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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힌 광시곡,변주 18번> 맨밑은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 나오는
<Bring Him Home>을 콤 윌킨스가 부릅니다
[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의 탄생지를 찾아 ]
화가의 아틀리에 같은 방입니다. 지붕에는 훤한 채광창(採光窓)을 이고 벽면은 삼면이 유리창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3층 건물 꼭대기에 따로 우뚝 얹혀 큰 기선(汽船)의 조타실(操舵室) 같기도 합니다.
창에는 세인트 피터 항(항)의 부두와 수평선과 험 도(島), 제투 도(島), 사크 도(島) 등의 섬들이 가득 들어와 담깁니다. 그래서 방 이름이 루크 아우트(Look out).
* 위고의 집필실이었던 루크 아우트(Look Out),전면에 세인트 피터 항구가 보입니다
바다를 향한 쪽 양벽 모서리에는 다리 없는 책상이 각각 허리 높이로 벽 중턱에 걸려 붙어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이 방의 이 책상에서 씌어졌습니다.
위고가 영불해협에 있는 영령(英領)의 섬 건지 도(島)에 온 것은 1855년, 공화주의자로서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대하여 1851년 국외로 망명했던 그는 1852년 이웃의 저지 도(島)에 자리를 잡았다가 3년 만에 건지 도로 옮겼고 1856년 <오트빌 하우스>라 부르는 집을 사들여 1870년 나폴레옹 3세의 몰락으로 파리로 귀환할 때까지 14년간(54세 때부터 68세 때까지) 살았습니다.
* 건지 도 지도
“갈매기와 함께 밥을 먹고 가마지우 새와 함께 목욕을 한” 망명 생활이었습니다.
건지 도는 화초 재배가 주업인 인구 7만 5천의 기후 좋은 섬입니다. 영국의 포츠머드와 웨이머드에서 떠나는 정기선이 있지만 프랑스의 생 말로에서 배를 타는 것이 훨씬 가깝습니다. 셰르부르에서는 경비행기도 다닙니다.
섬의 주항(主港)인 세인트 피터에 배를 내리면 비탈진 시가지 중턱에 오트빌 하우스가 하얗게 보입니다. 이 집은 1927년 위고의 손녀인 잔 위고가 파리 시(市)에 기증하여 지금은 영국 당이면서도 무슨 조차지(租借地)처럼 프랑스 국기를 문 앞에 달고 위고 기념관이 되어 있습니다.
* 오트빌 하우스
“큰 스펙타클로 둘러싸인 작은 처소”라고 스스로 위안하던 오트빌 하우스는 위고가 실향인(失鄕人)의 설음을 그 치장에 쏟아 낙을 찾던 집이었습니다. 집안은 오밀조밀한 각종 데코레이션으로 어지럽습니다.
그 하나하나에 그의 손이 안 닿은 것이 없어 각 방은 장식가로서의 위고의 재능에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자신이 일일이 조각한 문짝, 가구들에는 <V.H>라는 이름 약자가 그의 손 끝을 느끼게 하고 <희망은 나의 힘>, <인생은 망명이다> 등 여기저기 새긴 좌우명(座右銘)에서는 당시의 심란(心亂)을 읽을 수 있습니다.
청실(靑室)도 있고 홍실(紅室)도 있습니다. 동양 취미가 있었는지 중국화(中國畵)가 유난히 많습니다. 서재에는 발자크, 라마르틴, 디킨즈 등의 책이 꽂혀 있습니다. 한 방에는 <레 미제라블>의 삽화들을 모아 놓아 위고가 이 집에서 구상하던 소설의 세계가 그림으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 위고의 방
널따란 뒤뜰에는 종려수(棕櫚樹)와 동백나무들 사이에 그가 직접 심은 참나무가 1백년이 넘은 나이에도 정정합니다.
한 망명 작가의 은신처이기에는 너무 호화로운 이 저택은 위고가 <정관시집(靜觀詩集)>의 수입으로 사서 <레 미제라블>의 수입으로 꾸민 것입니다.
위고는 여기 사는 동안 규칙적으로 매일 오후 산책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맨 꼭대기의 <루크 아우트>에 올라가 가족들의 접근을 금지시키고 다리 없는 책상 앞에서 늘 선 채로 글을 썼습니다. 집필 중일 때는 딸 아넬이 피아노를 쳐서도 안 되었습니다.
* 위고의 방
그러다가 저녁 때가 되면 위고는 장의자(長椅子)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곁에는 꿈에 나오는 시귀(詩句)들을 얼른 옮겨 담기 위해서 항상 종이를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위고의 애인이던 배우 쥘리에트 드루에가 이 섬까지 따라와 머물던 곳은 지금 <판도라>라는 호텔입니다. 쥘리에트는 위고가 쓴 <레 미제라블>의 원고를 일일이 정서한 여인이었습니다.
날씨 좋은 날이면 <루크 아우트> 창 밖으로 멀리 프랑스 땅이 보입니다. 프랑스를 떠난 지 10년 후에 완성한 <레 미제라블>이 파리의 거리들을 모두 잊지 않고 생생히 묘사한 것은 위고의 아린 향수(鄕愁)의 표현이었습니다.
* 위고의 방
위고가 <레 미제라블>을 처음 손대기 시작한 것은 망명 전 파리에서였습니다.
그는 1845년 <레 미제르>라는 작품을 착수해 3년 동안 쓰다가 1848년 파리를 떠나면서 중단한 뒤 1860년 건지 도에서 <레 미제라블>로 개제(改題)하여 다시 계속했습니다.
파리의 옛 바스티유 감옥 자리 가까이에 있는 보즈 광장 가에는 위고가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한 집이 남아 있고 파리로 오는 위고 찬미자들은 반드시 이 곳을 찾습니다.
위고가 1832년부터 16년 동안 거주한 이 집은 그의 탄생 1백주년인 1902년, 친구이던 극작가 폴 뫼리스가 위고의 유품들을 대량 기증함으로써 이듬해 기념관으로 개관했습니다.
* 보즈 광장의 위고 기념관
이 기념관에서는 이번에는 화가로서의 위고의 면모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전문가 못지 않은 뎃상이 4백점이나 보존되어 있습니다. 위고의 손 모형과 함께 머리카락이 한 묶음, 그의 체온이 느껴집니다.
위고는 <레 미제라블> 외에도 시집 <빛과 그림자>, 희곡 <뤼 블라> 등을 이 집에서 썼고, 발자크, 알렉상드르 뒤마, 라마르틴 등을 이 집에서 맞았습니다.
* 위고의 침실
이 기념관에서 진열장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말굽조각, 탄환, 조약돌 등이 한 무더기 눈에 띕니다. 1861년 위고가 워털루에서 주워온 것이라고 설명에 되어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패전한 대회전장(大會戰場) 워털루는 브뤼셀 남쪽으로 18km.
옛 싸움터는 넓은 평원이 끝간 데 없이 뻗었고 그 가운데에 피라밋 형의 기념총(記念塚)이 솟아 있습니다. 여기서 한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굴뚝 같은 원주(圓柱)의 위고 기념탑을 길가에서 만나게 됩니다.
위고는 <레 미제라블>의 워털루 싸움 장면을 현장에서 쓰기 위해 1861년 5월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이 대작(大作)에 대미(大尾) 자(字)를 쓴 것은 이해 6월 30일 상오 8시 30분 바로 이 워털루에서였습니다.
이 커다란 종지부(終止符)를 축하하는 위고 기념관은 1912년에 처음 초석이 놓여졌으나 자금 사정으로 중단했다가 1956년에야 완성되었습니다.
* 워털루 전투장 사자상 기념탑
<레 미제라블.> 주인공 장 발장의 발길이 닿는 곳은 모두 실재(實在)의 지명(地名)들이라고 합니다. 장 발장이 감옥살이를 한 툴롱은 남프랑스의 해안 도시입니다. 미리엘 신부의 은촛대를 훔친 디뉴는 알프스 산맥 남단에 있습니다. 소설 속의 미리엘 신부는 디뉴의 주교이던 미올리스 신부가 모델입니다.
장 발장은 영불(英佛) 해협에 가까운 북프랑스의 몽트뢰이유까지 올라가 시장(市長)이 됩니다. 몽트뢰이유에는 장 발장을 시장으로 모신 영광을 기념하는 것이라고는 지금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장 발장이 불쌍한 코제트를 여인숙에서 구출해 내는 몽페르메이유 마을은 다릅니다. 장 발장을 역사상의 인물로 예우합니다.
파리에서 동쪽으로 21km 거리의 몽페르메이유에는 어린 코제트가 물 길러 나왔다가 장 발장을 만나는 우물이 있습니다. 이것을 <장 발장의 우물>이라고 부릅니다. 마을 아래쪽의 이 우물로 내려가는 길이 <장 발장의 우물 로(路)>요, 부근의 숲은 <장 발장 공원>입니다.
코제트를 잡아두는 테나르디에의 여인숙은 알 가(街) 5번지. 이 집이 그 여인숙이라는 확증은 아무것도 없는 채 마을 사람들은 심증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빨간 벽돌 2층 집은 줄곧 카페로 내려오다가 1980년 새로 개수를 해서 개인 살림집이 되었습니다.
* 19세기 말 몽페르메이유
장 발장과 코제트는 이 마을에 축제가 있을 때면 반드시 가장행렬 속에 등장하여 거리를 누빈다고 합니다.
1885년 6월 1일, 빅토르 위고의 장례식 날 몽페르메이유 마을은 시민대표를 조문 사절로 보내 위고의 관 위에 은방울꽃 한 다발을 얹었습니다. 위고가 이 마을에 와서 20여 일 머무는 동안 즐겨 산보하던 숲에서 딴 꽃이었습니다.
장 발장이 몽페르메이유에서 코제트를 데리고 파리에 와서 처음 숨는 곳은 고르보 옥(屋)입니다. 이탈리아 광장 부근 오피탈 대로(大路)와 뤼방스 가(街)의 모퉁이에 있던 이 집은 없어졌습니다. 장 발장과 코제트는 이 집을 나와 이번에는 프티 픽퓌스 가(街)의 수도원으로 달아납니다.
“네 개의 거리가 수구(水溝)처럼 둘러싼 수도원”이라는 소설의 묘사대로 투른포르 가의 수도원은 건물은 달라졌으나 길은 그대로입니다. 1975년까지 이 자리에 수도원이 있었는데 건물이 너무 낡아서 헐어 버리고 새 아파트가 들어섰습니다.
로몽 가 쪽으로 새로 난 정문 앞에서 행여 장 발장이 정원사로 일하던 들이라도 남아 있나 하고 안을 기웃거리니 아담한 안뜰이 있습니다. 이 수도원은 위고의 평생의 연인 쥘리에트 드루에가 어릴 때 들어가 있던 곳이어서 위고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에 그렸습니다.
장 발장이 코제트를 데리고 매일같이 산책을 나가던 뤽상부르 공원은 이 수도원에서 걸어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습니다.
* 뤽상부르 공원에서 장 발장,코제트,마리우스(상상화)
장 발장이 수도원을 빠져나오기 위해 죽은 이승(呢僧)의 관 속에들어가 생 매장되는 묘지는 보지라르 묘지였는데 파스퇴르 지하철역 부근의 그 자리에는 뷔퐁 중.고등학교가 들어섰습니다.
청년 마리우스가 봉기에 참가했다가 부상을 당하는 공화파의 본거지 <코랭트> 주점(酒店)은 랑뷔토 가 100번지에 <르 부브레>라는 식당이 되어 있습니다.
장 발장이 이 마리우스를 업고 파리의 하수도로 들어가 탈주하는 장면은 <레 미제라블>의 압권(壓卷)이라 할 수 있습니다.
* 파리의 하수도
장 발장 때문에 유명해진 이 하수도는 지금 일반에게 공개되어 매주 월,수요일과 매월 마지막 토요일이면 알마 교(橋)의 좌안(左岸) 쪽 모퉁이에 관광객들이 줄을 섭니다. 입구의 계단을 내려가면 첫 방의 슬라이드 영사실에서는 “파리의 땅 밑에는 또 하나의 파리가 있다”는 <레 미제라블>의 구절부터 인용하여 안내를 시작합니다.
1855년 장 발장이 등장할 무렵에 163km이던 하수도의 전장(全長)은 현재 2,100km로 10배 이상 늘었습니다.
<레 미제라블>의 현장감(現場感)은 인간애의 모뉴먼트인 장 발장을 소설에서 끄집어 내어 우리 곁에 영원히 살게 합니다.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 중동부의 브장송에서 테어나 파리에서 죽었습니다. 지금은 빅토르 위고 대로(大路)로 이름이 바뀐 길의 집에서 위고가 숨을 거둘 때의 방 모습은 모즈 광장의 위고 기념관에 그대로 재생되어 있습니다.
프랑스 국민은 이 국민적 대시인을 국장(國葬)으로 모셨고 그 영구의 행렬이 개선문 밑을 지나 위인들의 묘소인 팡테옹으로 행하던 광경은 또한 기념관에 사진으로 생생합니다.
* 팡테옹의 위고 대리석관(왼쪽)
* 1885년 6월 1일 개선문에서 거행된 위고의 국장(國葬) 장면
[ 빅토르 위고와 <레 미제라블> ]
낭만파 문학의 총수(總帥)이자 19세기 프랑스의 최고 시인인 빅토르 위고(1802~1885)의 소설 <레 미제라블>은 그 주인공의 이름인 <장 발장>으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장 발장은 위고의 인도주의 정신의 화신(化身)입니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간의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장 발장은 사회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미리엘 신부의 자비가 그를 개심시켜 그는 덕행을 쌓고 몽트뢰이유의 시장까지 됩니다.
자기 때문에 무고한 죄를 뒤집어 쓴 사나이를 살리려고 스스로 다시 붙잡혔다가 탈주한 뒤 팡틴이라는 불쌍한 매춘부를 동정하여 팡틴의 어린 딸 코제트를 데리고 파리에 숨습니다. 형사 자베르는 장 발장을 계속 쫓습니다.
코제트는 자라서 마리우스라는 청년과 사랑을 하게 되고...마리우스는 시민 반란에 참가하여 부상을 입고 장 발장의 등에 업혀 파리의 하수도를 통해 도망쳐 나옵니다. 장 발장은 코제트를 마리우스와 결혼시키고 눈을 감습니다.
*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 나오는 <Bring Him Home>을 콤 윌킨스가 부릅니다
첫댓글 중학교때 읽었던 '쟝발쟝'이 인연이 되어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거블'과 ' 노트르담의 곱추'를 몇번이나 보았습니다.
특히 캐머론 매킨토시의 뮤지컬인 '레미제러블'에서 ' Bring him home', ' i dreamed a dream''On my own'등은 심금을 울리는 곡으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데 다시 들려 주시어 고맙습니다.
류대감! 맨 위 루크 아우트 사진을 찾아내고 얼매나 쾌재를 불렀는지!! 유레카!!
옛날에도 이 사진 찾느라고 고생고생하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리...항상 원하
는 사진을 찾느데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요.
이번에는 장발장이 시장으로 있던 몽트뢰이유와 악당 테나르디에로부터 코제트
를 구출해내는 몽페르메이유,그리고 워털루에 있는 레미제라블 완결 빅토르 위
고 기념탑 사진을 못찾아 을매나 안타카웠던지...당장 비행기표를 사서 유럽으로
날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나중에 용음회 재정이 넉넉해지면 생각 좀
...ㅎㅎㅎㅎ 감상 잘 했다니까 고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