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홈페이지에 "Peanuts를 통해 본 Anarchism에 관한 글"을 구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전에 다른 사이트에서 본 기억이 있어서 금방 검색해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에 관한 제 생각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 글을
씁니다.
그 글은 http://air.cpnet.or.kr/mail2web/org/komsat/msg00423.html 에
있습니다. 이것도 다른 곳에서 인용한 것이지만 더 이상 찾지는 않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우선 만화 '스머프'가 공산당들이라고 주장하고 다음에
스누피와 다른 피너츠의 등장인물들이 무정부주의주의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화 '스머프'는 외국에 많은 앤티 사이트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건 일단 지금의 제 관심사는 아니고, 여기서는 피너츠와
무정부주의에 관한 주제만 다루겠습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저 글의 후반부, 피너츠와 관계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
『스머프와 스누피의 정치사상』
스머프를 좋아한다구? 당신 혹시 공산당 아냐?
스누피도 좋아해? 문제가 있구만...
(중략)
세계적으로 많은 매니아를 거느리고 있는 스누피는 그러고 보면
무정부주의자인 듯하다. 스누피가 도서관에서 읽다가 'yok! yok! yok!
yok!' 자지러지게 웃으며 복사까지 했던 책제목이 뭔지 아는지? 바로
'사냥개 길들이기'. 명령과 복종, 강한 결속력으로 이루어진 조직에 대한
통렬한 비웃음이었던 거다. 발칙한 비글개!
당연히 순종적이고 충실해야 하는 개 주제에 주인을 '둥근머리 소년'이라고
부르는 스누피의 가장 친한 친구는 우드스탁이다. 그런데 우드스탁은 어떤
녀석인가? 항간에는 그 노랭이가 개벼룩이라는 주장이 유포되어있긴 하지만
우드스탁은 명백히 철새이다. 그런데 이 철새라는 녀석은 겨울이 되어도
스누피 밥그릇에서 아이스하키를 한 후 잼보니를 밀고 다니면서 전혀
이동할 생각을 안 한다. 한번은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려는 결심을 하는데
그때 글쎄, 기가 막혀서, 기구를 타고 날아가는 거다. 도대체 무슨 새가
이래? 철새로서의 정체성-잘 날고, 때가 되면 갔다가 돌아오는-을
온몸으로 완강히 거부하는 이 녀석에게서도 역시 지독한 무정부주의자의
냄새가 난다.
아니, 얘들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 그냥 불한당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스누피에게 밥주는 둥근머리 소년과 그의 친구들은 뭐 다른가.
한번도 게임에서 이기지 못한 피너츠 야구팀을 보라. 샐리 브라운과 루시
반 펠트는 왜 야구팀에 속했는지 모를 만큼 야구에 대해 무심하다. 그리고
매니저인 찰리 브라운은 그다지 통솔력이 있지 않고, 4번 타자인
스누피는 가장 훌륭한 타자이긴 하지만 자기 일이 생기면 곰새 달아나고
만다. 역시 무정부주의자들은 경쟁력이 없나봐...
그런데 스머프보다 스누피가 훨씬 많은 팬들을 가지고 있는 거 보면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보다는 무정부주의자가 좋은가 보지?
========================================
우선 이 글은 '무정부주의'라는 것을 옹호하고 있는가? 아니다, 차라리
비난하는 쪽으로 보인다. 이 글의 문제는 여러 가지이다. 근본적으로
무정부주의자라는 것이 비난받아 마땅한 것인가, 하는 것과 피너츠의
등장인물들에 '무정부주의자'라는 '라벨'을 붙일 수 있느냐 하는 것과, 이
글의 의도는 무엇인가 하는 점 등이다.
누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자. 대부분의 경우, 감정이 들어가서
그렇겠지만, 그 잘못 자체만 비난하게 되지 않고 그 사람 인격을 비난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아이가 꽃병을 깼으면 "실수로 꽃병을 깼구나, 어떻게
하지?" 아니면 "꽃병이 깨졌구나." 같은 구체적인 사항에 대한 반응을
하기보다는 "왜 너는 그렇게 바보 같니?!!" 아니면 더 심한 욕을 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이런 인격 비난의 가장 전형적인 경우 중 하나는
그 사람에게 어떤 라벨(label)을 붙이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라거나, 더
심하게 '빨갱이' 같은 것들이 좋은 예일 것이고, 지금 주제인
'무정부주의자'라는 것도 그렇다. 많은 욕들도 실은 이런 '라벨 붙이기'의
극단적인 예이다. 욕들이란 것이 대개 '개'처럼 동물이나, '성적인 문란함'
특히 근친상간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실은 이런
'라벨 붙이기'에서는 그 라벨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건 그 라벨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건 상관은 없다. 그저 라벨을 붙이는 사람이 상대에 대해
엄청난 감정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영어
단어에도 재미있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label'과 비슷한 발음과 형태를
보이는 'libel'이란 단어가 '모욕, 중상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일 당신이 길고 크게 보아 상대방을 아끼는 것이 좋은 경우엔, 곧
애인이라던가 자식이라던가 직장 동료나 부하라던가 하는 경우 등등엔,
라벨 붙이기를 가급적 하지 않는 편이 좋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꽃병이 깨졌구나." 하는
반응과 "이 바보 같은 자식!" 하는 반응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제발,
당신의 꽃병보다는 당신의 아이를, 애인을, 사람을 사랑하라.
이처럼 실수나 잘못 뿐만 아니라 사람의 여러 특성 중 한 특성만을 보고
라벨을 붙이는 경우도 많다. 우선, 무정부주의라는 것은 아주 폭넓은
개념이다. 크게 보아, 모든 정치조직, 권력, 그리고 사회적 권위 같은 것들을
부정하는 사상 및 운동을 말한다. 그 주장에 따르면 본래 인간을 선한데
제도나 관습에 의해 타락하기 때문에 그런 조직과 권위적인 것들, 특히
사유재산과 국가를 부정하고 최상의 가치인 인간의 자유를 누리자는
것이다. 같은 무정부주의를 주장한다해도 사람 사람마다 그 배경이나
환경에 따라 다른 구체적인 입장을 보인다. 그래서 개개인간의 자율적인
협동을 강조한다거나,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를 주장한다거나, 개인의
개성을 강조한다거나, 극단적으로 모든 폭력에 반대하는 무저항주의를
내세운다거나, 반대로 조직과 국가를 파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파괴
암살을 행하는 급격한 폭력주의를 내세운다거나 등등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의 일제시대처럼 다른 나라의 정복을 받고 있을 때 독립의
수단으로서 기존 국가(정복 국가)를 파괴하기 위해 무정부주의를 내세울
수도 있는 것이다.
위의 글에서 스누피나 피너츠의 다른 등장인물들에게 '무정부주의자'라는
라벨을 붙일 수 있다면 예수나 석가도 무정부주의자였고 공산주의자였고
'빨갱이'였을 것이다. 아니, 어느 누구고 어느 라벨이건 붙여지지 못할 건 또
무엇이랴.
물론 당연히 자신을 무정부주의자라고 불러주길 원하는 사람도, 그렇게
불려야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세상 어느 곳에서는 먹을 게 없어
굶어죽어 가는 것을 보면 풍요함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만화 '블론디'나
'가필드' 같은 것들을 보고 '제국주의적 만화'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비슷하게, 많은 헐리우드 영화가 미국 상업주의와 국수주의적 요소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그것들에 어떤 구체적인 라벨을 붙일
때는 신중해야 한다. 세상에 많은 불행과 어려움이 있을 때 그런 것을 직접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나 문학 작품을 보고 비난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십중팔구 전혀 다른 관점에서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즐겁게 숲에서 노래하고 있는 앵무새는 쏴 죽이면 안
되는 것이리라.
나아가서, 위에 언급되어 있는 '공산당'이나 더 심한 '빨갱이'라는 라벨은
어떨까. 크게 보아 하나의 '주의'로서 이것들은 인류에 대한 거대한 규모의
역사적 실험으로서 행해진 것이고, 나름대로 사상적 가치가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현재의 기독교 교회들은 예수 시대 직후의 초대교회를 모범으로
삼고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보면 '원시 공산주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평가된다. 물론 정치논리에 의해 공산주의 세계는 '자유주의' 세계와
피비린내 나는 대립과 전쟁을 했고, 공산주의나 빨갱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지금도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양명학이란 것을 따르면
죽음에 이르는 나쁜 행위였다. 그런데 그 양명학이란 게 간단히 말해
유교에 불교의 선(禪)적인 요소를 가미한 것이었다. 그것이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던 정통 유교학자 그룹에게 위협으로 느껴졌기에 절대 허용되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위 글을 보고 내가 생각해 낸 더 재미있는 점은, 피너츠 만화에
'무정부주의'라는 라벨을 붙이고 있는 이유가 만일 그 만화가 세상의 불행에
직접적인 행동파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면, 차라리 그 비난을
하는 사람 자신을 '무정부주의자'라고 부르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자신의
자유를 달성시켜주는 무정부주의를 획득하려 기존 조직을 파괴하려고
나서는 급격한 폭력주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과연 피너츠
만화가 세상의 불행에 등돌리고 서 있는 만화인가 하는 것에 심각한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만화라는 장르를 통해 작가 슐츠씨는 자신의 한
인간으로서의 아이덴터티(identity)-세상의 행에 기뻐하고 불행에 슬퍼하는
모습을 포함한 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획득하려 평생을 노력했다. 그래서
그의 만화는 삶을 주제로 하는 소중한 이야기들이 여기 저기 밤하늘의
별처럼 영롱한 진주처럼 박혀있는 것이다.
이렇게 피너츠와 무정부주의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니, 다음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나는 여기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 땅,
그리고 세상 어딘가에는 불행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럴 때 나의 태도는
무엇이어야 할까, 하는 것에 관계되는 것이다. 무정부주의라 해도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내세우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어떤 아이가 식탁에서 밥을 제대로 안 먹고 남길 때마다 엄마가 잔소리를
했다. "아프리카에서는 말야... 너 만한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어." 매일
그 소리를 짜증내며 듣던 아이가 어느 날 통쾌한 반격을 했다. "엄마, 그럼
내가 이거 다 먹으면 아프리카 아이들이 굶지 않아?" 엄마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 그건... 말야..."
그래서 세상의 아픔과 불행에 대해서는 나는 예수의 접근 방법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의 방법은 '이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네 이웃에게
친구가 되라.' 가장 좋은 친구란 그에 의하면 자신의 목숨까지 내 놓는
것이지만, 그렇게 거창한 '좋은' 친구일 필요는 물론 없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자신의 이웃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내 자신의 소중함을
알고 인류애적인 입장에서 마찬가지로 상대방이 소중함을 인정해 주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한 가족의 일원이라면 나의 이웃은 내 가족이
된다. 내가 한 동네나 사회의 일원이라면 동네 사람과 사회의 구성원들이
나의 이웃이 된다. 내가 한 나라의 일원이라고 하면 내 이웃은 내 나라 내
민족이 된다. 예수의 이웃은 아마 온 세상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이웃을 '죄'라는 말로 표현되는 그 근본적인 불행의 삶의 조건에서
구원해 주려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그렇게, 나의 이웃은 우주이다. 난 온
우주를 향해 연민을 느낀다.
저 밥을 제대로 먹지 않는 아이의 엄마는 그 아이가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설득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가슴에 뿌리 내린 사랑이 세상을 향해 뻗어 자라나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무정부주의에는 가치 있는 주장도 많다. 나는 특히 간디나
톨스토이 같은 무저항주의자들을 진정으로 존경한다. 하지만 스누피나 찰리
브라운이나 스누피의 등장인물들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만화라는 사회.문화적인 장르 안에서 우리의 삶의 제반 문제들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우리들의 분신들이다. 거기에는 슬픔과 아픔도 있고 기쁨과
웃음도 있다.
* Be Happ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