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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장 로꼬꼬와 새로운 예술의 태동
1. 궁정예술의 해체
2. 새로운 독자와 관객
제2장 계몽시대의 예술
1. 시민극의 형성
2. 독일과 계몽주의
제3장 낭만주의
1. 혁명과 예술
2. 독일 및 서유럽의 낭만주의
제1장 로꼬꼬와 새로운 예술의 태동
1. 궁정예술의 해체
25 '귀족'(gentlilhomme)이 16세기의 정신적 대표자이고 '신사'(honnête homme)가 17세기의 그것이라면 18세기의 정신적 대표자는 '교양인', 즉 볼떼르의 독자이다. 프랑스 시민이 모범으로 받드는 볼떼르를 알지 못하고서는 프랑스의 시민계급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러나 또한 볼떼르가 영주와 같은 태도를 하고 왕들을 친구로 삼고 막대한 재산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비단 혈통뿐만 아니라 그 사상감정에서도 그가 얼마나 깊이 시민계급에 뿌리박고 있는가를 보지 않는다면 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26 18세기의 프랑스의 시민계급은 결코 15세기나 16세기의 이딸리아 시민계급보다도 더 통일적이지 못했다. 이번에는 당시 길드의 지배권을 둘러싼 투쟁에 상응할 만한 싸움은 없었다 하더라도, 시민계급의 여러 상이한 층들 사이의 경제적 이해는 당시와 똑같이 날카롭게 대립되어 있었다. 흔히들 '제3신분'의 해방투쟁과 혁명을 두고서 하나의 단일적인 운동이라고 일컬어왔지만 그러나 실제로 시민계급의 단일성은 위로는 귀족, 아래로는 농민 및 도시 노동자들에 대해 공동 전선을 펴는 데 한정되어 있었으며, 이 경계선 내에서는 여전히 특권이 있는 층과 없는 층이 엄연히 갈라져 있었던 것이다.
26 부르즈와지는 정치적 민주주의 이외의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으며, 혁명이 경제적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기 시작하자마다 곧 자기들의 전우를 저버렸다.
31 다시 말해서 고도로 발전된 도시와 궁정의 생활이 성립된 이래 일찍이 누가 정말로 목동과 농부의 단순하고 질박한 생활을 원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문학에서 목자생활은 언제나 하나의 이상상으로서, 이 이상상 속에는 고급 사교계로부터의 도피와 그 사교계의 관습에 대한 경멸 같은 부정적 특징들이 결정적 요소를 이루어왔다. 그것은 문명의 혜택을 그대로 누리면서 그 질곡으로부터의 해방도 약속해주는 상태에 자기가 있다고 상상하는 일종의 놀이었다.
43 17세기의 프랑스 전원소설은 지친 시대의 읽을거리다. 내란으로 피폐해진 이 사회는 사랑에 빠진 목동들의 아름답고 나긋나긋한 대화를 읽으면서 고단함을 풀었던 것이다.
45 소설은 17세기에만 해도 그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저급한, 어떤 점에서 아직 후진적인 문학형태를 대변했으나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주도적인 장르가 된다. 가장 중요한 문학작품들이 이 장르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진보라고 할 만한 의미있는 발전이 이 분양에서 일어난다. 18세기는 심리학의 시대라는 이유만으로도 이미 소설의 시대인 셈이다.
45 근대 소설과 과거의 소설을 나누는 경계선이 있다면 여기가 바로 그 경계선일 것이다. 지금까지는 소설이 단지 외면적 사건의 서술이요 기껏해야 구체적 행동 속에 나타난 정신적 움직임의 서술이었다면, 이제부터 그것은 정신의 역사요 심리학적 분석이며 자기해부인 것이다.
49 바로끄는 왕실예술이었으나 로꼬꼬는 왕실예술이 아니라 귀족과 대부르즈와지의 예술이다. 왕실과 국가의 건축사업이 개인들의 건축활동에 밀려나 성이나 궁전 대신에 '저택(hotel)'과 '멋진 별장(petie maison)이 지어지고, 공공건물의 싸늘한 대리석과 육중한 청동보다도 침실과 사실(私室)의 아늑하고 우아한 맛을 더 좋아하게 되며, 근엄하고 장중한 색조 및 갈색과 자색, 암청색과 금빛은 밝은 파스텔 색조, 회색과 은빛, 회록색과 장미빛으로 바뀐다.
50 로꼬고는 실로 르네쌍스와 함께 시작된 발전의 마지막 국면을 대변하며, 이 발전과정의 시초가 되었고 정적•구속적•규범적 원리와 계속 싸워야만 했던 동적•해방적 원리에 승리를 안겨줌으로써 이 과정을 총결산한다. 로꼬꼬에 이르러 비로소 르네쌍스의 예술적 목표는 최종적으로 달성되며, 또한 로꼬꼬와 더불어 사물의 객관적 묘사는 근대 자연주의가 추구하던 적확성과 자연스러움을 확보한다.
51 로꼬꼬 이후(부분적으로는 로꼬꼬 속에서) 시작된 부르즈와 예술은 이미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이며 르네쌍스 및 예술사적으로 르네쌍스에 직접 연속되는 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다. 이 부르즈와 예술과 더불어 민주주의 사상과 주관주의에 근거하는, 그리고 발전사적으로 보아 분명 르네쌍스•바로끄•로꼬꼬의 엘리뜨 문화와 직접 관련되면서도 그것들과 원리적으로 대립되는 오늘 우리 자신의 문화시대가 시작된다.
53 로꼬꼬는 사실 돈 많고 권태로워진 향락가들을 위한 하나의 에로틱한 예술이다. 그것은 자연에 의해 한계가 그어져 있는 향락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한 수단인 것이다. 중상층의 예술 즉 다비드, 제리꼬, 들라크르와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숙한 '정상적인' 여성상이 다시 유행하게 된다.
53 로꼬꼬는 또한 서구 최후의 보편적 양식으로서, 그것은 다만 일반적으로 통용되었고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대체로 단일한 형식체계 내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뿐 아니라, 모든 재능있는 예술가의 공유재산이요 그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도 보편적인 양식이다. 로꼬꼬 이후에는 더이상 그러한 형식규준, 그러한 보편타당한 양식의 방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2. 새로운 독자와 관객
60 프랑스에서는 100년 후에야 청산될 봉건주의의 잔재가 영국에서는 이미 1640~60년 사이의 혁명기간 중에 붕괴되었다. 하지만 영국에서나 프랑스에서나 혁명은 자본과 결합된 계층이 무엇보다 자기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수호하기 위해 절대주의와 독점적 토지소유 및 교회에 대항한 하나의 계급투쟁이었다. 17,180세기의 영국 정치를 지배한 거대한 싸움은 왕실과 궁정귀족을 한편으로 하고 자본주의에 이해관계를 가진 계층들을 다른 한편으로 하여 진행되었는데, 그러나 실제로는 적어도 세 개의 상이한, 경제적으로 대립적인 집단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즉 그것은 첫째가 대토지 소유자이고, 둘째가 자본주의적 관념을 지닌 귀족과 연합한 부르즈와지이며, 셋째가 소(小)상공업자•도시의 임금노동자 및 농민들로 이루어진 극히 복합적인 그룹이었다.
63 원래 '젠트리'는 봉토가 있는 호족들 즉 '향사'(鄕士, squirearchy)와 같은 것이었지만, 차츰 지방의 유지들이 여기에 포함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재산과 교양이라는 면에서 소상공업자나 '빈민'과 구별되는 모든 사회계층이 또한 여기에 흡수되었다. 이리하여 신사(gentleman)라는 개념은 법률적인 의의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일정한 생활 수준과 관련해서조차 확실치 않은 말이 되었다. 지배계급에 속한다는 것은 점점 더 문화적 수준의 공통성 및 구성원들의 동질성이라는 기준에 의존하게 되었다.
66 새로운 독자층의 성장을 가져온 문화적 수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8세기 초부터 보급된 잡지(정기간행물)로서 그것은 이 시대의 위대한 발명이다. 시민계급은 거기에서 문학적인 교양과 아울러 세속적인 교양의 세례를 받는데, 물론 이 교양들은 아직 근본적으로 귀족계급의 가치 기준에 입각해 있었다. 그런데 이 귀족계급 역시 절대적 권력을 쥐고 있던 시절 이후 크게 변모하여 궁정적 정신에 대해 도시적•시민적 정신이 승리하게 되자 이로부터 하나의 교훈을 얻었다.
70오직 혼자 힘으로 거친 자연을 이기고 아무것도 없는 데에서 행복과 안전과 질서와 법과 관습을 창조해낸 로빈슨 크로쏘우는 중간계급의 고전적 대표자이다. 그의 모험담은 근면과 인내와 발명심과 모든 난관을 극복하는 건강한 인간 오성, 요컨대 실천적인 시민적 덕목을 기리는 하나의 영원한 찬가이다. 또한 그것은 자기의 강한 힘을 자각하고 야심에 불타는 한 계급의 신앙고백인 동시에 진취적인 기상과 세계지배의 꿈에 부푼 한 젊은 민족의 선언문이다. 반면에 스위프트는 오직 이 모든 것의 뒷면만을 본다. 그것은 단지 그가 처음부터 사회적으로 다른 입장에서 관찰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디포우의 소박한 신념을 이미 잃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계몽주의 시대의 환멸을 맨 먼저 체험한 사람들 중의 하나로서 자기의 체험을 형상화 하여 깡디드를 능가하는 이 시대의 인물로 걸리버를 창조했다.
74 이 세기의 중엽 이후 마침내 패트런 제도는 완전히 끝장이 나며 1780년 경에는 개인의 후원에 의지하는 작가는 한 사람도 없게 된다. 펜대만 가지고 살아가는 독립적인 시인과 문필가들의 숫자는 날로 늘어가며, 이와 마찬가지로 책을 읽고 사며 그 저자와 순전히 책을 통한 비개인적 관계만을 가지는 사람들의 숫자 또한 매일매일 증가했다.
77 근대 시민계급의 대두는 중세기의 종신 출신 기사계급(ministeriales)에서와 비슷하게 낭만주의 운동과 결부되어 있는데, 두 경우는 모두 사회계층의 재편성은 형식적 구속의 해체를 가져왔고 감수성의 심화를 촉진시켰다.
83 근대경제는 '자유방임주의' 원칙이 도입되면서 비로소 시작된 것이며, 개인적 자유라는 관념도 이러한 경제적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로서 처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84 작가가 작중인물에 거리를 두는 태도, 세계에 대한 엄격한 주지주의적인 입장, 독자와의 관계에서의 유보적인 자세, 요컨대 작가의 고전주의적•귀족적 자제(自制)는 경제적 자유주의가 확립되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종말을 고했다. 주관적인 감정생활을 표현하고 그 자신의 인간성을 주장하려는 작가의 소망, 독자를 영혼과 양심의 은밀한 싸움의 직접적인 증인으로 만들려는 그의 소망은 자유경쟁의 원리와 개인의 주도권이라는 것에 병행하여 나타난 현상이다.
85 강하고 완고한 개인들은 어느 때에나 있게 마련이고 서양인들은 사람의 그런 개성을 이미 르네쌍스에서 의식했었다. 그러나 문명의 발달과정 자체에서 유래한 비인간화에 대한 도전과 항의로서의 개인주의가 존재하게 된 것은 18세기 중반 이후가 처음이다.
94 새로운 소설의 자서전적 형식은 그것이 일인칭 서술이건 서간체 혹은 일기체 수법이건 간에 소설의 표현성을 제고시키기 위한 것으로 외부에서 내부로 주의를 돌리려는 한 수단이다. 주체와 객체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 이제부터는 모든 문학적 노력의 주요한 목표가 된다. 심리적 거리의 단축을 위한 이러한 노력과 더불어 작가, 주인공, 독자 사이의 관계는 전면적으로 변화한다.
98 루쏘의 원시주의는 물론 문화적 권태기에는 으레 나타나곤 하는 목가적 이상의 한 변형이요 구속(救贖) 환상의 한 형태였을 뿐이지만, 그러나 루쏘는 그 이전의 수많은 세대들이 느껴온 '문화에 대한 불안'을 최초로 의식화했으며 또한 이러한 문화에 대한 염증으로부터 처음으로 독자적인 하나의 역사철학을 전개했다.
99 루쏘의 사상은 당시에 이미 불명료한 형태로나마 널리 퍼져 있던 것으로, 그는 다만 많은 동시대인들이 느낀 바를 분명한 말로 발언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 당시의 사람들은 이성과 존엄성을 수반하는 볼떼르주의를 지지하느냐 아니면 역사적 전통을 무시하고 완전히 새로 시작하느냐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100 문학에서 자기관찰과 자기탐닉에 대한 병적인 열광, 그리고 벌거벗은 작가 자신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작품은 더욱 진실하고 설득력이 있게 된다는 견해는 루쏘의 정신적 유산에 속한다. 이후 100년 내지 150년간의 서양문학에 있어 비중있는 업적은 모두 이러한 주관주의의 낙인이 찍혀 있다.
106 음악은 17세기 말까지 실용성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전에는 실제적 목적이 없는 음악이란 도무지 없었으며 감정을 표현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인 순수한 연주음악은 18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생겨나게 되었다. 공개연주회에 모인 청중은 궁정에서의 음악연주를 듣던 사람들과는 본질적인 면에서 몇 가지 차이가 났다. 우선 연주회의 청중들은 일반적으로 음악 그 자체를 평가하는 데 훈련이 덜 돼 있었다. 그들은 음악연주를 듣기 위해 그때마다 입장료를 내는, 그러니까 항상 다시 정복되고 항상 새로 만족시켜야 하는 그러한 청중이었다.
107 이제 시민 계급은 음악의 주된 고객이 되었고, 또 음악은 다른 어느 장르에서보다 시민계급의 정서생활이 더 직접적으로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는 애호 받는 예술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음악이 실용적인 목적예술에서 순수한 표현예술이 됨에 따라 작곡가는 실용성 있는 음악과 주문에 따른 작곡 일체에 대해 혐오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공적인 직책으로서의 작곡행위 전체를 경멸하기 시작한다.
107 지체높은 귀족이나 직접적인 주문자를 위한 작곡과 누가 누군지 모르는 연주회 청중을 위한 창작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주문작품이 대체로 1회 연주를 위한 것임에 비하여 연주용 작품이란 되도록 여러 번 되풀이하여 연주될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이다.
108 하이든은 이미 선배들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시간을 들여서 작곡했다. 그러나 하이든만 해도 100편이 넘는 교향곡을 썼지만 모짜르트는 그 절반밖에 쓰지 않았고 베토벤은 겨우 아홉 곡을 썼다.
108 예술작품이란 유일무이하고 일회적이며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는 사상은 여러 세기 전에 이미 수공예로부터 독립을 이룩한 회화에서보다도 오히려 음악에서 더 순수하게 실현된 것이다.
제2장 계몽시대의 예술
1. 시민극의 형성
117 시민극은 성립 당초부터 영웅적•귀족적인 도덕체계의 절대적 가치에 대한 거부이자 그 평가절하를 의미했으며 그 자체로서 부르즈와 도덕 및 귀족에 대한 시민계급의 동등권을 주장하기 위한 하나의 선전이었다. 시민극의 전 역사는 그것이 부르즈와적 계급의식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있었던 것이다.
119 부르즈와 연극과 이전의 연극의 진정한 차이는 과거에는 감춰져 있던 정치•사회적 경향성이 이제 전면으로 부각되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시민극의 진정으로 새로운 점은 이제 극적 갈등이 개별적인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과 사회제도 사이에서 벌어진다는 것, 일정한 사회적 집단의 대표자인 주인공이 어떤 정체 모를 비개인적인 힘과 싸우며 그리하여 그가 자기 입장을 하나의 추상적인 이념으로, 기성의 사회질서에 대한 고발로 표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135 18세기의 낭만주의 운동은 유럽 어디에서나 사회학적으로 모순이 많은 하나의 현상이었다. 낭만주의 운동은 한편으로는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된 시민계급 해방의 연장 내지 그 상승으로서 평민층의 과다한 감정과 정열을 표현함으로써 상류층의 까다롭고 자제된 주지주의에 대립되는 운동이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상류층 스스로가 계몽주의의 ‘파괴적인’ 합리주의와 개혁주의에 반대한 운동이기도 했다.
2. 독일과 계몽주의
135 18세기의 낭만주의 운동은 유럽 어디에서나 사회학적으로 모순이 많은 하나의 현상이었다. 낭만주의 운동은 한편으로는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된 시민계급 해방의 연장 내지 그 상승으로서의 평민층의 과다한 감정과 정열을 표현함으로써 상류층의 까다롭고 자제된 주지주의에 대립되는 운동이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상류층 스스로가 계몽주의의 '파괴적'인 합리주의와 개혁주의에 반대한 운동이기도 하였다.
136 독일의 시민계급은 합리주의의 과정을 완전히 마치기도 전에 이미 낭만적 비합리주의의 영향하에 들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순전한 이론으로서의 합리주의가 독일에서 그 대변자를 갖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독일의 대학들에서는 합리주의 이론이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더 강하게 주장되기조차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강단이론, 즉 직업적인 학자와 학식있는 문인들의 전공분야에 지나지 않았다. 이 합리주의는 한번도 사회생활 속에, 즉 광범한 사회계층의 정치적•사회적 사고 및 시민계급의 생활태도에 완전히 침투한 적이 없었다.
136 그렇다면 이러한 잘못된 의식, 즉 궁극적으로 독일의 비극을 낳게 한 지식인의 정치적 천진성과 무지는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가? 독일 시민계급은 한번도 계몽주의를 올바르게 수용하지 못했다는 사실, 그리고 긴밀하게 결속된 계층으로서의 의식적이고 진보적인 지식인이 독일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계몽주의는 근대 시민계급에 있어 기본적인 정치적 단련의 과정으로서, 이 과정이 없었다면 지난 2세기 동안의 유럽 정신사에서 했던 시민계급의 역할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독일의 불행은 이 나라가 제때에 이 과정을 거치지 못했고 그 후에 가서도 이때 놓쳐버린 과정을 다시 밟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다.
138 30년 전쟁(1618~48)은 독일 무역을 완전히 붕괴시켰고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독일 도시들을 깡그리 파괴하였다.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은 독일의 소국(小國)분립주의를 확정시키고 지방영주들의 독립권을 확인하였다. 왕이 어느정도 국가의 단일성을 대표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귀족에 반대하면서까지 국가의 이익을 옹호했다는 점에서 이를테면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었던 서유럽적 상황에 비추어보면,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은 그렇지 않아도 낙후되었던 독일적 상황을 법적으로 확인시켜준 셈이다.
142 시민계급의 무력과 정부 및 일체의 정치적 활동으로부터의 제외는 소극적 태도를 낳게 하였는데, 이러한 소극적 태도는 모든 문화생활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하급관리와 소학교 교사, 세상물정에 어두운 시인들로 구성된 지식인층은 사생활과 정치 사이에 하나의 경계선을 긋고, 공적인 문제들에 대한 일체의 실천적 영향력을 처음부터 포기하는 데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들은 이상주의를 극단화하고 자신들의 이념이 세속적 이해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이를 보상하였고 국정에 관한 모든 일을 전적으로 권력자에게 위임하였다.
142 그들의 사고는 순전히 정관적•사변적•비현실적•비합리적으로 되었고, 그들의 표현 방식 또한 고집스럽고 극단적이며 난해하게 되었으며 남을 고려해서 글 쓸 능력이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남으로부터 교정이나 비판을 받는다는 것을 일체 싫어하였다. 그들은 계급•신분•사회집단을 초월하는 '보편 인류적' 차원으로 물러나서 실제적 감각의 결여를 하나의 미덕으로 삼고 이를 이상주의, 내면성, 또는 공간적•시간적 한계의 극복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본의 아닌 수동성으로부터 목가적인 사생활의 이상을, 속박된 외부적 삶의 강제로부터 내면적 자유의 이념을. 그리고 범속한 경험적 현실에 대한 정신의 절대적 우월성이라는 이념을 발전시켰다. 이렇게 해서 독일에서는 문학이 정치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고, 서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가이자 정치가이고 학자이자 언론인이며 훌륭한 철학자이자 동시에 훌륭한 저널리스트인 여론의 대표자들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155 계몽주의가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으며 언젠가는 해명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면, 질풍노도는 이와 반대로 세계를 근본적으로 불가해한 것, 신비스러운 것, 인간적 이성의 관점에서 보아 의미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견해들은 단순히 머리에서 짜낸 것도 아니고 논리적으로 전개된 것도 아니다. 전자가 현실을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확실의 결과였다면, 후자는 이 현실에서 길을 잃고 버려져 있다는 느낌의 표현이다.
164 낭만주의자들이 등장한 다음에야, 그리고 그들이 무엇보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열광한 뒤에야 비로소 괴테는 독일 문학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낭만주의자들이 이처럼 괴테를 지지했던 것은 그들 사이에 놓인 일체의 개인적•세계관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뿐만 아니라 질풍노도 이후의 전 독일 문화를 하나로 묶는 불가침의 깊은 이해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말해주는 가장 두드러진 징표이다. 예술은 이제 그들의 위대한 공동적 체험이 되었다. 또 예술은 가장 큰 정신적 즐거움의 대상이자 개인적 완성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류가 그들의 잃어버린 천진성을 되찾고 자연과 문화를 동시에 소유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쉴러에 의하면 미적 교육은 루쏘가 이미 인식한 바의 숙명적 악으로부터 인류를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괴테는 이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술은 "전체의 파괴적인 힘에 대하여 자기를 지키기 위한" 개인의 노력이라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이르면 예술적 체험은 지금까지 오로지 종교만이 할 수 있었던 기능을 획득하게 된다.
168 괴테는 말년에 가서 문학에 대한 종래의 순개인적 입장에서 멀어지면서 차츰 일반적인 문명적 과제를 중요시하는 초개인적이고 초국가적인 예술관에 가까워져갔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세계문학'이라는 명칭과 부분적으로는 그 개념까지도 그에게서 처음 비롯된 것이다.
168 루쏘와 리처드슨의 작품들도 엄격한 의미에서는 이미 '세계문학'이었다. 18세기 전반 이래 일종의 '유럽적 대화'가 진행중이었고, 유럽의 모든 문화민족들이 비록 대부분 수동적이긴 했지만 이 대화에 참가하였다. 당시의 문학은 전유럽적이 문학이었고, 또 중세 이후 한번도 체험해보지 못했던 서구 정신공동체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 시대의 문학은 중세적 문학은 물론이고 현대의 여러 국제적인 문학운동과도 날카로운 차이를 보여주었다.
168 세계문학의 이론과 실제는 세계무역의 목적과 방법에 의해 조건지어진 문명의 산물이다. 여러 나라들 사이의 정신적 상품의 교환을 무역과 비교했던 괴테의 발언 자체가 이러한 상관관계를 암시하고 있고, 또 이러한 개념의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괴테가 정신적•물질적 산물의 '교역적' 성격에 대하여, 그리고 정신적•물질적 상품들이 교환되는 템포가 가속화되는 데 대하여 말했을 때 우리는 여기서 이념의 교류 전체가 얼마나 직접적으로 산업혁명의 체험과 연결되어 있는가를 알게된다. 단지 이상스러운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대유럽국가들 중에서 이 세계문학에 가장 적게 기여한 독일인들이 세계문학의 의미를 최초로 파악하고 그 이념을 처음으로 전개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제3장 낭만주의
1. 혁명과 예술
175 18세기는 모순에 가득 찬 세기이다. 이 세기에는 철학적 입장만이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 사이에서 동요한 것이 아니라 예술의욕 역시 두 개의 서로 상반되는 사조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어, 어느 시기에는 엄격한 고전주의적 관점에 접근하는가 하면 또 다른 시기에는 매우 자유로운 회화적 관점에 접근하기도 했다. 또 이 시대의 고전주의 역시 합리주의와 마찬가지로 좀처럼 정의하기 힘들고 사회학적으로 다의적인 현상이어서, 때로는 궁정적•귀족적 계층이, 때로는 시민적 계층이 번갈아 주도하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혁명적 시민계급의 대표적인 예술양식으로 발전하였다.
202 혁명에 의해 준비된 낭만주의도 그 이전의 유사한 운동에 근거를 두고는 있지만, 전기 낭만주의와 본래의 낭만주의는 근대 고전주의와 두 형식이 가지고 있던 만큼의 공통점도 갖고 있지 않다. 전기 낭만주의와 본래의 낭만주의는 그 발전과정에서, 이를테면 중간에 잠깐 중단되었을 뿐 전체적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했던 하나의 통일적 성격을 지닌 낭만적 운동이 아니다.
202 전기 낭만주의가 규칙에서 일탈할 수 있는 권한을 천재에게만 허용했다면 혁명 이후의 낭만주의는 어떠한 종류의 객관적 예술 법칙의 타당성도 부인한다. 일체의 개성적 표현은 유일무이하고 대체될 수 없으며, 또 이러한 개성적 표현의 법칙과 기준은 개인 자신 속에 있다는 생각은 혁명이 예술을 위해 이룩한 위대한 성과다.
203 근대예술은 고독한 인간, 다시 말해 행이든 불행이든간에 자기 주위의 사람들과 이질감을 느끼는 개인의 자기표현이다. 혁명과 낭만주의는 예술가가 하나의 '사회', 즉 다소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동질적인 집단을 상대로 했던 문화시대, 그 권위를 원칙적으로 무조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집단을 대상으로 삼아야 했던 문화시대의 종말을 뜻한다. 예술은 이제 객관적•전통적 가치기준을 따르는 사회적 예술이기를 중단하고 스스로가 기준을 만들고 또 이 기준에 의해 평가받기를 원하는 표현예술이 되었다.
204 다비드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회화가 프랑스혁명이라는 공통의 원천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은, 낭만주의가 고전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되지 않았고 낭만주의가 다비드 유파를 외부로부터 와해시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이 바로 다비드의 가장 가깝고 재능있는 제자인 그로(A.J. Gros), 지로데(Girodet), 게랭(P.-N. Guerin)에서 처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미루어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두 양식이 엄격하게 분리되기 시작한 것은 1820년과 1830년 사이, 그러니까 낭만주의가 예술적으로 진보적 요소를 지닌 양식이 되고 고전주의가 여전히 다비드의 절대적 권위를 추종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의 양식이 되었을 때이다.
2. 독일 및 서유럽의 낭만주의
214 19세기의 자유주의는 낭만주의를 왕정복고 및 반동과 동일시 하였다. 이들간의 연관성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특히 독일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정당성을 지닐지 모르나 전체적으로는 잘못된 역사상을 낳게 하였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이 처음으로 교정된 것은 사람들이 독일 낭만주의와 서유럽 낭만주의를 구별하여 전자를 반동적 경향을 지닌 것으로, 후자를 진보적 경향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낭만주의상은 훨씬 더 진실에 가까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태를 단순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아 독일 낭만주의의 여러 형태들도 서유럽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고 단일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216 현실주의자란 언제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워야 하고 언제 남에게 양보를 해야만 하는가를 아는 사람이고, 변증법자란 그때마다의 역사적 상황이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여러 동인과 과제가 서로 뒤엉켜 생겨나는 것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낭만주의자는 과거에 대한 그의 모든 이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를 비역사적•비변증법적으로 판단한다. 다시말해 그는 현재라는 것이 과거와 미래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고, 또 정적 요소와 동적 요소가 서로 뒤엉켜 있는 하나의 모순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217 낭만주의는 서양의 정신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의 하나였고, 그 스스로 자기의 역사적 역할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었다. 고딕 이래 감수성의 발전이 이때처럼 강한 자극을 받고, 자신의 감정과 본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예술가의 권리가 이때처럼 철저히 강조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르네쌍스 이래 계속 발전을 거듭하여, 계몽주의를 통하여 전체 문화세계를 지배하는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 합리주의는 그의 발전사에서 가장 격렬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중세의 초자연주의와 전통주의가 붕괴하고 난 이래로 이성과 냉철함, 자기통제 능력과 의지가 이때처럼 폄하되어 거론된 적은 없었다.
219 낭만주의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추억거리와 자신을 유추•비교할 대상을 찾았으며 과거에 이미 실현되었다고 그들이 믿었던 이상을 통해 가장 강한 자극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중세에 대한 관계가 고전주의의 고대에 대한 관계와 전적으로 맞먹는다고는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고전주의가 그리스인들에게서 단지 하나의 본보기만을 취했다면, 낭만주의는 이와 반대로 항상 과거에 관하여 '이미 경험했다'는 감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낭만주의는 지나간 시간을 마치 전생에 이미 존재했던 시간처럼 회상하였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감정은 결코 고전주의가 고대에 갖는 공통점에 비해 낭만주의가 중세에 대해 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220 낭만주의의 시대의식, 즉 낭만주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현재의 의미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제기가 없었더라면 19세기의 모든 역사주의 및 이와 결부되어 일어난 정신사의 깊은 변혁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220 프랑스 대혁명과 낭만주의 이후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인간과 사회의 본질이 근본적으로 진화적이고 동적인 것이라고 느끼기 시작하였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문화가 끝없는 흐름 속에 있고 간단 없는 투쟁 속에 있다는 생각, 우리의 정신적 삶이란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생각은 낭만주의의 발견으로서, 오늘날의 세계상을 정립하는데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이다.
221 무엇보다도 역사적 운명이라고 할만한 것이 존재하고 또 "우리가 바로 오늘의 우리인 것은 바로 그러한 특정한 과거를 뒤돌아보기 때문"이라는 인식은 낭만주의가 이룩한 성과이다. 이러한 종류의 생각과 이 생각에 반영되어 있는 역사주의는 계몽주의에서는 전혀 생소한 것이었다. 인간정신, 정치제도, 법, 언어, 종교, 예술 등의 본질은 오직 그 역사적 기초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고 또 이런 것들은 역사적 삶 속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순수하며 본질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사상은 낭만주의 이전에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222 낭만주의의 해석학적 기술, 역사적 상관관계에 대한 통찰력, 역사에서의 문제적인 것과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에 대한 감수성, 이러한 것들과 더불어 우리는 또한 역사적 신비주의, 역사적 힘의 인격화와 신비화, 바꾸어 말하여 역사적 현상들이란 독립적인 원리들의 기능이요 발현이며 구체화일 뿐이라는 생각을 낭만주의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의미심장하게 또 그럴법하게 '유출설(流出設)적 논리'라고 규정하였는데, 이러한 규정은 추상적 역사관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러한 사고방식을 자체 속에 내포하고 있는 흔히 의식되지도 않는 형이상학을 암시해준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역사는 알 수 없는 미지의 힘들이 지배하는 영역처럼 보이며, 개개의 현상들 속에서는 불완전하게 밖에 표현될 수 없는 한층 높은 이념들의 토대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플라톤적 형이상학은 국민정신, 국민 서사시, 국민문학과 기독교 예술 등에 관한 이미 낡은 낭만주의 이론들 속에서뿐만 아니라 리글(A. Riegl, 1858~1905)의 '예술 의욕(Kunstwollen)이라는 개념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리글도 개념을 절대화하는 낭만주의의 개념신비주와 정령적 역사관의 마력에서 아직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24 역사 발전의 근원을 형식원칙이나 이념에 두는 이상주의적 역사관이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비역사적인 실체의 '변형'만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면, 유물론적 역사관은 모든 요인들이 항상 유동적이고 의미변천을 하며 정적인 것, 무시간적 보편성과 일방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요인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물질적•정신적인, 경제적•이념적인 일체의 요인들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이 상호 의존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227 고전주의자는 스스로를 현실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지배하고 또 모든 존재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지배를 받는 것에도 동의하였다. 이와 반대로 낭만주의자는 어떠한 외적 구속도 인정하지 않았고, 스스로 책임을 질 능력도 없었으며, 압도적인 현실 속에서 자신이 아무런 방비 없이 내던져져 있다고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신격화하였다. 그는 현실을 견강부회하거나 혹은 아무 저항 없이 맹목적으로 현실을 자신을 내던지거나 했지만, 그러나 자기가 현실을 감당할 수 있다고는 결코 느끼지 못하였다.
251 낭만주의자들의 자기만족과 허영심은 점점 심해져서 그들은 시인을 하나의 신으로 보던 종전의 유미주의와는 반대로 신을 하나의 시인으로 보는 데까지 나아간다.
251 물론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이론은 극히 복잡한 현상으로서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적 태도를, 다른 한편으로는 정적주의적(靜寂主義的)•보수주의적 태도를 보여주지만 그 기원에서는 부르즈와적 가치적도에 대한 반항인 것이다. 고띠에가 예술의 순수한 형식성과 유희적 성격을 강조하고 일체의 이념이나 이상으로부터 예술을 해방시키려 했다면, 그것은 그가 그렇게 함으로써 무엇보다도 부르즈와적 생활질서의 지배로부터 예술을 해방시키기 위함이었다.
278 낭만주의 회화의 최초의 위대한 화가이자 동시에 최대의 대표자인 들라크르와는 이미 낭만주의를 반대하고 또 이를 극복하려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낭만주의는 전기 낭만주의의 연속일 뿐만 아니라 비록 모순적•양면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19세기처럼 분열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18세기적인 운동이라면, 들라크르와는 이미 19세기를 대표하고 있다. 18세기가 독단적이었다면 ― 심지어 18세기의 낭만주의에서도 이러한 독단론의 기미가 엿보인다 ― 19세기는 회의적으로 불가지론적이다.
279 19세기의 정신적 대표자들은 체계와 계획에 대한 신념을 상실했으며 예술의 의미와 목적을 인생에 대한 수동적인 몰입에서, 생의 리듬을 파악하는 데서, 현존재의 분위기와 기분을 보존하는 가운데서 찾고 있다. 또한 그들의 신념은 비합리적•본능적인 삶의 긍정에, 그들의 도덕은 현실의 체념적인 수용에 있는 것이다.
280 자연주의에 반해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갖는 공통점은 이 두 양식이 현존재와 이간을 실제보다 훨씬 크게 설정하고 또 여기에 웅대한 비극적•영웅적 면모와 정열적인 감상적인 표현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들라크르와에게는 아직 남아있지만 콘스터블과 19세기 자연주의에 오면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이러한 예술관은 다음과 같은 사실, 즉 들라크르와에게는 인간이 아직도 자기 주위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반면에 콘스터블에게는 인간은 여러 사물들 중의 한 사물이 되고 있으며 또 인간이 물질적 삶의 환경 속에서 융해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280 인간이 예술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물체적 세계가 인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자 회화는 새로운 내용을 획득하게 될 뿐 아니라 점점 더 기술적이고 순전히 형식적인 문제의 해결에 의존하게 된다. 묘사대상은 점차 모든 미적 가치와 예술적 관심을 잃게 되고 그리하여 예술은 일찍이 유례가 없었을 만큼 형식주의적으로 된다. 무엇을 그리는가 하는 것은 이제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고 오직 어떻게 그려졌는가 하는 것만이 문제 된다. 모티브에 대한 이러한 무관심은 가장 유희적이었던 매너리즘에서도 찾아볼 수 없던 것이다. 양배추의 머리 부분과 성모 마리아의 머리가 예술적 제재로서 동일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회화적인 것이 회화 본래의 내용을 이루게 되는 이 시기에 와서야 처음으로 상이한 대상과 장르 사이에 있던 과거의 아카데믹한 위계질서는 없어지는 것이다.
288 낭만주의 음악가들이 청중들에게 많은 것을 양보하자 그들의 음악적 표현도 매우 대담해지고 자의적이 되었다. 자곡은 점점 더 어려워졌는데, 그것도 기술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에서 모두 다 그러하였다.
288 아마추어와 가장 사이의 간격의 심화, 오락적 음악과 순수음악 사이에 놓인 심연의 확대, 이 양자의 발전경향은 음악의 고전적 장르를 해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288 이러한 형식해제에 음악이 대처했던 음악 고유의 성향, 예컨대 내용의 비합리성과 표현수단의 독자적 과시 등을 보면 왜 음악이 근대 예술장르 중에서도 으뜸가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고전주의에서는 문학이 주도적인 예술이었다면 초기 낭만주의는 부분적으로 회화에 근거를 두었다. 그러나 후기 낭만주의는 완전히 음악에 의존하고 있다. 고띠에에 있어서는 아직 회화가 예술의 이상이었다면, 들라크르와에 와서는 이미 음악이 가장 깊은 예술적인 체험의 원천이 된다.
289 음악은 19세기가 끝나기까지 계속 낭만주의적이었는데, 그것도 다른 예술장르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낭만주의적이었다. 그리고 19세기가 예술의 진수를 바로 음악에서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세기가 얼마나 깊이 음악과 연루되어 있는가를 가장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바그너의 음악을 통해 처음으로 예술적인 것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는 토마스 만의 고백은 극히 상징적이다. 19세기 말의 세기 전화기에도 예술의 진수는 여전히 '피, 관능, 죽음', 즉 감각의 도취와 이성의 공중곡예였다. 낭만주의 정신에 대한 19세기의 투쟁은 결판이 나지 않은 채 남아 있었으며 새로운 세기에 와서야 어떤 결말에 이르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