우리는 민주국가다. 여기에 맞는 정책과 대책이 있어야지 주먹구구식으로 누구 하나가 필요하다고 비공식으로 이런 조직이 운용된다면 이거 왕조시대 일부 힘있던 관료들의 "사병"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후에 오류동일대에서 발굴작업이 있었으나 찾지 못했고 또 다른 인원이 벽제 공원묘지에 매장되었다(현장에서 숨진 인원은 벽제에서 2006년도에 발굴되어 현재 벽제 일정장소에 추모공원이 설치되어 안치되어 있다)는 증언(현장에서 죽지않고 남았던 5명의 특수전사)에 우리는 무려 5차에 걸쳐 발굴을 진행했는데 이 과정에 내가 직접 현장 통제관이 되어 지휘했고 유가족을 만나 별별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후에 나는 LA에서 있었던 한인 이주 100주년 기념식에 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 모습을 알려주고 증언이나 제보자를 찾기위해 찾아간 적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실미도사건의 그 마지막 5인(오류동 공군부대 안에서 사형됨)이 묻혔다는 곳을 본인이 어린나이에 직접 목격했다며 나에게 찾아와 뭔가 비밀스런 내용이라도 있는양 은밀히 접근하여 정보를 주겠다 한다. 하필이면 이름도 나와 비슷해 보였다. 솔깃하여 이야기를 들으니 본인이 어린나이에 오류동에서 분명 산으로 오르는 모습과 나가온 차량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에 나에게 정보를 주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본인이 한국에 살고있을 때에 여러곳에서 정보를 얻으려 본인을 찾았고 심지어 위협까지 느껴서 LA로 도망친 것이란다. 그러면서 그곳을 아느냐고 물어 발굴작전에 직접 참여했다고 하니 그곳이 아닌 그 지역 어디라는 식이다. 그것은 본인 어머니 기일에 한번씩 한국에 들어와 위치를 확인하곤 했는데 어느날 보니 글토하고 있어 가보니 아니라는 식이다.
그래서 역사의 올바른 기록을 위해 나에게 정보를 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종이에 요도를 그려주는데 개략적이라 그렇게 큰 정보는 아니다.
그러나 얼마를 지났는데 어느날 국방부에서 전화가 왔다. LA에 "미스터 리"를 아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LA에 갔다온 이후에 실미도 담당 과장에게 이 문제를 알려준 적이 있기에 바로 얼마전에 내거 정보라며 받아온 그 당사자인 것같다고 답변했다.
"이번에는 세월호 추모공원이 있는 "부평 공원묘지 인근"이라는 증언을 가지고 민원을 제기한 것이다. 그래서 나보고 함께 가보자고 하여 추모공원이 있는 곳과 원래 오류동 발굴 지역을 탐사했다. 하지만 그사이 10여년이 또 지나서 너무 많은 변화가 벌어져 정확한 발굴지역도 모르겠다. 등산로가 발달하고 발로 산밑에 앞파트가 들어서고 학교가 세워지고 말이다.
우린 산에 오르내리며 '06년도에 시굴을 했던, 당시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이해동 목사로 기억)을 만났던 곳을 찾아 혹시 혹시라는 말만 반복하고 내려왔다. 물론 그 산 남쪽이 현재 평강제일교회가 들어와 있는데 바로 이 "모리아성전" 위로 올라사면 사형 집행장소가 그대로 있다.
나는 아마도 여름이고 겨울이고 4~5회는 이곳 야산일대를 탐사했다.
이유는 이곳이 초기 전투당시 한강변에서 6.25전쟁 지연전에 이어 후퇴당시에 밀려내려가며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바로 앞이 김포공항이고 한강변이다. 강서구의 화곡동이나 방화동(개화산 전적지), 내발산동(우장산, 강서구청 맞은편), 내발산동(현재 공수부대 자리), 공항 내부(2회 들어가 3/4번 활주로와 바로 지금도 녹지대로 남아 있는 논형태 보존되어 있음), 오곡동과 오쇠동일대, 부천시 오정구 오정동에서 원미구 원미동일대의 춘의산과 원미산이 연결되는 모든 지맥들, 바로 인접 서울 구로구의 궁동, 천왕동 지역등 별별 지역을 다 다녔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러다가 이상한 투기꾼(?, 어느 산밑에 일본군이 패망하면서 만주에서 실어온 엄청난 금괴가 묻혔다는 제보와 동업희망 / 왜냐하면 통제구역으로 본인들이 들어가지 못하므로 나를 따라 현장 실태를 보려함. 이 건은 비공개가 아니라 조금 오래된 내용이지만 언론에 노출이 되었고 지금도 관련된 곳에서 비공개 자료수집 및 준비중으로 알고 있음)을 두번이나 대면한 적이 있다(그러나 밑의 간부들이 모르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하여 더이상 진척은 없었다). 이 모든 내용도 대부분 앞장에 언급되어 있다.
결국 실미도 5인의 행방은 현재도 진행형인데 심심한 애도와 그 유가족에게 진심어린 위로의 말씀을 들이고 싶다. 시대가 만들어낸 잘못된 사건이다. 하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 그 높은 분들의 정의로운 고백을 바랄 뿐.
4)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에는~
그런데 묘한 것은 소련군사고문단장의 기록이 이 서부지역 전사, 특히 창녕 영산과 마산 서부지역에 대한 전쟁기록이 미흡하다. 우리가 번역과정에서 뺀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별거 없는 것인지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나의 입장에서는 확인하기 조금 어려운 사항이다.
제1권 198~208페이지 사이는 '50.7.9~23일까지를 남침 3단계로 제1군단의 대전/서천 방면과 제2군단의 문경/영주/영덕 방면에 대한 기록이 있다.
남침 4단계는 209~224페이지에 수록되어 있는데 '50.7.19~9.25일까지의 기록인데 제1군단이 진주/합천/김천방면의 전투 기록이 있는데 우리의 전사기록과 차이점이 있다.
가) 영광 삼학리의 경찰의 전투 기록이 우리측 전사에도 라주바에프의 보고서에도 없다
북한군 제6사단이 7월 19일에 별다른 저항없이 금강을 도하하여 경찰병력의 일부 저항을 물리치고 당일 만경강까지 진출한다. 7.20일에는 김제와 전주를 피탈하고 7월 22일에는 고창을 그리고 23일에 영광을 점령하는데 북한군 제6사단 제15연대의 일부가 밤 11시에 적 1개 대대 병력과 조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24일 아침까지 전투가 계속되어 적 병사 및 장교 200여 명을 살상하고 야포 및 박격포 12문을 노획하고 나주로 진격하여 7월 24일 오후 늦게 해방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제1권 211페이지)
우리 전사(제4권 475~495p)에도 국군 1개 대대가 적의 공격을 받아 지연전을 했다고 기록하고 나주로 철수하는 부대를 추격하여 북한군이 24일 오후에 나주가 점령되었다고 기록한다.
경찰관련 기록은 북한군 제6-15연대 예하 대대의 1개소대 규모가 고창 용대리로 상륙하여 영광지역을 공격하고 영광에는 경찰 1개 소대 규모가 경계를 하다 나주로 철수하였으나 이미 나주가 피탈되어 불갑산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전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삼학리에는 국군 1대 대대규모(단대호 미상)가 방어를 하다 돌파되었으며 24일 오후에 나주가 피탈되었다고 한다.
경찰관련 기록은 화순 널재에 아군 철수를 엄호하던 경찰이 적의 전차를 동반한 곡격에 화순을 거쳐 벌교로 철수하고 24일 아침 8시에 나주가 점령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엄청난 기록의 잘못인지 정말 기록이 맞다면 우리가 삼학리일대에서 발굴작전을 하여 '07년도에 무려 50여구의 경찰, 그것도 경찰 뺏지(영암, 해남 경찰등 선명히 식별됨)와 요대등 원형대로의 유품까지 발굴하고 그 유족들을 탐문하여 DNA 감식으로 20여명이 신원까지 확인되었는데 도대체 이것은 무언인지 문제다.
나) 영광 삼학리에 경찰 전투기록 고찰
라주바예프의 전쟁 보고서(제1권 209~212p)는 북한군 제6사단은 7월 19일 별다른 저항없이 금강을 도하하여 개별 경찰들을 격파하면서 19일 오후에 만경강까지 진출하고 제6-15연대는 7월 20일 김제를, 제6-1연대는 이리 동산동에서 경찰 수비대 200명을 격파하고 전주를 점령했다.
이어서 후속하는 포병을 집결 시킨 후 7월 20일 오후 늦게 진격을 개시하여 7월 21일 새벽 3시에 제15연대가 지금의 정읍시 고부면 남복리를, 제1연대가 김제를 점령했다. 7월 22일 저녁 7시 무렵 영광 방면으로 진격하는 제15연대가 고창을 점령하고 23일 새벽 4시에 영광을 점령한다.
제1연대는 23일 정오에 고창을 점령하는데 북한군 제6사단은 영광 및 고창 점령전에 목포로부터 투입된 국군 해병대 3개 부대 병력을 격파했다고 기록한다.
북 제6사단은 23일 저녁 8시에 사단 제2제대인 제13연대를 영광지역에서 함평-목포방면으로 투입하여 7월 24일 차량에 탑승한 선두가 목포를 점령하기 위한 전투를 수행하였다.
북한군 제15연대는 영광으로부터 나주로 진격하라는 지시에 7월 23일 저녁 8시에 진격을 개시하여 밤 11시 무렵 영광 삼학리에서 국군 1개 대대 병력과 조우하여 7월 24일 아침 7시까지 전투가 계속 되었고 병사 및 장교 200여 명을 살상하고 야포 및 박격포 12문을 노획한 후에 7월 24일 오후에 나주를 해방시켰다고 기록한다.
북한군 제1연대는 고창에서 남원-구례-순천. 하동으로 진격한다.
7월 24일오전에 남원을 점령한 후 오후에는 구례를 점령한다. 그리고 25일 하루를 휴식하고 정비를 한 후에 26일 새벽 5시에 순천을 점령하였다. 이후에 2개 대대는 여수방면으로 1개 대대는 하동방면으로 진격을 개시하여 27일 아침 6시 30분에 여수를 점령하면서 국군 장.사병 500명을 전사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하동으로 진격한 1개 대대가 섬진강 서쪽 강변의 국군을 격파하고 도하하여 7월 27일 오전 10시에 하동을 점령하였다고 한다.
북한군 제6사단은 목포항과 여수항에 증강된 1개 대대씩 주둔시키고 7월 28일 오후 늦게 하동에 주력을 집결시키고 7월 29일 아침부터 마산방면으로 진격하여 29일 오후 늦게 하촌리(진주 서남방)에 진출하여 그 곳에서 남강 동쪽 강변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던 미 제1해병사단 2개 대대 병력과 조우하게 되며 남쪽으로 진출하는 제15연대가 진주-마산간 도로를 차단하여 미군의 철수로를 막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전사기록은 어떻게 되었을까?(제4권, 호남지역 전투 437~495페이지)
호남지역 전투
1. 개요
사실 호남지역에는 대평리-공주 사이의 금강 방어선이 '50.7.16일 무너지면서 북한군 제4사단이 대평리-대전으로 공격하는 제3사단과 협동하여 논산을 경유 대전 남쪽으로 우회하고 있었다.
이 기세에 눌려 미군이 논산에서 철수하자 그 우익에 전개된 북한군 제6사단이 주력부대를 유구에서 강경-장항으로 남진시키고 제13연대를 홍성에서 서천방향으로 각각 진출 시킨다.
하지만 우리 국군은 군대가 없었다. 따라서 전북지역에서 새로 편성중인 제7사단(사단장 민기식 대령)예하 2개 연대(제3.9연대)는 대부분 비무장으로 병력 보존차원에서 후방으로 이동(제3연대: 전주-순천-하동-진주 경유 부산으로. 제9연대: 남원-운봉-함양-진주 경유 부산으로)하고 1개 대대(독립 대대)만이 군산에 상륙한 해병대 고길훈 부대(야구 500명이 7월 15일 제주항을 출항하여 16일 08:00시에 군산에 입항하여 해양대학교에 지휘소 개설, 99식 소총, 3개 중대에 1개 수색소대로 편성. 군산에 있던 해군 경비부와 인천경비부에서 철수한 인원, 옹진에서 철수한 제17연대 요원등 혼성부대로 재편성 됨. 최초 임무는 군산항에 비축된 정부미를 안동호(LST)에 적재하는 것을 경비)와 함께 금강하류지역에서 결전의 의지를 가다듬었다.
당시에 육군본부는 호남지역에서 제,7사단을 신편하여 예하부대를 신속히 확보하려 했으나 무장시킬 아무런 방법을 강구하지 못했다.
'50.7.16일 서천과 논산이 피탈되자 전주 편성관구사령관 신태영 소장이 금강남안의 방어를 위해 해병대와 신편중인 제7사단 일부로 군산은 해병대가, 용안면-웅포면일대는 제7사단, 전북경찰(700여명)은 고산-강경간을 방어토록 한다. 그리고 이나루 공주로부터ㅜ기갑연대의 기병중대가 마필 100두와 함께 전주로 들어와 통제를 받게 되었다.
당시 상황은 어떤 적법한 계통에의한 명령체계가 없이 임시방편으로 지휘통제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예를 든다면 당시 제7사단은 민기식 대령이 지휘하는데 전주편성 사령관은 신태영 소장이고 이러다 보니 서로 보이지않는 알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상황 파악이 어려운 육본은 전주 편성관구사령부를 전북 편성관구사령부(원용덕 준장)로,
광주 편성관구사령부를 전남 편성관구사령부(이형근 준장)로 개편하고 동일부('50.7.16)로 서해안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하여 신태영 소장을 임명하여 통합 지휘하게 한다.
이에 따라 전북 편성관구사령부에 신편 제7사단을 흡수, 그 예하 제3연대를 제1교육대로 그리고 제9연대를 제2교육대로 개칭하여 직할대로 하여 하였으며 전남 편성관구사령부에 신편 제5사단을 흡수 그 예하 제15연대를 제5교육대로, 제26연대를 제3교육대로 하여 하여 그 지휘 하에 두었으나 사실 그 명령은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고 유명무실 하였다.
2. 각 지역별 단계별 전투 내용
(가) 군산-이리 전투
전북 편성관구사령관 원용덕 준장은 7월 17일 08:00시에 북한군이 강경에 진출한 상황을 입수하자 전북지역 경찰과 충남지역 경찰, 그리고 기마중대, 독립대대, 배동걸 소령이 지휘하는 27명의 육본 요원으로 구성된 27명의 특공대가 이리로 이동하여 금강을 연하여 추진진지를 점령토록 한다.
한편 '50.7.17일에 남원에 제30연대가 편성되게 되는데 육본의 통제가 아니라 보병학교 참모장인 김용주 중령이 임시 편성한 부대로 그는 이응준 소장(전남편성관구 사령관)의 지시로 낙오병과 지역 장정들을 모아 1,500명 규모로 편성된다.하지만 7. 18일부터 국군이 진지편성도 하기 전에 북한군이 강경-이리 국도를 따라 이동하고 조공부대가 서천에서 군산으로 지향하고 있었다.
이리 경찰서 구내에서 작전지휘를 하던 신소장은 가용 병력이나 탄약의 부족으로 적의 공격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 판단하고 육본에 지원요청과 전남지역(이응준 소장)에 경찰병력의 지원을 요청하고 군산항의 해병대에도 긴급지원을 요청한다
1) 주요 전투
가)장항-군산 전투
이 전투는 "해병대 고길훈 부대"가 정부미의 적재 업무를 엄호하는 것인데 일부부대로 장항으로 상륙하여 장항 북쪽 옥선동 50고지 일대부터 적과 전투가 시작되고 적재가 완료됨을 확인한 후에 많은 피해를 감수(20여명 전사, 20여명 사살), 다시 복귀시키는데 생포한 북한군으로부터 제6사단 제13연대임을 알아냈다.
군산일원을 방어중 서해안지구 사령부로부터 이리가 위급하다는 급전을 받고 안동호의 출항을 보장하는 가운데 1개 중대를 이리로 급파하였다.
군산항에서 임무 수행중이던 주력은 19일 민간선박으로 안동호에 승선하여 목포를 향해 출발, 군산이 적의 수중에 들어간다.
나)강경-익산 전투
강경에는 강경 경찰서 경찰들이 '50. 7. 15일 전주로 물러났다 다시 강경으로 16일 17:00시에 진입하였으나 결국 적에게 67명 전원이 전사를 하게 된다. 18일 강경이 점령 되었다.
이 시간대에 금강 남안에 배치된 경찰 병력(전북/충나무경찰)이 적과 조우를 하면서 강경-이리 국도변에서 적을 물리쳐 북한군은 일시적으로 강경으로 후퇴하지만 저녁 무렵부터 다시 적의 반격에 밀리게 되면서 지휘체계가 무너져 여산에서 수습하게 된다.
하지만 다시 적의 압력에 다시 익산으로 물러서게 되는데 결국 북한군 제6-15연대가 19일 이리를 점령하고 강경을 점령한 북 제6-13연대가 군산쪽에서 금강을 도하하였다.
같은 시각에 전남에서 경찰 1개 대대가 지원하러 전주에 올라와 이들을 익산으로 추진배치 시켰으나 도중에 적 제6-1연대의 공격으로 와해되고 여기에 아군 공군기로부터 오폭을 받아 19일 22:00시에 삼례를 거쳐 철수하게 되었다.
다) 웅포-이리 전투
국군 제7사단 기간병력으로 구성된 독립대대는 7월 18일 원용덕 준장의 직저부 지휘하에 웅포로 전진하였다.
18일 여러 나루터를 이용한 적 15연대의 도섭 공격으로 각개로 흩어져 19일 이리로 물러났다. 이때 이리의 해병 1개 중대(100명 규모)는 신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이리 서쪽 장신리에 기병중대와 진지구축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이미 적이 선점하여 목적지에 도달도 못해보고(도중에 어둠 속에서 소대장과 일원이 적에게 포로 됨)축차적으로 밀리는 경찰을 엄호하면서 결국 이리로 철수하게 된다.
결국 19일 전북지역 사령부는 이리에서 전주로 철수하게 되고 해병대는 목천포에서 아군 병력의 도하를 엄호하다 김제로 철수하는데 이때 배동걸 특공대도 유격전으로 적을 12명 사살한 후에 해병대와 같이 김제로 철수 하였다.
라) 삼례-김제 전투
서해안지구전투사령부 예하 독립대대와 경찰 혼성부대드른 7월 19일 북한군 제6-1연대의 이리 점령으로 각개 분산되어 전주로 철수를 시작하며 계속된 적의 압력으로 정읍, 임실일대로 22:00시경 철수를 거듭한다.
2) 탐사 및 탐문결과(전술한 내용 참조)
우리는 지금 군산대학교 안에 있는 방공호를 우선 조사했다. 지역 주민들이 이곳에 많은 인원이 몰살당했다고 탐문과정에 제보를 하였기 때문이다. 장항이나 서천에 이르는 노정에 해병대의 전투 흔적을 조사하여 일부 지역은 발굴도 했으나 유해를 찾지는 못했고 지역주민의 부분적인 제보만 얻는데 그쳤다. 해병대가 싸운 곳에서는 전국 어디든지 그렇게 유해를 발굴하기가 쉽지는 않다. 해병대 어는 참전용사가 남긴 말은 여운이 남은다. '우린 전우를 남기지 않아!"
물론 보도연맹이나 소위 말하는 빨갱이라는 명목으로 죽어간 인원도 있고 북한군이 내려와서는 소위 빈민족자 처단이라는 미명하에 수많은 우익인사들이 같은 장소에 죽어갔으며 여기에 경찰이나 군인들이 끼여 있다는 것이다. 남으로 후퇴하는 과정에 미쳐 빠져 나가지 못하고 지역에 변복으로 숨어 있다가 붙잡혀 죽어간 인원이 수없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 유족들이 수복이후에 대부분 찾아갔지만 유족이 없는 사람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하며 얼마동안은 귀신이 나온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난무했고 사실 구잡스런 동네 젊은 층들이 들어가 해골을 들고 나오기도 하고 시계나 전투화 등을 가지고 나와서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방공호에 들어가 보지는 않했다. 폐쇄되어 있고 내부가 무너져 내리고 그 후에 몇번에 걸쳐 내부조사가 이루어지고 증거가 될만한 것들이 대부분 훼손되었다는 익명을 요구한 다른 분의 제보를 들었기 때문이다.어쨌든 현 군산대학교 안의 낮은 야산에는 전투흔적이 개인호등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
"금강변 고수부지에 남아 있는 이름모를 영혼의 메아리"
두번째로 조사한 곳이 강경 경찰서 전투관련 사실인데 이 내용은 앞의 전술에 기록하고 있으며 강경의 황산대교 주변의 고수부지에는 많은 사연이 유유히 흐르는 금강물을 따라 이어져 내려온다.
전쟁의 비극이며 붉은 사상의 소유자들이 얼마나 무서운 집단인지 소름돋게 하는 곳이다.
이곳은 조선의 "제2의 모스크바(논산 성동)"라 할 정도로 좌익이었던 여씨들이 많았다는 곳이란다. 지금이야 그런 것이 없지만 일제시대 서구에 불어닥친 뉴레프트 운동의 여파로 일본에도 유학한 학생들을 주축으로 하는 공산당원들이 생기고 그들은 민족주의를 내걸고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신진세력들로 사회개혁을 꿈꾸던 인원들이였으나 이후에 조선공산당이나 사회주의동맹에 연결되면서 해방이후에는 소위 박헌영의 남로당 핵심세력으로 둔갑, 김일성의 사주에 의한 남한의 공산사회 건설의 주역이 되고자 했던 혁신세력들이 많았다.
따라서 이 강경 화산리일대 등은 강경경찰(충남 경찰)이 북한군과 전투하여 전원 장렬히 전사한 곳이기도 하고 반면에 무고한 국민들이 반민족주의란 누명과 지주 또는 군인이나 공무원, 경찰의 가족, 기독교인이란 이유로 몰살 당하기도 했고 반면에 수복이 되고 나서는 북한군에 동조하거나 기여한 인원들, 그리고 일부는 상호간의 앙금에 의한 고자질에 의해서 무고한 국민이 수없이 죽기도 한 곳이다. 실제 강변에서 우린 낚시꾼의 신고로 고수부지를 발굴하여 100여 명의 민간인 사망자를 발굴하여 지역 경찰에 넘겼으며 당시에 직접 강둑에 살았고 목격한 사람을 대면하여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도 했다.
세번째 조사한 곳이 전주와 삼례지역으로 가랑산에서 실제 유해를 발굴도 했다.
그러나 이곳도 초기 전투보다는 주로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작전으로 진출하던 당시에 잔류 패잔병들과 벌인 국지적인 전투사실이 주였다. 여기저기 죽어서 매장된 것도 국군이나 경찰이 아닌 당시의 빨갱이노릇하다 죽은 인원이 태반이고 그것도 대부분 유족이 밤에 다 수집해 갔고 지금 남아있는 것은 유족이 지역에 없는 인원이란다. 그러니 사실 변복한 군인이나 경찰 신분이 될 수도 있는데 우린 그걸 분별할 자료나 능력이 없다.
처음부터 지역 제보자가 전투관련 군인신분이라 하면 무명용사란 이유로 발굴을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파락치와 관련되는 내용들이라 방법이 없다.
3)소련 군사고문관의 기록 검토
제1권 203쪽에 보면 북한군 제6사단든 전의 지역에 집결해서 7월 14일 밤 8시에 이동을 개시하여 7월 17일 오후 늦게 강경 북방 2km까지 진출하여 7월 18일 아침에 강경을 점령한다. 같은 시간에 서해안으로 우회하는 제6-13연대는 별다른 저항없이 서천을 점령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7월19일 아침부터 진격하여아군으로부터 별다른 저항없이 금강을 도하하여 개별 경찰대를 격파하고 19일 오후 늦게 만경강까지 진출한다.
이후 7월 20일 새벽 3시에 제6-15연대가 김제를 점령하고 제1연대는 이리 동산동 지역에서 경찰 수비대 200여 명을 격파하고 오전 11시에 전주를 점령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동산동 지역은 만경강과 이리천을 안고 있는 완전한 개활지로 평지인데 과연 그곳에서 비록 경찰이라라도 저지선을 구축했으리라고는 보기 어렵고, 아마도 전라선의 춘포역 정도에서 열차를 이용 후퇴하려다 포위되어 많은 희생이 발생하지 않았나 판단 된다.
우리 전사 기록은 같은 시각에 전남에서 경찰 1개 대대가 지원하러 전주에 올라와 이들을 익산으로 추진배치 시켰으나 도중에 적 제6-1연대의 공격으로 와해되고 여기에 아군 공군기로부터 오폭을 받아 19일 22:00시에 삼례를 거쳐 철수하게 되었다고 기록한다.
하지만 이 지역 주민들은 이러한 사실을 목격하거나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 삼례 비비정에서는 미쳐 강을 건너지 못한 병력이 전사하여 가매장 되었다는 목격자가 있었는데 그 주변이 밭으로 변했고 지금은 흔적도 없다.
(나) 정읍-목포 전투
북한군 제6사단은 7월 19일 승세를 몰아 공격방향을 전주와 광주에 이르는 양개 국도를 연해 지향하였다. 서해안지구전투사령부가 남원으로 이동함에 따라 신편 제7사단 독립대대와 기병중대도 함께 이동하였다.
7월 20일 신태영 사령관은 지휘소를 남원 경찰서에 설치하고 제7사단은 남원 중학교에 지휘소를 개소하였다. 이어서 신사령관과 원용덕 장군이 대구로 육본을 찾아가는 싯점에 민기식 대령이 제30연대까지 포함하여 통합 지휘하게 되는데 이를 "민 부대"로 호칭하고 22일 육본으로부터 추인 받는다. 이때 병력은 전주로부터 철수한 낙오병과 제30연대를 포함하여 600여 명이고 장비로는 경기관총 4정, 박격포(60밀리,81밀리) 7문이었으나 소총탄은 거의 고갈된 상태였다.
한편 대구에 도착한 신 사령관은 호남지역 상황을 보고하고 대구에 예비로 있던 소대 규모의 "김병화 부대"를 투입하여 징발차량 10대로 대구를 떠났다.
또한 육군본부는 경남과 전남지역 편성관구사령관에게 남원으로 병력의 일부를 투입토록 명령한다. 하지만 신 사령관과 민기식 대령과의 불편한 관계로 적잖은 난관이 있었다.
한편 육본으로부터 명령을 수령한 전남 편성관구사령관 이응준 소장은 즉시 순천에 배치된 제15연대장 김병휘 중령에게 남원으로 출동하라 명령하였으며 부연대장 이영규 중령이 제2대대 인원 300명을 엄선하여 열차편으로 남원으로 출동하여 20일 09:00시에 진입하였다. "이영규 부대"다.
같은 시각에 남원의 제30연대장 김용주 중령은 1,500명의 신병을 모아 훈련에 주력중 7월 21일 북한군의 공격이 임박하자 민기식 대령으로부터 후방지역으로 이동하라는 목표없는 철수명령을 받는다. 당시 연대는 제3.9.15.26 등 4개 연대가 '50년 7월 17일 육본으로부터 제1~4교육대로 개칭되는 조치가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하고 원래의 명칭으로 있었다. 연대들은 보급품은 차량으로 각 부대는 도보로 21일 남원을 떠나 구례를 경유하여 진주로 향하고 28일 구포에 도착 한다.
1) 주요 전투
가)부안-신태인 전투
7월 22일 피아간에는 섬진강을 중심으로 소규모 탐색전만이 계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해병대 1개 대대가 여수에 상륙, 다시 북상하여 민부대를 지원하였다. 또한 부산에서 지원된 오덕준 부대를 민기식 대령이 통합 지휘하게 된다.
북 제6-1연대는 태인을 22일 유린하고 당일 16:00시에 고부로 진출하여 경찰의 방어진지를 유린한다. 한편 같은 시기에 덕유산에 출몰하던 공비 2개 중대가 진안을 습격하였다. 경찰은 일전도 못하고 장수로 철수하였으며 북 제6사단은 주력으로 광주, 목포를 점령하고 이어 남해안을 우회하여 순천 서쪽 일대로 진출하려 했다.
하지만 아군은 적의 기도를 분쇄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밀려나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이날 7월 22일 서해사는 지원부대의 도착에도 불구하고 적을 저지할 능력이 없기에 덕유산-지리산-백운산을 연하는 선에서 유격전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지만 실제 병력은 경찰이고 임실방면과 정읍 두 곳이었다.
이에따라 서해사는 서측이 노출되면 전체적인 방어전략에 큰 문제가 우려되므로 동쪽은 경찰병력과 이를 지원할 것으로 보이는 미군을 우 지구대로, 민 부대를 좌지구대로 각각 분류하여 적을 진안 및 임실 쪽에서 지연토록 작전명령 제1호를 하달했다.
이때 여수에 상륙한 고길훈 부대(7월 20일 군산에서 해상 철수하여 목포항에 입항하여 제3중대를 인수하고 21일 18:00시에 목포를 떠나 22일 08:00시에 여수항에 입항한다.)는 명령을 받지 못한 채 다만 해군본부의 명령에 따르고 있었고 남원역에서 승차한 패로 밤을 세운 이영규 부대는 민대령으로부터 상황을 듣고 다시 북상하여 임실 용운치 일대를 점령하게 된다. 하지만 있어야 할 경찰병력은 없었다.
같은 시각에 제주항을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고길훈 부대의 지휘권을 인수하고 1개 중대를 증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예비로 둔 제7중대를 지휘, 제천호로 제주항을 떠나 21일 18:00시에 여수 항에 도착하여 고길훈 부대를 접수하고 부대 명칭을 "김성은 부대"로 개칭 하였다.
이때 해군본부는 보급품과 M1소총, 박격포, 탄약 등을 급히 부산에서 영등포호로 적재하여 여수로 보냄으로써 김성은 부대는 전원 M1소총으로 무장하고 선상에서 사격훈련을 시켰다.
이러한 여건하에 23일 22시30분경에 돌연 남원에서 민부대장의 전화를 받는다. "귀부대는 이제 내가 통제한다. 급거 남원으로 북상하기 바람"이라는 것이다. 부대는 즉시 선박에 적재한 식량 등 보급품을 옮기는 철야로 진행하여 03:00시경 열차 편으로 다음날ㄹ 10시 20분경 남원에 진출하여 민재령으로부터 역습 명령을 받고 17:00시경 열차로 임실에 도착한다.
민기식 부대는 전날 서해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의 함양 전진으로 7월 23일부터 남원 지역의 각 부대를 통합지휘하게 되었는데, 아울러 미 제8군에서는 이날 비로소 잭슨대위를 고문관으로 급파하고 상황을 공유하며 바로 민부대에 작전지침이 전달되게 되어 통신수단의 결여라는 불안요소를 배제할 수 있었다.
이날 7월 23일 민부대는 김성은 부대와 부산에서 지원된 오덕준 부대(전남지역 상황이 악화되자 육군본부는 경남지구 편성관구사령관에게 보병 1개 대대를 남원에 급파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러한 조치로 급편된 오덕준 부대(오부대)는 해병대에 이어 23일 15:00시경 남원에 진출하여 서해사의 작전통제를 받는다.
이 오부대는 원래 7월 7일 제5, 제7사단이 광주와 전주에서 신편될 때 부산에서 신편된 제9사단(사단장 이종찬 대령)을 모체로 창설된 부대이다. 당시 제9사단 예하에는 제23연대(연대장 이유성 중령)가 부산에서, 제27연대(연대장 김익열 대령)가 마산에서 신병을 모집하여 편성 중에 있었다.
이때 육본으로부터 명령을 받고 참모장인 오대령은 월 17일 육본 명으로 제8교육대로 개칭된 제23연대 병력과 퇴원자, 학도병을 650명 선발하여 M1소총으로 무장하고 징발된 차량 20대로 21일 마산으로 출발하여 이곳에서 제9교육대로 개칭된 제29연대에서 일부를 뽑아 22일 기차로 출발하여 마산에서 1박하고 23일 남원에 도착한다. 원래 1,000명선에 이르던 병력은 도중에 이탈자가 생겨 700명선으로 피로에 겹쳐 예비로 남원에 배치되었다.
이와 같이 남원에서의 정황은 활발했으나 전남지역 상황이 악화되어 23일 이날 영광, 광주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화순과 나주로 밀어 붙였다. 북한군 제6사단은 제15 연대가 광주 방면으로 제1연대가 남원으로 지향하였다. 제1연대는 장성에서 남원쪽으로 지향하여 남원을 점령후에 여수항을 점령토록 되어 있었다.
나)정읍-장성의 전투
북한군 제6-15연대는 7월 20일 김제를 점령한 후 고부-고창-광주 방면으로 공격하려 하였다. 정읍일대의 아군 부대는 탄약도 거의 소모하고 식사도 못해 극도로 기진맥진한 상태로, 7월 19일 김제에서 물러난 해병 3중대와 배동걸 특공대, 그리고 전남경찰 1개 중대 뿐이었다. 여기에 서해사와 연락도 두절되어 각개 부대별로 활동하고 있었고 경찰병력은 돌아가 버렸다.
이처럼 거의 무방비 상태의 상황에서 7월 20일 전주가 피탈되고 서해사는 철수해 버리고 전남 펴성관구사령부(사령관 이응준 소장)가 정읍으로 남진하는 적과 대치하게 되며 도청에 사령부를 이형근 준장 등을 구성원으로 설치하였다. 당시에 이형근 준장은 전북 편성관구사령관에 7월 17일부로 인사조치 되었지만 명령을 받지 못해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또한 이형석 대령은 동일(7월 17일)부 신편 제5사단장에서 해임되었으나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사령부를 유지하고 예하 제15연대(제5교육대), 제26연대(제3교육대)를 형식상 지휘하였다. 하지만 사실은 병력이 없는 간부진 조직에 불과하여 전투력은 없었다.
그런데 육본은 무장할 병력이 없기에 교육대로 전환시킨다. 이에 광주에 배치된 제26연대(제3교육대)는 광주지방 중학생 1,000여 명을 모집하여 지1대대(대대장 조시형 소령), 제2대대(대대장 은석표 소령), 제3대대(대대장 김문수 소령)을 편성하고 있었는데 무장이라는 것이 경찰로부터 입수한 99식 소총 10정과 광주병원(제3육군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가 휴대한 M1소총 몇정이 전부로 대대는 10% 정도만이 소총을 소지하였다.
7월 20일 육본으로부터 정읍방면으로 1개 대대를 급송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형석 제5사단장은 지원자로 급편하기로 하고 대대장은 본부사령인 제1대대장 조시형 소령만이 지원하고 신병을 보충하여 제26연대 전화기를 조시형 대대에 넘겨주었다. 대대는 21일 08시 30분에 광주경찰서에 들려 99식 소총탄 2,000발을 지급받아 차량 10대로 장성 갈재로 3시간만에 도착하여 그 북방인 정읍으로 진출중에 일부 적과 조우하여 물리친 후에 정읍 북쪽 말고개까지 진출한다. 북한군은 재정비한 후에 22일 새벽에 공격을 재개하여 주시형 부대는 중과부족으로 분산 철수하게 된다.
한편 해병대 제3중대는 20일 정읍으로 물러난 후에 본대와 합류를 위해 목포로 향하여 군산에서 해상철수한 고길훈 부대와 합류하여 여수로 가게 된다.
같은 시간대에 전남편성관구 사령관 이응준 소장은 신편중인 제5사단장 이형석대령과 수시 접촉을 유지하며 전남지역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여수와 목포 등에 보관중인 정부미를 서둘러 반출토록 조치하고 전남방직 공장의 재고품인 광목 전량을 징발조치하여 여수항으로 후송하는 등의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한편 사령관은 전남북도계에서 적을 저지키로 하고 22일 새벽 신편 제5사단 제26연대(제3교육대)에는 가용 병력이 전무하므로 전남경찰국장을 불러 경찰로 방어토록 한다.
당시 전남경찰은 각서에서 15명씩을 차출하여 전북지역으로 출동했기 때문에 광주에 있는 일부 병력만 500여 명을 편성하였으나 무장은 M1소총과 99식 소총뿐이고 그나마도 1/3병력만 휴대하는 실정이었다.
갈재에 도착한 경찰은 먼저 22일 고부 말고개를 방어하던 경찰과 조시형 부대가 북한군 제5-15연대의 공격으로 와해되어 분산철수를 하게 되어 적의 공격력에 역부족으로 광주로 물러서야만 했다.
북한군 제6사단은 제15연대를 고창에서 영광-나주 방면으로, 전주를 점령후 신태인 일대에 집결된 제1연대를 고창을 거쳐 장성-남원방면으로 진출토록 하여 24일 미명에 장성 갈재를 공격한다.
한편 고창에서 영광방면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15연대는 23일 영광 북쪽 용대리에 2차로 상륙한 소대규모의 병력을 지원받아 영광을 공격하며 당시 이곳에는 단지 경찰 1개 소대 병력이 경계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대로 전투한번 못하고 나주로 철수를 감행하나 이미 나주가 피탈되어 불갑산에 들어가 유격전을 하게 된다.
2) 유해발굴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정읍-목포간의 주요전투 지역은 사실 우리가 조사한 결과는 영광 삼학리 밖에 확인하지 못했다. 전사의 기록은 기록일 뿐이고 현장에 가서 탐사 및 탐문 결과 별다른 것을 확인하지 못했다.
영광 삼학리에서의 기록도 경찰이 전투했다는 기록이 없다. 하지만 우린 이곳에서 경찰복을 입은체 그 경찰마크와 요대까지 그대로를 발굴하였다. 50여명을 발굴하여 15여 명의 신원도 유전자 검사를 통해 확인 한 역사적 사실이 확인 되었다.
고창일대나 갈재부근 전사도 별개없다. 실제 전투가 아니라 포 몇 방 쏘거나 전차가 나타나면 분산철수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실 이곳 전투는 건재가 명확하지 않은 부대, 예를 들어 민부대, 김부대, 이부대, 이런 식의 부대들과 지역 경찰 병력이 전투를 국지적으로 했다고 보여진다.
전남북 도계인 장성 갈재일대의 전투도 이 보고서에는 별개 없다. 경찰도 군대도 전투한 사실이 사실 미흡하고 영광 삼학리일대에서 그래도 전투 기록이 있으나 우리 군은 미흡한데 아군 2개 대대를 격파했다고 하고 실제 전투한 경찰 기록은 없다.
우리는 지역 일대의 주요고지군들인 태청산, 불갑산, 내장산, 백양산, 변산, 그리고 호남터널이 지나는 방장산이나 입암산 등 대부분 다 올라가 보았지만 결국 확인된 사실은 이 지역은 대부분 여.순사건이후 공비토벌이나 전쟁이후에는 잔탕 소탕작전이 주로 벌어진 곳이고 지역 주민들도 한결같이 그런 제보를 하였다.
그래도 입암산에는 장성 갈재전투와 관련된 몇십개의 개인호를 발견했지만 지역주민들 이야기는 북한군이 오기전에 군인이나 경찰은 다 이지역을 벗어났다고 한다.
결국 주요 고지군과 갈재 일대는 모두 발굴 작전을 1~2주 간에 걸쳐 모두 시행했지만 유해는 발굴하지 못했다. 다만 탄피나 수류탄 파편등을 일부 확인하여 전투지역임은 증명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지역단위에 보면 전쟁 당시에 전사하여 자가 봉송된 전사자 유해의 안장모습을 종종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유가족이 있거나 동네에서 사실을 아는 분이 아마 잘 모셨으리라 보는데 세월이 지나 그 관심정도가 낮아지고 일부는 유가족이 이사나 다른 이유 등으로 현지에 살지않게 되면서 어떻게 보면 방치되다시피 관리가 엉망인 모습을 목격하거나 제보를 받기도 했다.
따라서 이에 대한 관리나 정부가 나서 현충원으로 이장하여 모시는 대책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보며 김제에서 바로 이런 동네 마을 입구에 이런 지역이 있어서 몇분을 우리가 책임자로 동네 관련된 분들의 보증과 지원으로 현충원으로 안장을 유도하기도 했다.
3)소련군 군사고문관의 기록 검토
7월 23일부터 제2제대인 제13연대가 영광에서 함평-목포방면으로 진출하여 접전없이 목포를 24일 아침 6시 무렵 목포 점령전투를 수행하였다고 한다.
제15연대는 영광에서 나주로 진격하라는 명령에 따라 7월 23일 밤 8시 무렵 진격을 개시하여 밤 11시경 삼학리에서 아군 1개 대대 병력과 조우하여 7월 24일 아침까지 전투가 계속되고 적 병사 및 장교 200여 명을 살상하였고 야포 및 박격포 12문을 노획한 후에 나주를 오후 늦게 해방시켰다고 한다.
북 제6-1연대가 7월 23일 고창을 점령하는데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했으며 영광 및 고창 점령전에 목포로부터 투입된 국군 해병대 3개 대대 병력을 격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창에서 남원으로 진출한 후에 여수항을 해방토록 지시를 받고 7월 24일 진격을 개시하여 당일 11시경 60km를 진출, 남원을 점령한 후에 지체없이 오후 늦게 구례를 해방시킨다. 연대는 25일 하루를 휴식하고 26일 새벽에 구례를 출발하여 당일 새벽 5시에 순천을 점령한다.
연대 주력은 다시 여수와 하동으로 진격하여 7월 27일 아침 6시 30분에 여수를 점령하고 아군 병사 및 장교 500명을 전사시켰다고 한다. 하동으로 진격한 부대는 하동 서남방 서족 강변의 아군을 격파하고 강을 도하하여 7월 27일 하동을 오전10시경 점령하였다. 하동 화개면 탑리의 학도병 전투 기록이 없다. 이때 광양양지역에서 이동중이던 아군의 포병부대를 발견하여 105밀리 곡사포 12문과 박격포 9문을 노획하였다고 기록한다.
(다) 광주-목포 부근 전투
신편 제5사단장 이형석 대령은 7월 23일 광주가 단시일 내에 적의 위협에 직면하리라고는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사단은 이미 육본의 병력차출 지시에 병력을 보내 자위력이 극히 취약했다.
이 대령은 전남지역의 전황이 위급합에 따라서 상부에 병력과 탄약의 지원을 요구하였지만 이를 지원할 능력을 육본은 갖고 있지 못했으며 신 장관으로부터 "육탄으로라도 용감하게 싸우시오"라는 말만을 들었을 뿐이다.
그는 더이상 상부로부터 지원을 기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당시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대령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같은 요청으로 신 대령은 제주도에서 공비토벌작전에 임한 서북청년단원 150명을 선발하여 비무장으로 민간선박으로 제주항을 떠나 제5사단을 지원토록 23일 조치하였다. 이들은 여수항에 상륙하여 대기하다 그 후 이형석 대령이 고흥반도로 철수한다는 소식에 다시 승선하여 고흥 봉암리에로 직행하여 이 대령과 합류한다.
이날 23일 새벽 장성 갈재를 넘어 아군 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은 10:00시경 장성을 점령하고 광주로 적의 선두가 침투하기 시작한다. 북한군 제6-1연대가 장성에서 담양으로 우회하여남원으로, 제15연대는 영광에서 나주로, 제13연대가 영광에서 함평,목포로 각각 진출하고 있었으며 광주에는 제15연대 병력이었다.
23일 15:00시경 아군 군/경 혼성부대는 적 1개소대규모의 진출을 최초에는 격퇴시켰으나 소수의 병력으로 광주를 고수하기에는 어렵다고 보고 화순을 경유, 순천으로 철수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육본으로부터 제26연대(제3교육대)가 이미 해산된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제26연대장 이백우 중령에게 원하는 자만을 뽑아 순천-마산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하였다.(먼저 1개 대대는 전날 조시형 소령이 인솔하여 출동) 연대장은 나머지 2개 대대에서 대한청년단원, 학생, 청년방위대원 등을 기간으로 다시 엄선하고 은석표 소령에게 무장한 경찰을 지휘하여 화순 널재에서 철수부대를 엄호토록 하였다.
상황이 급변하는 동안 북 제6-15연대 예하 1개 대대 규모가 광주로, 23일 17:00시경에는 제1연대가 장성에서 담양을 지나 순창으로 동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5사단장은 이응준 소장, 이형근 준장과 동행하여 지프로 광주를 탈출하여 화순을 경유 벌교로 이동하고 제26연대(-)는 차량 ㅠ10대에 분승하여 벌교로 물러나 부대를 수습 정비하였다.
또한 화순 널재에서 철수부대 엄호 임무를 맡은 은석표 소령은 경찰 1개 소대병력으로 작전으루수행 후에 24일 새벽에 차량으로 벌교로 철수해 왔다. 이때 이응준 소장으로부터 순천부근에 병력을 급파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경찰로부터 총기를 인수하여 은소령이 30여명의 병력을 모아 출동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나머지 신병들의 철수로를 가지고 격론을 벌이는 사이에 헌병대장으로부터 사단 해체 소식을 접하게 된다.
제5사단장 이형석 대령은 각자의 결의를 묻고 정호림 대위를 여수로 보내 배를 구해 고흥반도 봉암리에 대기토록 조치하였다. 대부분의 병력이 함께할 것을 자원하여 먼저 광주에서 광목을실은 차량을 봉암리로 보내고 부대를 지휘하여 봉암리(소록도 맞은 편으로 녹동항이 있다)에 도착하여 대형선박 5척에 물자와 같이 승선하여 23일 14:00시경 전 대원은 욕지도로 향했다.
결국 7월 23일 광주가 점령되고 영광일대로 진출한 북 제15연대 주력은 나주 점령 명령을 받고 23일 23:00시경 삼학리까지 진출, 아군 1개 대대 규모의 저항으로 다음날 07:00시까지 파상공세를 감행하여 24일 오후에 나주를 점령하였다.
때마침 화순 널재에서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던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전차를 동반한 적의 강공에 화순으루거처 벌교로 철수하고 24일 08:00시에 화순은 점령되었다.
나주에서 남진한 북한군은 목포를 향해 전차와 장갑차를 투입하여 진출하였으며 영암에는 24일 14:00시경, 목포인근에는 14:30분경 진출하게 되는데 목포를경비중인 해군 경비부와 경찰은 적이 도착전에 15:00시경 항에 보관중인 정부미를 그대로 유기한채로 LST를 이용하여 철수하고 말았다.
영암 경찰병력 일부가 월출산으로 밀려나 유격전을 하다 해남으로 철수하여 우실재에서 해남경찰과 합류하여 적과 조우하였으나 결국 포위망을 피해 도암만에서 15:30분경 어선으로 청산도로 향하였다. 따라서 북한군 제6사단은 거의 동시에 해남, 강진, 그리고 장흥을 점령한다.
남쪽의 적의 진출이 이와 같을 때 순천 북쪽 곡성에는 24일 19:00시경 순창, 남원으로부터 남진한 북한군이 접근하고 22:00시경에 순천 북쪽 광천까지 진출한다.
1) 탐사 및 탐문 결과
우리는 기록의 실체를 찾으러 광주지역의 무등산일대를 조사하고 널재도 몇번에 걸쳐 탐사 및 탐문하였다. 널재 바로 화순쪽으로 밑에 이십곡리가 있는데 '51년도 4월에 공비토벌 작전에 전사한 국군 제8-10-3대대-10중대 인원 26구를 발굴하는 과정에도 거의 1달여를 이곳에 머물며 주변을 탐사하고 제보자 확보노력을 했지만 국군의 전투사실을 목격한 분은 없고 경찰의 일부 병력이 머물다 떠나곤 했다는 내용은 많이 들었다.
이곳은 화순 청풍의 화학산(615) 능선, 춘양의 개천산(497) 능선, 이양의 발룡산(412), 장흥의 봉미산(506) 능선, 보성읍 일원 등에서 활동도 큰 성과는 없었다. 모두가 공비토벌작전에 관한 민원성 내용이고 초기 전투 사실에 대한 것은 우리가 얻지를 못했다.
해남 우실재에도 그런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고 있다면 오히려 영암 해변가 염전일대에서 북한군이 사전 5월 말에 침투했다가 전원 포살되었다는 내용이 그래도 가장 의미있는 것이다(전문 참조)
2) 소련군 군사고문관의 기록 검토
보고서에도 큰 전투가 기록에 없다. 라주바예프는 가능한 국군을 전사시킨 것으로 기록이 많이 되어 있는 느낌이고 사실은 전남북 지역에서의 전투는 비록 제한적이지만 주로 경찰 병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우리가 완도 금일면 감목리에서 유해를 '07년도에 1구를 발굴하는데 경찰이었다. 제보자 김종목(79)씨가 목격한 사실로 경찰 4명이 전사하여 3명은 그 유족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찾아갔고 1구가 남아 있다고 하여 실제 발굴 결과 칼빈 탄두와 요대, 동전, M1완탄 등이 발굴 되었다.
현재까지 전.남북에서 군인이 발굴 된 것은 모두 공비토벌작전과 관련된 것(화순 이십곡리 26명, 화학산 1구, 보성읍 주봉리 3구 등)이고 영광 삼학리 50여 명과 순천 판교리 2구, 조곡동 경찰 유해 18구(2차 매장지)이곳 완도등에서 발굴된 유해는 모두 경찰로 제보에 의해 발굴 되었다.
(라) 남원-여수 부근 전투
1) 주요전투 개황
가)남원 부근 전투
북한군 제6-1연대는 장성을 점령한 후 7월 24일 이른 아침에 차량으로 남원을 목표로 60km를 이동하여 민부대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포병 1개 대대와 자주포 대대로 증강되어 신속히 남원-여수로 진출하려 했다.
반면 민부대는 23일 적의 주 공격로가 전주-임실방면이 되리라 판단하고 주력부대인 김병화 부대, 이영규 부대, 오덕준 부대, 그리고 김성은 해병대를 통합하여 임실 북족에 배치하고 남원 서측에는 경찰 일부병력만 배치하고 있었다.
7월 24일 이날 01:00시경 이영규 부대로부터 1개 연대규모의 적이 섬진강을 도하하여 남진중이며 경찰로부터도 순창으로 육박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미 고문관인 잭슨 대위로부터 역습은 무용하니 축차지연전으로 서부전선을 방어하는 것이 효과적이란 조언을 듣고 24일 02:00시경 임실부근의 모든 부대를 남원으로 철수하라 명령했다.
이에 임실 북쪽 고지를 점령하던 이영규 부대는 섬진강을 도하한 일부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며 24일 09:00시경 남행열차 편으로 남원을경유하여 구례로 철수하는데 민부대와 통신두절로 어떠한 통제도 받을 수가 없어서 임의 판단에 따라 이루어졌다.
한편 김성은 부대는 임실로 진출하는 즉시 진지를 점령토록 되어 있었으나 24일 02:00시경 남원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고 열차편으로 돌아와 남원역에 머물다 09:00시경 남원 동북쪽 고지(북쪽 2km 200~50고지군)일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이행하려는 순간 적의 포성이 들려 축차적으로 철수를 감행하여 30도가 넘는 혹서를 극복하며 30리 산길을 넘어 12:30분경 운봉에 도착한다.
이때 오덕준 부대는 순창으로부터 남원으로 진출하는 북한군 제6-1연대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고 있었다. 민부대의 예비대로 최초 남원에 배치된 오부대는 24일 01:00시에 민부대장으로부터 임실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받고 차량에 분승하여 북진하다 다시 적이 광주로부터 하동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남원으로 돌아왔다. 이때 손관도 소령이 적의 전화를 우연히 도청하여 적이 순창에서 남원으로 진출하고 있다는 사실늘 알게 되어 남원 서쪽 3.5km 지점인 상동리에 급진하여 병력을 전개하였다. 장갑차를 앞세우고 유연하게 진출하는 적에게 기습공격을 감행하였으나 교전 1시간만에 화력의 열세로 운봉지역으로 물러났다.
나) 구례 부근 전투
임실 북쪽에서 섬진강을 도하한 일련의 북한군이 24일 12:00시경 남원을 사면에서 포위할 기세로 시내에 진입을 하고 민 부대, 오 부대, 김성은 부대는 서측 운봉일대로 철수하였다.북한군은 남쪽으로는 곡성으로 동쪽으로는 운봉으로진출하려 했다.
이때 곡성에는 소수의 경찰 병력이 있었고 구례 남쪽 신월리(구례구역 인근)에는 임실에서 기차로 내려온 이영규 부대가 집결중에 있었다.
육군본부는 경남지역으로의 적의 진출을 차단하기 위해서 남원-구례-순천간을 방어할 목적으로 전투력을 운용할 것을 판단하였지만 병력이 없었다. 그래서 이응준 소장은 23일 밤 지휘소를 광주에서 순천으로 이동한 후에 각지에서 물러난 경찰 1,500여명을 3개 부대로 편성하여 1개 부대는 구례 신월리로, 1개 부대는 장흥으로, 1개 부대는 신편 제5사단 사령부를 따라 벌교로 이동한 보병 90명과 함께 순천 서북방 학구 부근으로 진출하여적을 방어토록 했다.
북한군 제6-1연대는 24일 오후에 남원에서 기동하여 구례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구례에는 경찰의 일부 낙오인원이 잔류하다 용두리로 물러나자 북한군은 용두리에 포격을 가하며 밀고와 이영규 부대와 경찰은 하동에 이르는 도르를따라 일단 화개장터에 철수하여 부대를 정비하였다. 이들은 24일 오후 늦게 구례를 점령한 후 25일 하루동안 부대정비에 들어갔으며 일부 부대가 차량으로 이영규 부대를 추격토록 하였다. 이 부대의 김필상 소령은 적이 화개장터로 접근하자 일제사격으로 적을 일단 격퇴시켰으나 적의 증원 병력이 접근하자 하동으로 철수하였다.
다) 순천 부근 전투
북한군 제6사단은 제603모터사이클연대의 지원 하에 목포, 나주, 광주 일대를 점령한 ㅜ제13연대 및 제15연대 병력이 보성 일대엣 순천으로 향하고, 구례에서 제1연대 병력이 순천으로 향했다.
전남지구전투사령관 이응준 소장은 7월 24일 광주를 이탈한 후에 순천에 집결한 전병력을 학구로 북상시켰다. 인원은 1개 중대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군.경 혼성병력으로 극도로 사기는 저하 되어 있었다.
학구는 17번 도로상의 마을로 교통의 중심지였으나 실제 병력은 장비나 탄약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로 26일 미명에 북한군이 접근하자 철수하여 순천 북방 2km지점의 봉화산 365고지로 철수했다.
한편 이 사령관은 여수의 김병휘 중령(제15연대(제5교육대))에게 순천을방어할 것을 지시하게 되고 김중령은 25일 12:00시에 순천에 탄약 한상자를 실고 진입하게 된다. 우체국에 있는 이사령관을 만나 하동대교가 파괴되는 등 퇴로가 차단된 시점에 여수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고 건의하고 365고지로 향했다. 이때 고지에는 30여명의 병력이 있었고 시내에는 500명이 넘는 경찰병력이 있었으나 오합지졸이었다.
이 무렵 벌교쪽에서 북한군이 순천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에 이응준 사령관등은 여수로 물러나게 되는데 365고지에 병력은 퇴로가 차단되어 각자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김부대는 순천을 우회하여 광양해안으로 철수하여 민간선박을 이용하여 삼천포로 향했다.
하지만 육군본부는 전혀 이러한 상황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고 민기식 대령에게 주변 부대를 지휘하여 실지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라) 여수 부근 전투
전남편성관구사령관 이응준 소장은 7워루25일 여수로 철수하여 이곳을 고수하려 하였으나 전황이 허락하지 않했다.
여수에는 제15연대 3대대(대대장 김종오 소령)가 정부미를 비롯하여 정부자산을 반출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김 소령은 앞서 구례로 진출한 김병휘 연대장의 지시로 육사생도 1기생(7월 10일 임관)과 호국군에서 현역으로 복귀한 장교들을 중대장으로 임명하여 학도병 등 신병 700~800여 명을 징집하여 훈련을 실시하고 정부자산을 선적하는 작업을 병행하여 25일 아침까지 전량을 해군 수송선에 탑재할 수 있었고 다른 지역에서의 소개된 다량의 물자를 반출하는데 지원하였다.
북한군의 공격이 재개되자 여수 북쪽의 군.경은 큰 피해를 입으며 여수 월산리로 철수하여 재편성을 통한 여수 방어를 계획하여 여수 북쪽 석천사 능선에서, 김병휘 중령을 비롯한 장병들이 26일 05:30분경 군경 혼성으로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북한군 제1연대(-)는 06:00시에 여수로 진입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15연대 3대대는 정부자산 반출 자업을 거의 마칠 무렵 긴박한 상황에서 26일 06:30분에 대기 중인 함대를 통해 대피하였다. 결국 전남편성관구사령부와 경찰병력600여 명은 해군이 지원한 문산호(LST)에 탑승하고 백두산호의 엄호로 내항을 벗어났다.
2 )현장탐사 및 탐문결과
사실 위 기록은 우리 전사기록일 뿐이다. 우리가 전사부도에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국군의 배치현황과 전투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 조금 과한 표현을 쓴다면 전투는 없었고 적이 총 몇방 쏘는 소리에 그저 언제 있었느냐는 식으로 군인은 없었다고 한다. 괜시리 머물며 동네 먹을 것을 얻어가고 돼지나 개 등을 잡아가는 것만 보았다는 증언이다.
가) 남원 및 운봉지역
나는 남원역(현재)에서 멀지않은 상동리, 중동리의 노인정을 찾았다. 그리고 용장서원과 142고지 주변, 24번도로와 17번도로 주변을 탐사했으나 정말 개인호다운 호를 하나도 찾지 못했다. 어른들 말씀이 아군은 그냥 지나갔다는 이야기다.
임실 오수리 일대나 운봉 장교리에도 이야기는 무성하나 전투 사실을 목격한 주민은 만나지 못하고 장교리 여원재에서 바로 길옆에 몇개의 개인호 비슷한 것을 찾았을 뿐이다.
나)구례 및 순천. 여수지역
상기 지역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여수.순천 사건등 공비토벌작전이 전쟁전 후에 많이 지리산을 끼고 있었던 곳이다. 그러니 웬만한 산속에는 개인호가 어디든지 구축되어 있다.
문제는 6.25전쟁 당시에 국군이나 경찰이 북한군과 어디서 전투를 했느냐, 그리고 얼마만큼의 인명피해가 있었느냐의 문제인데 우리 전사에는 별다른 기록이 부족하다.
하지만 순천 중앙동 경찰 유족회에서 뜻하지 않는 제보가 날라 들었다.
"조곡동에 경찰 21인이 묻혀있다"
현장에 가서 지역주민을 만나고 실제 매장된 지역을 탐사하고 관련사실을 종합한 결과 이 묘역은 원래 현 위치가 아니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경찰 유해를 한 곳에 옮겼다가 현 장소로 옮겨온 것이였다.
전사한 시기는 전쟁초기 국군이 밀려 동쪽으로 후퇴하던 상황에 경찰들이 방황하면서 여기저기서 북한군에 죽고 일부는 파괴된 하동대교근처에서 섬진강 물속으로 수없이 전사해 들어갔다는 것이다.
1차로 우리는 2007년도 5월에 순천 서면 판교리지역 주민 허학영(54세)씨의 제보로 2구를 발굴하였다.
당시 1950년 7월인지 8월에 전투에서 2명이 전사하여 본인 아버지가 선친 묘역 인근에 매장하였다가 철도가 지나가게 되자 선친 묘와 함께 2구를 이장하여 매장했다는 내용이었다.
이곳은 바로 학구리와 근접한 곳으로 정황상 국군이나 경찰이 전투로 전사했을 정황이 높았다.
하동과 인접한 구례의 백운산이나 지리산 자락등은 모두 공비토벌 작전이 벌어진 곳이다.
나)소련군 군사고문관의 기록 검토
24일 11시 무렵 남원을, 그리고 오후 늦게 구례를 점령하고 7월 25일 하루를 휴식했다고 한다. 7월 26일 새벽에 구례를 출발한 제6-1연대는 당일 새벽 5시에 순천을 점령하고 이후 2개 대대와 1개 포병 대대가 여수 방면으로, 그리고1개 대대와 고사포대대가 하동 방면으로 진격을 했다.
"화개장터에서 학도병이 전투했다는 기록은 우리 전사에도 소련군 군사고문관 보고서에도 없다."
"우리 전사에 여수지역 방어간 500명의 전사기록이 없다"
연대 주력은 다시 여수와 하동으로 진격하여 7월 27일 아침 6시 30분에 여수를 점령하고 아군 병사 및 장교 500명을 전사시켰다고 한다. 하동으로 진격한 부대는 하동 서남방 서족 강변의 아군을 격파하고 강을 도하하여 7월 27일 하동을 오전10시경 점령하였다. 하동 화개면 탑리의 학도병 전투 기록이 없다. 이때 광양지역에서 이동 중이던 아군의 포병부대를 발견하여 105밀리 곡사포 12문과 박격포 9문을 노획하였다고 기록한다.
적 제6사단은 목포항과 여수항을 방어하기 위해 증강된 1개 대대씩을 주둔시켰다. 7월 28일 주력을 하동에 집결시키고 7월 29일부터 마산방면으로 진격을 개시하여 당일 오후 늦게 진주 서남방 하촌리까지 진출한다. 그 곳에서 남강 동측 강변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중인 미 제1해병사단 2개 대대 병력의 저항을 받고 7월 30일 도하를 위한 전개선을 확보했다고 한다.
저녁 7시경부터 남강을 도하하였으며 밤 9시 40분경 도시 전투를 하고 제15연대는 진주 동방 상촌리지역에서 진주-마산간 도로를 차단하여 아군이 이동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기록한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 당시에 우리는 전투사단에도 포병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싯점에 어떻게 105미리 대포를 12문씩이나 노획 했다고 하는지 의문이고 이러한 사실이 우리 전사기록에는 전무하다.
또한 아군을 500여 명 전사시켰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런 병력이 없었다. 이런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전사는 문제점이 많게 되는 것이고 이런 문제점에 대한 명확한 사실규명을 위해서도 북한측 자료를 확보하는 노력도 있어야 한다.
"영광, 고창 점령간 우리 해병 1,200명을 격파했다는 보고서내용은 진실인가?"
또한 1권 358페이지에 보면 북한군 포병작전관련 보고서에 7월 20일 김제를 점령하고 전주를 점령하는 과정에 동산리에서 경찰 200여 명의 수비대를 격파했다는 기록과 7월 23일 제6-15연대가 영광을 점령하고 제6-1연대가 고창을 점령하는데 목포로부터 투입된 1,200명의 국군의 해병 병사 및 장교를 격파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당시 우리는 건재우지의 군 병력은 고길훈 부대도 이미 군산에서 목포로 배를 이용내려갔고 제3중대도 이어서 정읍에서 내륙으로 해서 목포로 가서 합류한다. 또한 그 병력은 소수였다.000000 있다면 지역 경찰이 일부 지연전을 했을 뿐이다.
여기까지가 호남지역 전사 내용이다.
다시 서부 및 남부지역 전투로 돌아간다.
제 3절 마산 서부지역 전투
1. 전투 개요
마산 서부지역 전투는 '50. 8.2~9.14까지 국군과 미군으로 증강된 미 제25사단과 북한군 2개 사단(제6.7사단)이 진주-마산지역에서 치열하게 싸운 44일간의 공방전이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부산을 점령하려던 북한군의 기도를 차단하고 그들 2개 사단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마산 서부지역 전투는 3단계로 구분 된다.
첫째는 '50. 8.2~8.6까지로 미 제19연대와 미 제27연대의 정찰대가 마산으로 진출하려는 북한군 제6사단의 선두부대와 벌어진 정찰전이다.
둘째는 8.7~8.13까지로 마산 정면의 북한군을 격파하여 부산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실시된 킨 특수임무부대 반격작전이다.
셋째는 8.31-9.14까지 소위 북한군의 9월 공세 기간 미 제5전투단으로 증강된 미 제25사단과 북한군 2개 사단(제6.7사단)간에 실시된 공방전이다.
미 제25사단은 이 지역에서 북한군 2개 사단을 맞아 사단장의 과감한 작전권 행사와 병사들의 용전분투로 방어선을 유지하고 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혀 마산 서측의 위협을 제거하여 부산을 점령하려는 그들의 기도를 차단하고 인천상륙작전의에 이은 반격작전의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2. 북한군과 미군 상황
1) 북한군 상황
지연작전 동안 북한군 제6사단의 임무는 1개 모터사이클연대와 함께 서해 방면의 아군을 추격하면서 목포와 여수항을 점령하고 마산을 공격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북한군 제6사단은 7월 19일 호남지역으로 대 우회 기동을 실시하여 27일 여수를 점령하고 29일부터 마산 공격에 나선다.
그런데 미 제8군은 7월 31일 뒤늦게 포로 심문과 무전 감청을 통해 북한군 제4사단과 제6사단이 낙동강 서남 방면으로 아군의 배후를 공격하기 위해 기동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한편 북한군 제6사단 제13연대는 '50.7.24일에 목포항을 점령한데 이어, 제1연대가 25일 여수항을 점령했다. 7월 28일 오후에 주력을 하동지역에 집결시키고 다음날 7월 29일부터 마산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그중 제15연대가 7월 30일 진주-마산간 도로를 차단함으로써아군이 동쪽으로 철수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북한군 제6사단은 7월 31일에 진주를 점령한 후에 계속하여 마산으로 밀어 붙이면서 아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한다. 8월 초에 5000명 수준이던 병력이 7,500명이 되었다.
남한의 점령, 서울지역에서 청년 2,500명을 강제로 동원하여 2주간의 훈련을 시켜서 전선으로 8월 21일 투입하였다.
9월 공세 때 북한군은 마산 서부지역에 기존 제6사단에 추가하여 북한군 제7사단(-1)을 새로 증원한다. 이 사단은 6.25 이후 한만 국경 경비대 4,000명을 기간으로 황해도 지역에서 청장년을 모집하여 보충하게 되며 8워루5일 대전에서 정식으로 제7사단을 창설하였다. 이 부대는8월 15일 경남 진주에 주력이 도착하여 임무는 제6사단의 후방을 방호하면서 증원할 준비태세를 갖추는 것이었다.
9월 공세 때 북한군 제6.7사단의 임무는 마산 방면으로 공격하여 미 제25사단의 진지를 돌파하고 마산. 김해를 점령한 다음 부산 점령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제6사단에 제105전차사단 전차 20대와 제16기갑여단 전차 43대를 각각 지원하고 추가로 104치안연대도 증원하여 주었다.
2) 미군 상황
(1)미 제8군의 마산 방면 적정 판단과 조치
미 제8군은 북한군 제6사단의 대 우회기동이 마산을 거쳐 부산을 점령하려는 의도를 알고 상주 남쪽에서 방어 중인 미 제25사단을 마산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8월 1일 14:00시에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 때 마산 방면에는 미 제29연대(2개 대대), 미 제24사단 제19연대(2개 대대), 미 제25사단 제27연대, 민부대, 이응준 부대가 지연전을 전개하고 있지만 전투력이 약하여 북한군 제6사단을 감당하지 못하리라 판단 하였다. 이 무렵 제25사단이 도착 전까지는 마산지역 방어책임은 미 제24사단에 있었다.
미 제25사단은 상주에서 김천을 거쳐 왜관까지는 도보 또는 차량으로 이동하고, 그곳에서는 철로로 마산까지 이동하였다. 이동간 적의 산발적인 기습을 받아가며 36시간만에 140km에 달하는 먼거리를 도보, 차량, 기차를 이용하여 8월 3일 야간까지 이동을 완료하였고, 미 제5전투단도 이 날 집결을 완료하였다.
(2)미 제8군의 반격 작전계획
북한군이 진주-마산 접근로에서 부산을 목표로 하고 있을 때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한국에 도착하는 모든 증원 부대를 마산으로 집결시켰다. 미 제25사단, 미 제5전투단, 전차와 포병으로 증강된 미 제1해병여단이 그 주력이다.
워커 사령관은 2개의 공격계획, 하나는 8.5~10일 사이에 마산-진주 방면에서 공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8월 중순경 전면공세로 여수까지 진출하였다가 순천-전주-논산 축선을 따라 금강선으로 진출하는 것이였다.
미 제8군은 많은 토의 끝에 대구 정면의 적의 압박을 제거하기 위해 적의 일부를 마산 서부지역으로 투입하도록 하기 위해 진주로의 공격을 결정하고 미 제5공군사령관에게 8.5~8.6일까지 마산과 남강에 집중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미제8군은 미 제25사단장에게 8월 7일 06:30분을 기해 남강 이남 진주 방면으로 공격을 시작하여 중암리-무촌리-진주선, 그리고 진동-사천선을 확보토록 하였다. 공격부대 지휘관은 미 제25사단장인 킨 소장으로 하고 부대 명칭은 그 이름을 붙여 "킨 특수임무부대"라 하였다. 이를 위해 제29연대를 해체하여 미 제27연대와 미 제35연대에 편입하여 각 연대를 3개 대대로 편성하였다.
3) 전투 경과
미 제25사단장은 8월 3일부터 작전 지휘권을 행사하였다. 그동안은 미 제 24사단장에게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은 미 제19연대의 방어 책임이었다. 미 제19연대는 7월 31일 진주에서 철수하여 중암리 서측방 괘방산 능선을 점령하였다. 8월 1일 저녁 미 제19연대는 제1대대를 우전방, 한국군 민기식 부대를 좌전방으로 하고, 전투에 지친 제2대대와 산청에서 돌아온 미 제29연대 제1대대, 그리고 하동에서 타격을 받은 미 제29연대 3대대를 중암리에 집결시켜 예비로 두었으며 병력은 1,273명이었다.
(1) 마산 서측방의 정찰전
마산 서측방의 정찰전('50.8.2-3)
남지 미24사
ㅐ
미25사
의령
미19-2대대 검암리
중암리
민부대 괘방산 미29연대(-) 함안
김부대(8.4집결)
마산 미25사
적6-13연
진주 진주고개 무촌리
체크정찰대 8.2일 15:00철수(27-1대대) 적6사(-)
발산고개 서북산
미27-2-E중대
봉암리
진동리 미25-27연(진동초)
김부대
미27-1대대 8.2 04:00출발
8.3 01:00 복귀
사천
(가)괘방산의 조우전
8월 1일 미 제24사단장 처치 소장은 북한군 제6사단이 정말 이 일대로 기동했는지 알아볼 필요를 느껴 마침 일본에서 들어온 중전차 중대를 포함하여 제19연대장과 제27연대장에게 8월 2일 06:00시를 기해 진주 방면으로 기동하여 정찰을 실시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19연대장은 무촌리 일대를 정찰하기로 결심하고 배속된 미 제29-1대대에 전차소대, 공병소대, 트럭 22대를 배속시켰다. 그러나 이 사실은 고개 위에 있는 제19-1대대에 전달되지 않았다.
미 제29-1대대가 막 고개를 넘어서자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되고, 괘방산은 밤사이 북한군이 점령하였으며 민부대와 제19-1대대 사이로 침투하여 미군 중박격포진지를 유린한 다음 국도를 차단하였다.
미 제19-1대대와 제29-1대대는 고개 위에서 적의 사격을 받고 정오경에는 유엔 공군기의 오폭으로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백병전까지 수행하게 되었다. 마침내 제29-1대대의 C중대가 괘방산 정상을 탈환하고 미 제19-1대대와 민부대 사이로 침투한 적은 예비인 미 제19-2대대가 적을 격퇴시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역습 부대가 민부대를 적으로 잘못 알고 공격을 하여 민부대는 앞뒤로 협공을 받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철수하게 되며 이 빈자리를 미 제29-3대대(못트 중령)가 투입되어 공백을 채웠다. 여기서 미군은 90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나)미 제27연대 제1대대(첵대대)의 조우전
미 제27-1대대장 체크 중령은 미 제8야전포병대대 A포대와 셔먼 전차 1개 소대를 배속받고 대대를 차량화하여 8월 2일 04:00시에 진동리를 출발하여 진주로 향했다.
별 저항없이 무촌리 일대로 진출중에 길가에 잠들고 있던 일련의 북한군을 식별하여 대부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09:00시경에 무촌리에 도달했는데 진주고개로 북한군의 차량종대가 넘어오고 있어 이를 매복하여 10대의 트럭을 노획하였다. 여기에는 정찰기의 보고와 미군 전폭기 편대가 공격에 가담하였다.
체크 정찰대는 전차 4대를 앞세우고 국도를 따라 진주고개를 향해 공격해 갔으나 북한군의 병력이 증가하여 전차만이 전진을 하자 우전방에서 3문의 대전차 포가 공격을 가해 왔고 포병의 지원으로 대전차 포를 제압하였다. 이미 적의 병력이 진출로 앞 뒤에 다수가 나타나고 8월 2일 07:00시에 미 제19연대의 상황을 알게 되어 부대는 목작이 달성 되었다고 판단하고 철수를 하게 되며 미군 전투기가 선회하며 엄호 하였다. 철수 도중 많은 적의 기습을 받으며 보전포 협동으로 북한군의 협공을 뿌리치고 8월 3일 01:00시에 연대 본부가 있는 진동리 초등학교로 복귀하였다.
(다)북한군의 미 제27연대본부 기습
미 제27연대는 진동 초등학교에 위치하고 근처에 155밀리 곡사포 A포대와 제8포병대대가 위치하고 있었다. 8월 3일 07:00시경 아침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도중에 북한군의 기습이 시작되었다. 학교 인근 245고지에서 접근하는 적을 경계병은 국군이 지원하러 오는 줄 알았다.
연대장과 체크 대대장의 지휘로 245고지를 탈취하는 동안 북방에서 북한군을 만재한 20~30대의 차량이 함안에서 남하하여 진동리 북방 1km 지점에서 하차 하였고 이를 발견한 미 제8포병 대대의 사격으로 북한군은 산속으로 도주 하였다. 이 전투에서 체크 대대는 전사 13명, 부상 40명의 피해를 입었고 적은 600여구의 시체를 남기고 퇴각하였다.
반면 북한군 제6사단장 방호산은 8월 2일 주간에 경계배치가 되어 있지 않은 진동리의 연대지휘소와 포병진지를 발견하고, 마산에는 전투 부대가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방호산은 북한군 제6-1연대를 서부간 남쪽으로 우회 기동시켜 진동리를 기습하였다. 그들은 체크 대대가 철수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밤중에 진동리로 복귀한 것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8월 3일 1개 대대로 진동리 연대 본부를 기습하고 제1연대(-)를 마산으로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진동리에 보병이 주둔하고 곧 역습을 가해와 큰 손실을 입고 퇴각하고 다시 1개 대대를 차량으로 투입하였으나 대대장이 전개지점을 잘못 선정한 탓으로 하차지점이 포착되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 결과 북한군 제6사단은 그동안의 전투 손실이 누적되어 8월 3일야간에는 전투력이 반감되고 전차부대도 연료 부족으로 운용에 제한을 받았다.
(라) 국군 해병대의 진동리 부근 전투
국군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8월 1일 이응준 서남지구사령관의 명령에 아닐 18:00시에 마산을 출발하여 22:30분경 봉암리 계곡의 고사리에 도착하여 지휘소를 설치하였다. 해병대의 임무는 마산을 향해 동진하고 있는 적을 진동리 서쪽에서 격멸하라는 것이었다.
김성은 부대는 8월 3일 아군 방어진지로 오고 있는 적 대대병력을 공격하여 전차 2대, 트럭 4대, 지프차 2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리고 상황보고를 하려했으나 무전기 고장으로 다른 지시를 받지 못한 채 진동리가 적에게 포위 된 것으로 판단하여 8월 4일 13:40분에 함안에 도착한다. 이 때 김부대는 서남지구전투사령부에서 배속이 해제되어 미 제25사단에 배속 되었다. 8월 6일에 미 제27연대에 배속되어 적에게 점령당한 야반산을 공격하여 탈취하고 8월 7일에 김성은 부대는 미 제25사단 명에 의해 다시 마산으로 이동하여 집결하였다. 이곳에서 전 장병 일계급씩 특진이 된다.
(2)킨 특수임무부대의 반격작전
킨 특수임무부대의 반격작전('50.8.7-12)
남지 미24사
ㅐ
미25사
ㅇ의령
검암리
미35-대대 미24-2대대
중암리
미35연(-) 함안 마산
미25사, 미24-1대대
적1-13연
미24-1대대 게릴라
진주 적 무촌리 미35연 서북산 미24-3대대
ㅐ 적6사 봉암리 미24-3대대 미24-2대대
미해병5연 미5연대 진동리
사천 5해병 항공모함
장촌리
적
적6-15연
(가) 킨 작전의 배경
미 제25사단은 북한군 우회 기동에 따라 이곳에 긴급 투입되어 미 제24사단으로부터 방어책임지역을 인수받아 남지에서 마산에 이르는 책임지역에 8월 4일까지 예하 부대를 배치 하였다.
미 제35연대는 중암리에, 미 제24연대는 하안 부근, 제27연대는 진동리에 배치하였다. 또 사단은 그곳에서 작전 중이던 국군 민부대, 김성은 부대를 작전통제하였으며 진주 -중암리 축선에 지연전을 수행하던 미 제24-19연대는 8월 3일 원대 복귀하였다.
한편 미 제25사단은 8월 2일 마산으로 이동한 미 제5연대전투단을 배속 받았다. 8월 3일에는 미 제8군 예비인 미 제1해병여단이 마산으로 이동하여 마산-부산축선으로 가중되는 북한군 제6사단을 격멸하여 대구로 집중되는 적의 압력을 완화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마산-진주축선으로 개전 이후 최초의 사단급 공격작전이 벌어지게 되며 이것이 "킨 특수임무부대"다.
(나) 킨 특수임무부대 편성과 기동계획
킨 부대장은 미 제29연대를 해체하여 미 제27연대와 제35연대에 1개 대대씩 증편하여 이들 연대를 3개 대대로 편성하고, 미 제87전차중대, 국군 민부대, 김부대, 경찰 중대를 배속 받아 총병력 20,000여명, 전차 100여대, 야포 100여문을 보유하였다.
이 작전을 위해 워커는 미 제5공군사령관에게 8월 5일부터 양일간 항공력을 집중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또 미 제25사단(제27연대: 제5전투단과 교대한 후 제8군 예비로 전환)에 미 제5전투단, 미 제1해병여단, 미 제89중전차 대대, 미 해병 제1전차대대를 배속하여 "킨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였다.
킨 특수임무부대의 반격 계획은 현 배치 선에서 3개 도로로 진주를 탈환하는 것이다.
북쪽에서는 미 제35연대가 가장 양호한 남해안 간선 도로를 이용하여 중암리에서 무촌리로, 미 제27연대와 교대한 제5전투단이 진동리-봉암리-무촌리로 진출한 후 협동으로 진주고개를 공격하며, 미 제5해병연대가 고성-사천간 도로를 따라 진주 남동쪽을 공격하고 미 제24연대(민부대. 김부대. 경찰 배속)가 서북산 일대로 침투하여 보급로를 차단하고 적을 소탕하며 함안 도로를 확보토록 하였다.
이 무렵 북한군 제6사단은 병력을 분산시켜 마산으로의 돌파구를 찾고 있었고 8월 6일 밤 각 방면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모든 보급로를 차단하고 진동리 주변 감제고지를 장악 하였다.
(다) 공격 전야의 상황
미 제35연대는 8월 6일 괘방산 진지를 점령하고, 미 제5해병연대 제2대대는 진동리 서쪽 신기리 뒷산 181고지 옥녀봉에서 야반산까지 점령하였다.
한편 진동리에는 미 제27연대와 해병 김성은 부대, 미 제5해병연대가 집결하여 대규모 병력이 집결 되었다.
8월 6일 밤 괘방산 정상이 적의 기습으로 피탈되었으나 북한군 제6사단은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전투에서 많은 손실이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라) 킨 특수임무부대 전투 경과
킨 특수임무부대는 8월 7일 06:30분에 공격을 개시하여 미 제35연대는 괘방산을 탈환하고 공군의 지원하에 북한군 1개 대대를 격파하여 전차 2대, 자주포 5문, 병력 350여명을 살상하고 무촌리로 진출했다.
미 제5전투단은 진동리 도로를 따라 제1대대를 고성으로 진출시켰다. 그러나 야반산(여우고지)의 제2대대는 아침부터 적의 포위 공격을 받았고 또 교대하게 될 해병 제2대대도 능선에 도착하면서 교전을 하게 되면서 누가 누구를 공격하는지 모를 혼전양상이 되었다. 고지의 해병 2대대는 공수로 식수와 보급품을 지원받게 되는데 섭씨 44도의 극심한 더위 때문에 많은 일사병 환자가 발생하였다
진동리 일대의 고지를 북한군이 점령하면서 미군 보급소와 포병진지에 박격포 사격을 실시하면서 진동리-마산간 도로를 차단하였다.
8월 8일 새벽 야반산 일대의 미 제5전투단 제2대대와 미 해병 제2대대는 항공기 편대의 지원하에 공격을 개시하여 악전고투 끝에 적을 격퇴하고 연결 되었다.
반면 미 해병 제3대대와 미 제24연대 제2대대가 진동리 감제고지를 장악하고 있는 적을 항공기, 포병, 전차의 지원을 받아 공격했으나 진전이 없었다. 양 대대는 계속적인 공격으로 적 600여명을 살상하면서 공격 3일 만인 8월 9일에 탈환하여 진동리 일대의 적의 위협을 제거하였다.
고성을 향해 공격하고 있는 미 제5해병연대는 미 항공모함의 함재기로부터 공중지원을 받으며 진출하고 있으나 적의 저항이 증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8월 10일 봉암리에 진출한 미 제5연대는 야간에 적의 기습을 받고 11일 아침에 공군의 지원하에 적을 격퇴하였다. 하지만 미 제5연대 3대대는 무촌리에 도착해 미 제35연대와 진주고개로 진격하였다. 미해병대는 우연히 고성부근에서 위장된 북한군 제83모터사이클연대의 대열을 발견하고 항공기 폭격을 요청하고 공격하여 북한군 200명 사살, 차량 55대, 오토바이 45대 등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무렵 미 제8군은 대 구북방에 대한 적의 공격이 강화되고 낙동강 돌출부의 상황이 악화되고 동해안의 국군 제3사단이 장사동에서 포위되는 등 전선 상황의 악화로 예비대 학보가 시급하였다. 이에 워커사령관은 킨 특수임무부대의 반격작전을 종료하고 미 제25사단이 공격을 주도하고 국군의 민부대와 김성은 부대의 배속 해제하여 한국군에 복귀시키고 미 제1해병여단과 제5연대전투단도 배속을 해제토록 하였다.
이에 미 제5연대장은 제1대대로 봉암리 서북고개를 점령케 하여 엄호토록 하고 계곡을 돌파하기로 하였다. 미 제25사단장은 신속한 이동을 원했고 미 제5연대장은 철수시 피해를 고려하여 야간이동을 건의하여 승인받았다. 제1대대가 발산고개를 점령할 무렵 사단장으로부터 제2대대와 1개 포대를 즉시 이동시키고 나머지는 날이 밝을 때까지 현 위치에 대기하라는 무전지시가 제5연대장에게 전달 되었다.
이로인해 봉암리 계곡에는 지원병력이 없는 연대본부와 미 제555포병대대, 미 제90포병대대, 미 제159포병대대, 미 중박격포, 미 근무중대와 의무중대만 남게 되었다.
"피의 계곡"
하지만 이미 북한군이 발산고개를 중심으로 종심깊게 침투하여 주요고지를 좌우로 점령하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증원하기로 되어있는 부대들도 제대로 진입할 수 없었으며 적의 강력한 화력과 맞서 싸워야하 지경이 되었다. 더군다나 병력의 수준이 제대로 된 것이 아닌 신병수준이고 지휘관의 전투지휘 능력도 일부는 아직 부족한 상태에 야간전투라 더욱 항공기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봉암리계곡에서 포위된 미 제5연대본부와 포병부대, 전투근무지원 부대들은 상부의명령을 기다릴 수 없이 날이 밝기전 무촌리로 이동하기 위해 기동을 하게 되며 연대본부는 먼저 어떻게 고개를 넘어 갔으나 뒤따라 나선 포병 부대는 3개 방향에서 공격을 받고 완전 무력화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
북한군이 물러가고 새벽에 다시 공군의 지원되며 발산고개의 미 제5연대 제1대대는 병력을 수습하여 무촌리로 향하게 되는데 이때 제대대 C중대의 경우 180명중 가운데 23명만이 생존하였다.
구출명령을 받고 도착한 제2대대는 정오경에 도달하였다. 킨 사단장은 미 해병 제3대대를 봉암리로 보냈으나 도중에 다른 임무로 철수하였고 미 제24연대 제3대대는 끝내 도착하지 못했다.
결국 지원부대가 없던 포병은 이곳 봉암리계곡에서 미 제555포병대대는 사상자 180명과 105mm포 8문, 미 제90포병대대는 사상자 190명와 155mm화포 6문, 차량 26대의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이곳을 "포병의 무덤 또는 피의 계곡"이라 일컬어졌다.
8월 12일 미 제5해병연대 주력은 사천 동남쪽 신촌리에 도달하여 항모 함재기의 지원속에 북한군 모타사이클연대와 제15-2대대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한편 서북산 일대를 공격하던 미 제24연대는 진동리부근의 보급로가 적의 지뢰와 소화기 사격에 차단되자 전차와 장갑차를 밀어넣어 통로를 개척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미 제24연대에 배속된 국군 민부대와 김성은 부대, 그리고 경찰대는 진동리 부근 감제고지에서 적의 침투를 격퇴하며 이날 배속이 해제되면서 김부대는 중암리로 민부대와 경찰대는 마산으로 이동하였다.
미 제8군은 8월 12일 저녁 반격작전을 중지하고 킨 특수임무부대를 서북산 일대로 전환하고 미 해병대를 예비로 확보하였다.
8월 13일 자정 킨 특수임무부대의 철수명령에 따라 예하 연대는 서북산 동측으로 이동하고 배속 해제된 미 제5연대전투단은 마산, 미 해병여단은 낙동강 돌출부로 이동하고 , 8월 16일 킨 특수임무부대는 해체되었다.
킨 특수임무부대는 그동안 7일간의 반격작전에서 진주를 탈환하고 대구정면의 적을 유인하는 목적은 이루지 못했으나 마산으 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큰 기여를 하였으며 북한군 제6사단은 병력 4,000~5,000명, 전차 13대의 큰손실을 입었다.
(3) 킨 특수임무부대의 해체와 주항선 전투
미 제25사단은 제27연대를 군 예비로 보내고 8월 14일부터 미 제35연대를 남지~검암리에, 미 제24연대를 중앙의 서북산 일원에, 미 제5연대를 그 남쪽 진동리에 배치하여 주항선을 형성하였다. 서북산 남쪽 능선에는 경찰 432명이 배치되어 제24연대와 제5연대의 간격을 메워주었다.
미 제25사단은 가야 북서쪽 25km 지점에 있는 십이당산(270)에서 남쪽으로 661고지(미군이 전투산이라 칭함), 필봉(742), 서북산(738), 야반산(342), 옥녀봉(181)을 잇는 능선 위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한편 북한군은 제6사단의 후방방호 임무를 부여받은 제7사단이 8월 15일 진주에서 집결하여 일부 병력을 통영과 여수로 진출시켰다. 제6사단은 강제 집행한 징집병 2,000여명을 보충하는 등 재편성하고 마산 방면의 주요고지를 탈취하고자 하였다.
미 제35연대는 십이당산과 도로변 진지로 접근하는 북한군 제-13연대의 공격을 방어하며 결국 23일 북한군은 후퇴하게 된다.
미 제24연대는 8월 18일 미명부터 북한군 제6-15연대의 공격을 받고 교전하였다. 그들은 서북산의 암벽능선을 점령과 둔덕의 탄광일대를 장악하여 유엔공군기의 네이팜탄 폭격도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부대는 전투산 북쪽 일부를 상실하고 서북산의 일부 능선도 피탈당했다. 그러나 공군기의 무려 38회의 지원으로 전투산을 탈환하게 되고 한국군의 경찰은 정찰임무중 북한군 제6-15연대장을 생포하였으나 도주하려다 사살 되었다.
8월 21일 미 제5연대가 공격에 나서 혈전으로 서북한 정상을 탈환하였다.
전투산과 서북산 일대는 8월 말까지 연일 밤낮 똑같은 방식의 혈전이 주야간에 주인이 바뀌는 쟁탈전이 계속되고 서북산의 정상은 주인이 무려 19차례 바뀌는 격전을 치렀다.
미 제25사단은 8월말까지 검암리 정면, 전투산, 서북산 일대로 돌팧려는 북한군을 저지하였고 8월 30일 제8군 예비로 갔던 제27연대가 원대복귀하고 미 제5연대전투단이 미 제24사단으로 배속 전환 되었다.
(4) 한국 해병대의 통영상륙작전
마산정면 고지 일대에서 격전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1950. 8. 17일 북한군 제7사단 예하 제51연대 1개 대대로 방어병력이 없는 고성을 무혈입성한 후 한국의 경찰중대를 제압하고 통영으로 진출한다.
이에 진해에서 정비중이던 김성은 부대가 2척의 함정으로 통영반도로 기습상륙하였고, 다음날(8.18) 미명 해병대가 원문고개를 점령한 후에야 비로소 북한군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이때 공군과 해군 함정이 적 집결지와 보급차량을 강타하고 삼천포 해안에 이동 중인 적 함선 4척을 격침 시켰으며 원문고개 일대에 진지를 구축한 해병은 적의 계속되는 기습을 격퇴하게 되고, 포로 진술에 의하며 북한군 제104연대 제21대대와 22대대 소속으로 남한에서 강제 징집된 학도병이었다.
(5) 9월 공세시 마산 서북방 전투
북한군의 마산방면 공격('50.8.31-9.1)
적7사 기항 아곡 남지 미2사
ㅐ
미25사
구혜리
칠원리 미27-2대대(9.1)
십이당산 사가
미35-3대대
중암리 미35연
ㅐ
미24연 중리
전투산 742 필봉 마산 미25사
미27연(8.31)
서북산
미24연
ㅐ 추곡리 9.1 07:30
미5연
진동리
(가) 미 제25사단의 배치와 북한군의 기도
1950년 8월 하순의 마산정면 전선을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후방지역에서는 병력집결이 현저히 관측되고 있었다.
미 제25사단은 남지교부터 십이당산(271고지), 진주-마산간 도로를 따라 전투산(665고지)과 필봉(743고지)을 거쳐 진동리 해안에 이르는 48km를 담당하였다. 남강변과 검암리 일대에 제35연대, 전투산과 필봉등 함안 산악지대에 제24연대, 서북산 남쪽에서 진동리 해안까지 제5연대전투단을 그리고 제27연대는 마산에 예비로 두었다.
반면 북한군은 마산을 점령한 후에 부산방면으로 진출하여 삼랑진과 구포사이에서 미군의 주보급로를 차단하고자, 제6사단은 진주에 집결하여 공격준비를 갖추고 있고, 제7사단은 의령 동북에 집결하여 공격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계속되는 유엔 공군기의 폭격에도 아랑곳없이 남강에 수중교를 부설하였다. 이들의 작전은 제6사단이 진주-검암리-마산도로를 따라 돌파하여 중리로 진출하고, 제7사단은 칠원리로 진출하여 남강남쪽 남지리-마산간 도로를 차단하는 것으로 두개 도로가 주공축선이었다.
(나) 미 제35연대의 남지부근 전투
8월 31일 23:30분, 북한군이 이 지역에서 2개 사단으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9월 1일 북한군 제7사단이 남강을 도하하여 미 제35연대 우측 2대대 진지를 공격하였다. 미군은 제64야포대대가 VT신관 사격, 비행기 폭격으로 저지하고 있을때 부대 간격(제1대대와 2대대 사이)으로 돌파되어 칠원과 중리 후방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검암리 정면 고지일대 제35연대 제1대대는 북한군 제6-13연대의 공격을 받아, 특히 지역내 유리한 감제고지인 십이당산에서 3차례에 걸쳐 격전이 벌어져 결국 제13연대장 시체까지 남기며 북한군이 후퇴하고 미군이 승리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적이 연대 후방지역으로 일부 병력이 깊숙히 침투하였고 이를 격퇴하기 위해 예비로 있던 제27-2대대를 투입하여 9월 2일부터 5일까지 좌충우돌하면서 남강변에서부터 후방지역에 이르는 전지역에서 제35연대 병력이 중대 및 소대규모로 분산하여 침투한 적을 격멸하였고 여기에 공군의 지원이 헌신적이었다.
9월 5일부터 북한군의 압력이 현저히 줄어들면서 미 제27-1대대까지 합류하여 적을 소탕하였고 북한군은 16개 집단으로 나뉘어 분산 퇴각하였다. 미 제25사단은 전선 정면을 제외하고도 후방지역에서만 북한군 시체 2,000여구를 매장하였다. 9월 8~9일으 양일간에 엄청난 폭우로 남강의 수위가 2m이상 올라가 북한군의 도하는 어렵게 되어 미 제35연대는 한 고비를 넘겼다.
"마산시민 소개령(9월 10일, 12,000명이 부산으로)"
한편 미 제25사단의 후방지역에는 북한군 유격대와 적 오열의 준동으로 창원 무전중계소가 습격을 당하고, 한국 신문협회 마신지부장(남로당 마산 위원장과 마산 형무소의 간수(공산당원)가 북한군에게 정보를 제공하다 검거 되었다. 이러한 사건으로 미 제25사단장은 마산시민에게 피난령을 내려 9월 10일까지 12,000명의 시민을 부산으로 이동시켰다.
(다) 미 제24사단의 함안부근 전투
미 제25사단장 킨소장은 다부동에서 도착한 제27연대를 사단에 배속시켜 달라고 워커중장에게 요구했으나 미 제27-1대대만을 배속시켰다.
사단장은 제1대대를 제24연대에 배속시키고 이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사단은 8월 31일 한밤중에 북한군 제6사단 주력의 공격을 받아 함안 정면의 제2대대가 돌파되고 함안이 피탈되었다. 즉시 미 제1대대를 투입하고, 야포사격, 전투기들이 네이팜, 로켓포, 기총소사를 가하여 함안은 불바다가 되면서 9월 1일 16:30분에 전차 8대를 선두로 미 제27-1대대가 진격했으나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저지 되었다. 계속하여 미군 전투기와 함재기들이 공중지원을 했다.
9월 2일에 다시 공격하여 함안을 탈환하게 되는데 함안 일대는 북한군 4개 대대병력이 있었으며 이들중에 1,000여명이 손실을 입고 일시 물러난 것이다.
9월 4일에 미 제24-1대대에 진지를 인계했으나 9월 5일 적의 공격에 다시 피탈하게 되는데 이 제24연대는 상주에서부터 제대로 전투를 벌인 적이 없는 관계로 킨사단장은 워커중장에게 교체건의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했는데 9월 6일 북한군 공격시 연대장 챔페니 대령이 부상으로 후송되어 연대 지휘는 제3대대장 코리중령이 수행하게 된다.
(라) 미 제27연대, 미 제24연대의 전투산과 서북산 전투
주요 고지군 확보를 위해 북한군 제6.7사단과 미 제25사단은 전투산, 필봉, 서북산 일대에서 공방전이 계속 되었다. 8월 21일 미 제25사단장은 미 제5연대전투단 제1대대에 서북한 정상을 확보토록 하였으나 9월초까지도 실패하였다.
이러는 상황속에서 9월 7일 북한군이 전투산을 피탈하자 미 제27-3대대에 전투산 탈환을 명하였지만 3일간 수차례 고지로의 진출은 좌절 되었다.이에 제24연대장 코리 중령은 화력으로 적의 소모를 강요하여 결국 적의 병력이 감소되면서 전투산을 탈환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은 9월 14일 새벽 500명의 병력으로 전투산을 공격해와 미 제24-3대대장이 부상을 당하는 등의 악전고투 끝에 철수하게 된다.
한편 미 제5연대전투단은 제1대대가 서북산 탈환전에 실패한 후 정찰전과 화력으로 적을 교란하여 북한군은 수세로 전환하고 미 제25사단은 공세적인 방어로 작전의 주도권을 확보하여 총반격의 계기를 마련한다
4. 전투 결과
미 제25사단이 한국전선에 투입된 이래 8월 말과 9월 초의 낙동강 방어작전은 미 제8군의 지대한 관심사가 되었거, 미 제25사단장 킨 소장은 작전 지휘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미 제27연대와 제35연대는 충분히 임무를 수행하였으나, 제24연대는 전투산 일대의 전투에서 전과도 없고, 9월 1일함안전투에서는 2개 대대가 분산되어 작전에 차질을 가져온다.
이에 미 제25사단장은 미 제8군에 제24연대의 교체를 건의하지만 통과되지 못하고, 연대는 전투시 언제나 돌파당하여 군에 위협을 조성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제25사단은 8월 31일부터 9월 초에 걸친 마산 서부지역 방어전에서 용전분투와 포병 및 공군화력의 막대한 지원아래 전선지역에서의 적 사상자를 제왜ㅣ하고도 사단 후방지역에서만 2,000여 명의 북한군 시체를 발견했다. 9월 9일 전선을 시찰한 제35연대장 피셔 대령은 제2차세계대전시 유럽전선의 작전에서도 이런 비참한 광격을 보지못했다고 토로했다.
결국 9월 7일 이후에 미 제25사단은 구 진지의 대붑분을 회복하고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5. 유해발굴 관련 탐사/ 탐문 결과
이지역의 내용도 앞서서 모두 기록 되어 있다. 엊그제 함안의 안현수(84)어르신이 전화가 왔다. 왜 한번 내려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제 철원땅 광덕산 아래서 농사를 짓고 있다고 대답했다. 전화를 하신 이유는 그토록 찾아오던 내가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궁금해서 전화를 하신 것이다.
어르신이 열서너살에 전쟁이고 북한군과 미군이 왔는데 함안에서 진동리 넘어가는 길이 전쟁 당시는 우마차가 다니는데 전쟁때문에 넓혀졌단다. 그런데 이곳에 미군과 북한군이 퍼붓는 포탄과 네이팜탄으로 주변은 모두가 다 타버리고 시신이 파열되어 불타버린 나무가지에 걸쳐 있었다고 제보 했던 분이다. 그 집이 한옥집으로 북한군 지휘부가 있었고 우리 경찰이 오면 경찰본부가 있었다.
안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의하면 하룻동안에도 몇번씩 북한군이 왔다 미군이 왔다, 그러다 한순간에는 우리 경찰이 서로 돌아가며 주인행세를 했던 전쟁터였다.
여항산이나 서북산, 필봉에 그리고 이지역 웬만한 고지에 올라서면 개인호가 널여있다는 표현이 맞다. 아무데고 파면 파편이나 탄피는 수없이 발굴이 가능하다.
유해발굴은 '07년 혈곡리에서 1구. 오곡리에서 13구'08년에는 가야읍과 군북면 중간, 79번도로 바로 남쪽능선(이 능선을 이용하면 여항산 서북산으로 올라간다) 소포리지역에서 17구, 미 제35연대가 방어한 대산면 하기리 지역에서 16구, '09년도에는 가야 혈곡리에서 자가봉송된 유해 5구. 여항산 일원에서 25구'10년도에 검암리지역에서 5구, 서북산 일대는 '07년도 1구를 시작으로 '08년도 2구. '09년도 7구 '11년도 2구. '13년도 1구. '14년도 8구를 발굴했다.
그 죽음의 계곡과 관련되는 봉암리 발산고개에서 '08년도 5구를 진동의 야반산에서는 '07년도 35구를 시작으로 '08년도 2구. '13년도 13구를 발굴했고 인곡리와 근곡리 일대에서도 '07~08년도에 15구를 발굴했다.
특이한 곳은 마산 내서면 광신사 절 앞에서 집단으로 매장된 7구의 유해를 발굴 했다.
"갑작스런 혹한으로 얼어죽다 살아난 서북산일대 탐사"
나는 재임기간에 하동에서 진주를 거쳐 미군의 이동로를 따라 마산에 이르는 구간에서 주요전투 산은 적어도 매년 한번 이상은 올랐다.
하동 화개장터 위의 우리 학도병이 싸웠다는 곳부터 우리 국군의 초대 육군 참모총장 채명신 장군이 백의 종군하여 전사한 하동 쇳고개를 포함하여 매년 1개월이상의 탐사 및 탐문 일정으로 지역주민도 정말 많이 대면했다.
'07년도 3월에는 서북산과 남쪽자락 수리봉과 인황산을 탐사하는 과정에 갑짜기 기상이 보슬비가 오다말고 한랭전선으로 바뀌어 영하로 급강하하여 얼어붙는 육신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동사란 실체를 경험한 곳이다.
"이곳 일대에서 발굴된 유해의 국적논란"
이곳 전투에서 국군의 건재부대가 전투한 것은 없다. 다만 해병대 김성은 부대가 진동에서 싸웠고 통영 원문고개에서 전투했다. 여기에 민부대가 잠깐 진주에서 방어선을 형성했고 주로 전투는 경찰이 했다.
소련 군사고문관 라주바예프의 보고서에도 국군이나 경찰과 관련된 사실이 없다. 더군다나 죽음의 계곡이나 봉암리 포병의 무덤군 관련 기록도 없다.
이런 사실에 우린 많은 혼란이 왔다. 야반산일대와 옥녀봉에서는 해병이 전투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인원이 전사한 것은 아니고 주도권을 갖고 있었기에 처리가 가능했다고 참전용사님이 증언했다. 경찰관련 사항은 그래도 우리가 서북산 일대에서 전투를 한 기록이 있기에 참고가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봐야 하는지. 하지만 탐문과정에 함께 동행한 하동 탑리 학도병 전투관련 직접 참가자인 여수 돌산의 정호명 참전용사와 함께한 다른 학도병의 기억에서 귀중한 증언을 들었다.
"우리는 이영규부대를 따라 다녔고 화개장터에서 무방비상태로 당하고나서 흩어졌는데 나중에 진주에서 다시 만났고 대열을 이루어 간 곳이 함안 삼봉산(302m), 그 다음에 바로 산 남쪽의 절골 저수지에서 너무 더워 일부는 목욕도 했다고 한다. 밤에 걸어서 계속 진동으로 가는데 밤에 비가 쏟아져 몹시 추웠는데 당시 인솔장교가 상의를 벗어 짜고 서로 등데고 있어라 하여 그렇게 하고 있는데 바로 적의 기습으로 다 죽었다"는 것이다. 그 산이 진동을 바로 내려다 보이는 야반산이란 증언을 현장에서 들었다.
"이런 추론으로 야반산과 서북한 일원의 발굴 유해는 주로 발굴된 유품으로 구분하되 야반산은 국군, 서북산 지역 발굴 유해는 경찰로 분류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문제는 대산면 일원의 남강변에서 발굴되는 유해의 국적이었다."
광려산 광신사 절에서 발굴된 7구는 절의 스님으로부터 제보된 내용이 지역 프락치들이 어디서 잡아왔는지 국군과 경찰을 끌고와 사살했고 이 인원들이 죽어가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고 전해 내려온다는 것이다. 그들은 옷도 다 베껴가고 전투화도 모두 벗겨버려 어디서 다 떨어진 고무신짝을 끌고 온 인원도 있고 맨발로 끌려오기도 했다고 했으니 어렵지않게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기리 일대는 미군과 북한군이 숨바꼭질 하듯이 전쟁을 했고 미군이 네이팜탄사격으로 일대를 다 태워버렸고 전쟁중에 유해처리를 해서 미군은 찾아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군이나 경찰의 참여여부를 물었으나 누구한테서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다.
문제는 카츄사의 참여 여부다. 카츄사는 '50.8. 15일에 첫 모집이 되는데 과연 미 제25사단에 배속이 되었느냐의 문제다. 지금 유엔 묘지(부산)에 가면 창녕-영산지역 전투에 참여하여 전사한 카츄사용사님이 20여분 안장되어 있다.
이렇게 접근하면 분명 미 제25사단에도 지원되었으리라 판단하여 발굴되는 유품을 고려하여 세밀히 분석 결정하였다.
"통영 앞바다에 휩쓸려 들어간 원혼들 이야기"
원문고개 전투관련 현장 탐사 및 탐문을 위해 통영 해병대 전우회를 찾았다. 멋진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한분이 친절하게 우리를 안내하고 점심까지 대접해 주었다.
과정에 지역주민들로부터 원문고개 전투 이야기를 듣고 현장을 탐사하여 개인호의 실체를 확인하였으나 국군이 일방적으로 승리를 한 곳으로 아군 피해는 별로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지역주민이 제보하는 내용은 엄청난 것이였다. 북한군이 점령하는 기간이나 우리 국군이 점령하는 기간에 수많은 사람이 트럭에 실려와 바다속으로 들어가 죽었다 한다. 사람끼리 묶어와 트럭 뒤를 개방하고 인솔하는 자가 발로 바로 앞 사람을 밀어내면 우르르 딸려서 물속으로 들어가 죽고 만다는 내용이다.
어디서 누가 잡혀왔는지는 모른단다. 인근지역에서 차후에 유족들이란 분들이 소식을 들었는지 찾아왔지만 어떻게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한다. 명복을 빌었다.
6. 소련군 군사고문관의 보고서
이 분야의 기록은 크게 부각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북한군이 제대로 전투한 것이 없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기록이 차후에 어떤 정치적 문제가 될까봐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기록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부실하다.
"쇳고개에서 국군의 참모총장을 전사시킨 내용도 없다."
"이곳 계동일대에서 미군 300여 명을 농수로에 매몰시킨 기록도 없다"
"북한군 연대장이 전사한 기록도 없고, 앞서 창녕-영산전투간 구진산에서 전사한 북한군 장군관련 내용도 없다.
7. 민간인 피해현황
가. 마산 보도연맹 학살('50.7.15-8월) : 특무대, 국군, 경찰이 보도연맹원 1천 681명 학살
마산은 한국전쟁 당시에 북한군에 점령되지 않은 지역 중 한 곳이다. '50.7.15일에 마산시내 일원과 진전면. 진동면. 구산면ㅊ등 외곾 농촌지역에서 일제히 보도연맹원을 소집했다. 이들은 다시 마산 시내의 경우 창동 시민극장(현재는 의류상가로 변모)으로 소집된 후, 400m 떨어진 마산형무소로 연행되고, 농천 지역 등은 경찰서를거쳐 형무소로 연행됐다.
연행된 보도연맹원들은 20여 일 후인 8월 초부터 미제 상륙함(LST)에 실려 마산시 구산면 원전앞바다(쾡이바다)로 끌려가 10명 단위로 묶인 채 수장됐ㄷ다. 허우적거리는 민간인들을 군인들이 뱃전에서 총징을 했다.
윤봉근 목격자 : 나는 당시에 철도경찰대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창포동 집에 왔다가 병원을 향해 가는데 갑자기 GMC트럭이 줄줄이 해안가로 들어왔다. 트럭이 한 열대는 족히 돼 보였다. 트럭에서 짚으로 만든 벙거지를 쓴 사람들이 내리는데 모두 손을 뒤로 묶었고, 앞뒤 사람의 허리에도 로프가 묶여 있었다.그 때 옛 유원회사 앞 뱃머리에 미제 상륙함(LST) 두 척이 왔다. 1개 연대 병력이 ㅌ칼 정도로 큰 배였다.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은 곧장 LST로 옮겨탔다. 나중에 들으니 괭이바당에서 총살 수장되었다고 한다. 천우신조로살아난 사람도 있어 내용을 잘 안다.
김남수(당시 마산형무소 간수) : 마산형무소에 잡혀온 보도연매원 사건은 육군 특무대가 전적으로 주도한 일이다.
나. 마산 여양리 학살('50.7.21) : 국군이 진주 등 서부 경남지역 보도연맹원 180명 학살
'50.7.15일 진주를 중심으로 경남서부지역 보도연맹원들이 면사무소, 지서, 군청 등에서 잠시 와보라는 호출을 받고 진주교도소에 집결해 일주일 가량 수용되어 있었다.
북한군이 서남쪽으로 진출해 오던 '50.7.21일 낮 12시경, 이들은 스리쿼터 1대와 트럭 4대에 태워져 여양리 골짜기로 들어왔다.
다. 마산 곡안리 미군 폭격('50.8.11) : 이날 곡안리 뒷산 아래의 성주 이씨 재실에 피난해 왓던 마을 주민 100여 명 중 83명이 미군의 무차별 총격에 의해 무참헤 숨졌다. 미군은 학살 하루 전날 저녁 이 재실을 찾아 주민들의 정체를 확인한 후"여긴 작전지역이니 빨리 이곳을 떠나라"고 말했다. 이에 주민들은 날씨가 어두워지고 노인과 어린이들이 많아 밤 중에 피난을 가긴 어렵다고 하고 내일 아침에 떠나겠다고 대답하자 그렇게 하라고 하며 미군이 떠나갔다.
그런데 당일 아침 떠나려는데, 먼저 북한군이 내려와 미군을 향해 총을 쏘고 사라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군이 총을 쏘기 시작하여 재실은 아비규환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