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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공간 10월호 칼럼]
용산 미군기지!
꾸역꾸역 채우려거나 비우려거나 치유하려고 들이대지 말라
황평우 | Hwang, Pyeongwoo
용산이라는 이름은 용과 같은 형체의 산줄기에서 유래됐다. 즉 한양도성 서쪽 무악의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약현(지금의 중림동과 봉래동 2가에 약초를 재배하던 밭이 있어 약초밭, 약밭, 약전, 약전현, 약현으로 불렸다)과 만리현(세종대 문신 최만리(崔萬里)가 살았던 곳에서 유래)을 지나 서쪽으로 한강 변을 향해 구불구불 나아간 모양이 마치 용이 몸을 틀어 나아간 것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용산 미군기지 전경
용산은 한양도성 외곽에서 교통과 물류의 중요한 거점이었으나 외곽에 있었다. 그리고 서울이 팽창하면서 도심 한복판이 됐다. 그러나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섬 아닌 섬이었고, 지구에서 가장 문어발식 군대가 많은 미국이 비용을 한 푼 안 내며 온갖 만용을 부리며 주둔하는 곳이다. 이처럼 수도 한복판에 외국군의 대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나라는 오직 한국뿐이다. 용산 미군기지는 남산공원의 1.2배, 서울대공원의 3배, 여의도 전체보다도 더 넓다. 또한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 버금가고, 런던의 하이드파크의 2.4배에 이르는 넓은 땅이다. 이 땅이 이제야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난다. 그런데 주인을 만나기 전부터 객들이 서로 나눠 먹겠다고 난리다.
고고학과 역사학적인 관점으로 보면 이곳은 목멱산(남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구릉의 말단부와 남산의 남쪽과 서쪽에 솟아오른 낮은 구릉들로 이루어진 지형으로 일반적으로 유적이 많이 분포하는 지형·지세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미군기지 내에 문화재가 있을만한 경사면은 깎거나 쌓아 대지를 조성하고 군 시설물과 도로 등을 개설하면서 심하게 훼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확인은 어렵지만, 부대에서 소량의 유물이 확인됐고, 유물이 확인되지 않은 지역 중 몇몇 지점은 아직 형질변경이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흙을 덮어 평탄면을 조성된 것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이런 지역을 중심으로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하고 토층의 층위 변화 모습을 확인하는 문화재 조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즉 지금까지 발표되고 알려진 미군기지에 대한 온갖 계획은 한마디로 다 무효라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개발 전에 가장 기본인 고고학적, 역사적 문화재 조사도 선행하지 않고, 무슨 유적이 발견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용산 미군기지 내에 꾸역꾸역 무엇인가를 집어넣으려는 것은 잔인한 푸아그라 요리에 불과하다.
용이 몸을 틀어 지나간 곳
한강과 인접해 있는 용산에 선사유적과 관련한 보고는 아직 없다. 그 원인은 고려 말 몽골군의 병참기지였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조선을 침략한 왜군의 보급기지가, 임오군란 때는 청나라 오장경 부대 3000명의 병력이 주둔했으며, 청일전쟁 때는 일본 육군 6000명이 주둔한 후 일제의 세력 확장의 요충지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방 이후 주한미군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즉 외국군대가 주둔했던 이곳을 고고학을 배운 우리의 학자들이 문화재 조사를 할 기회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었다.
조선 시대 교통의 중심지인 용산은 서강, 마포, 두모포, 송파와 함께 한강의 수운을 통해 전국 물자가 집결했고, 숭례문(崇禮門)과 동작진(銅雀津)을 연결해 시흥, 군포, 수원 화성으로 가는 정조의 남행 길이었다. 즉 조선의 핵심 도로가 위치했다. 조선 시대 만초천(蔓草川: 옛날, 이 냇가에 덩쿨이 무성해 유래한 이름)은 용산과 한강을 이어주는 최단 거리였으며 그 흔적도 용산 미군기지 내에 남아있다. 만초천은 자연스러운 선형이었으며, 당시의 모습은 이색의 용산팔경(龍山八景)의 3경으로 ‘만천해화(蔓川蟹火: 만천의 게잡이 불빛)’로도 볼 수 있다. 만초천은 ‘무악천(毋岳川)’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인왕산 옆의 ‘무악’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것에서 유래한다. 둔지산은 남산에서 부어현(夫於峴: 용산 일대의 옛 지명)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능선으로, 남산의 산세를 삼각산(三角山)과 관악산(冠岳山)으로 연결하는 축 역할을 했다.
1904년에 한국주차군사령부는 한일의정서 제4조 규정을 근거로 용산 일대 약 380만㎡를 강제 수용한 후 토지 매매를 정지하고 위수 지역으로 선포해 무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06년에서 1914년까지 군사시설이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 1906년에는 연병장에서 한강 통에 이르는 대로와 삼판통(三坂通)에서 계행사에 이르는 주요 도로가 완성되었다. 조선총독부가 1897년 경인철도인수조합(京仁鐵道引受組合)을 결성해 미국인 제임스 모오스가 따낸 경인철도 부설권을 양도받았다. 인천-용산-한성을 연결하는 전쟁 침략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1900년 7월 최초의 근대식 교량으로 한강철교를 준공했다. 같은 해 8월에는 경성역-인천역 간 전 노선 41km를 개통했다. 이때 철도 관련 종사자(철도도감 장병, 노무자)들이 증가하며 용산 일대가 흥청대기 시작했다.
이후 만초천은 일본 오사카에 있는 욱천(旭川)으로 이름이 바뀌고 직선화가 된다. 주변 지역은 도시화와 병영의 입지로 도로와 하천은 직선으로 변형되는데 이는 조선의 길과 하천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직선은 빠름, 대량생산, 전투, 전쟁, 일제를 의미하고 곡선은 여유, 부드러움, 자연에 순응, 평화, 조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용산이라는 곡선이 직선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조선의 몰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후 일본군의 사격장 조성으로 남산과 연결된 만초천 물길은 아예 단절된다.
용산에 왜 선사유적이 없을까
1945년 해방과 함께 미 24사단은 일본 기지를 접수하는 과정에서 저항 없이 용산에 정착한다. 미군의 용산 점령은 서울 시민 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군 부대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물자와 미8군 무대는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 대중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더불어 미군을 상대로 한 주변 지역 화랑가 형성의 거점이 됐는데 이때 박수근도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생활하기도 했다. 1991년 미군 골프장이 한국 측에 반환됨에 따라 반환부지에 용산 가족공원이 조성됐고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서 이전했다. 1993년에는 메인 포스트의 일부가 반환돼 1995년 전쟁박물관이 들어섰다.
현재의 용산 미군기지는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쟁박물관이 위치한 블록이 메인 포스트로 중앙에 있고, 남쪽으로는 사우스 포스트, 북쪽으로 캠프 코이너가 있다. 메인 포스트에는 주한미군사령부와 미8군 사령부 외에도 한미연합사령부, 유엔군사령부가 있고, 각종 위락시설 등도 있다. 사우스 포스트는 골프장을 비롯해 학교·병원·주택 등이 있는 주거지역이다. 캠프 코이너는 사령부를 지원하는 보충대·인사행정사령부·한국군지원단(KATUSA)이 있고, 이곳에 시민의 저항으로 덕수궁 터에 못 지은 주한 미국대사관이 신축될 계획으로 있다. 또한 캠프 코이너의 서쪽으로 캠프 킴이 있고, 사우스 포스트의 동쪽으로 유엔공관(UN Compound)과 수송부가 남북으로 각각 있다. 현재 용산 미군기지 안에 있는 문화재를 살펴보면 고려·조선 시대 유물·유적 터 7곳, 일제 때 지어진 업무·주거용 건물 226동, 교량·석축 6개, 문인석 10여 기 등 문화재 250여 점이 있다.
용산 미군기지 배치도
캠프 코이너 북동쪽의 작은 구릉 지역에서는 조선 시대 제천행사를 열었던 남단(南檀) 터가 발견됐다. 남악해독단(南嶽海瀆壇) 또는 산천단(山川壇)으로 불렸는데 국가의 안전과 발전의 기원, 즉 국태안민(國泰安民)을 기원하기 위해 명산, 대천, 대해를 정하여 단을 수축한 다음 국가에서 제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 시대 남악해독단은 남교(南郊)인 현 용산1가 동 육군본부 근방으로 풍우뢰우단(風雨雷雨壇)의 좌편에 있었다. 이 단은 풍우뢰우단이나 북단, 사단, 동단과 비슷한 성격을 가졌고, 이 단을 남단으로 부르기도 했다. 현재 많은 석재가 주변에 흩어져 보존이 시급한 실정이다. 또한 기지 내 곳곳에 조선 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문인석 10여 기가 확인됐다. 본래 기지 내에 있던 묘지 앞에 세워졌던 이들 문인석은 도로 부근 등지로 옮겨져 조경용으로 쓰이고 있다. 일부 석상은 파손되거나 페인트로 훼손됐다. 또 사우스 포스트에서 발견된 군용 감옥은 1908년 완공된 서대문형무소(사적 324호)보다 앞선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건물은 현재 미군 의무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감옥건물과 조경용으로 변한 문인석-출처 세계일보
용산 곳곳이 숨겨진 보물의 땅
용산 미군기지 내에는 반드시 발굴해 유적의 성격을 파악해야 할 곳이 다수 있다. 먼저 앞에서 언급한 ‘남단’으로 추정되는 캠프 코이너 북동쪽 작은 구릉 지역이다. 두 번째로 캠프 코이너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곳인데, 이 지역 내에서는 삼각집선문이 시문 된 조선 시대 기와 조각을 비롯해 고려 시대 이후의 것으로 보이는 도․자기편 일부가 확인됐다. 셋째, 사우스 포스트의 북쪽 중심부로, ‘드레곤 힐’의 북동쪽 구릉지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비교적 자연지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곳으로, 구릉 내에는 미군과 관련한 건물들이 계단식으로 단을 이루며 형성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 조선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 조각을 비롯하여 자기편 일부가 확인됐다. 네 번째로 사우스 포스트 북쪽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있는 자연 구릉지다. 이 구릉은 남산자락이 남서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구릉의 말단지역으로, 현재 이 구릉의 남서사면부에는 ‘힐탑하우스’가 있고, 이곳에서 고려 시대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 조각과 도․자기편이 일부 확인되었다. 다섯 번째 사우스 포스트 서쪽 끝단이다. 이곳에서 고려 시대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자기편들이 일부 확인됐다.
왼쪽 작은 구릉지가 남단 터이다.
흔적만 남은 남단-하늘에 재사를 지내던 신성한 곳이 미군의 폐지 소각장이 되어버렸다.
용산 미군기지내 문화재분포지 - 반드시 발굴조사가 필요한 곳이다.
이처럼 지표에 구체적인 유물은 없지만, 지형이나 고고학적으로 볼 때 꼭 조사해야 할 곳도 많다. 첫째 캠프 킴부지다. 남산의 남쪽 말단사면의 서편에 이어진 평탄한 지형을 갖추고 있다. 이렇게 평탄한 지형은 예로부터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둘째 유엔사 부지 안에 있는, 남산 남쪽에 솟아오른 구릉의 서쪽 사면과 맞닿는 평탄한 지형. 셋째 유엔사 부지의 남쪽에 있는 수송부 부지로 남쪽에 솟아오른 구릉의 남쪽 사면이 한강을 바라보며 내려오는 평탄한 지형. 넷째로 사우스 포스트의 남쪽으로, 국립중앙박물관 북쪽에 인접한 곳이다. 이곳은 현재 골프연습장, 야구장, 축구장 등의 체육시설이 있는 비교적 평평한 곳으로 아직 형질변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섯째, 사우스 포스트의 남서쪽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부지와 접한다. 이 지역은 원래 운동장부지로 활용됐으나 현재는 아무런 시설이 없다. 이곳들은 공원 조사 사업 시행 전에 반드시 문화재 발굴조사를 해야 한다.
또 용산 미군기지 주변에 있는 문화재로는 원(院:공공 숙박시설)의 하나로 영남로(嶺南路)로 향하는 첫 번째 숙박시설이었으며, 현재 용산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이태원(李泰院)이다. 다음은 전생서터(典牲暑址)인데 전생서는 조선 시대 궁중의 제향(祭享), 빈례(賓禮), 사여(賜與)에 쓸 가축을 기르던 관청으로 용산구 후암동 370번지에 있고, 현재 영락보린원이라는 복지시설이 들어서 있다. 청파배다리터(舟橋址)는 만초천에 놓였던 다리로 현재 용산구 청파동 168번지 인근의 갈월동 쌍굴 다리 뒤쪽에 있었다. 다음은 구 간조 경성지점 사옥(舊 間組 京城支店, 현 주식회사 광일 사옥)이다. 간조는 철도관계 공사를 많이 시행한 회사로 압록강 철교와 한강 인도교 공사를 시공했다. 한강로 2가 112-1번지에 있는 사옥은 조선영업부가 설립될 당시 경성지점으로 신축됐다. 다음은 구 용산철도학교터(舊 龍山鐵道學校址)다. 성균관대학교박물관에서 2003년에 시굴 조사했는데 이때 철도학교의 콘크리트기초가 확인됐다. 또한 토재마(土製馬) 1점도 확인됐다. 이는 마포·용산나루에 수운을 담당했던 주민의 사당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시사한다. 그리고 용산철도병원(舊 龍山鐵道病院, 현 중앙대학교부속 용산병원)과, 와서터(瓦署址)도 존재했다. 와서는 조선 시대 기와나 벽돌을 구워내는 것을 관장하던 관아이다. 위치는 현재 용산공업고등학교가 있는 용산구 한강로 3가 65번지 일원이다.
이처럼 용산 미군기지안과 주변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문화재들이 존재한다. 이곳에는 315년 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135년 된 은행나무 3그루가 고난의 근대사를 다 느끼며 지켜보고 서 있다. 우리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보다 못한 존재이다. 이 자리에 무엇을 꾸역꾸역 채우려거나 비우려거나 치유하려고 들이대지 마라. 우선 그냥 두고 몇십 년, 아니 몇 년이라도 그냥 두고 좀 놔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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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평우(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는 문화관련 시민단체인 문화연대에서 일한다. 개발과 문화재 보존의 상생 해법을 찾은 육의전박물관 관장이다. 문화유산의 보존과 전승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고자하며 약탈문화재 환수운동도 벌이고 있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정부 문화재청의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했다.
Pyeongwoo Hwang (Director, Korea Cultural Heritage Policy Research Institute)
기타 첨부 사진
주한미8군 사령부 옆에 나란히 서있는 이 건물도 일제시대 건물이다 - 출처 박신용철
일제가 지진에 대비해 내진설계를 한 건물로 여전히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 건물은 미소공동위원회 회의때 소련군이 주둔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 건물은 해방이후 미군부대'JUSMAC-K'가 주둔했고 한국전쟁 직전은 군사고문단이 사용했다. 현재는 합동군사지원단이 사용하고 있다. - 출처 박신용철
교통정리를 하는 미군 너머 보이는 건물도 일제 시대 건물로 현재 미군의 'Finance'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 출처 박신용철
첫댓글 이제까지 본 용산기지부지 관련으로는 가장 자세히 잘 쓴 글입니다! 이번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보았더니 서문쪽에 새로 '한글박물관'을 짓고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