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후(蕭太后) 그리고 거란의 흥성
아름답고 총명한 소작(蕭綽), 아명은 연연(燕燕)이며, 16세에 황후가 되었고, 29세때 태후가 되었다. 그녀는 요(遼)나라의 소태후시대를 열었다. 그녀의 통치하에, 요나라는 전성기를 맞이하며, 북송과 유명한 전연지맹(澶淵之盟)을 맺었다.
요나라의 황후는 대대로 소씨집안에서 나왔다. 10세기때, 만일 당신의 성이 소씨였다면, 북송인들은 놀라서 당신의 두 눈을 쳐다봤을 것이고, 거란인이라면 이 황후족의 사람을 따뜻하게 쳐다봤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소태후"라는 세 글자는 거의 요경종의 처인 소작의 전용명사가 되어버렸다. 민간전설에서 그녀는 "양가장(楊家將)"의 적수였고, 양가장의 충성스런 장군들은 모두 그녀의 손에 죽어버린다.
그러나 역사상 "양가장"은 없었다. 소작이 양업을 죽여버린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과장되어 전해진 것이다. 역사의 진상은 '전연지맹'에서 나타난다. 송과 요가 대치하고 있을 때, 한쪽은 늑대같고 호랑이같은 요나라군대로 사령관의 기치아래 단정하고 예쁜 여인이 있었고, 한쪽은 송나라군대인대 중군에는 유약하고 겁많은 송진종이 ?아 있었다. 북송과 협상하기 위하여 대신 조리가 요나라 군진으로 들어갔을 때, 태후 소작은 한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왔다. 그는 한덕양(韓德讓)이다. 황제인 요성종도 그들을 향하여 자식으로서의 예를 공손하게 갖추었다.
소작은 '전연지맹'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역사에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강산과 애정을 모두 얻은 것이다.
존귀한 성씨
953년, 요나라의 개국황제의 처인 술율평(述律平)이 돌연 사망한다. 이때, 그녀의 친가에서는 또 하나의 여자아이가 세상에 태어났다. 소명이 연연인 소작이었다. 그녀는 태후정치의 서막을 열었던 여인이다.
한명은 죽고, 한명은 태어났다. 두 중요한 여인은 역사에서 살짝 스치며 지나간다.
"소"씨는 요나라에서 아주 혁혁한 가문이다.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소씨집안의 여인인 술율평을 황후로 받아들인 후, 황후는 반드시 소씨집안에서 나와야 했다. 이는 요나라 정계의 하나의 '숨은규칙'이 되었다. 소작이 출생했을 때, 요나라는 이미 4명의 황제가 있었고, 그의 부친인 소사온(蕭思溫)은 "연국공주(燕國公主)"의 부마였고, 전공을 세웠으며, 야심이 대단했다. 이는 소작의 일생이 평탄하지 않을 것임을 나타낸다.
하루는 초원에 황사가 불었다. 소사온은 일부러 세 딸을 불러 정원을 청소하게 한다. 소작은 가장 어렸는데, 오로지 그녀만이 정원의 구석구석을 깨끗히 쓸었다. 소사온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야 말로 소씨집안을 위하여 큰 일을 해낼 아이이다"
이는 바로 동한의 전고인 "한 집안도 쓸지 못하면, 어찌 천하를 쓸어버릴 수 있겠는가"의 요나라버전이다.
소사온의 안배하에, 소작은 황질(皇侄)인 야율현(耶律賢)에게 시집간다. 969년, 이들 장인사위는 황제를 따라 사냥을 나간다. 황제가 천막안에서 술에 취해 쓰러지자, 그들은 눈빛을 교환한 후, 두 명의 주방장에게 '음식'을 올리라고 하고, 날카로운 칼을 뽑아서 황제의 심장을 찌른다.
이어 야율현이 등극하니 그가 요경종(遼景宗)이다. 16세인 소작은 황후에 책봉된다. 소사온은 아주 기뻐했고, 딸과 사위를 함께 허니문사냥을 떠나게 조치한다. 그러나,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정적들의 반격이 아주 빨랐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소사온이 암살당한다.
하룻밤만에, 소작은 권력의 대가가 무엇인지 확실히 깨달았다. 그녀는 부친을 잃은 비통과 궁중생활에 대한 두려움을 마음 깊은 곳까지 느꼈다. 그리하여 모든 정성을 다하여, 황제의 총애를 얻고자 노력했다. 2년후 그녀는 장남 융서(隆緖)를 낳고, 황후의 지위는 아주 굳건해 진다.
운명은 다시 한번 소작을 뒤흔든다. 요경종은 능력있는 황제였지만, 몸이 튼튼하지 못했다. 바쁜 정무로 어려서부터의 병이 도졌다. 나중에는 조회에 출석하기도 힘들어졌다. 이런 상황하에서 그는 아주 똑똑한 처를 생각했다.
소작은 황후의 신분으로 조정을 주재한다. 그녀는 능력있었고, 시시때때로 요경종에게 보고했다. 몇년후, 요나라의 경제는 호전되고, 군사력도 날로 증대되었다. 조야에서 이 젊은 황후를 괄목상대하기 시작한다.
병석의 요경종은 아주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는 황제로서 줄 수 있는 최고의 상을 처에게 내린다. 그는 사관을 부른 다음: "오늘부터, 모든 기록에서 황후가 하는 말에서 '짐(朕)'이라는 말을 쓸 수 있도록 하라"
정사를 주재한지 12년, 천진난만한 소녀에서 그녀는 이미 성숙한 정치가로 변모했다. 요경종이 병사할 때, 소작은 "황후의 장남인 융서로 하여금 황제위를 승계하게 하라"는 유조를 받는다.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요나라의 황위교체는 아주 무질서했고, 유조 한 장 만으로는 과부고아를 더 이상 보호할 수 없었다. 그녀는 11살된 아들을 데리고, 대신 야율사진, 한덕양을 부르고, 눈물을 머금고 묻는다: "나는 어찌하면 좋은가?"
제왕이 눈물을 흘리며 부탁하면, 신하로서야 목숨을 내놓고 이루어야 할 것이다. 하물며 그녀는 아직 29세된 아름다운 태후였다. 두사람의 고굉대신은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태후께서 우리르 믿어주시기만 하면, 걱정하실 일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맹서한다.
이때가 982년이고, 이후 요나라는 순조롭게 소태후의 시대로 돌입한다.
한족 승상을 사랑하게 되다.
소작은 요나라에 대한 대규모의 개혁을 시작한다. 노예를 석방하고, 농경을 장려하며, 근검절약하고, 억울한 송사를 풀어주고, <<당율>>을 추진한다. 감옥은 점차 비어갔고, 밭을 가는 소와 목장의 말은 늘어갔다. 구귀족의 돈주머니도 두터워 졌다.
이때, 그녀의 곁에 한 남자의 그림자가 또렷해 졌다. 한덕양은 한족이다. 더욱 명확히 말하자면 황실의 노예이다. 그는 조부와 부친 2대에 걸친 공헌으로 인하여 한씨집안은 이미 승상을 맡을 정도에 이른 것이다. 한 해는 그의 부친이 유주(幽州, 지금의 북경)를 지키러 떠날 때, 그를 데리고 요경종에게 하직인사를 하러 갔다. 이때 권력을 대행하던 황후 소작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이것이 한덕양과 소작의 첫번째 대면이다. 그는 그녀보다 11살이 많았고, 군신의 예를 갖추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하여, 역사서에는 기록이 없다. 아마도, 979년의 첩보는 소작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당시, 송태종 조광의가 중원과 남방을 통일하였고, 북벌을 계획했다. 한덕양은 부친을 대신하여 유주를 지키고 있었는데, 분병합위술을 써서 고량하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조광의는 당나귀가 끄는 마차를 타고 황급히 도망쳤다. 나중에 한덕양의 부친이 조심하지 않다가 죽을 죄를 범하였을 때, 소작이 나서서 구해주게 된다.
요경종이 죽은 후, 태후와 한덕양간의 스캔들은 널리 알려졌다. 한 궁중시위는 술에 취하여 태후의 스캔들을 떠들고 다녔다. 그래도 소작은 그저 그에게 장(杖)을 몇대 때리고 끝냈다. 그녀는 사랑을 할 줄 알았고, 그것을 인정할 줄도 알았다. 아예 한덕양을 궁정시위총관, 남원추밀사, 총리조정으로 임명하고,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소작으로 하여금 이토록 마음을 빼앗기도록 만든 남자는 절대 보통인물이 아니다. 985년, 한덕양은 요나라의 도량형을 통일한다; 988년 한덕양은 소작을 부추겨서 과거를 시작하고 유학을 일으킨다; 990년, 한덕양은 농경을 정돈한다. 그의 영항 아래, 북방초원은 더 이상 말에서 활쏘는 소리만 들리는 곳이 아니라, 책읽는 소리까지 들리는 곳이 되었다. 한덕양은 일생동안 소작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들의 애정은 민족융합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소태후와 한덕양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이들의 사랑은 계속되었고, 소작은 요나라귀족들로부터의 압력을 막아내기 위하여, 한덕양에게 국성을 하사하여, 야율융운(耶律隆運)으로 개명하게 하고, 호적을 노예에서 황족으로 바꾸어준다. 그녀의 아들인 요성종은 한덕양에 대하여 부친의 예를 취했다. 한덕양의 병이 위중할 때, 요성종은 친히 한덕양의 집으로 가서 차를 따르고 물을 먹이고, 약을 드리면서 문안을 했다.
최근에 출토된 요나라의 금은기에서 하나의 축문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소작의 사후에 대신들이 그녀의 하늘나라에서의 축복을 비는 내용인데, 그녀와 나란히 이름한 것은 바로 신하들의 병이 위중한 한덕양에 대한 축원이었다.
양가장은 없었고, 소태후만 있었다.
소태후가 양업의 머리를 자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양가장"은 없었다. 소위 사태군(佘太君)이니, 양문칠자(楊門七子)니, 양문여장(楊門女將)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민간의 허구이다.
979년, 북한(北漢)에서 일하던 양업은 송(宋)나라에 투항한다. 조광의는 사람을 알아보고 그를 중용했으며, 양업으로 하여금 계속하여 북방변경의 군사기밀업무를 맡게 한다. 조정에는 양업이 이미 변절한 사람이라는 것을 들어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광의는 그를 밀고하는 여러 서신도 받는다. 그러나, 이 서신들을 모두 양업에게 건네주었다. 이로써 조광의가 양업을 얼마나 신뢰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조광의가 30만대군을 이끌고 북벌하다가, 한덕랑에 의하여 일패도지하여 당나귀가 끄는 마차를 타고 도망치게 되었을 때, 양업은 서로군의 부사령관이었다.
불행한 것은 요나라군대의 화살에 양업이 상처를 입고, 포로로 잡혀간다. 3일후에 양업은 곡기를 끊고 사망한다. 소작은 그가 영웅이라고 보고 존중해준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머리는 베어내어, 요나라군영에 돌려 사기를 북돋운다. 이번 전투에서 송태종 조광의는 연운십육주를 회복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요나라와 송나라간에는 전투가 불가피했다. 이것이 바로 "전연지맹"이다.
1004년, 소작, 한덕양과 요성종은 친정을 한다. 북송의 도성 개봉을 압박한다. 황위를 이어받은 송진종 조항은 부친 조광의처럼 용맹하지 못했다. 두려움에 휩싸여 수도를 옮기며 도망칠 생각을 했다.
"안됩니다" 조정의 대신들중 구준(寇準)이 분연히 일어나 송진종에게 친정을 하도록 요구한다.
전전긍긍하던 송진종은 거의 구준에 붙잡혀서 전주(澶州)까지 끌려온다. 구준의 생각이 옳았다. 황제의 친정이 전선의 장병들에게 얼마나 큰 독려가 되었는지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졸지에 송나라군사의 사기가 진작되었고, 소작의 형제인 요나라대장 소달름을 활로 맞혀 죽여버린다.
독전하던 소작은 온 들판이 피로 물들고, 시체가 산을 이루는 것을 보고는 아마도 마음 속으로 서늘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요나라의 후원에서도 불이 붙었다. 즉, 일부 부락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하여 소작은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어져서 평화협상을 시작한다.
요나라와 송의 관계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전연지맹"인데, 바로 이렇게 체결된 것이다. 연운16주는 현상을 유지하고, 북송은 매년 요나라에 "세폐(歲幣)"로 은10만냥, 비단20만필을 바친다는 것이다.
"전연지맹"은 소태후의 일생에서 최고조로 달한 때였다. 이는 외교상의 승리였다. 이후 120년간 요나라와 송나라간에는 큰 전투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또한 군사상의 승리였다. 송진종의 양보로 연운십육주는 합법적으로 요나라에 귀속되게 되었다. 이로부터 연운십육주를 회복한다는 것은 북송에 있어서 머나먼 꿈이 되어 버렸다.
소작의 얼굴에, 이때 약간은 승리의 빛을 띄었을 것이다. 해마다 지속되는 전쟁으로 세수가 감소하고 부족들이 내란을 일으켰다. "전연지맹"으로부터 5년이 흐른 후, 소작은 흙에 묻힌다. 1년3개월 후, 한덕양도 그녀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