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의 `태백산맥'
“벌교는 한마디로 일인(日人)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벌교는 낙안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던 갯가 빈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전라남도 내륙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시킨 것이었다. 벌교 포구의 끝 선수머리에서 배를 띄우면 순천만을 가로질러 여수까지는 반나절이면 족했고, 목포에서 부산에 이르는 긴 뱃길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조정래(53)씨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일본의 조선 지배가 남겨 놓은 흔적으로부터 시작한다. 소설의 시점(始點)이 되는 1948년 10월의 여수·순천 반란사건은 제주 4·3항쟁 진압 명령을 거부한 병사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었으며, 4·3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총선거 저지를 목표로 내걸었었다. 이승만에 의한 단정수립 기도가 일본의 패망 이후 38선 이남과 이북에 각기 진주한 미군과 소련군의 현상고착 방침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결국 동족상잔과 분단 고착화로 이어지는 여순사건은 일제의 식민통치와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이다.
2백자 원고지로 1만6천5백장에 이르는 장강과도 같은 길이의 <태백산맥>이 문을 여는 첫 장면은 제석산 아래 자락에 자리잡은 현 부자네 제각 부근이다. 당으로부터 지역의 거점 확보를 명령받은 정하섭이 그 대상으로 새끼무당 소화를 설정하고 제각 옆에 있는 소화네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다. 일제 지배 당시 일본인 나카지마(中島)가 조선인 소작농들을 동원해 20리 벌교 포구를 따라 제방을 쌓아 조성한 중도들판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세워진 제각은 한옥을 기본틀로 삼되 구석구석에 일본식을 가미한 독특한 양식의 건축물이다. 가령 마루는 조선식에 천장은 일본식이고 툇마루를 타고 돌아가면 본채와 붙어 있는 변소에 이를 수 있으며, 기와지붕 아래 처마에는 벚꽃 무늬를 단청으로 새겨 넣는 식이다. 이 집을 지은 지주는 또한 큰길에서 제각에 이르는 소로 양옆으로는 벚꽃나무를 심었으며 집 앞 마당에는 일본식 연못이 있는 정원을 꾸며놓았으니, 일제 식민당국에 대한 그의 감사의 염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음이다.
비밀임무의 수행이 주는 긴박감과 청춘남녀의 만남에서 오는 풋풋함이 버무려져 피워내는 착잡한 분위기로부터 시작된 <태백산맥>은 여순사건의 끝자락에서부터 전쟁 직후까지 한국사의 가장 긴박한 한 시기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여기서 총체적이라는 것은 단행본 10권의 방대한 분량이나 전쟁을 중심으로 그 전후의 사건 전개를 두루 담았다는 소재의 차원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마침내 전쟁이라는 형태로 폭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민족사의 모순을, 그 핵심을 파악할 수 있는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는 뜻에 더 가깝다.
<태백산맥>의 총체성을 우선적으로 담보해 주는 것은 이 소설이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민족적 비극의 연원을 민족 내부의 사정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분단내인론'이라고도 불리는 이 견해는 그간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그리고 민족 자존심의 훼손을 막고자 흔히 동원되었던 논리―한민족은 소련과 미국이라는 두 외세의 대리전을 치렀을 뿐이라는―를 정 면에서 반박하고 민족 구성원 내부의 분열과 대립이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좀더 구체적으로 그것은 땅의 문제를 둘러싼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갈등으로 표출된다.
지식인 출신 야산대장 염상진과 그를 따르는 농민 전사 하대치, 회의하는 지식인이지만 역사로부터 끊임없이 선택과 실천을 강요당하는 김범우, 양심적인 국군 장교 심재모, 부패한 우익의 대표자 최익승·최익달, 염상진의 동생인 우익 행동대장 염상구, 손승호, 서민영, 안창민, 소화와 이지숙, 외서댁, 들몰댁…. 수백명의 등장인물이 엮는 크고 작은 사건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거대한 역사의 양탄자를 짠다. 그 양탄자 위에서 민중의 나날의 삶과 역사라는 이름의 추상은 완벽하게 호응하여 일치를 이룬다.
<태백산맥>의 문학적 성취를 보장한 요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전라도 방언의 탁월한 구사이다. 거기다가 걸쭉한 육담과 예술의 경지에 오른 욕설 등은 민중적 삶의 활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소설의 사실성을 더하는 효과를 지닌다.
“그 양귀신덜이 들이닥침스로 시상 판세가 위찌 돌아가등가? 코가 석 자나 늘어졌든 지주덜이 새 기운 얻어 되살아나고, 순사질 해묵은 죄 지가 먼첨 알고 뽕빠지게 도망질혔든 눔덜이 도로 그 자리 차고 앉고, 그 공평허게 일 잘허든 인민위원회럴 공산당 못자리판이라고 몰아때레 사람덜 잡아딜이고, 자네덜도 다 아는 이약 새 날아가는 소리로 일일이 되짚을 것도 없이, 지대로 잘 돼가는 밥솥얼 엎어뿐 것이 누구냐 그것이여. 보나마나 그 양코배기덜 아니었드라고?”
최인훈씨의 <광장>이 1960년 4·19의 자식인 것과 같은 맥락에서 <태백산맥>은 정녕 1980년대의 아들이다. 5·16 이후, 아니 4·19의 꿈같던 한 순간을 제하고는 해방 이후 줄곧 우리 사회를 옥죄어온 우익독재의 사슬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80년대를 통틀어 격렬히 용솟음쳤고 그 결과 최소한의 이념적 자유와 균형의 틈이 마련되었거니와, <태백산맥>은 바로 그 틈바구니에서 피어난 한 떨기 민들레와도 같았던 것이다. 이념적 균형을 위한 작가의 고민이 거꾸로 이념의 역편향이라는 비판에 노출되는 결과를 낳기는 했지만 말이다.
<태백산맥>이 비록 논픽션이 아닌 소설이긴 하지만 현실의 벌교에는 소설 속 사건이 펼쳐졌던 이런저런 무대들이 소설과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모양으로 남아 있다. 하대치의 아버지가 한 뙈기 소작논을 바라 등뼈가 휘도록 돌덩이를 져날라 쌓은 중도방죽, 방죽에서 읍내로 이어지는 소화다리, 염상구가 읍내 주먹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담력 싸움을 벌였던 철교, 염상진이 하대치를 시켜 압류한 지주의 쌀을 쌓아 놓았던 횡갯다리, 김범우의 집, 그리고 염상진의 야산대가 한동안 해방구로 삼았던 율어 등…. 특히 좌우로 첩첩 산줄기들이 벋어내려오다가 문득 자진해버린 바탕에 적당한 크기의 분지성 들판이 조성된 율어의 지세는 독립성과 안전성이라는 해방구의 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충족시키고 있다. 소설과 현실의 이런 일치는 작가 자신이 한국전쟁 이후 3년 동안 벌교읍에 살았던 경험의 소산이다.
“해방에서 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기를 다루는 대하소설의 무대로 벌교를 삼은 것은 제가 벌교읍의 골목골목까지도 훤히 안다는 이점말고도 벌교가 겪은 역사가 우리나라 전체의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전형성을 지닌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갈등, 인근 벌교읍에서 조계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빨치산의 투쟁 루트 등이 소설의 배경으로서 적당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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