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영우 팽나무가 천연기념물이 되고, 쌍계사와 불일폭포가 명승이 되다.
방송과 언론의 힘이 크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면도 있지만, 낙동강 변에 위치한 그 팽나무와 당집이 오랜 역사와 공동체 문화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문화재청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것이다. 이번 회의에 올라온 청와대 반송을 비롯한 노거수 여섯그루, 지리산 쌍계사와 불일폭포 일원이 천연기념물과 명승으로 지정 예고 되었다.
고궁박물관에서 회의를 마치고 나오자 수많은 취재진들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는데, 다들 우영우 팽나무 때문에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나라 안에 명승이 많이 있다, 오대산 자락 소금강이 1호 명승이고, 마이산이 12호, 그렇게 많이 지정된 명승 중 이제야 명승으로 지정된 쌍계사와 불일폭포는 어떤 사연을 지니고 있는가?
소설가 김동리가 《역마》에서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는 시오리가 좋은 길이라 해도 굽이굽이 벌어진 물과 돌과 장려한 풍경은 언제 보아도 길 멀미를 내지 않게 하였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꽃피는 봄날 쌍계사 가는 길은 그윽하고 화사하기 이를 데 없다.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위치한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3년(724)에 의상의 제자 삼법이 창건하였다. 삼법은 당나라에 있을 때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정상(머리) 을 모셔 삼신산(금강산, 한라산, 지리산) 눈 쌓인 계곡 위 꽃 피는 곳에 봉안하라’ 는 꿈을 꾸고 귀국하여 현재 쌍계사 자리에 이르러 혜능의 머리를 묻고 절 이름 을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 이후 문성왕 2년(840) 진감선사가 중창하여 대가람을 이루었으며, 정강왕 때 쌍계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쌍계사의 좌우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합쳐지므로 절 이름을 쌍계사라 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크게 소실되어 인조 10년(1632) 벽암스님이 중건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 초입에 마치 문처럼 마주 서 있는 두 바위에는 고운 최치원이 지팡이 끝으로 썼다는 ‘쌍계雙磎’, ‘석문石門’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을 지나던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쌍계석문에 이르렀다. 최고운의 필적이 바위에 새겨져 있었는데 글자의 획이 마모되지 않았다. 그 글씨를 보건대, 가늘면서도 굳세어 세상의 굵고 부드러운 서체와는 사뭇 다르니, 참으로 기이한 필체다. 김탁영은 이 글씨를 어린아이가 글자를 익히는 수준이라고 평하였다. 탁영은 글을 잘 짓지만 글씨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은 듯하다.”
이 절도 다른 절들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 오늘날 볼 수 있는 건물들은 그 뒤에 하나씩 다시 세운 것이다. 대웅전, 화엄전, 명부전, 칠성각, 설선당, 팔영루, 일주문 등이 그것이다. 그중 쌍계사의 대웅전은 광해군 12년(1620)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4칸의 기둥이 높은 아름다운 건물로, 보물 제458호로 지정되었다.
쌍계사의 여러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국보 제47호로 지정된 진감선사탑비다. 경주 초월산의 대승국사비,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탑비, 보령 성주사의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와 더불어 최치원의 사산비문四山碑文에 속하는 이 비는 쌍계사를 세운 진감선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신라 정당왕 2년(887) 에 세운 것으로 높이가 3.63미터, 폭이 1미터인 검은 대리석비다. 신라 말의 고승인 진감선사는 전주 금마(지금의 익산)사람으로 속성이 최씨였다. 그는 태어나면서 울지도 않았다는데,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일찍부터 소리 없고 말 없는 깊은 도의 싹을 타고 태어났다.“고 하였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쓴 것으로 알려진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에 적힌 이 글은 천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모든 글자들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데, 한국 전쟁 당시 총알에 맞은 자국이 여기저기 뚫려 있어 옆구리에 쇠판을 대고 있다.
쌍계사에서 조금 올라가서 좌측으로 가면 만나는 절이 국사암이고, 그곳에서 불일암과 불일폭포는 2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불일폭포로 가는 길은 한적하면서도 아름답다. 이 길을 오래 전에 걸었던 사람이 무오사화의 주인공 탁영 김일손이었다.
“쌍계사 동쪽 골짜기를 따라 다시 지팡이를 짚고 길을 떠났다. 돌층계를 오르기도 하고 위태로운 잔도를 기어오르기도 하면서 몇 리를 가자, 꽤 넓고 평평하여 농사짓고 살만한 곳이 나왔다.
여기가 세상에서 청학동이라고 하는 곳이다. 그리고 생각해봤다. 우리들은 이곳애 올 수 있었는데, 이인로는 이찌하여 이곳에 오지 못했던가?(...)
앞으로 수십 보를 가자 가파른 골짜기가 나타났다. 잔도를 타고 올라 한 암자에 이르렀는데, 불일암이라 하였다. 암자가 절벽 위에 있어 앞은 낭떠러지였고, 사방은 산이 기이하고 빼어나 이를 데 없이 상쾌하였다.(...) 아래에는 용추에 학연鶴淵이 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청학동이라고 일컫는 곳은 불일평전을 이르는 말이다.
조선시대에 이곳을 찾았던 유몽인의 글에 불일폭포의 위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여산의 폭포 높이가 얼마나 더 되는지 모르지만 우리 나라 긴 폭포로는 개성의 박연폭포만한 것이 없다.그런데 이 폭포는 박연폭포와 비교해 몇 장이나 더 긴듯 하고,물이 쏟아지는 길이도 더 긴듯하다,“
깊은 지리산 속에 숨어 있어서 명승인데도 명승 대접도 받지 못한 불일폭포와 쌍계가에서 국사암에 이르는 일원을 문화재청에서 곧 국가 명승으로 지정해서 세상의 풍파에 찌든 도시 사람들이 찾아가 마음을 씻고 돌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두류산이 우리나라 첫 번째 산이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인간 세상의 영리를 마다하고 영영 떠나려 하지 않으려 한다면, 오직 이 산만이 편히 은거할 만한 곳이리라.“
아름답고도 웅장한 불일폭포 초입 불일 평전은 우리 민족의 이상향인 청학동이라고도 불리는데, 쌍계사에서 한 발 한 발 걸어서 불일폭포를 다녀오면 며칠동안은 신선이 된 듯 육신이 향기롭기만 하다. 그래서 문득 문득 가고 싶은 곳이 쌍계사에서 불일 폭포 가는 길이다.
그대도 문득 그 길을 휘적휘적 걷고 싶지 않은가?
2022년 8월 25일,
창원 우영우 팽나무와
쌍계사와 불일폭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