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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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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설교 | |
성경낭독 : 행 3:12-19; 눅 24:36-48 본문 : 욘 1:17-2:10 제목 : “요나의 죽음과 부활” |
요나의 죽음과 부활
오늘 말씀은 요나서 1장 17절 말씀으로부터 시작하도록 합시다.
욘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마치 수수께끼와도 같은 이 사건, 그래서 동화(피노키오)의 한 부분이 차용하기도 한 이 사건은, 이 자체만으로 놓고 보면 동화처럼 보일지라도, 예수님의 인용 때문에 심오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요나가 물고기의 뱃속에 놓이게 된 이 사건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마 12:39-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이 지시하는 바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요나가 겪은 일이 “표적”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요나가 겪은 물고기 뱃속의 삼일과 그 후의 뱉어짐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놓이게 된 사건을 단순히 볼 수 없게 됩니다.
심지어 이 사건은 단순하게 ‘신앙에 연관되었다’ 정도조차 아닙니다. 말하자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된 사건을 읽으면서 “어떠한 역경 가운데서도 결코 포기하지 마!”라는 식의 심리학적 메시지조차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스스로, 이 물고기 사건을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관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이 말씀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눈’, ‘열려진 눈’으로 요나의 물고기 사건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소설도 아니고, 심리학적 테라피도 아니고, 죽음과 부활이라는 복음의 핵심을 여기에서 들여다보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
1. 물고기 뱃속 = 죽음
자, 그러면 이 복음을 차례차례, 그 진행 과정을 따라서 살펴가 보도록 합시다.
우리가 처음 생각해야 할 주제는 이전에 살폈던 “내려감”이라는 주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내려갔고”(1:3), 다시 배로 “내려갔”으며(1:3), 그 배에서 다시 배의 제일 밑바닥으로 “내려”갔습니다(1:5). 그리고 이제 물로 던져져, “스올의 뱃속”(2:2) 혹은 “깊음 속 바다 가운데”(3절), 또는 “산의 뿌리”(6절)까지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이 “내려감”의 절정이 일어난 곳이 어디인가? 바로 바다에 던져지게 된 일, 그리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된 일입니다. 요나의 내려감은 그야말로 끝없이 지속되다가, 마지막에 그 정점을 찍게 되는데, 그 정점이 바로 우리가 방금 말한 “스올의 뱃속”, “깊은 속 바다 가운데”, “산의 뿌리”입니다. 이 일은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 갇히게 되었을 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요나가 지금 도착하게 된 지점, 곧 물고기 뱃속을 통하여 도착하게 된 지점이 다름 아닌 ‘지옥’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낯을 떠나서 끝없이 내려갈 때, 최후에 도달하게 되는 곳은 지옥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어디에다 비유하셨냐? 바로 ‘주님의 무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가 지금 물고기 뱃속에서 당하고 있는 일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는 일”입니다. 다시 복음서의 말씀을 상기해 보십시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이 요나의 정황을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갇혀 있었던 그 3일은, 다름 아닌, ‘죽음의 권능’을 보여주는 사건! ‘인간 죄의 최후 지점’을 보여주는 사건! 곧 그리스도께서 죄의 형벌 때문에, 죽으시고, 또 3일 동안 그 죄의 권세 아래에 짓눌려 계시던 바로 그때를 보여주고 있는 날들입니다!
2. 그러나
1) 괴수로서의 바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잠깐 요나가 던져진 이 ‘바다’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먼저 1장 15절을 보십시오.
욘 1: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우리는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게 된 상황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바다’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다는 배와 그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생명을 삼키려고 했습니다. 사공들은 요나의 생명을 구원하려 했으나 어쩔 수 없었고, 결국 요나를 바다에 던집니다.
이 장면을 만약에 동화로 그린다고 하면, 저는 바다를,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괴수로 그리겠습니다. 말하자면 바다는 크게 포효하면서 모든 것을 삼키려고 하는 괴수처럼 배와 사람들을 삼키려고 했고, 요나는 그 괴수의 입에 던져진 제물과 같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이미지에 익숙하면, 바다가 자주 ‘용’으로, ‘라합’으로, 곧 ‘바다 괴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을 알 것입니다. 성경의 많은 말씀들이 하나님께서 바다와 싸우시는 장면을 괴수와의 싸움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사 27:1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사 51:9-10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시 74:13-14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으며
일반적으로 이런 장면들은 통상 ‘홍해 도하’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관점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 곧 바다를 건널 때, 그 일은 ‘야웨 하나님께서 용과 싸우시는 일’입니다. 고대로부터 바다는 항상 ‘혼돈’과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주 바다와 싸우셨습니다.
그러면 다시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는 장면으로 가 봅시다.
요나가 처한 상황은 어떤 상황으로 보이게 됩니까?
요나는 바다 괴물, 곧 용 혹은 라합, 아니면 리워야단을 상징하는 바다에 먹이로 삼켜집니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짐으로써, 바로 이런 괴수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2) 예비하신 물고기
요나의 정황을 이런 방향으로 보게 되면, 우리가 앞에서 말했던 ‘물고기’가 약간 다른 방향으로 보이게 됩니다. 1장 15절과 1장 17절을 붙여서 읽어보십시오.
욘 1: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욘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이렇게 두 절을 비교하여 놓고 보면, “여호와께서 예비하셨다”라는 말씀이 돋보이게! 크게! 보이게 됩니다. 이 물고기를 “여호와께서 예비하셨다”라고 쓰고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이 물고기가 ‘요나에게 괴로움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요나를 구원하려고’ 주신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요나가 바다에 던져졌을 때, 그냥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요나는 5분도 지나지 않아 익사했을 것입니다. 그냥 괴수로서의 바다에 삼켜져 끝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무려 3일이나 바닷 속에서 살아남았죠! 요나는 바다에 삼켜졌으나 죽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주려는 바를 정확하게 보아야 합니다.
바다가 죽음의 괴수, 혼돈의 괴수인 것은 분명하지만, “여호와께서 예비하신 물고기”도 단순히 죽음입니까? 물고기의 뱃속이 무덤인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의 3일’을 요나에게 비교하셨으니까요. 예수님은 ‘바다’를 ‘무덤’에 비유하신 것이 아니라 ‘물고기 뱃속’을 ‘무덤’에 비유하셨습니다. 다시 복음서의 구절을 보십시오.
마 12:39-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인자가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는 것”, 곧 주님의 무덤은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직접적으로 ‘무덤’을 ‘물고기 뱃속’에 비유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여기 이 ‘무덤’에 중요한 실마리가 하나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은 물고기를 예비하심으로 오히려 요나를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처하게 된 것은 맞는데! 요나가 스올의 바닥까지 도달한 것은 맞는데! 그러나 잠정적입니다! 죽었지만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3일 동안은 죽음 가운데 있지만, 곧 육지에 토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덤 중에 계시나, 곧 죽으셨으나, 그러나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곧 부활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렇다! 분명히 죽음이지만! 죽음으로서 전부가 아니다! “여호와께서 물고기를 예비”하셨는데, 그것은 지금은 죽음이지만, 완결되어버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부활을 준비하고 계시다! 곧 우리는, “하나님께서 저 죽음의 너머, 그 이면에 새로운 준비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이 물고기를 준비하시는 야웨 하나님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물고기 뱃속은 일차적으로는 죽음이나, 그러나 오히려 구원이 됩니다. 분명히 죽음의 것이었던 것이, 오히려 구원의 것이 됩니다. 이것이 요나의 물고기 뱃속의 ‘완전체로서의’ 이야기입니다.
부활의 전조로서의 죽음 : 굉장한 역설
1. 죽음의 역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잘 생각하는 일은 우리에게 귀한 가르침을 줍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부활이 죽음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죽음은! 죽음 그 자체로서 끝이 아니라 ‘부활의 전조’가 됩니다! 이것은 굉장한 역설입니다.
우리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사로잡히는 사실을 통해서 ‘죽음’을 봅니다.
물고기의 위장 속에서 겨우 목숨이 붙어 있는 경험은, 피노키오 이야기에서처럼 넓은 동굴과 같은 곳에서 횃불을 밝혀 들고 돌아다닐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아마도 요나는 좁은 위장의 어딘가에 몸이 꽉 낀채로 고래와 물고기들이 숨을 쉴 때 들어온 적은 양의 산소로 겨우 호흡하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요나의 경험은 그야말로 ‘죽음의 경험’, ‘무덤의 경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죽음’, 이 ‘무덤’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사망의 권세’를 ‘경험’했지만, 그 사망에게 완전히 삼켜져버리지는 않았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의도가 단지 그가 죽음 그 자체를 경험하는 것으로 끝내기를 바라셨다면,
바다에 던져졌을 때, 물고기를 예비하시지 않고 그냥 두시거나
아니면 혹 물고기에게 삼켜졌어도 그냥 소화되게 내버려 두셨으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물고기를 예비하셨고, 심지어는 그 뱃속에서 살아남게 하신 것은,
죽음이, 무덤이 그 자체로 끝이 아님을
알려주기 위함이셨습니다.
그 날의 요나와, 지금 오늘날 여기 우리는 동시에 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 죽음이란,
우리에게는 끝이지만
하나님께는 아니구나!
그렇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죽음’을 ‘도약대’로 삼으십니다. 아무도 할 수 없고,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도구로 삼아, 오히려 높이 점프하여, 부활로 나아가십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오래 전 요나의 시대 때도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죽음조차
하나님의 도구이다
하나님께는 참으로 능치 못할 일이 없다
2. 앗수르, 그리고 교회
1)
그래서 예수님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당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요나의 물고기 뱃속 이야기를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에 적용하셨을 때, 이 적용은 거꾸로, 요나에게도, 요나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중요한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요나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요나에게 있어 앗수르는 ‘악한 성읍’입니다.
죽음 뿐이며, 죽어야만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요나에게 하나님은 물고기 뱃속의 경험을 통해서 무엇을 알려주십니까?
“죄를 지었으니 죽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인생에게 통용되는 공통의 진리이지만,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깨닫습니다.
그러나 야웨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죽음도 극복이 되는구나!
요나는 이것을 깨닫습니다.
요나 시대의 이스라엘은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야웨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완전히 죽어야만 하는 자들에게도 다시 살아남이 가능한 것이구나!
이것이 예수님께서 요나 이야기를 “죽음과 부활”이라고 말씀하신 것의 의미입니다.
2)
그러면 다시 이것을 이스라엘에게 가져와 보십시오.
우리가 앞에서도 계속 살폈듯이, 앗수르의 회개는 무엇을 위한 준비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교회의 회개를 위한 준비가 됩니다.
우리는 요나가 앗수르를 ‘멸망받을 도성’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 대상을 앗수르로만 한정지어 생각하면 안 됩니다. 거꾸로 이스라엘은요? 그럼 이스라엘은 괜찮았습니까? 우리는 이전에도 살폈던 것처럼, 당대의 이스라엘은 구제불능의 상태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회개해야 하는 악한 교회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자를 부활의 권능으로 살리실 수 있으신 하나님께서,
앗수르조차 죽어 없어질 존재로 여기지 않으신다면,
그분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바로 여기에서 ‘우리 희망의 씨앗’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주이시기 때문에, 교회가 제아무리 타락하고 악하더라도, 다시금 살아날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요나처럼 물고기 뱃속, 곧 지옥에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교회를 구원하시려는 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은 없던 생명조차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다시 일어나 하나님께 회개할 수 있습니다. 소망이 없는 앗수르조차 살리실 수 있다고 알려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교회는 더 말할 나위가 어디 있겠습니까?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이 ‘이중적 지식’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을’ 창출하시는 분이심을 깨달을 때,
그 오래 전의 선지자가, 어렴풋이 멀리서나마, “주님의 무덤과, 그 다음의 부활을” 성령님을 통해서 약하게나마 깨닫게 될 때,
바로 그때 요나는 ‘앗수르’도 살리실 수 있는 분께서, ‘교회를’ 살리실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러므로 깨달은 이에게 요청되는 일
1) 그 다음 내용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요나의 사건을 두고 말씀하신 것의 그 다음 내용을 살핌으로써 “그러므로 깨달은 이에게 요청되는 일”이라는 주제를 말씀드리는 것으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오늘 여러 번 마태복음 본문에서 40절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그 다음 절도 중요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는 말씀 바로 그 다음은 이것입니다.
마 12:41-4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요나 이야기를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에 적용하신 다음, 이어서 말씀하신 내용은 ‘경고’입니다. 혹은 ‘이 세대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시대 때 살았던 니느웨의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을 심판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도 회개했지만,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은 요나보다 더 큰 이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 발짝 더 나가면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 눅 12:10)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보다 성령님이 더 쎄다......이런 것이 아니라 ‘구속사의 시대적 진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 그 다음으로 성령의 시대가 옵니다. 교회의 시대가 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도행전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한 이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은 이들을 심판한다면
성령님의 전도, 곧 우리의 마음에 친히 역사하는 분의 전하심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앞의 “니느웨 사람들”과 “예수님 당대 사람들” 모두에게 심판받을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전해 듣고,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요청되는 일은 ‘무엇보다 순종’입니다. 죽으심과 부활의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조차! 또 그 패역한 이스라엘 사람들조차! 모두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실 수 있다는 메시지를 듣고도! 제 맘대로 살면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에게 닥칠 심판은 훨씬 더 크고 엄정할 것입니다.
2) 포로에 순종
실제로 이스라엘에게는 어떤 메시지가 주어졌습니까?
하나님께서 혼돈의 바다, 죽음의 바다에서 “그를 삼키는 큰 물고기”를 주셨을 때, 거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닥치게 되는 일이 무엇입니까? 큰 물고기는 죽음의 바다에서 요나를 보호하기 위한 큰 방패막이 같은 것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스라엘에게도 비슷한 것을 주실 것입니다. 악한 이스라엘, 하나님께 거역하고 반역한 이스라엘에게는, 이제 곧 죽음이 닥칠 것인데, 하나님은 이 죽음을, 교회 곧 이스라엘이 고스란히 당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해 보호할 수 있는 큰 물고기를 준비하실 것입니다. 이 물고기는 겉으로 보기에는 ‘죽음’처럼 보입니다만, 사실은 이 물고기야말로 “야웨께서 준비하신 구원”입니다. 이 물고기에 삼키우는 것을 그대로 당해야만, 그들은 다시 부활, 곧 살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맥락에서 바라볼 때, 이스라엘을 덮치는 죽음으로부터 그들을 건지는 물고기는 대국 앗수르, 혹은 대국 바벨론입니다. 우리는 선지서들에서,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가야 하는 형국이 되었을 때, 선지자들이 “그래! 끌려가라! 포로로 끌려가는 것! 하나님의 채찍을 맞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대표적인 선지자가 예레미야 아닙니까? 예레미야는 일평생 포로로 끌려가야 한다는 것을 외치다가 매국노가 되었습니다. 엄청난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야웨의 이름으로 선포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속이 불에 타는 것 같아서 다시 선포하기를 반복하였습니다.
이 마지막 주제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을 위하여 ‘죽음’을 주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판과 형벌을 주실 때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순복해야 합니다. 물고기에게 잡아 먹혀야 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죽음 속에 충분히 잠길 때에만, 그 포로로 끌려가는 일에 충분히 끌려 가야지만, 그래야 그 다음의 부활이 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에 ‘다시 토함을’ 입었습니다. 주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도 사흘 동안의 사망의 권세 아래에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부활의 영광을 얻으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치심에 복종하고, 죄에 대한 형벌에 복종하고, 매를 맞는 것을 달게 여길 때! 바로 거기에만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셔서 비로소 구원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 또한 우리 삶에서 ‘죽음’이 머물러 있을 때, 여기 ‘잠잠히 참고 기다림으로’ 주의 구원, 주의 부활을 소망하는 이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