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이 은혜다"
누가복음 17장 11-19절
얼마전 저희 아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가고 있었는데
아들이 갑자기 밖에 이렇게 보다가
이러는 겁니다.
“아빠, 씨불가마사나”
“씨불? 씨불... 뭐?”
저와 아내는 너무 당황 했습니다.
일곱 살짜리가 벌써 이런 말을 하는 구나.
그러더니 갑자기 손가락을 가리키며
저희에게 알려줬습니다.
알고 보니
‘24시 불가마 사우나’였습니다.
같은 단어도 이렇게 다르게 들릴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같은 상황 속에서 저희 아들은
순수하게 글씨를 물어본 거였고
저는 다른 의도로 그 상황을 해석했던 겁니다.
어제 눈이 많이 내렸죠.
아침에 베란다 문을 열어서 밖을 봤는데
눈이 엄청나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지켜 보던 저희 둘째가
예쁘다고 소리쳤어요.
동시에 저는 마음속으로 소리쳤습니다.
‘이 눈 언제 다 치우지?
차는 괜찮을까?’
같은 상황 속에서 우리는
늘 다른 생각을 하며 살아가죠.
오늘도 오늘 본문에도 나병 환자 열 명이
같은 상황을 경험해요.
그런데 그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그 내용은 무엇이며
어떤 은혜의 씨앗이 심겨져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
한 마을로 들어 가셨어요.
그때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오는 거예요.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모두 나 병에 걸린 환자였습니다.
이것은 한센병을 의미해요.
이들은 일반인들과 좀 달랐습니다.
옷도 다르게 입고
또 말투도 달라야만 했습니다.
레위기 13장 45-46절을 읽겠습니다.
레위기 13:45,46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이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이들은 찢겨진 옷을 입고
머리도 풀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윗입술을 가리고
“나는 부정합니다. 나는 부정합니다” 라고
외쳐야만 했습니다.
당신만 하더라도 나병은
하나님이 내리신 천형으로 여겨졌어요.
하나님이 내린 벌이기에
그와 가까이하면 자기도 부정해진다고
여겼습니다.
나병 환자의 삶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외로운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괴로워겠습니까?
주변에 가족들도 없습니다.
친구들도 없어요.
친하게 지냈던 모든 지인들은
다 떨어져 나갈만 하죠.
혼자서 끼니를 해결해야 했고,
추위도 견뎌야 했습니다.
어디가 아픈데 잘 아픈 지도 몰라요.
너무 힘들고 외로운 그 마음이
더 아팠기 때문이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을 낫게 한다는 소문이
돌았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을 향하여서
이들은 떼거지로 몰려와서 외치는 거죠.
“예수 선생님, 우리를 좀 불쌍히 여겨주세요!”
간절히 외치는 그 외침을 주님은 들으셨습니다.
14절 말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으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곧장 떠나갔죠.
그랬더니만 가다가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자신들의 몸이 깨끗하게 변한 거예요.
얼굴도 손도 서로 막 자랑해요.
“내가 더 깨끗하지 않냐?
봐봐, 장난 아니야! 너도 피부가 장난이 아닌데?”
그때 한 사람이 자신의 깨끗하게 됨을 보고
너무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와 발 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 발앞에 엎드려서 감사했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병 환자를 택하셨고
나병 환자 중에서도 이 한 사람을 택하셔서
두드러지게 하셨을까?
어떻게 보면 주인공이
한 명의 치유 받은 나병 환자 아닙니까?
이 사람의 출신이 되게 특이합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은 인간으로
대접 받지 못 했거든요.
유대인들이 보기에 이 사람들은
개만도 못한 민족이라고
그런 사람이라고 여겼어요.
원래 이들을 함께 잘 살았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같은
강대국들에게 멸망을 당했을 때
문제가 생깁니다.
이주 정책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가 섞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볼 때
사마리아인은 더러운 사람이고
상종할 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무릎꿇고 감사하자
예수님 뭐라고 하십니까?
우리 본문 19절 말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내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 말씀하시죠.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지금 이 사람은 그저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했을 뿐인데,
그것을 믿음의 행위라고 하시며
그것이 바로 구원의 이유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감사는 내가 무언가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부터 일어납니다.
말씀 묵상하다가
‘그럼 내가 뭘 받았을까? 감사할 게 뭘까?’
란 생각을 해 봤습니다.
여러분,
병을 얻은 게 특별한 거라면
이 병이 나은 것도 특별한 게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 반대로 생각해볼게요.
병을 얻지 않고 그냥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은
특별한 거 아닐까요?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지만,
병에 걸리지 않고 또 나을 필요도 없이
건강한 것이 더 특별한 것이죠.
그러면서 ‘평범함이 은혜다’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 생각을 한 이유가 있어요.
지난 한 달동안 병원을 엄청 다녔거든요.
둘째가 TV 모서리에 입술을 찍히고
수술 때문에 병원을 갔습니다.
이후엔 통원 치료료 인해
수시로 병원을 가야 했어요.
꿰매고, 실밥 뽑고, 치료받고 말입니다.
얼마 후엔 큰아들이 독감 A형에 걸리면서
또다시 병원을 갔습니다.
이런 게 계속 이어지니까
‘아 이제 병원은 그만 갔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아프지 않은 게
은혜였음이 깨달아졌어요.
병원 가지 않는 게 진짜 은혜였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도 건강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
은혜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옆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줄까요?
“당신은 큰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2023년을 한번 돌아봅시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의 삶에
굉장히 특별한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많은 일들보다 평범하게 여겨지는 일상이
더 많았던 것 아십니까?
숨을 쉴 수 있는 것, 걸어갈 수 있는 것,
물을 마실 수 있는 것,
예배를 드리러 올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은혜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죠.
오늘 본문은 묵상하면서
‘나병 환자’에게 집중해 봤습니다.
나병이 어떤 병인지 아십니까?
나병은 한센시병이라고 알려져 있죠.
이 병이 특징은 몸이 썩거나
뭉개지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거랍니다.
감각을 느끼지 못하니까 상처가 나고
피부가 찢어져도 그것을 잘 알지 못한답니다.
예전에 소록도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 계신 분들은 코가 없고, 손가락도 없으셔요.
그 이유는 나병이라는 병균이 들어가서
몸을 둔하게 만드는 거였습니다.
통증에 대해서 느끼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아픈데 아픈 걸 몰라요.
찢어졌는데 무감각한 겁니다.
결국 그 속에 세균이 들어가서
썩고 곪게 만드는 거죠.
오늘 본문에 등장한 나병환자의 겉모습은
이렇게 썩고 떨어져 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에 한 가지는 정상이었어요.
감사의 열정이죠.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깨끗이 나온 걸 보고
예수님께 나아가 다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신체가 건강한 유대인인들은
그러지 않았어요.
심지어 나병 치유를 경험한 10명 중에
아홉 명이 바로 그랬죠.
은혜를 받고도 은혜에 대한 감각이
둔해져 버린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우리 안에 영적 나병이 있는 건 아닙니까?
삶은 무너지고 은혜 대한 열정은 식어 버렸는데,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일주일 사는 게 그 증거입니다.
말씀 없이 아침을 시작해도 상관없어요.
기도가 없어도 내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이건 심각한 영적 나병에 걸렸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영적인 나병 환자가 우리 아닌지요?
주님은 말씀하세요.
“이리로 와.
내가 치료해 줄게.”
나병 환자든지, 심지어 죽어가는 사람일지라도
우리 예수님께 나오면
다 깨끗이 회복되고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24시간 속에
평범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모두 은혜였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고백할 것은
바로 이 찬양이 아닐까 싶어요.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내가 보기엔 실패라고 여겨지는 순간도
주님은 형통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이
은혜였다고 고백할 수 있는 거죠.
어떤 미국에 계신 목사님께서
<새롭게 하소서>라는 프로그램에 나오셔서
이런 말씀 하셨어요.
은혜라는 것을 우리가 착각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은혜를 받으면
뭔가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만
뭔가 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데,
사실은 은혜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은혜는 뭔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감동이다.’
라고 했어요.
뭔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고
할 수 없으면 안 될 만큼
뜨겁게 타오르는 그 감동말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뜨겁게 타오르는 감동 그게 바로 은혜입니다.
1860년 9월 8일 한 증기선이
범선과 충돌 하고 맙니다.
그때 충돌 시각이 새벽 2시 30분이었기 때문에
구조대가 오기까지 시간이 꽤 꽤 걸렸습니다.
승객과 승무원 398명이 모두 물에 빠져서
생명을 구원해 달라고 외치고 있었어요.
그 상황 속에 노스웨스턴 대학에도
스펜서라는 사람이 물에 뛰어듭니다.
그는 대학의 수영 선수였습니다.
그는 밧줄로 몸을 묶어서 사고 지점까지
800m 거리를 왔다갔다 하면서
17명의 생명을 구조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무리를 했던 탓인지
그 이후에 그런 장애를 얻게 되었습니다.
평생 휠체어에 앉아서 사는 장애인이 되었죠.
그가 세상 떠나기 전에 한 기자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물어봤어요.
“당신은 참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당신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 졌잖아요.
그런데 당신에게도 비극적인 날은
충분히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날 이후로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스팬서는 깊은 한숨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구해준 17명 중에
그날 이후 저를 찾아와 구해준 것에
감사하다고 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는 어떤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주셨어요.
그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영적인 나병을 치료받은 게 우리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시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50편 23절 함께 읽겠습니다.
시편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라는 것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입니다.
오늘 이 시간이 아침에 나오기까지
얼마나 큰 은혜 가운데 우리가 살아왔는지요.
구원에 감격이 우리의 마음을 충만히 채우면
그 은혜를 증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나병 환자가 나음을 받고,
집에 돌아가서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외쳤겠죠.
이 분이 나를 고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외쳤을 겁니다.
남들이 핍박해도 관계없어요.
본인이 나은 게 확실하거든요.
이전과 다른 삶이 된 게 분명하거든요.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협박이
더 이상 그를 멈추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담임 목사님께서는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십니다.
췌장암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셨죠.
그리고 병원에서 췌장암 정상 판정을 받자마자
완치된 것을 믿고 전도하셨어요.
하나님의 치유 은혜에 감사로 보답하신 거죠.
그 후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밖으로 나가셔서 전도하고 계십니다.
사랑 여러분,
우리 교회가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그 은혜 감격에 충만하여서
그 감동이 내 마음을 떨리게 만들어서
하나님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전도하길 바랍니다.
이를 통해 많은 영혼을
주님께 이끄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이
1000만원을 기도 응답으로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 주님은 그런 것을 주지 않으셔도 돼요.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숨쉬고 있잖아요.
건강하게 걸어다니잖아요.
예배 자리 가운데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1년 동안 중국에 있을 때
마음 속에 가장 큰 열망이 하나 있었어요.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그때는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가 없었어요.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탈북자 열 명 정도와 함께 모여서
같이 기도하는 겁니다.
조용하지만 간절하게 주님을 불렀습니다.
그때 제 안에는 예배에 대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스스로 돌아보았어요.
그때는 예배 한 번 드리기 위해서 힘을 다했는데,
난 오늘 예배를 너무 익숙하게 드리고 있진 않나?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평범함이 은혜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하고 계십니까?
이 예배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는
열정으로 나아가고 있나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나병 환자입니다.
우리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를 오늘 고쳐주옵소서!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되는
그 은혜를 누리게 해주옵소서.”
이 시간 이 찬양을 부르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