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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5일(성령강림주일)
로마서 8:16
성령의 증거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이 설교문은 웨슬리설교전집(한국웨슬리학회 편, 대한기독교서회, 2006) 제1권에 나오는 “성령의 증거Ⅰ”에 기초해서 작성되었습니다. 이 설교문은 존 웨슬리가 1746년에 출판을 목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한 인디언이 도시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뉴욕에 왔습니다. 그런데 뉴욕이 얼마나 시끄럽습니까?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 소리로 그지없이 소란한데 갑자기 인디언이 친구에게 “쉿쉿”하더니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길모퉁이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울렸습니다. 깜짝 놀란 친구가 이렇게 복잡한 도시에서 어떻게 귀뚜라미 소리를 들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인디언이 주머니에서 동전을 한 줌 꺼내 땅바닥에 쏟았습니다.
동전 흩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길 가던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무엇을 듣는가는 우리 자신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감정의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출처: 김용훈, 「하나님의 사람은 은혜로 삽니다」(서울: 디모데, 2014);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20년 1월호), 177에서 재인용.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하나 더 들려드리겠습니다.
감히 하나님께 말싸움을 건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모세한테 했던 것처럼 떨기나무에 불을 붙여 보십시오. 하나님, 그러면 제가 따르겠습니다. 여호수아에게 했던 것처럼 성벽을 무너뜨려 보십시오. 하나님, 그러면 제가 따르겠습니다. 갈릴리에서 했던 것처럼 파도를 잔잔케 해 보십시오. 하나님, 그러면 제가 따르겠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떨기나무 옆에, 성벽 근처에, 바닷가에 앉아 하나님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을 보내셨습니다. 떨기나무에 붙일 불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에 붙일 불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벽을 무너뜨리셨습니다. 돌로 만든 벽이 아니라 그 사람의 죄의 벽을 무너뜨리셨습니다. 하나님은 폭풍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바다의 폭풍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의 폭풍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의 반응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떨기나무를, 삶이 아니라 벽돌을, 영혼이 아니라 바다를 보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 사람은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단정 지었습니다.
마침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보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능력을 잃으셨나요?” 그러자 하나님은 그 사람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청각을 잃었느냐?”
-맥스 루카도, 「주와 같이 길가는 것」(서울: 복 있는 사람, 2001);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20년 1월호), 185에서 재인용.
제가 여러분에게 전해드린 두 가지 이야기를 듣고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까? 두 가지 이야기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상에서 나오는 음성을 하나님의 영의 증거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귀의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라는 ‘자기 확신’과 ‘자기기만’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광신자’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너무나 이성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너무나 이성적이어서, 성령의 분명한 증거를 인정하지 않고 영적인 일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너무나 이성적인 사람들은 성령의 증거가 신자에게 주어진 특권이라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그들은 성령의 증거가 사도시대에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사도시대와 같은 성령의 증거가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잘못된 열광주의를 경계해야 하고, 동시에 성령의 역사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균형 잡힌 영적시각이 필요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우리 영의 증거’가 무엇인지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과연 ‘하나님의 영’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십니까? 둘째,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이 결합된 증거가 어떻게 마귀의 현혹으로부터 분명하게 구별됩니까?
먼저, 우리 영의 증거가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사도 바울은 바로 앞부분인 로마서 8장 14-1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동일하게,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5).”
자, 이러한 말씀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알 수 없다는 말입니까? 네,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이 동일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또 성령의 능력으로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면 이것이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인 분명한 표적이 된다.” 성경은 반복해서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너희 자신이 알리라.”
맞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의 선한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는 표적이 있다면 우리는 그 표적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영’의 증거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도 거룩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외적인 행동까지도 거룩하게 해 주셨다는 ‘양심의 증거’입니다.
그러면 이 증거와 결합되는 ‘하나님의 영’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십니까?
‘하나님의 영’은 ‘우리 영’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직접 증언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의 증거는 ‘우리 영’의 증거보다 순서상으로 앞서야 합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변화된 삶의 증거를 깨닫게 되기 이전에, 성령께서 먼저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먼저 우리를 일깨워주셔야만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선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또 그분의 하시는 일을 드러내시고 분명하게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은혜를 우리로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겸손한 사랑과 거룩한 기쁨과 순종하는 사랑을 가지고 행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기뻐한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결코 의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교단의 모(母) 교회인 중앙성결교회를 시무하고 계신 한기채 목사님의 글에 이런 내용이 실렸습니다.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종종 아이들과 함께 대학 캠퍼스에서 연날리기를 했습니다. 아들의 연은 올라갔다 곤두박질을 치는데, 딸의 연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 올라갔습니다. 제가 딸에게 장난삼아 “신형아, 네 연은 어디 갔니? 연이 없어졌네!”하고 물으면 딸아이는 확신 있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연은 보이지 않지만 저 하늘 높이 있어요.” 내가 “연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하늘 높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니?”라고 물으면, 딸아이는 “아빠, 이 연줄을 만져보세요. 연이 위에서 당기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출처: 한기채, 「삼중혁명의 영성」(서울: 두란노, 2009); 「생명의 삶」(서울: 두란노, 2014년 9월호), 151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어떻게 믿고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비록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손끝에서 팽팽하게 느껴지는 연줄의 감각을 통해 우리는 높은 하늘 그 어딘가 연이 날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이미 우리 안에서 행하고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령을 통해 깨닫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성령의 증거를 받은 후에 우리의 영도 그것을 느끼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성령과 더불어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영과 함께 하는 증거가 어떻게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구별되는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는 성령의 증거와 마귀의 유혹을 구별해 내는 표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성령의 증거와 마귀의 유혹을 구별해 내는 표지는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회개가 죄의 용서보다 항상 앞서 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진정한 회개만이 죄의 용서를 가져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이르되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회개하고, 거짓 없이 거룩한 복음을 믿는 자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과 마귀의 유혹에 빠진 사람은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그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갖지 못한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입술의 참회를 반복하지만, 진정한 마음의 참회를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참회만이 진정한 기쁨을 낳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만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높이는 교만은 참된 회개를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런 사람이 참된 용서를 경험할리는 만무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진정한 표적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요일 5:3).”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 14:21).”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계명에 즐겨 순종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율법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스스로 믿고 있으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로 오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로 자신들이 용서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려고 합니다.
이러한 마음 자세는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헛되게 하는 악한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사는 사람은 선을 행하는데 열심이며, 악을 멀리 합니다. 그러나 육신에 이끌려 사는 사람은 그 반대입니다. 그는 선을 행하는 일에 관심이 없으며, 오히려 악을 더 사랑합니다.
그는 경건에 이르는 연습에 관심이 없고, 영적인 어둠의 영과 싸우는 일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또한 그는 자기 영혼을 향하여 “영혼아 편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자(눅 12:19).”라며 스스로 위안을 삼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의 증거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을 주장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하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그 증거로 외적인 열매 즉, 남에게 선을 행하며, 빛 가운데로 행하는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한 영의 증거를 갖지 못한 자들은 이러한 내적인, 외적인 열매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성결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죄는 마귀에게 속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이 스스로 자신을 속이고 있지 않은지를 점검하십시오. 자신 안에 하나님의 선한 영의 증거가 있는지를 돌아보십시오. 만약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영의 증거가 없다면 이제라도 회개함으로 주께로 돌이키십시오.
그러나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영의 선한 증거가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여러분 자신을 깨끗하게 하십시오(고후 7:1). 무엇보다 여러분의 모든 생각이나 말과 행동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가 되게 하십시오(롬 12:1).
어느 잡지에 한 칸짜리 옥탑 방에 세 들어 사는 한 부인을 인터뷰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기자가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언제 가장 행복하십니까?”, “밤에 빨래 널 때,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 ‘나는 행복한 여자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왜 밤중에 빨래를 하죠?”, “낮에는 주인집에서 빨랫줄을 쓰니까 밤에만 제 차례가 와요.” 그 말을 하는 부인의 눈 깊은 곳에서 별이 총총 빛나고 있었다고 기자는 전했습니다.
사실 그 부인에게도 5년 전부터 식물인간으로 누워 지내는 남편이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행복을 잃지 않은 것은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죄 사함의 은혜와 영원한 천국이 주어짐을 알았기에, 부인은 구원의 감격으로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모든 죄와 저주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그 부인의 남편이 온전하게 회복되지 않았을지라도, 하늘나라에서는 기뻐 뛰며 주님을 찬양할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부활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옥탑 방에서도, 병상에서도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출처: 유기성,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로 사는 가정」(서울: 넥서스CROSS, 2012); 「생명의 삶」(서울: 두란노, 2016년 9월호), 85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은혜에 감사합시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그의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님의 증거를 통하여 회개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친히 증거 하신 일입니다.
또한 우리 영은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영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며, 의지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이어받을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분의 계명을 지킵시다.
저는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의 영적인 귀를 열어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즐거워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음성에 즐거이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