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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시인의 시세계
1. 투명한 삶과 언어에 이르는 길
시인 오규원은 경남 밀양군 삼랑진읍 용전리에서 1941년 부친 오인호와 모친 고계준의 육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다.
그는 이곳에서 열두 살까지 비교적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초등학교 6학원 때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고향을 떠나 중학시절부터는 형제와 친척들의 집을 전전한다. 그는 이런 뿌리 없는 생활에서 오는 허기와 친척들의 집을 전전한다. 그는 이런 뿌리 없는 생활에서
오는 허기와 결핍의식을 풍부한 독서로 메우는 한편 중학 3학년부터는 시를 써보기 시작한다.
사범학교 시절 문학 잡지와 시집을 탐독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김수영,김춘수,전봉건 등의 시를 만나게 된다. 사범학교 졸업 후 1961년 부산의 사상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다. 이듬해 동아대 법학과(2부)에 지원했는데 법학을 통해 그는 말 또는 표현의 불명확성과 애매성
추상성 등을 체험하게 됨으로서 언어에 대한 사유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1965년 [현대문학] 에 겨울나그네] 가 김현승 선생에게 추천되면서 문단생활을 시작하는데 이때 본명인 오규옥을 필명 오규원으로.바꾸게 된다. 이후 1967년에
<우계의 시> 로 2회 추천,1968년 [몇개의 현상] 으로 추천 완료를 받음으로써 정식으로 시단에 입문한다.
1970년부터는 김병익,김현 등 문지그룹과 만나기 시작하였으며, 1971년 첫 시집 <분명한 사건> [순례] 에 실린 시들과 개봉동 연작시들을 포함하여 시선집 [사랑의 기교] 를 출간한다. 1976년에는 시에 관한 산문들을 모은 시론집 [현실과 극기]를 출간하며, 1978년에는 세번째 시집 [왕자가 아닌한 아이에게] 를 낸다.
1981년에는 이듬해 현대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네번째 시집 [이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와 에세이집 [한국만화의 현실] [볼펜을 발꾸락에 끼고] 등을 출간하는 활력적인 작업을 보여준다.
1983년에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의 전임교수가 된다. 같은해에 시론집 [언어와 삶] 을 출간하며,1984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문예창작의 교육 가능성와 그 실제를 연구한 [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육과정 연구] 를 펴낸다.
1987년 문학선집 길밖에 세상] 을 펴내며,1989년에는 연암문학상을 수상하고, 수상 작품집 [하늘 아래의 생] 이 출간된다. 1987년 다섯번째 시집 [가끔은 주목받은 생이고 싶다] 에 이어 1990년 사례연구와 시적 언술의 특성에 관한 연구서인 [현대시작법] 을 펴낸다.
1991년 여섯번째 시집 [사랑의 감옥] 이 출간된다. 한편 같은해 그는 폐포들이 점차로 파괴되어 호흡에 곤란을 가져오게 만드는 만성폐쇄성 질환(폐기종)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어 요양을 위해 강원도 인제를 거쳐 1993년 여름부터는 무릉에 머물렀는데 이곳 생활의 흔적이 일곱 번째 시집 [길,골목,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와 산문집 [가슴이 붉은 딱새]에 녹아 있다.
1996년4월 무릉을 떠난 그는 산속에 파묻힌 마을 서후라는 곳으로 요양지를 옮긴다. 1997년에는 [순례] 복간본이 출간되었으며,1998년에는 한잎의 여자 가 시선집으로 출간되었다. 여덟번째 시집인 [토마토는 붉다 아니달콤하다] 를 통해 날이미지의 투명함을 보여준 그는 최근에는 학기 중에는 일산의 자택에서 방항때는 서후에 머물면서 시작활동을 하고 있다.
2002년 8권의 시집과 동시집 [나무 속의 자동차]를함께 수록한 [오규원 시전집] 1,2가 만들어졌으며,동시대 비평가들이 그의 시세계에 대해 분석,평가하고 있는 '오규원 깊이 읽기' 가 출간되었다.
2. 시적 인식의 갱신과 언어 탐구
최근 오규원의 시의 경향은 '날이미지 시학'의 심화로 평가되고 있다.
1990년대 초부터 모색되기 시작한 '현상'과 '날이미지'에 관한 그의 시적 사유와 방법론은 이제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그가 한국 현대시사에서 시적 인식과 방법론에 대한 가장 첨예한 자의식을 개진시켜 온 시인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많은 평자들은 오규원이 세계와의 대응 속에서 언어와 시에 대한 사유와 그 구체적인 시작 방법론을 생산하고 있음에 동의한다. 초기 시에서 보여주던 사물의 의인화에서부터 패러디와 아이러니,환유적 언술을 거쳐 최근의 날이미지의 시학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시적
언술은 그의 세계관의 변모와 시적 인식의 갱신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있다.
이 글은 오규원에 관한 기준의 평가들을 수용하면서 시인 오규원이 구현하는 시사의 주요 테마를 현실과의 대응속에서 탐구되는 시적 인식과 방법론으 갱신으로 상정하고 그 궤적을 살펴보려 한다.
1) 이상으로서의 순수와 추상
<분명한 사건>과<순례>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 시 세계는 언어와 절대성과 순수성의 추구로 요약할 수 있다.
모더니즘 시의 관점에서 1960년대는 언어실험과 내면 탐구를 주축으로 하는 순수시으 시기로 대별될 수 있다. 이때를 순수시를 천착하는 시기로 볼 수 있는 근저에는 허무주의와 자유의식이 놓여있다. 즉 1960년대 전반기 4.19세대 혹은 한글 세대의 욕망과 좌절의 정치적 의미가 희석화되는 자리에서 허무주의와 순수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오규원에게 있어서는 4.19세대의 경험이 자신의 주체의식을 검증하는 계기이자 시인으로서는 모더니즘의 자기 반성적 내면 의식의 탐구를 지향하게 되는 전기였다. 그에게 내면 탐구는 시를 통한 순수한 언어와 의식의 탐구도 드러난다.
몇 개의 현상 / 오규원
Ⅰ. 빛
1
떨어지는 순간
빛은
하얀 공간에
꽃병도 없이 어딘가 꽂힌
꽃이 된다.
낱말도 없이
문장에
꽂힌
한 송이의
꽃이 된다.
고층의 건물이
사방으로
훨훨 날아다니는,
젊은이들이
중풍에 걸린
개를 타고 돌아다니는
어느
삭막한 나라에서
신의
손에서 풀려 나오는 순간
빛은
미친듯이 확확 타는
꽃이 된다.
2
그는
알 수 없는 종교가 되어
공중에
빛나고 있다.
그는
변신하여
떨어진다.
땅 위에서
반짝이는 사람의 눈과 눈 속에
조용히 쉬며
빛나고 있다.
알 수 없는 낱말과 눈짓이
출렁거리고 있다.
Ⅱ. 환상의 땅
고요한 환상의
출장소
뜰, 뜰의
달콤한 구석에서
언어들이
쉬고 있다.
추상의 나뭇가지에
살고 있는
언어들 중의
몇몇은
위험한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다
떨어져 죽고.
나의
고장난 수도꼭지에서도
뚜욱 뚜욱
언어들이 죽는다.
건강한 언어의
아이들은
어미의 둥지에서
알을 까고,
고요한 환상의
출장소
뜰에
새가 되어
내려와 쉰다.
의식의
고장난 수도꼭지에서
쉰다.
시인은 인간의 순수 정신의 창조물로 사물의 본질을 간직한 언어를 꿈꾸고 있다. 그러나 타락한 현실에 의해 언어는 훼손되고 오염된다.
그러므로 이런 순수한 언어가 존재할 수 있는 곳은 현실이 아니다.'환상의 출장소'이다. 환상 속에서만이 언어는 순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그 '추상의 세계는 달콤한 안식의 공간이지만 현실은 순수한 세계와는 대립적인 위험한 세계이다.
이런 점에서 순수한 언어란 그의 관념이 만들어 낸 추상화된 세계속에서만 가능한 것이 된다. 추상과 순수 세계의 핵심은 현실적 인간 개념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따라서 추상은 일체의 현실적인 연관으로부터 해방된 순수한 관념의 정신 세계이므로 일상 언어로 부터의 괴리
는 필연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규원이 추구하고 있는 순수와 추상의 세계 역사 현실이라는 구체적인 세계와 절연된 세계이다. 때문에 그의 시에 등장하는 주체들은 인간이 아니라 주로 의인화된 사물들이며 은유의 기법은 의미의 동일화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비동일화를 통해 추상의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런 순수와 추상의 세계는 언어 그 자체를 투명하게 드러내려 했으며,그런 언어 자체에 대한 믿음을 보여 주려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으나 삶과 현실이 표백됨으로써 또 하나의 관념을 생산하고 있다.
2) 물신 사회와 아이러니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와 [이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를 중심으로 하는 이 시기는 시인의 관념에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서기 시작하는 때이다. 시인은 인간의 내면과 언어가 물신사회 안에서 무력화되고 불순해 질 수밖에 없으며 일상적인 고정관념과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인식함으로써 세계와 부딪히는 언어의 문제에 천착하는 한편,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시는 무엇인가 라는 고민을 아이러니의 어법으로 드러낸다.
용산에서 / 오규원
詩에는 무슨 근사한 얘기가 있다고 믿는
낡은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詩에는
아무 것도 없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生밖에.
믿고 싶어 못 버리는 사람들의
무슨 근사한 이야기의 空想밖에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意志와 理想 속에 자라며 흔들리듯
그대의 사랑도 믿음도 나의 사기(詐欺)도 詐欺의 확실함도
확실한 그만큼 확실하지 않고
근사한 풀밭에는 잡초가 자란다.
확실하지 않음이나 사랑하는 게 어떤가.
詩에는 아무 것도 없다. 詩에는
남아 있는 우리의 生밖에.
남아 있는 우리의 生은 우리와 늘 만난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믿고 싶지 않겠지만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 오규원, 『王子가 아닌 한 아이에게,문학과 지성사(1978)
시인은 시가 속악한 사회에 순수한 이상 세계의 비전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정통적인 시의 덕목을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시인들이 제시하는 그 세계는 현실적 의미로 볼 때 전혀 근사하지 않은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세계라고 반어적으로 이야기 한다. 어저면 멋진 신세계로 근사하게 굴러가는 현대사회에서 그런 생각은 그저 '낡은'환상일지도 모른다.
시인의 이런 생각은 "시는 추상적이니 구상적은 오해마라. 시인은 병신이나 안 병신이나 오해마라,지금은 한국은 산문이다. 정치도 산문 사회도 산문, 시인도 산문이다." 산문적이기 위한 전쟁시대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진술된다. 현실 속에서 시의 무용함과 패배의 인정은 역으로 이 시대의 삶이 시인과 시의 덕목을 훼손시키고 있는 타락한 세계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오규원은 시의 언어를 훼손시키고 시를 패배시키는 강력한 힘이 물신화된 사회 구조 속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의 "사랑의 기교"연작이나 "콩밭에 콩심기"등은 기교와 본질의 가치가 전도된 우리 사회의
모습을 풍자하고 있다. 그는 이런 전도된 현실을 주로 표면적인 의미와 이면의 의미가 전도된 아이러니 기법으로 시화한다.
인간 관계마저 물신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그 사회가 무의식적으로.강요하는 허위 의식에 따라 행동하고 자신을 정상화시켜 나간다. 이런 현상을 오규원은 놓치지않고 "정말이다 우리는 아직도 패배를 승리로 굳게 읽는 방법을/믿음이라 부른다 왜 패배를/패배로 읽으면 안되는지"(우리 시대의 순수시)라고 묻는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나 믿음이란 것도 그 시대의 허위 의식에 의해 조작되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말들에 깃들인 관념을 버리려 하는 것이다.
고도로 발달된 대중매체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타락하고 불순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언어의 숙명이라면 시의 언어 역시 정통적인 시의 덕목을 행사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물신 사회에 대응해야 하는 시의 운명이다.
3) 자본주의적 일상과 패러디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의 세계는 시의 고정관념을 파기함으로써 시와 언어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시에 일상의 언어와 경험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드러나는데 그 일상의 언어는 구체적으로 자본주의적 삶의 현장에서부터 광고에 이르기까지 대채롭다.
봄 / 오규원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일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 집 개의 똥하나, 그래 모두 이리 와 내 언어 속에 서라.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은 내 언어의 꽃이 되고,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이다.
봄은 자유롭다. 자 봐라, 꽃피고 싶은 놈 꽃피고, 잎 달고 싶은 놈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랑이고 싶은 놈은 아지랑이가 되었다. 봄이 자유가 아니라면 꽃피는 지옥이라고 하자. 그래 봄은 지옥이다
이름이 지옥이라고 해서 필 꽃이 안 피고, 반짝일 게 안 반짝이던가. 내 말이 옳으면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
'봄'은 어떻게 이름을 부여받든 그 현실은 꽃피고 반짝이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이 부여하는 관념이나 명명행위가 살아있는 현실 자체를 구속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시인의 의식이나 관념을 투영시키지 않고 그대로 시를 쓰려 한다. 이런 문제 의식은 "배반을 모르는 시가'있다면 말해보라/의미하는 모든 것은/배반"할 수 있으므로(버스정거장에서). 살아 있는 "사물이 모든 사물이 그냥/한편의 시이듯/사람이 사람들이 또한/모두구나"라는 새로운 시적 인식으로 확장된다(詩인 구포씨의 일일(4)-다방에서)
이처럼 시의 언어에 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시적 영역을 확장시키려는 오규원의 기획은 대중매체의 언어를 시에 옮겨놓는 방법으로 이어진다. 오규원은 도구화된 언어 그 자체를 시어로 옮겨 놓음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런 언어를 생산하는 사회에 대응하려 한다. 이를 통해.시인은 전통적인 시 형식 자체에 대한 고정관념을 파기하면서 사회 비판력을 확보한다.
빙그레 우유200m|패키지 / 오규원
1.
양쪽 모서리를
함께 눌러주세요
나는 극좌와 극우의
양쪽 모서리를
함께 꾸욱 누른다
2.
따르는 곳
극좌와 극우의 흰
고름이 쭈르르 쏟아진다
시인은 일상적으로 먹는 우유의 안내서를 정치적인 문안으로 해석함으로써 우리의 현실이 상품처럼 결코 '빙그레'웃을 수만은 없는 곳임을 시사한다. 상품 안내서를 읽어 내려가는 독자의 무의식에 충격을 가하며 현실을 깨닫게 만드는 이런 종류의 패러디시를 통해 그는 기존의 시형식과 시어가 내포하는 고정관념과 권위를 전복시키는 자유로운 시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4) 살아 있는 현실과 환유적 언술
<사랑의 감옥> 으로 대표되는 이 시기의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싶다] 에서 보여 주었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과 패러디의 경향이 계속되는 한편 시의 의미를 풍요롭게 하기 위한 시적 인식과 언술 전환의 단초가 마련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손-김현에게 / 김현
개울가에서 한 여자가 피묻은
자식의 옷을 헹구고 있다 물살에
더운 바람이 겹겹 낀다 옷을
다 행구고 난 여자가
이번에는 두손으로 물을 가르며
달의 물떼를 벗긴다
몸을 씻긴다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그 손으로
돼지 죽을 쓰고 장독 뚜껑을
연다 손가락을 쭉쭉 빨며 장맛을 보고
이불밑으로 들어가서는
사내의 그것을 만진다 그 손은
그렇다 언어이리라
위의 시는 관념인 언어를 인식 대상으로 삼는다. 손의 행위를 축으로 한 여자의 욕망과 손의 움직임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안정성 환유의 언어 체계를 보여주고 있다. '손'은 하나의 의미에 귀속되지 않고 일상적인 영역에서부터 초월적인 영역에까지 그 의미를 확장시켜 나간다.'손-언어'란 인간의 욕망이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고 옮겨가는 기호일 뿐이다.
인간의 욕망은 생이 존재하는 한 지속적이며 욕망의 기호인 언어 또한 마찬가지다(세허라쟈드의 말). 언어는 하나의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흘러가는 다양한 삶의 의미를 보여준다.
시랑의 감옥 / 오규원
뱃속의 아이야 너를 뱃속에 넣고
난장의 리어카에 붙어서서 엄마는
털옷을 고르고 있단다 털옷도 사랑만큼
다르단다 바깥 세상은 곧 겨울이란다
엄마는 털옷을 하나씩 골라
손으로 뺨으로 문질러보면서 그것 하나로
추운 세상 안으로 따뜻하게
세상 하나 감추려 한단다 뱃속의 아이야
아직도 엄마는 옷을 골라잡지 못하고
얼굴에는 땀이 배어나오고 있단다 털옷으로
어찌 이 추운 세상을 다 막고
가릴 수 있겠느냐 있다고 엄마가
믿겠느냐 그러나 엄마는
털옷 안의 털옷 안의 집으로
오 그래 그 구멍 숭숭한 사랑의 감옥으로
너를 데리고 가려 한단다 그렇게 한동안
견뎌야 하는 곳에 엄마가 산단다
언젠가는 털옷조차 벗어야 한다는 사실을
뱃속의 아이야 너도 태어나서 알게 되고
이 세상의 부드러운 바람이나 햇볕 하나로 너도
울며 세상의 것을 사랑하게 되리라 되리라만
"좁은 난장의 길을 오가며 한시간씩이나/ 곳곳을 기웃거리"(저 여자)며 엄마는 뱃속의 아기에게 말한다. 이 세상은 추위와 고통을 견뎌야 하는 감옥이라고 정해진 길 위에서 사회적 규범들과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며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은 감시자가 없는 감옥의 생활과 다름없다. 그러나 그 힘을 감싸안을 수 있는 부드러운 따뜻함 그리고 사랑이 있으므로 이 감옥은 우리에게 긍정성을 갖는다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따뜻하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이는 시인의 시적 인식과 세계관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세계와 시의 대립을 주측으로 은유적 원리에 의해 하나의 관념을 생산해 내던 사회 비판력과도 관련된다. 시적 방법론이 살아있는 현실 그 자체를 시로 드러내려는 환유적 언술로 변화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5) 현존하는 의미와 '날이미지'의 시학
길,골목,호텔 그리고 강물소리와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에 이어지는 시세계 주로 자신이 선언하고 있는 '날이미지 시학'의 시들이 구체화되고 심화되면서 언어의 투명함과 자율성이 강화되고 있다.
시집의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길,골목.호텔,강물소리'는 공간적인 인접성이 상상될 뿐 그 어떤 관념도 암시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라는 진술은 끝없이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고 유예시키는 주체의 목소리를 환기시킨다.
물과 길 4 /오규원
강이 허리가 꺾이는 곳에서는 산이
뒤로 물러섰다 그래도 산의
머리는 하늘과 닿고 산이
물러선 자리는 텅 비고 절벽이 생겨
곳곳의 물이 거기 모여
반짝였다 산을 따라가지 못한
절벽은 그러나 자주 몸을 헐며
서서 물을 받는다 팍팍한 그 붉은 황토에
동그랗게 숨구멍을 뚫고 물총새가
절벽과 함께 몸을 두고
새끼를 기른다 그래서 절벽에 붙어
강을 굽어보는 물총새가
긴 부리로 가볍게 해를 들고
있을 때도 있다 절벽 끝에 사는
키 작은 망개나무와 싸리나무가 하늘의
별과 달을 들어올릴 때도 있다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위의 시는 인접해 있는 사물들이 이루는 하나의 공간을 그림처럼 우리에게 보여준다. 시인이 한자리에서 주위의 풍경을 보는 것이라면 그 풍경이 갖는 입체성 때문에 별과 새는 따로 놓이게 되어 새가 별을 든다는 진술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 속에는 멀리 있는 산이나 높이 떠 있는 별이나 달이 가까이 있는 사물들과 함께 하나의
평면에 놓여있다.
따라서 '강이 허리가 꺽이는 곳에서'산이 뒤로 물러서 있다거나 '물총새의 긴부리'가 해를 받친다는 진술이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그림에 나타난 현상과 현상을 그림처럼 보여 주는 것은 다르다. 그림에서는 자연스러운 하나의 풍경이 시적 진술로는 놀랍고도 새로운 의미를 준다.
시인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상들을 인간 중심적인 시각으로 서열화시키지 않는다. 그의 시에서는 다양한 자연물들이 함께 공존한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 그대로를 생생하게 날이미지로 보여 주려한다.
물물과 높이 / 오규원
밤새 눈이 온 뒤 어제는 지워지고 쌓인 흰 눈만 남은 날입니다
쌓인 눈을 위에 얹고 物物이 허공의 깊이를
물물의 높이로 바꾸고
나뭇가지에서는 쌓인 눈이 눈으로 아직까지 그곳에 있는 날입니다
뒤뜰에 붙은 언덕의 덤불 밑에는 오목눈이와 멧새와 지빠귀와
그리고 콩새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먹이를 찾고
새들이 먹이를 삼킬 때마다
덤불 밖의 하늘이 꼬리 쪽으로 자주 기우는 날입니다
직박구리 한 쌍이 마른 칡덩굴이 감고 있는 산수유에 앉아
노란 꽃이 진 자리에 생긴 붉은 열매를 챙기고
열매가 사라진 자리에는 허공이 다시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날입니다
그러나 콩새 한 마리가 급히 솟구치더니
하늘에 엉기고 있는 덩굴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가서는
몸을 그곳의 하늘에다 깨끗이 지우는 날입니다
시집『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문지 4쇄 2004년
위의 시는 하나의 풍경안에 다섯 개의 풍경이 공존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시는 연 구분은 없지만 '~날입니다'라는 종결형이 다섯 번 반복되면서 각각의 상황이 진술되고 있는데 또 다른 풍경이 덧보태질 수 있도록 시의 구조는 개방적이다. 이때 어떤 한 상황이 '~날입니다'라는 같은 구문에 종속됨으로써 각기 다른 풍경의 동시성과 현존성을 최대한 살리고 있다.
시적 자아는 시적 상황에 개입을 자제하면서 풍경들 그 자체만으로 시가 살아나게 만들고 있다. '~이다'가 아니라 '~입니다'라는 표현 역시 대상에 대한 시적 자아의 거리를 만들어 내면서 단지 한 풍경의 전달자일 뿐이라는 인상을 자아낸다.
시인은 눈이 쌓여 있는 풍경을 물물들이 높이를 갖게 된 것으로 표현한다. 단순히 쌓인다가 아니라 눈이 쌓임으로써 한 존재가 높이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눈이 쌓이는 것이지만 물물들의 입장에서 보면 높이를 갖게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시인은 가능한 인간의 시점 즉 자연을 바라보는 자신의 관념을 배제하고 풍경 그 자체의 의식과 상상에 투철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간이지만 가능한 자연의 일부로 자연의 현상과 본성에 충실하려 한다. 그는 인간과 자연의 경계에서 시를 쓰는 것이다
3. 서정시의 새로운 인식과 전략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규원의 시세계는 언어에 관한 끊임없이 사유하고 탐구하면서 언어의 본질과 한계에 대해 깊이 있게 천착해온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구체적으로 세계와의 대응 속에서 시적 인식과 시적 방법론을 끊임없이 갱신하는 작업으로 드러났는데 관념과 추상의 순수시 아이러니와 패러디 현상과 날이미지의 시학의 시론과 시가 바로 그 구체적인 결과물들이다.
이처럼 언어와 시형식의 탐구는 정통적인 서정시의 문법을 파괴하고 다양한 새로운 서정시의 운명을 개척하는 것으로 드러났는데 자본주의 사회와 대응하는 패러디 시학이나 언어의 투명함을 추구하는 날이미지의 시학 등이 그들이다. 대중매체의 언어를 이용한 패러디 시를 통해 그는 현대시사에서 패러디의 방법적 전략과 인식을 가장 깊이있게 보여주었으며, 날이미지의 시학은 인간 중심적인 시각과 관념으로부터 현상과 언어를 해방함으로써 존재의 본질을 투명하게 드러내려 한다는 점에서 서정시의 외연과 내포를 확장시키고 있다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오규원의 시는 새로운 자연시와 생명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의 자연시는 생태학적 상상력으로서 당위적인 생명을 강조한다기 보다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을 표현하고 말한다는 점에서 자연시의 새로운 지평을 마련해 준다. 따라서 그의 자연시의 특성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자연을 바로보는 사유 구조가 일상의 삶의 현장과는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이는 그의 날이미지의 시학이 정통적인 서정시의 인식과 문법,독법의 측면에서 어떤 변별성을 지니고 있는지가 좀더 상세히 밝혀진다면 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새로쓰는 한국시인론 (백년글사랑,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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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오규원의 시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시어인 ‘높이’와 ‘깊이’를 반야심경의 ‘空’ 사상과 관련지어 살펴봄으로써 오규원의 시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내는 데 있다. ‘높이’와 ‘깊이’는 제8시집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으로, 오규원의 시 세계를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시어라고 할 수 있다. ‘높이’와 ‘깊이’는 ‘안’과 ‘밖’, ‘빛’과 ‘어둠’ 등 대립적인 관계를 이루는 시어들을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준다.
반야심경의 空 사상과 관련지어 보면, ‘높이’와 ‘깊이’는 불교에서의 色卽是空 空卽是色과 상통한다. 色과 空은 현실적으론 둘이면서 이치적으로는 하나이며, 色이 멸하여 空이 되는 것이 아니고 色 그자체가 바로 空이다. 色이 즉 空이며 空이 즉 色인 것처럼 물물의 ‘높이’는 허공의 ‘깊이’이고, 허공의 ‘깊이’는 물물의 ‘높이’라고 할 수 있다. 물물의 ‘높이’에 의해 허공의 ‘깊이’가 드러나는 것처럼, 空은 色을 통해 드러날 수 있다. 色卽是空 空卽是色은 ‘높이’와 ‘깊이’가 다르지 않고 곧 같은 것임을 말한다.
이는 우주만유를 제법의 실상 그 자체로 보는 實相般若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實相般若의 지혜를 통해 보면 ‘높이’로 서 있는 나무와 ‘깊이’로 다시 서 있는 나무는 같은 것이다. 물물-色-형상-높이는 수면에 비추어 허공-空-실체-깊이로 드러난다. 모든 물물의 ‘높이’는 허공의 ‘깊이’를 지니고 있다. 그 둘이 다르지 않은 하나임을 보여주고 그 둘을 관계시키는 것이 바로 수면이다. 수면을 접점으로 色과 空은 기능하고 연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