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은 공의회에 모인 사람들을 ‘아버지와 형제들’이라고 부르며 자신과 동족임을 강조하고 존경을 표현합니다(1-2).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는 아브라함과 요셉, 그리고 모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이는 모세의 법을 어긴다고 말하는 자들에 대한 변호입니다. 3절부터 34절까지는 모두가 알고 있는 객관적인 역사입니다. 그러나 35절부터는 스데반의 관점입니다. 모세는 같은 민족에게 거부를 당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부르셔서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또 그 완악한 백성을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사람이 모세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자신과 같은 선지자를 세울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모세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조상들과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주던 자라고 였습니다. 이어서 스데반은 ‘우리의 조상’들이 이 모세에게 불순종했음을 지적합니다. 이제 스데반은 성전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합니다. 모세는 증거의 장막, 곧 언약궤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던 장막을 만들었고 조상들은 여호수아와 함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은 여호와 하나님이 거하실 집을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일 뿐 그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었음을 49절에서 말합니다.
스데반은 이어서 본격적으로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의 잘못을 말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성령을 항상 거슬렀습니다. 심지어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의인, 메시야도 잡아 죽였다고 합니다(51-52). 천사 전한 율법을 받고도 그들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모세보다, 천사보다 탁월한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셨지 결코 폐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을 새롭게 세우신 것이지 결코 파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스데반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갑니다. 그때 예수님은 충성된 증인 스데반에게 하늘에서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스데반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증거하자 사람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쳤습니다. 그럼에도 스데반은 자신의 영혼을 예수님께 부탁드리고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잠듭니다.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는 표현입니다(60). 이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스데반은 구약의 역사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구약을 예수님께서 완성하셨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을 잘 알고 있던 같은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 때 반응은 앞에서 회개한 유대인들과는 달리 더 포악해 졌습니다. 양심에 찔림을 받았지만, 그것을 회개로 연결하지 않고 오히려 스데반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습니다. 이러한 핍박에 굴하지 않고 스데반은 핍박하는 자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두 분류로 나뉩니다. 믿고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순종을 요구하며, 듣지 않고 거부한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초청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되거나 드러날 때 어떤 마음이 듭니까? 그것에 대해서 귀를 막고 듣기 싫어하기보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게 죄를 지적 받을 때 귀를 막으면 우리는 회개에 이를 수 없고, 결국 스데반을 돌로 치는 자들과 같이 됩니다. 스데반의 말씀을 통해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말씀을 통해 죄를 지적 받아 마음이 찔릴 때 귀를 막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용서와 위로와 평안이 임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거부하는 자들에게 그들과 똑같이 적대하지 않고 여전히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우리가 됩시다. 우리의 기도의 열매는 주님의 때에 반드시 맺힐 것입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