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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승복기사' 날조보도 전형 |
이승복 오보 논쟁의 전말과 진실(1) |
뉴스방송을 전문으로 하는 미국 CNN의 운영지침 제6항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뉴스를 보도한다.
우리는 그것을 창조하지 않는다."
전 언론학회장 김민환 고려대 신방과 교수는 14년 전 발표한 학술논문에서 이 경구를 소개하며
"어떤 매체도 뉴스를 지어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주관적인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사건에 접근하여 취재·보도하고 해설하며, 뉴저널리즘의 경우 심리적
묘사·소설적 기법까지 용인하고 있는 새로운 경향은 사건의 날조 보도까지 야기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김
교수는 조선일보의 이승복 작문 기사를 포함해 모두 5개의 국·내외 보도를 대표적인 날조 오보 사례로 선정했다. 오늘부터 몇 차례에 걸쳐 이승복
오보 논쟁의 전말과 진실을 연재한다. 이 기사는 주간 <시민의신문> 지면에도 연재된다.
김민환 고려대 신방과
교수, 14년 전 학술토론서 이미 주장
항소심 선고 앞두고 발굴…유죄선고시 언론학계 '파문' 클듯
서울시 서초구 서울지법 421호 법정.
지난 1월 29일 오전
10시 기자는 이곳에 있었다. 10평이 조금 넘을까 말까한 421호 법정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김주언 한국언론재단 연구이사와 김종배 전
미디어오늘 편집국장이 방청석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1998년 오보전시회를 통해 이승복 신화가 조작됐다는 의혹을 제기한
이유로 조선일보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했던 그들은 2002년 9월 3일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각각 징역 6월과 10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곧바로 항소했던 그들은 법정에서 또다시 조선일보와 치열한 '진실게임'을 벌였고, 10여 차례의 심리를 모두 마친 그날
항소심 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땡전뉴스'로 상징되는 언론통제가 기승을 부렸던 5공 시절 '보도지침'을 폭로하면서 투옥까지
됐었던 김주언 씨는 지난 5년 동안의 법정투쟁에 지친 듯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재판장님이 입정하십니다.
방청객은 잠시 일어서 주시기 바랍니다."
정리(廷吏)의 안내에 따라 방청객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후 법복을 차려 입은
판사들이 법정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구만회 부장판사 등 서울지법 형사항소 9부 소속 법관들이었다. 그런데 자리에 앉아서 서류를 펼치며 재판을
시작하려던 구 판사가 예정에 없던 신상발언을 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 재판을 시작하기에 앞서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김주언, 김종배 피고 나오셨습니까? 알려져 있다시피 두 분 사건에 대한 항소심 판결이 오늘로 예정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판결을 내리기에는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남아 있어 심리를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는 3월 2일 오전 10시에 이곳에서 심리를
재개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재판장으로 하여금 10여 차례의 심리를 진행하고도 여전히 미진함을 느끼게 만든 이 사건의 전말과 진상은
무엇인가. 본지가 오늘부터 몇 차례에 걸쳐 이 사건의 배경과 진상과 전망을 독자에게 상세히 전달하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거니와, 먼저 사건의
개요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만나지도 않고 버젓이 취재원으로
1968년 12월 9일 밤.
울진·삼척지구에 침투했다가 군경의 추격에 쫓기고 있던 무장공비 5명이 계방산 입구에 있는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마을에서 제일 위쪽에 위치한 이석우(당시 35)씨의 초가로 들어가 이씨의 아내 주대하(33)씨와 3남1녀 중 차남
승복(10)군·삼남 승수(7)군·장녀 승자(4)양을 살해하고, 장남 학관(15)군에게 중상을 입힌 채 의복과 식량을 챙긴 뒤 계방산으로
달아났다.
기자들이 현장에 달려온 시간은 다음날인 12월 10일 낮이었다. 승복 군은 이미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있었고, 유일한 생존자인 학관(당시 이름은 승권)군은 중상을 입고 의식불명에 빠진 채 헬리콥터로 원주의 병원으로 이송돼 있었다. 더욱이 기자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건현장이 깨끗하게 정리돼 있었고, 군인들이 주민들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개요 외에는 취재할 만한 것이
없었다.
12월 10일 석간을 필두로 각 신문사가 이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인 12월 11일 조선일보만이
유일하게 초등학교 1학년인 승복 군이 무장공비에 맞서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며 장렬하게 저항하다 참혹하게 죽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기사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유신독재의 버팀목 중 하나가 된 '반공소년 이승복 신화' 탄생의 일등공신이 됐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당시부터 언론계와 언론학계 내부에선 이 기사가 '오보특종'의 전형이라는 이야기가 공개된 비밀로 통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언론인과 지식인만 알고 있던 이 공개된 비밀이 일반인도 말할 수 있는 '팩트'로 확인된 것은 24년이 흐른 뒤였다. 1992년 김종배(당시
언론노보 기자)씨가 한국기자협회에서 발간하는 계간지 <저널리즘> 가을호에 조선일보 보도가 작문이라는 내용의 글을 기고한
것이다.
당시 김종배 씨는 유일한 현장 목격자이자 조선일보가 취재원으로 분명하게 명시했던 이학관 씨와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학관 씨가 "사건 직후에 조선일보 기자는 물론이고 어떤 언론인도 만난 적이 없다"고 증언한 것이다. 이씨는
도리어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자신이 원주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진 뒤 사흘 뒤에야 깨어났는데 어떻게 기자의 취재에 응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학관 씨를 취재원으로 분명하게 명시했던 조선일보 기사가 사실은 거짓으로 꾸며낸 작문이라는 사실이 최초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조선일보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98년 당시 김주언 씨가 사무총장으로 있던 언론개혁시민연대가 조선일보의
이 기사를 비롯해 50대 허위·왜곡보도 사례를 선정해 발표하자 조선일보는 월간조선을 통해 반박기사를 게재한 뒤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언론사 이념 주입 경계해야
그런데 조선일보가 문제삼은 김종배 씨의 '저널리즘' 기사가 나오기 2년
전인 1990년에 이미 언론학자의 학술논문에서도 조선일보 이승복 작문 기사가 날조 보도의 대표적 사례로 언급됐다는 사실이 최근 확인됐다.
한국언론연구원(현 한국언론재단)이 1990년에 발간한 <오보와 정정>. 이 책에는 권말부록으로 2개의 관련자료가 실려 있는데,
'취재보도의 경향과 오보 사례'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 자료 앞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었다.
"이 글은
한국언론연구원이 '오보와 정정'을 주제로 파라다이스 도고호텔(1990. 11. 15∼11. 17)에서 개최한 워크숍의 발제논문으로, 전남대
신문방송학과 김민환 교수가 쓴 글입니다."
김민환 교수(60)는 누구인가? 전남대를 거쳐 현재는 모교인 고려대 신방과 정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 <한국신문사>(사회비평사, 1996), <미군정기 신문의 사회사상>(나남, 2001) 등의 저서를
저술했을 뿐만 아니라 신문방송연구소 소장(1996), 한국언론학회 회장(2002∼2003), 고려대 언론대학원 원장(2002∼현재) 등을
역임하거나 지금도 맡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언론학자다.
그런 김 교수는 14년 전 발표한 문제의 학술논문에서 "주관성을
용인하는 새로운 보도 경향이 야기할 문제 중에서 특히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것은, 오보가 실수나 왜곡의 차원을 벗어나 날조 행위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과 주관성을 바탕으로 기자나 언론사의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를 주입할 개연성이 높아졌다는 사실이다"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그는
5가지의 대표적 날조 보도 사례를 소개했는데, 당시 그가 선정한 국내외의 대표적인 날조 보도 사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지미의 세계(미국, 워싱턴포스트, 1980)
1980년 7월 28일자 워싱턴포스트 1면에는 '지미의
세계'라는 제목의 기사가 특종으로 보도됐다. 여기자 쟈네트 쿠크가 쓴 이 장문 기사의 리드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지미는
여덟 살, 헤로인 중독 3대다. 고수머리에 갈색 눈을 가진 이 흑인 소년의 가냘픈 팔에는 많은 바늘자국이 반점으로 남아 있다. 지미는 다섯 살
때부터 헤로인 주사를 맞아 왔다."
첫 문장부터 참으로 끔찍한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흑인 소년의 어머니가 그런 것처럼 사생아인
지미 역시 어머니와 동거하던 애인에 의해 매일 헤로인 주사를 맞고 있다는 이 기사를 접한 전 미국인은 경악했고, 쿠크 기자는 하루아침에 명기자의
반열에 올랐다.
쿠크 기자는 지미 소년이 어머니와 그 애인이 헤로인을 맞는 것을 보며 자신도 호기심으로 헤로인을 투약하기 시작해
이미 중독자가 됐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중독자였으므로 결국 3대에 걸쳐 마약에 희생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현장을 중계하듯이 투약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뛰어난 문장력까지 보여준 다음과 같은 미문(美文)은 쿠크 기자에게 퓰리처상(특집기사 부문)을 안겨주었다.
"주사 바늘은 지미의 부드러운 살갗에 마치 방금 구워낸 케이크의 한가운데에 스트로를 찔러 넣듯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러나 명성과 영예는 너무나 짧았다. '지미의 세계'가 하루만에 워싱턴포스트 스스로에 의해 날조 보도로 밝혀진 것이다. 너무나
완벽한 기사에 도리어 의심을 갖게 된 편집인들의 집요한 추궁에 쿠크 기자는 "지미 소년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보도 내용도 거의 모두
거짓으로 지어낸 것"이라고 고백했다. 그레이엄 발행인은 기자회견을 갖고 "우리의 보도가 옳을 때 우리는 그 편에 서지만 보도가 옳지 않을 때는
우리는 옳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서 머리를 숙였다.
오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2)지구는 어떤 색깔?(일본, 아사히, 1989)
1989년 4월 20일자 아사히신문 1면에는
'지구는 어떤 색깔?'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오키나와에 있는 거대한 산호초에 누군가가 'KY'라는 이니셜을 선명하게 낙서해놓은
큼지막한 사진까지 곁들인 이 기사에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격렬하게 울분을 토했다.
"이것은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오키나와
야에야마 군도(群島) 이리오모테지마의 서쪽 길이 8m의 거대한 '아자미 산호'를 촬영하러 간 우리 동료는 이 'KY'라는 이니셜을 보고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1백년 단위로 자라온 것을 순식간에 상처를 내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정신의 빈곤과 황폐한 마음, 도대체 'KY'는
누구인가."
상징적인 환경파괴의 현장을 생생하게 고발한 이 기사는 오키나와의 산호초를 개발열풍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환경운동
캠페인이 한창이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맞아떨어지면서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사진이 갖는 시각적인 전달 효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산호에 낙서를 한 파렴치 행위를 준엄하게 꾸짖으며 지구의 색깔이 절망의 색깔로 바뀌었다고 개탄까지
했던 이 특종기사는 한달 만에 취재기자의 완전한 날조행위로 밝혀졌다. 아사히신문은 5월 16일 "취재하던 사진기자 한 명이 촬영효과를 높이기
위해 'KY'라는 낙서를 더 깊이 긁어낸 사실이 있으며, 이는 명백히 자연파괴 방지라는 취재의도에 반하는 행위로써 신문사는 깊이 사과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진상이 드러나면서 일본 열도는 일대 충격에 휩싸였는데, 전말은 이렇다.
낙서가 있다는 제보를 받고 기자가 현지에 도착했으나 낙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기자는 스스로 카메라 스트로보의 금속 부분으로 산호에
'KY'라는 낙서를 새겨 넣은 뒤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일주일 후 이치야나기 아사히신문 사장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3)깡패 두목 섹스 린치 고백(일본, 아사히TV, 1985)
1985년 8월 20일
일본 민간방송 중 하나인 아사히TV는 '애프터눈 쇼'라는 프로에서 실로 충격적인 사건을 보도했다. '깡패 두목 섹스 린치 고백'이란 제목으로
방영된 이 프로에서 깡패들이 강변에서 바비큐 파티를 벌이던 64명 청소년 중에서 5명의 소녀를 골라 난폭하게 성폭행을 자행하는 모습을 시청자에게
전달한 것이다.
바비큐 파티에 참석한 청소년들의 얼굴을 TV 화면을 통해 시청자에게 생생히 전달된 이 엽기적 사건이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의 파장은 엄청났다. 화면에서 딸의 얼굴을 발견한 한 어머니는 그 후 극도로 실망하여 철도 자살까지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프로는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담당 프로듀서가 미리 깡패들과 짜고 연출한 것임이 나중에 드러났다. 깡패와 소녀들은 돈을
받고 프로듀서가 시키는 대로 연기를 했다는 것이었다. 프로듀서는 '섹스 린치'를 가하는 장면이 시원치 않자 "조금 더 리얼하게 해봐"라고
구체적인 요구까지 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충격적인 사건이 사실은 방송인의 연출에 의한 날조였음이 드러나자 일본 사회는 또다시
발칵 뒤집혔다. 이 방송사 사장이 사과 방송을 했으며, 프로듀서는 물론이고 10년 동안 이 프로를 진행해 왔던 인기 사회자도 물러나야 했다.
20여 년 동안 아사히TV의 간판 프로였던 '애프터눈 쇼'도 전격 폐지되고 말았다. 당시 일본 수상이었던 나카소네도 이 어처구니없는 날조 보도에
유감을 표명했다.
(4)김창선 구출 특보(한국, 동양방송, 1967)
1967년 8월 22일 오후
3시 30분 당시 국내 최대 금광이었던 충남 청양 구봉광산 지하 3백50m 수직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건물 50층 높이인
지하 1백25m 수평 갱도에서 혼자 배수작업을 하던 광부 김창선씨(실제 이름은 양창선)가 그 안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거의 모든
도시인이 연탄을 때고 있던 당시만 해도 이런 사건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몇 가지 독특한 뉴스 소재를 갖추고 있어 연일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다. 우선 갱도 안에 갇혀 있는 김씨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굶주림과 죽음에 공포에 떨면서도 16일간이나 살아 있었다.
더욱이 그는 공기 파이프를 통해 밖의 세계와 대화를 계속함으로써 호롱불처럼 꺼져가려는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김씨의
생존 사실이 극적으로 알려지자 각 언론사는 다투어 현지에 취재단을 파견했다. 전화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았던 그 당시에는 전화 회선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실제로 청양전화국에서 구봉광산까지 전화선은 1회선밖에 없었다. 동양방송(김 교수는 T방송이라고 이니셜을 썼음―기자주)은
'정시예약통화'라는 제도를 활용해 이 전화선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 바람에 다른 언론사들은 동양방송의 뉴스를 통해 현지 사정을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뉴스의 제공권을 독점하고 있던 이 방송국은 뜻밖의 오보를 내고 말았다. 9월 6일 오전에 취재기자가 "지금
막 구조대가 갱을 뚫는 데 성공했다. 김창선씨가 곧 지상으로 나올 것이다"라고 보고해 오자 지체 없이 정오 뉴스를 통해 '광부 김창선 16일
만의 극적 구출'이라고 특종 보도한 것이다. 더욱이 동양방송은 미리 준비해 놓았던 '김창선의 인간승리'라는 30분 짜리 다큐까지 방송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동양방송 뉴스만 믿고 신문사들이 앞다투어 1면 톱으로 '김창선 극적 구출'을 보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보도는 하루도 지나기 전에 날조된 오보로 밝혀졌다. 실제로 김창선씨가 구출된 것은 정확하게 그날 밤 9시
15분경이었다.
(5)이승복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한국, 조선일보, 1968)
한편 김민환
교수가 다섯 번째 날조 보도 사례로 선정한 것은 조선일보의 1968년 12월 11일자 이승복 기사였다. 이 부분은 독자의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김민환 교수의 논문 내용을 가감 없이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김 교수는 "1968년 12월 11일
독자들은 조선일보(김 교수는 'C일보'라고 이니셜을 썼음―기자주)의 사회면 톱기사를 읽으면서 무서운 전율과 진한 감동을 아울러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문을 연 뒤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현장에서 직접 이승원 군에게 취재하지 않는 한 이렇게 생생한 취재보도는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독자들은 한편으로 공비들의 잔인한 참살과정에 전율했고 한편으로 이승복의 반공정신에 감동했다. 잔비들의 잔인성과 이승복의
반공정신은 곧 모든 매체를 통해 국민에게 전파되었고, 정부는 그 후 교과서에 이 내용을 게재하여 반공교재로 활용했다. 국민학교에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마지막 말이 새겨진 이승복 동상이 들어섰다.
그러나 이 기사는 사건취재에 뒤늦게 참여한 기자가 상상력과 글
솜씨를 최대한 동원하여 날조한 것이었다. 그리고 날조한 사실이 이미 언론계에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있는 상황에서도 이승복은 아직도 반공이데올로기
선전의 훌륭한 재료로 이용되고 있다. 취재보도의 경향이 주관성의 개입을 용인하는 방향으로 크게 변화된 상황에서 이런 날조기사는 앞으로도 알게
모르게 독자들을 기만할 개연성이 높아졌다."
'표적 고발' 아니냐는 의혹도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취지의 내용이 실려 있는 언론학 관련 서적이나 기사는 이밖에도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법부가 이승복 기사가 날조된과정을 추적하고
독자에게 알렸다는 이유로 김종배, 김주언 씨에게 유죄를 선고할 경우 언론학계에는 일대 파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조선일보가 왜 취재도 없이 이승복 기사를 날조 보도로 규정한 수많은 논문과 저서는 놔둔 채 정작 취재를 통해 날조 보도라고 주장한 김종배 씨의
기사만 소송의 대상으로 삼았는지도 의문이다. 일종의 '표적 고발'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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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시민의 신문>에서 옮겼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동초님 감감사합니다...........
조선일보는 조작일보로 개명해야 마땅하다.
민족의 최대 오보지 좃선일보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사건은 오까모도의 자작극이었다는 말씀이신지요?
@고구마 1.21사건시 삼형제와 조우할 때와 비교되기도 하고 6.25사변 때 양민학살 후 인민군에게 뒤집어 씌운 사례가 떠올라서 질문드린 것입니다.
동초님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