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부온도 49도* 외 1편
임희선
이 골목에 오기 위해
팔, 다리 자르고
얼굴을 내다버렸어요
조금 더 눈에 띌까 해
수치스러움 참으며
속까지 홀랑 뒤집어
간, 쓸개 다 빼주고
모기향처럼 말아두었던
내장도 꺼내주었죠
먹자!!!
골목에 붙은 이 단호한 구호 아래
사육과 도살로 이어온 야만의 내력이
환각에 취해 부활할 때마다
이름도 역사도 존엄도 죄 거세해버리고
태초의 사명인 듯
발목을 절단하고 살갗을 도려내며
오욕의 시간을 견뎠어요
안심이에요
이제야 앉게 되는군요
우아한 이 접시에 오르고 나서야…
양지해주세요
입은 살아남았어요
입만 남은 곤란한 이 사태와
우둔한 말투와 그리고
삼겹스런…아닌 감격스런…
스테이크 칼끝이 스치자 그녀는
품고 있던 마지막 피를 주르륵 쏟아놓는다
한 종의 생존을 그제야 실감할 것 같았다
*심부온도 : 뇌를 포함한 오장 육부의 온도로 여기서 심부온도 49도는 스테이크 ‘레어(Rare)’를 말함.
그림자 사냥*
아빠가 빨아주는 고기는
더 이상 먹지 않겠어요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아먹는 연기
이제 정말 신물 나요
엄마가 빨아주는 속옷도
더는 입지 않겠어요
빨기 전에 늘 확인하는 불결한 눈
남몰래 찾으려는 게 뭔지
엄마 생각은 역겨워요
나는 빨강 머리 루비
세상은 다 동화 속에서 배웠죠
아름다운 사랑의 조건은
흉측한 두꺼비와 비위좋게 키스하기
재투성이 하녀로 학대받았어도
결국 왕자와 결혼하게 됐다면
강하게 길러준 계모, Thank You!
딸이라고 내다 버린 아버지 살리자고
몸 팔아 약을 구해와야 효녀 되는
도깨비 나라 같은 이상한 이야기들
놀이가 시작됐다!
그림자 밟힌 문장은 화석이 되고
영역 잃은 말들은 바닥에 구른다
사냥꾼을 피해 사람들이 달린다
다스려질 수 없는 힘과 겨루는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사유를 마비시키고 삐딱해지는 말
개입할 수 없는 사냥꾼의 언어
미지근한 물에 담가 뭐든 싸 먹을 수 있는
라이스페이퍼 같은 우리 집
뱃속에 기하학적 무늬 품고
망설임 없이 진화하는 우리 가족
“사랑스런 태양아, 몸속까지 추우니 이리 와 빛을 주렴.
사랑스런 태양아, 손이 추우니 이리 달려와 빛을 비춰 주렴.”**
놀이가 시작됐다
모두 사냥꾼을 피해 도망다닌다
촛농 접시처럼
그림자 밟힌 이들이 태양 아래 가만히 앉아 있다
*그림자 사냥 : 독일 전통 놀이로 사냥꾼 한 명을 정하고 둥글게 모여 노래를 부르며 놀이를 시작한다. 사냥꾼이 모든 친구 그림자를 밟으면 다시 노래를 부르며 사냥꾼 역할 할 사람을 고르고 놀이를 시작한다.
**놀이에서 부르는 노래
임희선
1974년 대전 출생.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 수료.
2014년 애지 등단, 문학과사람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