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웃어라
임승유
팬티를 뒤집어 입고 출근한 날
너는 왜 자꾸 웃는 거니
공장장이 한 말이다
귤처럼 노란 웃음을 까서 뒤집으면 하얗게 들킬 것 같아
오늘은 애인이 없는 게 참 다행이고
너는 왜 자꾸 웃는 거니
공장장은 그렇게 말하지만 예쁜 팬티를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나는 팬티 같은 건 수북하게 쌓아놓고 오늘은 꽃무늬 내일은 표범무늬
어제는 나비를 거느리고 다녔다 결심을 유보하느라 계속해서 뻗어나가고 있는 넝쿨식물처럼
내가 딴생각에 빠지면
손목이 가느다란 것들은 믿을 수가 없어 공장장은 중얼거린다
나에겐 아직 애인이 없고
공장장과 함께 밥을 먹는다
팬티 속을 만지면 울어본 적 없는 울음 설명할 수 없는 오후
번지듯 피어나는 꽃잎을 물고 나비는 날아가버리고
그걸 알아봐준다면 좋겠는데
다른 사람들은
웃지 않고 어떻게 마주 앉을 수 있는 걸까
애인은 어떤 식으로 생기는 걸까
주유소의 형식
나는 네모의 형식
팔다리를 접어 울음을 가두고 길가에 앉아 있다
누군가 지나가다 툭, 친다 해도 괜찮아
그건 내가 가진 가장 좋은 점
사람들이 가벼워진 연료통을 끌고 와 줄을 섰다
견고한 내 옆구리에 구멍을 뚫어
싱싱한 울음을 채운 사람들이
끌고 온 길을 접으며 달려 나갔다
말하자면 나는 바깥에서부터 흩어지고 있었는데
막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던 여자의 손가락 사이로
울음이 빠져나오고 있다
멀리 보냈던 울음들이 활활 타오르며 옆구리에 달라붙고 있다
내부를 향해 몰려드는 바깥들
우린 언젠가 같은 종류의 울음을 나눠 가진 적이 있고
출렁이는 울음을 만지작거리며
달릴 수 있는 만큼 달렸다
갈 데까지 가서
울음은 바닥이 나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럴 때 우리는
길가에 웅크려 앉은 자세
우산
사탕을 녹여 먹고
글라디올러스
아스파라거스
발음을 하는 동안에도 자라는 이름을 지어주면
기분이 나아질 거야
오늘의 날씨에 안감을 대고
단추를 만지작거리지
단추는 구멍이 한 개
단추는 구멍이 두 개
구멍이 네 개일 때는 외로움도 어려워져
오늘의 날씨에 안감을 대면
앞다투어 아이들이 뛰어 오고
뛰어오면서 녹는다
키스처럼
신발을 어디서 벗었는지 기억하지 않기로 하자
망고를 먹으면
망고의 기억을 갖게 되지
서로의 기억 속에 이빨을 박고
서로의 이빨을 빛나게 닦아주면서
라이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라이터를 살 때마다
어딘가에 두고 온 내가 생각났다
나는 화요일마다 같은 장소에 있었는데
에스컬레이터는 기억을 감쪽같이 감아버리고
에스컬레이터의 내면에는 서랍이 얼마나 많을까
나는 목요일의 술자리에서 속삭였지
싱고늄 종아리가 하얗게 얼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냐고
누군가를 부둥켜안고 싶은 적이 없었냐고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사건은 일어나고
그때마다 발생하는 기분들
그 기분들을 다 써먹지도 못했는데
누군가는 결정적으로 신문을 장식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심과 함께
서랍 속으로 사라졌다
탁자의 단순한 힘에 기대어
나는 사라진 라이터들과 한통속이다
당신의 목덜미에 손을 얹고
무슨 말이든 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주머니에 넣어 간 그 기분이 필요하고
당신의 얼굴을 돌려 세우려면
양손의 의지보다 확실한
몇 분 전의 느낌들이 필요한데
입술이 끌어 모으는 결심은 너무 늦거나 빨라
화요일의 에스컬레이터를 오를 때마다
칸칸마다 서랍을 열고
잘 있었니?
안부를 물어야 할 것 같고
아버지는 아침마다 산딸기를 따 들고 대문을 들어섰다
저기 대문을 잠가줘요
말랑하고 빨갛고 냄새가 나고 손으로 문대면 으깨지는 산딸기의 성장이 두려워 산딸기를 씹어 먹었다 내 이빨과 혀가 나의 성장에 관여했다
잇몸을 드러내며 아버지는 웃었다 나는 왜 고함을 쳤다라고 적지 않고 웃었다라고 적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아궁이 앞에서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나는 조금씩 사라지는 법을 배우고
들어올 때는 불을 끄고
방문을 반쯤 열어줘
어디서나 짙푸른 멍처럼 풀들이 자라나고
잇몸이 가려우면
아버지를 뜯어 먹었다
아버지만 뜯어 먹고도 이렇게 살아 있다니
성장이 징그러워요
입을 작게 벌리고도 훌륭하게 식사를 할 수 있다
메뚜기도 괜찮고 개구리도 괜찮고 방아깨비는 좀더 우아하지
쇠죽솥 가득 우아하게 저녁을 삶고 있는 엄마
나는 잘 크고 있다
아버지의 입안에서 맴돌던 냄새가
내 입안에서 맡아진다
자꾸만 내 이빨이 무시무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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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유 / 1973년 충북 괴산 출생. 청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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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문학상 시 부문 심사평 ▌
올해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부문에는 총 453명이 응모하였다. 예심을 맡은 심사위원들은 작품 선별의 기준으로 시의 완성도와 각자의 고유한 개성을 중요하게 보았다. 오랜 고심 끝에 모두 11명(김하나, 김해준, 박수지, 백은선, 안희연, 이관청, 이세희, 이현정, 임승유, 조혜경, 최단비)의 작품을 골랐다. 시편을 완성하는 솜씨가 모두 고른 편이어서, 최종심에 남길 후보작을 택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는 응모작의 수준이 평균 이상에 달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문제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
심사위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것은 낱낱의 시편이 무리 없이 완결되어 있는데 반해, 전반적으로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을 주는 시가 많다는 점이었다. 기존의 시 경향이 정형화된 유형을 낳고 있지 않은가라는 우려 또한 제기되었다. 요컨대 2000년대 이후 나타난 한국시의 혁신적인 실험과 시의 새로운 지평은 전례 없는 독창성을 구현함으로써 시사(詩史)에서 또 다른 전환점을 형성해왔다. 그러나 10여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변화의 산물이 이제 막 시작(詩作)에 몰두하고 있는 이들에게서 시의 원형적 본보기로, 따라야 할 전범으로 인식되고 있지 않은가라는 염려를 불러일으켰다. 그만큼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이 기존의 시인들을 연상시키는 예가 많고 이상하리만치 서로를 닮아 있었다.
어떠한 미학적 새로움이든 시간이 지날수록 탈피해야 할 또 다른 관습이 되고 만다는 사실은 미적 현대성이 지닌 구조적 아이러니에 해당한다. 그 때문에 자기 갱신과 ‘혁신’의 사명은 모든 현대적 예술에 부과된 책무이기도 하다. 그만큼 미학적 새로움은 매혹되기 쉽고, 전염력이 강하며, 새로움 바로 그것을 닮고자 하는 열망을 강하게 불러일으킨다. 반면, 그로 인해 정형화되기 쉽고, 모방을 낳기 마련이며,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한다. 게다가 그에 영향받은 예술적 후배들은 이러한 새로움을 본뜨는 일이 새로움의 직접 수행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생겨난다.
어떤 새로움이 유행으로 고착되면, 이전 세대의 아류가 양산되는 쪽으로 나아가기도 하는 셈이다. 이런 경우라면, 신예라는 호칭은 누구에게도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시에 김경주, 김행숙, 이제니, 조연호 등은 한 명으로 충분하다. 자극과 영향을 받는 것은 좋으나, 기존의 시를 추종하는 것은 신인으로선 반드시 경계해야 할 사항이다.
기성의 것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을 제외하고 나니, 최종적으로 남은 후보작이 의외로 적었다. 안희연의 시는 원천을 이루는 발상이 눈에 띄었다. 지배적 심상으로 택한 대상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할 때, 그것을 유추적으로 연관시킬지 아니면 전혀 이질적으로 충돌시킬지, 그에 따라 어떻게 다른 효과가 빚어질지를 직감적으로 알아채는 능력이 비범해 보였다. 그러나 읽는 이의 예상을 빗겨가는 기발함과 참신한 상상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그에 반해 최단비의 시는 전체적으로 안정된 기량을 갖추고 있고, 낱낱의 시편이 미숙함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잘 정제되어 있었다. 특정의 형식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형태의 시 쓰기에 모두 능하다는 인상을 주어 오랫동안 연마한 솜씨임을 짐작케 했다. 하지만 그만의 개성이라 꼽을 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아 아쉬웠다.
임승유의 시는 경쾌하고 발랄한 어조가 단연 돋보였다. 실존의 절박함이나 삶의 곤경, 외부 세계의 추악하고 어두운 면모에 직접 반향하기보다 가볍게 대상을 아우르는 품이 시 전체에 걸쳐 절묘한 아이러니를 형성하고 있고, 고통을 고통스럽지 않게, 슬픔을 슬프지 않게 그려내는 여유와 그 가운데 날카롭게 번뜩이는 이지(理智)가 과하지 않게 배면에 녹아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혔다. 무엇보다 이러한 장점을 자기 시의 특장(特長)으로 살릴 줄 아는 직관을 생래적으로 갖고 있으면서, 이를 기술적으로 형태화하는 노력이 작품 곳곳에서 엿보인다는 것, 그것이 그만의 고유함으로 발현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그가 보여줄 앞으로의 가능성에 큰 기대를 걸면서 임승유의 시를 흔쾌히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축하의 말과 더불어, 어느 누구와도 차별되는 시 세계를 일구어갈 것을 당선자에게 당부하고 싶다.
시 예심: 강계숙, 강동호, 하재연
본심: 강계숙, 이광호
—《문학과사회》 2011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