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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회 2010년 봄철 답사 여행
작년 3월 얼마 안 남은 동기회장의 임기 동안 동기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할까 생각하다가 문득 한국예술종합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있는 김봉렬 동기가 생각이 났다. 봉렬이는 자기 전공인 건축은 물론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 불교 등에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미 차원 높은 답사 이끔이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봉렬이를 꼬셔서 우리 동기들 답사 안내를 부탁하였었지. 결과는 대성공! 이후 동기들, 특히 동기들 부인네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동기회의 답사는 계속된다.
오늘(2010. 6. 5.)도 동기들을 태운 차가 월악산 국립공원으로 들어서더니 지릅재를 넘어 간다. 역시 봉렬 선생을 모시고 미륵리 절터로 가고 있는 것이다. 11시를 넘기면서 미륵리 절터에 도착하였다. 차에서 내려 나지막하게 오르막 경사에 터 잡은 절터로 오르는데, 절터 깊숙한 곳에 서있는 미륵부처가 그 앞의 석탑 뒤에 몸을 숨기고 힐끔힐끔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이곳은 단순히 월악산 깊숙한 계곡에 자리 잡은 호젓한 절터가 아니다. 절터 바로 왼쪽은 사람들이 머물다 가던 역원(驛院)의 터. 고려 초기에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사람들은 송계계곡을 따라 올라와 이곳 역원에서 잠을 청하고, 다음날이면 바로 뒤의 하늘재를 넘어 영남으로 내려가고, 반대로 영남 사람들은 하늘재를 넘어와 이곳에서 잠을 청한 뒤 남한강에서 배를 타고 내려갔다. 즉 이곳은 단지 월악산 깊은 산속 절이 아니라 사람과 물자가 물길과 계곡, 고갯길을 따라 오가는 중요한 교통로상의 미륵대원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기에 절에도 당시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미래세계에 인간을 구원한다는 미륵불을 모신 것이리라. 미륵불을 향하여 오르는데 먼저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커다란 돌거북. 길이 605cm, 높이 180cm의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거북 모양 비석 받침돌인데,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바위를 거북으로 조각해낸 것이다. 거북의 큰 등껍질을 눈여겨보니 작은 거북 2마리가 기어오르고 있고, 이 커다란 몸체에 사람도 올라갈 수 있게 하려는지 계단식으로 등껍질을 파냈다. 비석 받침돌이라면 거북 등 위에 비석을 세웠다는 얘기인데, 거북의 체구에 비해 작은 비좌(碑座)는 과연 저기에 비석 몸돌을 꽂았을까 의문이 든다. 안내문에도 수차례 발굴조사 결과 비 몸돌을 찾지 못한 것으로 미루어 원래부터 비석은 존재하지 않은 것 같다고 하고 있다. 만들다 만 것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비석은 없이 거북 받침돌만으로 존재케 한 것인가? 글쎄~ 여기에 자기 공적비를 세우려던 이 지방의 호족이 갑자기 쫄딱 망하여 이렇게 받침돌로만 남게 된 것이 아닐까?
거북을 떠나 보물 95호인 5층 석탑으로 다가간다. 이 탑 역시 기존에 여기에 있단 바위를 기단으로 다듬어 그 위에 탑을 쌓았단다. 그래서 그런가? 기단의 한 면은 직각을 이루지 못하고 조금 일그러져 있다. 탑 꼭대기에는 웬 철 막대가 꽂혀있어 무슨 피뢰침을 꽂아두었을까 생각하는데, 김교수는 탑의 상륜부가 다 떨어져 나가고 남은 것 같다고 한다.
미륵부처 앞에 섰다. 미륵불 주위 3면은 직각으로 돌을 쌓아 올렸는데, 이 지방 호족이 경주의 석굴암을 따라가려고 미륵불 주위로 보호석실을 쌓아 올린 것이다. 다만 공사비가 부족하여서인지 석굴암처럼 완전히 돌로 덮지 못하고 지붕은 목조로 올렸는데, 지금 목조지붕은 사라지고 없는 것. 몽고군이 이곳까지 침입해 왔을 때 이곳도 전란의 와중에 모두 불에 타버렸다. 주위에 쌓아올린 석재들이 둥근 것은 불에 탄 흔적이란다. 축대 중간 중간의 구멍은 원래 작은 부처를 모시던 구멍이라는데, 지금은 그 옛날 부처는 간데없고 그 중 한 구멍에선 2명의 현대의 동자승이 조심스레 밖을 내다보고 있다. 김교수는 석실 오른쪽 부분은 옆에 개울이 지나가기에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기울어지고 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석실 앞에는 구조 안전상 문제점이 있어 출입을 금지한다고 써 놨다.
미륵불은 왼손엔 둥근 무언가를 들고 있고, 오른손은 그 위로 세운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무얼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 미륵불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은 북쪽. 전설에는 신라가 망하자 마의태자와 그의 누이 덕주공주가 하늘재를 넘어와, 마의태자는 이곡에 미륵불을 세우고, 덕주공주는 더 나아가 덕주사에 마애불을 세웠다. 지난번에 덕주사 마애불을 보았을 때 마애불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남매는 불상을 만들면서 서로를 생각하며 마주보게 한 것인가? 그러고보면 보통 절이 이렇게 북쪽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것도 드물다. 전설은 마의태자가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하고, 또 다른 이는 미륵대원이 고려 시대의 절이므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고구려 땅을 회복하겠다는 의지의 상징으로 이렇게 북쪽을 보며 절터를 잡은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봉렬 교수의 설명은 다르다. 이곳 미륵대원이 남한강과 하늘재를 오가는 사람들이 붐비면서 생겨난 것이기에, 이곳에서 남한강을 거슬러 와 배에서 내려 송계계곡을 타고 이곳으로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다보니 자연 절은 송계계곡을 향하여 북쪽으로 자리 잡은 것이라는 것.
미륵불을 돌아 나오는데, 왼편 널따란 바위 위엔 둥그런 바위 하나 얹혀있다. 어떻게 널찍한 바위 위에 이런 둥그런 바위가 얹혀 있을까? 온달 장군이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을 때에 이 공기돌로 힘자랑을 하였다고 하여 온달장군 공기돌이라고 한다. 저 정도 돌로 공기놀이를 하려면 꽤나 거인이어야 할 것 같은데, 온달장군도 저 돌 잡고 낑낑대며 힘자랑은 했어도 공기놀이는 하지 못하였겠지?
이제 절터를 오른쪽으로 도니 하늘재를 알리는 큰 기념돌이 서있다. 여기서부터 하늘재의 고개를 올라가는구나. 높이는 525m 밖에 안 되는 고개이지만 거창하게 하늘을 품에 안는 고개 - 하늘재. 시간이 허락된다면 저 하늘재 위에까지 올라가 온 가슴으로 하늘을 품으련만... 설명을 보니 하늘재는 신라 아달라왕 3년(156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니 아마도 주요 고개중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고개이리라. 이곳에도 3층 석탑이 있다. 안내문에는 탑을 세운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땅기운이 약한 곳을 보강하기 위해 세운 탑이라고 하는데, 김교수의 설명은 다르다. 아까 5층 석탑은 부처님을 찾아 절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절 안의 탑이고, 이곳 3층 석탑은 이곳을 오가는 여행객들을 맞이하는, 특히 하늘재를 넘어온 사람들이 처음 만나는 탑으로 절하고는 상관없이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그래서 아까의 5층 석탑하고도 탑의 양식이 다르다.
탑 오른쪽으로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공터에는 주춧돌이 일정하게 놓여 있는 것이 건물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바로 역원이다. 이렇게 큰 절과 역원이 있던 곳이 왜 지금은 이렇게 흔적만 남아 있는 것일까? 고려 시대 몽고군의 침입으로 모두 불에 타버린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조선 태종 때 문경 새재가 새로 뚫리면서 사람과 물자의 이동로가 그리로 옮겨가는 바람에,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 이곳은 점점 나락의 길로 들어선 것이리라.
이제 화려했던 과거의 미륵대원의 영화를 허공 속에 그려보며 닷돈재를 넘어 사자빈신사지로 향한다. 예전에는 닷돈재를 넘으려면 통행세로 다섯돈을 내야했다는데 - 산적들이 통행세를 요구했나? - 우리는 버스를 타고 얼른 넘어간다. 사자빈신사 절터는 달랑 석탑 하나만 외로이 서 있는 게 아까 지나온 미륵리 절터보다 더 썰렁하구나. 사자빈신사(獅子頻迅寺) - 절 이름이 5글자라는 것도 그렇고, 이름 자체도 참 특이하다. 사자빈신사는 사자빈신삼매(獅子頻迅三昧)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라는데, 사자가 포효의 상을 나타내며 분발하여 일어날 때, 그 기세가 대단하여 다른 짐승 무리들이 두려워 복종하고 사자 새끼는 용맹이 더하는 것처럼, 부처가 이 삼매에 들어가면 대단한 기세로 큰 자비의 문을 열고 위엄을 나타내 불법을 믿지 않는 자와 자기만을 이롭게 하는 자들을 항복케 하므로 이를 빗대어 사자빈신삼매라고 한다. 우리가 잘 쓰는 사자후(獅子吼)란 말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라 하고...
보물 제94호인 석탑은 원래 9층탑이었으나 5층이 날아갔다. 그런데 사자빈신사라는 절 이름에 걸맞게 석탑은 4마리의 사자가 이를 받치고 있다. 그리고 이 석탑은 사자들이 앉아있는 중석에 79자의 명문을 새겨 이 탑이 고려 현종 18년(1022)에 만들어졌음을 알게 해주고 있다. 사자들이 호위하고 있는 안에는 한 인물이 앉아있는데, 안내문에는 비로좌나불이라고 되어 있는데, 김교수는 용맹정진하고 있는 스님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에도 뭔가 기필코 이루고야 말겠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앙 다물고 있으며 머리에는 두건을 두르고 있는 것이 스님이 맞을 것 같다. 그런데 이 무거운 석탑을 머리에 이고 있으면 용맹정진이 잘 되겠나 했더니, 자세히 보니 스님은 머리를 석탑에서 살짝 떼고 있다. 후후! 그렇지. 고생은 사자들이 하고 그 사이 스님은 열심히 용맹정진 해야겠지.
이제 이곳 월악산에서의 답사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여주 신륵사로 향한다. 도중에 버스가 잠시 들른 중부 내륙고속도로의 충주휴게소에서는 예상치 않은 것을 알게 되는 행운도 누렸다. 휴게소 뒤편으로 가니 관광안내판이 있는데 12시 방향에 국보 205호인 중원 고구려비가 있고, 1시 방향에는 탄금대와 국보 6호인 중앙탑이 있다고 한다. 중원 고구려비는 바로 휴게소 앞의 용전리 논밭을 건넌 야산의 턱에 있어 여기서 바로 확인이 되는데, 중앙탑은 중간의 낮은 동산에 가려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중앙탑도 앞에 보이는 남한강을 건너기 전 강가에 있으므로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중원 고구려비는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구려 돌비석으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그 기념으로 세웠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기념비이면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을 것임에도 추측만 하는 것은 이 비석이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기 전까지 동네 주민들이 우물가의 빨래판으로 사용하기도 하여 글자들이 심하게 닳아 없어졌기 때문이다. 중원 고구려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글을 새긴 것이라 주민들로서는 그저 동네에 구르는 돌에 누군가 낙서를 해놓았나보다 가볍게 생각하고 빨래판으로 사용하였을 수도 있으리라. 이 중요한 비석을 빨래판으로 사용하다니... 그나마 이를 쪼개어 건축자재로 사용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중앙탑은 통일신라 시대 세워진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을 일컫는 것으로 남아있는 신라의 탑으로는 가장 규모가 큰 탑이다. 중앙탑이라고 한 이유는 통일신라의 한 중앙에 세워졌다고 하여 중앙탑이라고 불리운다고 한다. 중앙탑을 세울 때에 장정 2사람이 신라의 북쪽 끝과 남쪽 끝에서 동시에 출발하여 이곳에서 만나 이곳이 바로 중앙이라고 여기에 탑을 세웠다나? 신라가 이곳에 이런 거탑을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국토의 중앙에 큰 탑을 세우리라는 열망도 있었을 것이고, 또 이곳이 과거 고구려의 영토로 고구려 유민들이 많이 있어 고구려의 기운을 잠재우기위해 이렇게 큰 탑을 이 땅에 꽂은 것이 아닐까?
4:10경 신륵사 주차장에 내려 신륵사로 걸어 들어간다. 보통 절에 간다고 하면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에만 익숙한데, 신륵사는 남한강 줄기인 여강이 감싸 안은 나지막한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아 걸어 들어가는 오른편으로는 여강의 물줄기를 바라볼 수 있다. 그런데 들어가는 길옆의 펼침막은 “살려주세요!!”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펼침막에는 남한강에 사는 물고기들이, 도마뱀이, 황새가 그리고 들꽃들이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다. 바로 앞의 남한강에선 한창 4대강 사업을 한다며 불도저로 마구 밀어붙이고 있어 이들이 이렇게 살려 달라며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마당에선 4대강 사업이 펼쳐지기 전의 아름답던 남한강변의 모습과 현재의 무참하게 파헤쳐진 모습을 대조하여 보여주는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고, 시인들이 강에 대해 노래한 시들이 걸려있다. 그중 이상국 시인의 ‘새벽강에서’를 읊조려본다.
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나무와 풀들이
서로 모르게
몸에 묻은 피를 씻어내고 있다
어둠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늘도 강에 내려와
찬물에 아랫도리를 씻는 새벽
누가 밤새 울던 소 같은 밤을
강가에 내다 매고 돌아간다
어둠을 내다 버리고 돌아간다
아침이면 몸에 묻은 피를 씻어내는 나무와 풀들. 지금 4대강가의 나무와 풀들은 이렇게 몸에 묻은 피를 씻어내다 끝내는 포크레인의 창끝에 잘려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 아닌가? 전시되고 있는 사진과 시 작품들 사이로는 지금도 4대강 사업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예전에 신륵사 이 강변에 왔을 때 내 마음을 푸근하게 하던 그 강은 어디로 가고 지금은 여기 저기 파헤쳐져 좁아지고 생명의 푸른 빛을 잃어버린 강물만 보이는가?
신륵사(神勒寺) - 신력으로 제압하는 절? 당연히 뭔가 전설이 있을 듯하다. 고려 우왕 때 마암(馬岩)이란 바위 부근에서 용마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고도 하고, 또는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사나운 용마가 나타나 인당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순해졌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하여 신력으로 용마를 제압하였다고 하여 ‘신륵사’라는 절 이름을 얻게 된 것. 신륵사는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절에서 나옹선사 열반성지라고 자랑하고 있듯이 나옹선사가 열반한 후 고려 우왕 2년(1376) 크게 중창되었다. 게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세종대왕 무덤인 영릉을 이곳으로 이장한 후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로 삼으니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다시 지어질 수 있었다고 하고...
경내를 돌아보다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 180호인 조사당 앞에 섰다. 조사당(祖師堂)이라면 그 절과 관련된 고승의 영정을 모시는 전각이 아닌가? 안을 들여다보니 벽에는 3조사의 영정이 걸려있는데, 가운데에 지공스님을 모시고 좌우로 무학대사와 나옹선사의 영정을 모셨다. 지공스님을 가운데 모셨다는 것은 지공스님이 3분 스님중에서는 제일 배분이 높다는 얘기이겠지. 실제로 지공스님은 나옹선사의 스승이고 무학대사는 나옹의 제자이다. 지공은 인도 스님으로 중국에서 활동할 때 자신을 찾아온 나옹에게 법을 전수하였고 고려에도 1년간 머물렀다고 한다. 무학대사야 태조 이성계의 왕사로 유명하니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고... 그러니까 지공과 무학은 신륵사와 특별한 관계는 없지만 나옹 때문에 여기에 영정이 모셔진 것이다. 그래서 영정은 지공을 가운데로 하여 걸었지만, 그 앞에 홀로 앉아있는 목조 좌상은 나옹선사이다. 신륵사에서 이렇게 나옹선사를 떠받치고 있지만 사실 나옹선사와 신륵사의 인연이란 나옹선사가 양주 회암사에서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이곳 신륵사에서 갑자기 입적한 것 외에 특별한 것은 없다. 그래도 당시의 제일 큰 고승이 자기네 절에서 죽었으니 이게 보통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고, 그렇기에 신륵사를 ‘나옹화상 열반성지’로 자랑하는 것이리라.
조사당 위쪽 봉미산 오름길엔 나옹선사의 석종(石鐘)형 부도(보물 228호)와 부도 앞을 밝히는 석등(보물 231호)이 있다. 나옹이 이곳에서 세상을 뜨자 제자들은 신륵사를 크게 다시 짓고 이곳에 나옹선사의 부도와 석등을 안치하였다. 스승이 이곳에서 돌아가셨다고 절을 크게 다시 짓고 석종형 부도와 석등을 만들 정도로 나옹선사는 당시에 공민왕의 왕사로서 이름을 떨친 모양이다. 그런 정도이니 신륵사도 나옹선사와는 그런 인연밖에 없음에도 나옹선사 열반성지라고 크게 떠드는 것일 테고...
신륵사에 있는 탑들은 다른 절들에 비해 특이하다. 우선 경내 마당에 있는 보물 225호의 다층 석탑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대리석탑이라고는 종로 원각사지의 10층 석탑과 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경천사 10층 석탑 외에는 이 탑 말고는 다른 탑을 본 기억이 없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는 보물 226호의 다층전탑도 있다. 벽돌탑 역시 경주 분황사탑 외에는 다른 탑이 기억이 나지 않는 것 같은데... 그뿐인가! 강가 바위 위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석탑 자체야 특이하다고 할 것이 없지만 이 강가 바위 위에 석탑을 세운 것이 특이하게 보인다. 당시에는 수운(水運)이 발달한 때이니까 강을 오가는 뱃사람들이 보라고 여기에 탑을 세운 것인가? 전설에는 나옹화상을 여기에서 화장을 하여 그 자리에 탑을 세운 것이라고도 한다. 원래 탑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사리를 안치하기 위한 것이었다는데, 그럼 이 석탑에도 나옹화상의 사리를 안치하였을까? 물론 전설이니 가능성은 없겠지만...
나옹선사만 이곳을 지나가다가 죽은 것이 아니다. 목은 이색 선생도 이곳에서 죽었다. 월탄 박종화 선생은 대하소설 ‘세종대왕’에서 이색이 끝내 조선 왕조에 협조를 하지 않자 이방원에 의해 이곳에서 암살된 것으로 그리고 있지. 절을 둘러보아도 목은 이색의 죽음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데, 다만 목은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발원하여 대장경을 인쇄하였다는 대장각기비는 있다.
석탑 옆의 바위에 서서 강물을 바라보는데 문득 강물 한가운데에 배를 허옇게 드러내놓고 가쁜 숨을 쉬고 있는 큰 물고기가 보인다. 잉어인가? 어쨌든 저 큰 고기가 배를 수면으로 대고 가쁜 숨을 쉰다는 것은 숨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 무슨 일인가? 낚시꾼이 잡은 것이라면 저렇게 가만히 두지는 않을 텐데... 4대강 사업을 한다고 강을 뒤집어 놓으니 숨 쉴 산소가 모자라 질식해서 죽어가는 것이 아닌가? 저 죽어가는 고기 한 마리가 4대강 사업의 반생태성을 대변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이제 아쉬운 발걸음을 되돌려 신륵사 일주문을 나오는데, 길 오른쪽으로 거북이 한 마리가 등에 비석을 세우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것 역시 신륵사 관련 기념비인가 하였더니 장군 원호의 전승비이다. 원호 장군은 임진왜란 때 신륵사 팔대숲 일대에서 도강을 기도하는 왜병을 섬멸하는 등 당시 무인지경으로 북상하던 왜군을 육전(陸戰)에서 격파하는 최초의 대승을 거둔 장군이란다. 장군은 후에 금화 전투에서 전사하였다고 하는데, 후손들이 장군의 고향 이곳에 전승비를 세운 것이다. 신륵사 답사를 하면서 덤으로 원호 장군 이야기까지 듣고 가는구나. 이제 모든 답사 일정을 마친 우리들을 태운 차는 고속도로로 들어와 서울로 향하는 대행렬에 스며든다. 오늘도 봉렬 교수와 같이 하며 우리가 몰랐던 지난 날의 이야기를 새로 알게 된 기쁨 속에 우리도 조용히 잠속으로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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