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9일 7시경에 봉담 집을 출발 군산 선유도를 향했다.
신시도를 지나 무녀도에 도착
코스:무녀도2구 선착장→선유대교→선유3구선착장→선유갯벌체험장→장자도→대장도
시간: 3시간
무녀2구
무녀도 포구의 쥐똥섬이 환상적....
고군산대교를 바라보며...
무녀도 포구의 쥐똥섬이 멋있어서 다시 한번....
무녀도 포구 모습....
선유대교
선유대교에서 선유도, 망주봉쪽 모습
선유 3구 선착장에서
선유도 남악산
선유3구 포구에서
선유3구 고래 쉼터
선유3구 등대가 특이해서...
선유도 망주봉
선유도 갯벌체험장에서 망주봉쪽 모습
솔섬이 멋있어서...
장자대교를 향하여
장자대교
구장자교를 걸으며...
구 장자대교를 걸으며 망주봉쪽 모습
장자도 모습
장자도에서 대장도를 바라보며...
장자도에서 오징어 말리는 모습이 특이해서...
장자도 체험장..
대장도 대장봉 모습
대장도 할미바위쪽 가면서 어느집 분재들이 멋있어서...
대장도에서 장자도쪽을 바라보며...
대장도 포구 쪽을 바라보며
대장도 포구 끝에서 대장도를 바라보며...
대장도포구에서
대장도 펜션단지쪽에서 장자도를 바라보며...
대장도 펜션단지쪽 해안이 멋있어서...
신시도 주차장 공원쪽을 바라보며...
정조 건배사 - 不醉無歸
정조 16년 1792년 어느 봄날이었다. 정조는 과거시험에 갓 합격한 성균관 유생들을 창덕궁으로 초대했다.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창덕궁의 희정당에 모인 젊은 유생들을 당황하게 한 것은 희정당 한쪽에 가득 쌓인 술통들이었다.
전날 50대1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것을 축하하는 자리라는 얘긴 들었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임금을 만날 줄은 몰랐다.
규장각과 승정원, 그리고 호조에 있는 술까지 모두 모아 놓은 상태에서 정조가 입을 열었다.
"옛사람들은 술로 취하게 한 뒤에 그 사람의 덕을 살펴본다고 하였다.
오늘 취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니, 모름지기 각자 양껏 마시도록
하라." (정조실록 16/3/2)
'불취무귀(不醉無歸)' 즉 '취하지 않은 사람은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정조의 이 말은 사실 심각한 붕당 간 대립을 완화해 보려는 고육지책이었다.
'당색이 다르면 조문(弔問)도 하지 않는다'는 사관의 기록처럼, 몇 차례의 환국(換局) 정치를 겪으면서 붕당들 사이의 불신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주요 국책 사업이 무산되는 일도 빈번했다.
어떤 식으로든 갈라진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는 게 정조의 판단이었고, 술자리는 그렇게 해서 마련된 것이었다.
정조는 이날 노론의 신기에게 행배(行杯), 즉 술잔 돌리는 일을 맡겼다.
술잔은 규장각의 신하들이 사용하는 팔환은배(八環銀盃)를 사용하도록 하되 나이 든 사람은 작은 잔을, 젊은이는 큰 잔을 사용하게 했다.
술이 골고루 잘 돌아가는지를 감독하는 것은 소론의 서영보 등의 몫이었다.
한참 술잔이 돌던 중에 소론의 이만수가 정조에게 말했다.
"이번에 합격한 오태증은 대제학 오도일의 후손인데, 집안 대대로 술을 잘 마십니다.
벌써 다섯 잔째인데도 전혀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정조는 껄껄 웃으며 "이곳 희정당은 오도일이 술에 취해 쓰러진 곳이다.
그의 할아버지를 생각한다면 어찌 술잔을 사양하겠는가.
큰 잔으로 연속해서 주어라." 결국 다섯 잔을 계속 마신 소론의 오태증은 술에 취해 쓰러지고 말았다.
정조는 그를 편히 눕게 한 다음 "술에 취해 누워 있은들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라며 그를 물리치려는 신하들을 만류했다.
국왕의 악취미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 기록은, 사실 정조의 인사 탕평책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여러 붕당의 젊은 유생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여 왕이 친히 내린 술을 마시고 서로 어우러지는 계기를 만들려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