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한석규(韓石圭) |
출생 | 1964년 11월 3일, 서울특별시 |
신체 | 178cm, 64kg, AB형 |
학력 |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
데뷔 | 1991년 MBC '우리들의 천국' |
가족 | 배우자 임명주[1] |
소속 | 클로버컴퍼니 |
1 데뷔 전 ¶
2 1990년대 초반 MBC 공채 시절 ¶
데뷔는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이었는데 큰 비중은 아니었고 지금으로 치면 시즌 1 마지막 부분에 잠깐 나왔다.
그 후 여명의 눈동자에서 서북청년단 역으로 단역으로 잠깐 모습을 비춘 한석규는 1993년에 역대 최고 시청률 7위 (61.1%)를 기록한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부드러운 남자 이미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극 중 여 주인공 김희애를 구원해주는 역할로 큰인기를 끌며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주며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 한다.(원래 이 역할을 문성근이 할 예정이었으나, 연극과 영화 스케쥴로 하차했다.) 아들과 딸 직후, 최수종, 채시라와 드라마 파일럿에 캐스팅, 이 드라마 역시 4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확실하게 최고 스타로 군림한다. 파일럿의 대 성공이후 당시 MBC의 가족극이었던 한 지붕 세가족의 출연진들이 교체되면서 새로 투입되었고[5] 그 다음 해 1994년, 학교 선배이자 한 때는 최고의 파트너였던 최민식과 드라마 서울의 달에 캐스팅되고 자체 최고 시청률 48.7%를 기록, 연타석으로 성공하며 자리를 굳힌다.(원래는 유인촌이 하기로 되어있었고, 작가 김운경씨는 한석규가 한다는것에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연기력에 반성했다고..)그러는 도중 마지막 승부 후속드라마로 편성된 박형준, 이시은[6]의 미니시리즈 도전이 시청률이 영 안나오자 오연수와 함께 시청률 상승 카드로 중간에 투입된다. 요즘 같으면 한석규, 오연수 같은 스타들이 시청률 상승을 위해 중간 투입되는 경우는 없으나 이때는 공채 시스템이었고 한마디로 스타여도 방송국에서 까라면 까야 하는 신세였다. 1994년 SBS의 모래시계에 대항하기 위해 제작된 까레이스키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역시 상한가를 치던 한석규가 이 작품에서 단역중에 단역으로 나온다.[7]
3 1990년대 중, 후반 전성기 ¶
한석규가 드라마의 연속 성공으로 충무로에서도 한석규의 영화진출이 꽤나 화제였는데[9] 한석규는 영화계에 진출하자마자 곧바로 한석규의 전성시대를 열게 된다. 1995년 부터 1999년 4년 동안은 한석규가 한국 영화계를 완벽하게 지배하는데 영화 데뷔작인 닥터 봉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홀아비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당시 서울관객 기준 376,443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한다.[10] 한석규가 데뷔작을 가벼운 코미디로 선택한 까닭은 너무 심각한 주제보다는 본인에게 맞는 장르로 무난하게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닥터봉'과 함께 출연을 검토했던 영화는 심혜진,진희경이 출연하는 스릴러물 손톱이었다고 한다.[11]덕분에 데뷔작이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그에게 들어오는 시나리오 수는 무려 40여개에 달했다.[12]
그 다음해인 1996년, 강제규 감독의 데뷔작이자 CG및 특수효과가 화제로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그린 은행나무 침대에 출연하며, 서울 기준 68만 5천명을 동원하며 영화배우로서 입지를 갖춘다. 그러나 배우로써의 입지를 갖췄다는 것일뿐 캐릭터의 매력도나 화제성은 다른 배우에게 모두 빼앗긴 유일한 영화이기도 하다.[13]
1997년에는 무려 세 작품에 출연했다. 이창동 감독의 데뷔작인 초록물고기(서울 기준 163,655명), 조폭연기가 인상적이었던 블랙 코미디 넘버 3(서울 기준 297,617명), 당시 유행하던 PC통신 채팅을 소재로 꽤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던 접속(서울 기준 674,993명)을 연달아 히트시켰으며, 느와르(초록물고기), 블랙코미디(넘버 3), 멜로(접속)[14]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캐릭터에 완벽히 녹아들며 최고의 연기를 보여 주었으며, 학교 선배인 최민식과 초록 물고기에서 같이 출연했던 송강호를 넘버 3에 출연시키는데 크게 공헌하는 등 능력있는 배우들을 밀어주기도 했다.[15]
1998년에는 한석규가 출연한 최고의 작품이자 많은 영화 매니아들 사이에서도 최고의 멜로작품으로 꼽히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 출연, 어찌 보면 뻔한 신파 멜로이지만 허진호 감독은 세련된 화법과 형식미로 신파조 멜로를 뛰어넘었다는 극찬을 받았다고... (네이버 영화 홍성진의 영화해설 인용) (서울 기준 422,930명) 참고로 한석규는 이 영화 OST 앨범에 들어가는 주제곡도 직접 불렀다.
다음 해인 1999년 영화 쉬리로 전성기의 정점을 찍는다. 남북한을 소재로 순 제작비 24억원과 각종 특수효과와 총격전 등 많은 화제를 불러모은 이 영화는 타이타닉이 가지고 있던 한국 영화 관객동원 1위의 기록을 깨면서 580만이 넘는 관객[16]을 동원,110억원의 수익을 올리는 기록을 남겼다. (당시 한석규는 한국배우로서는 최초로 러닝개런티 계약을 체결했다. 기본 출연료 2억 5천만원+관객당 500원으로 계약을 했는데 그로 인해 12억원의 수입을 올렸다.)
그 해 말,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호흡을 맞췄던 심은하와 함께 미스터리물인 텔 미썸딩에 출연, 서울 기준으로 73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성공시켰으나 앞뒤가 뚝뚝 끊기는 스토리와 석연치 않은 결말로 썩 좋은 평을 얻지 못했다.
4 하락세 ¶
한석규의 하락세는 다른 배우들처럼 사회적인 문제나 치정관계등의 스캔들이 이유가 아니었다. 충무로로 진출한 이후로 단 한번도 실패작에 출연하지 않았고 비평에서도 실패한 작품[17]이 거의 없다시피하여 90년대 중,후반은 충무로 원탑이었다[18]. 왠만한 유명 제작자와 감독도 한석규에게 감히 대들지 못할 정도로 그가 충무로에 끼친 영향력은 2000년대 배우들 중에서도 전무후무할 정도로 엄청났다.이 때 대한민국의 모든 시나리오는 99%가 한석규에게 맨 먼저 갔을 정도인데[19], 배우가 시나리오를 보는 능력은 가장 먼저 우선시 되는 능력이라고 하지만 그 까다로움이 너무 지나친게 문제였다. 게다가 언론노출을 너무 꺼리고 CF에 전념하는 모습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자 '8월의 크리스마스'가 개봉하는 1998년부터 한석규자체를 좋게 보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그의 행동마저 조금씩 구설수거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당시 한석규의 매니저를 맡은 사람이 다름아닌 형인 한선규씨였는데, 한석규에게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우선적으로 검토하는 사람이 바로 이 분이었다. 시나리오만 보고 판단해주는 역할만 했으면 좋으련만, 매니저의 행동을 넘어서 영화 제작에까지 신경쓰다 보니 그동안 한석규가 벌어준 돈 수십억원을 날려먹기도 했고[20], 90년대 후반 영화잡지 월간 스크린에서 주최한 핸드프린팅 행사제의도 단칼에 거절하는 등[21]도를 넘는 행동으로 안그래도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던 한석규를 기피하는 제작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동안 한석규밑에서 눌려오던 배우들이 한석규의 하락세에 맞추어 조금씩 도약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굳이 한석규가 아니더라도 연기나 흥행에서 더 좋은 결과를 얻을 배우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한석규로써는 조금씩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 셈.
5 2000년대 초반 휴식기 ¶
2002년 영화 이중간첩으로 복귀하기까지 3년이라는 공백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3년 동안 마냥 쉰 것만은 아니었다. CF를 얼마나 많이 찍었는데 SF물인 제노사이드,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차우, 그리고 소금인형이라는 작품에 출연하기로 했었고 소금인형의 경우 4~50% 정도 촬영을 했음에도 투자 문제로 인해 무산되어 본의 아니게 3년 동안 쉬어버리게 된 것. [22]
그 3년 동안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가 한석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송강호는 반칙왕으로 주연 데뷔에 확실하게 성공, 공동경비구역 JSA로 자리를 확실하게 잡았으며 최민식은 해피 엔드와 파이란으로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설경구는 99년 박하사탕으로 데뷔, 2002년에는 1997년의 한석규처럼 공공의 적, 오아시스, 광복절 특사를 연속으로 히트시킨다.
6 2000년대 중, 후반 몰락 ¶
3년 간의 공백 끝에 2002년 영화 이중간첩으로 복귀하게 되지만... 한석규는 첫번째 실패를 맛보게 된다. 69억이라는 제작비가 들었으나 흥행 기록은 서울 361,580명 전국 1,025,928명을 동원하는데 그쳤다.
흥미로운 인터뷰, 이중간첩 복귀 전 공백기간 동안 한 기자는 왜 공백기를 갖냐고 묻자 한석규가 말하길 지금은 한국영화의 거대한 거품이 낀 시기고 이 거품이 다 빠져나간 후에서나 진짜 작품 활동을 해야할 것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2002년과 2003년은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어 가는 감독, 작품, 배우들이 봇물 터지듯이 터져나왔다(…). 특히 2003년은 박찬욱의 올드보이,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김지운의 장화, 홍련이 한꺼번에 떠버렸으니... 결국 한석규의 말은 변명 아닌 변명이 되어버렸다.
결국 2003년 프리미어에 손예진과 함께 과대평가된 배우에 선정되는 불명예를 안는다. #* 그 이전 2001년도에 조사한 설문에서도 한석규가 과대평가받은 배우로 뽑혔다.아니러니하게도 1996년 프리미어에서 선정한 한국배우 평가에서는 한석규가 안성기,박중훈,문성근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2004년에는 스릴러물인 영화 주홍글씨와 블랙코미디 작품인 그때 그 사람들에 출연한다. 주홍글씨의 경우 첫 주에 흥행 1위를 기록하는데 초반의 흥행을 이어나가지 못하면서 하락세가 대폭 심해졌고 영화 역시 흥미진진한 초반과는 다르게 후반으로 갈수록 뚝뚝 끊기면서 영화 내적인 면이나 흥행면이나 용두사미적인 작픔으로 끝났다.
서울 489,254명, 전국 1,437,549명으로 대흥행까지는 아니지만 손익분기점은 넘겼다.
그때 그 사람들은 괜찮은 소재를 제대로 끌고 나가지 못한 면이 있었고[23] 서울 338,025명 전국 1,083,962명(제작비 60억)을 동원하는데 그치면서 두번째 영화 실패작으로 남게 된다.
2005년에는 초심을 찾기 위한 것인지 안전해보여서 택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닥터 봉 이후 10년만에 코미디 영화 미스터 주부퀴즈왕에 출연하지만 배급사에서도 버린 카드라고 생각했던지 제대로 홍보도 안 되었고 개봉한 지 얼마 후에 케이블에서 볼 수 있었다. 서울, 전국 합해 50만 명도 기록 못한 처참한 실패작.
복귀 이후 세 작품을 실패했지만 그래도 한석규라는 이름에 기대를 많이 했는지 2006년에는 세 작품에 연달아 출연한다.
영화 스캔들의 시나리오를 집필했던 김대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음란서생은 서울 868,692명, 전국 2,576,022명을 동원하며 침체기에서 벗어나는가 싶더니 다음 작품인 영화 구타유발자들은 서울, 전국 관객 합쳐 20만 명도 기록 못하는 대망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24]
그 해 가을에 개봉한 8년만의 멜로작품인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은 현실적이고 공감이 간다는 평과 지나치게 밋밋했다는 평 두 가지가 크게 갈리는 작품이었고, 흥행에 실패했다. 2013년 현재 케이블에서도 방영을 안한다..
2006년에 세 작품이나 출연하며 다작을 했던 한석규는 07년은 쉬고 08년 영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컴백한다. 당초 감독을 맡기로 했던 안권태 감독이 촬영 중반 곽경택 감독으로 교체되면서 대본이 수정되고 비중문제로 안 좋은 말이 나왔던 작품으로 촬영 자체가 험난한 작품이었다. 게다가 같이 개봉했던 작품이 다크 나이트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게다가 미이라3도 있었지만 그래도 틈바구니 속에서도 나름 선전 26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데 성공, 손익분기점은 간신히 넘기는데 성공했다.
2009년에는 주연이 아닌 주조연.. 어떻게 보면 조연으로 영화 백야행에 출연한다. 원작소설도 3권씩이나 되고 드라마로 나왔어야 할 분량을 2시간 짜리 영화로 압축했으니 작품 완성도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25]
2010년, 한석규는 코미디 영화인 이층의 악당을 통해 다시 도전했다. 그 전과는 달리 이번엔 2005년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한 손재곤 감독과의 작품이었는데 촬영 전부터 좋은 시나리오라며 호평을 들었고 또 평론가들역시 호평을 아끼지 않으며 좋은 평가를 받았고 기대도 컸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한석규는 90년대와 2000년대 그의 위상이 확연히 다르다. 이렇게 몰락을 하게 된 이유는 4년간의 공백으로 한석규의 역할을 대신 할 배우들인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 황정민 등의 배우가 급 성장하며 차지했고 한석규역시 2000년대 선택한 작품들이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이며 많이 밀리게 되며 일명 선구안에 문제가 있는게 아니냐 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한석규의 부진에 대해 너무 검증되지 않은 신인감독과 작품을 한다는 것을 원인으로 꼽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느정도 타당한 이야기. 대부분의 흥행배우들을 보면 감독과 배우들이 인맥으로 같이 가는 경우가 많은데 한석규의 경우 신인감독과의 작품을 고집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박찬욱, 김지운, 이창동, 봉준호 감독 등 검증된 감독과 작품을 하는 최민식,송강호와 강우석,윤제균감독과 그 연출부 출신들과 작업을 하는 설경구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한석규의 경우 데뷔작을 같이 했던 이광훈 감독은 닥터 봉 이후 패자부활전,자귀모,천년호라는 영화 팬들은 알만한 최악의 작품을 연속으로 연출하며 2003년을 끝으로 영화계에서 사라졌고 은행나무 침대와 쉬리를 같이했던 강제규는 현재 제작에만 전념하며 가뭄에 콩 나듯 연출하다가 마이 웨이의 실패로 앞날이 어둡고, 초록물고기의 이창동 감독과 8월의 크리스마스의 허진호 감독은 활발하게 작업을 하는 감독이 아니고 접속과 텔미썸띵을 같이 했던 장윤현 감독은 그 후 썸, 황진이, 가비가 연속으로 실패했고 넘버3의 송능한 감독은 영화계를 떠났다. 즉, 8편 연속 흥행으로 1990년대 전성기를 가져다 준 감독 중 현재에도 활발하게 작업을 하고 있는 감독들이 없다는 점이다.
이처럼 3년 간의 공백에도 2002년에는 당시 티켓파워 1위를 기록했던 그가 2000년대 침체기 이후에는 아예 언론에서도 거론조차 되지 않았으며 가끔 하는 설문조사에서도 순위권에 없었다.
7 2011년 화려한 부활, 그 후 ¶
이층의 악당까지 실패하자 한석규는 15년 간 하지 않았던 드라마의 영역에 발을 들이게 된다. 2011년 하반기 SBS 수목 드라마인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 역으로 복귀. 욕쟁이 세종(...)과 장난끼, 그리고 진지한 역할을 모조리 보여주면서 역시 한석규라는 말을 듣고 있다.
그 결과, 예상대로 2011 SBS 연기대상 수상의 영예를 안게되었다.
참고로 그전에 드라마 스페셜 남자 최우수상 후보에도 올랐으나 정작 상을 타게된 건 젊은 두 후배들. 제작진이 노렸는지 소감 발표 중 수상자와 전혀 상관이 없는 한석규에게 잠깐 카메라 단독샷이 행해졌다. 이에 본인은 그저 대인배의 뿌듯한 미소만 지을뿐... :)최우수상은,GE랄...곧 나의 대상 소식은 온 국민들에게...그래,역병처럼 퍼져나갈 것이다!
뿌리깊은 나무의 성공으로 화려한 부활을 하게 되며 모처럼 CF를 2편이나 계약했고 많은 시나리오를 받으며 다시 영화에서 명예회복을 노리고 있다. 그리고 2013년 류승완감독과 하정우,전지현과 함께한 영화 베를린이 개봉 3일만에 100만, 개봉 14일만에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손익분기 450만명을 넘기면서 710만명을 동원하는데 성공, 영화에서도 완벽하게 부활에 성공했다. 현재 이 수치는 2000년대 한석규의 최고 흥행이다.
뒤 이어 개봉한 파파로티도 이제훈의 군입대 및 7번방의 선물의 흥행호조 등등의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주연배우로써 성실하게(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예능출연 혹은 언론 노출 등등)홍보한 덕분에 간신히 손익분기점을 넘기게 되었다. 전성기처럼 원톱으로 주연으로 나오기는 힘들어졌지만, 선후배 배우와의 투톱으로 출연하여 시너지효과를 내는 주조연급으로 수요가 많을 것으로 전망된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출연제의가 그다지 많은건 아니라 한다(...)
8 기타 ¶
흔히들 말하는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외모라서 예의 그 순한 연기를 할 때는 정말 순해보이고 승질 더러운 연기를 할 땐 정말 드러워 보인다. 스펙트럼이 꽤나 넓다고 할 수 있는데, 요즘 들어 어둡고 지독한 연기를 많이 선보인다. 본인의 원래 성격은 굉장히 내성적이고 가라앉아있는 성격이라고 한다. 젊을 때는 자신의 그런 성격에 굉장한 불만을 품었었다고. 아무래도 날고 기는 끼 많은 사람들이 넘치는 연극영화과에서 조용한 성격으로 버텨내려니 비교도 많이 되었을 듯. 그래서 폭발적인 연기를 할 때 나름의 대리만족을 느낀다고 한다. 약간의 우울증이 있다고 한다. 막 가라앉은 건 아니고 남들에 비해 항상 차분하고 축 가라앉은 정도...
인터뷰를 꺼리고 그 흔한 sns도 하지 않는다. 작품 외적으로 자기를 노출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고 한다. 철저히 배우로 남고 싶어 하는 듯 싶다. 본인 가라사대 배우는 행동으로 말해야 하는 직업인데 인터뷰를 하면 말만 번드르하게 하는 것 같아 자괴감이 느껴진다고. 오죽했으면 뿌리깊은 나무 종영 뒤 인터뷰가 쇄도했을 때는 아예 도망다녔다고 인증했다. 이 덕분에 이미지는 굉장히 좋지만 팬 입장에서는 눈물난다. 영화 내려가면 떡밥 좀 달라고 아우성치는 팬이 부지기수다. 연예계의 토가시 요시히로라고 평하는 팬도 있다.
한국영화계에서 한석규의 영향은 1990년대 한국영화의 흥행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면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전이다.[27][28] 1999년 한석규는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총3000만원의 상금을 걸고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전'을 시작해서 2010년 12회까지 이르고 있다. 영화배우가 자신의 사비로 이런 공모전을 하는 것은 국내외적으로 전무후무한 일이다. 씨네21과 손잡고 진행한 막동이 공모전을 통해서 많은 시나리와 작가들이 배출되었고, 몇몇 수상작의 영화화에는 직접 주연을 맡기도 했다.[29]. 한석규는 평소에도 시나리오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고 한다. 좋은 시나리오에 명연기가 더해지면 명작이 되지만, 나쁜 시나리오로는 아무리 명연기,명연출을 해도 졸작이 된다고...막동이 공모전은 이런 평소의 지론을 실천에 옮긴 것. 그러나 아쉽게도 2011년에는 열리지 않는다고...주최측 내부 사정이라는데, 이거보고 장편 준비해온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 안습...
광고 내레이션도 간혹 맡는데(대부분 커피, 통신사, 금융 관련) 성우 출신이라 그런지 전혀 위화감이 없다.
전성기가 1990년대 후반 즉, 지금처럼 영화관의 수가 많지 않았고 멀티플렉스에 의한 와이드 릴리스 개봉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던 시절이라 관객수가 송강호,최민식 같은 라이벌 배우들에 비해 많이 적다. 게다가 그 당시에는 전국관객은 집계도 하지 않았고 서울관객만 집계하던 시절이어서 한석규의 전성기 시절을 접하지 못한 세대들에겐 본의아니게 폄하당하기는 한다. 미국의 경우 관객수가 아닌 흥행 수입을 기록하고 또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흥행 순위를 계산하여 30년대에 개봉했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2013년 현재 물가와 비교했을때 어느정도의 수입을 거뒀는지 비교라도 할수 있지만 우리나란 그런 체계조차 없다. 그래고 한석규가 전성기 시절 거뒀던 흥행 기록은 지금으로 치면 거의 300~500만 관객 정도 되는 기록이고 그 당시에 500만명이 왔던 쉬리는 지금으로 치면 1000만관객 정도 되는 작품이다. 더 이전에 개봉한 은행나무 침대,접속은 멀티플렉스 방식이 아닌 단관 상영 형식이었으므로 지금수치로 환산하면 각각 서울 240만, 200만명이고 전국적으로는 1000만명에 가깝다. ㅎㄷㄷ
시나리오를 주의깊게 보는 만큼 캐릭터 연구에도 공을 들이는 편이라 현장에서 독자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경우가 꽤 많다고 한다. 실제로 채택된 예도 꽤 많은데, 뿌리깊은 나무의 이만원신, 광평대군 사망 신, 구타유발자들의 문재가 침 뱉는 버릇[30],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백성찬 반장의 백발[31] 등등.
정신세계가 상당히 비범하다. 어릴 때 낚시를 하다가 비가 왔는데 옷을 죄다 벗고 비를 맞으면서 낚시를 했다거나 자기 영화 시사회에서 요즘 관심사에 대한 질문을 받자 진지하게 영조는 왜 사도세자를 뒤주에서 죽였을까라는 말을 하거나 버라이어티에 나와서 자기가 받은 질문을 역으로 MC에게 하거나 하는 식. 본인도 자각은 있는 모양으로, 버라이어티에 나올 때마다 왜 자신은 말할 때마다 진지해지지는지 모르겠다며 자책하는 풍경이 꽤 자주 보인다.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를 반쯤 한석규의 철학캠프로 만들어 버린 것은 반쯤 전설급이다.[32] 석규 스님
은근히 입이 거친 편이라고 한다. 사석에서 친근감을 표시할 때 편하게 육두문자를 쓰고는 한다고. 처음 피해를 본 배우는 은행나무 침대의 신현준. 최근에는 하정우..하정우는 만나자마자 한 시간 정도 육두문자를 들었다고 인터뷰 등지에서 거하게 인증했다. 하정우 왈 고급스러운 욕이라고… 실제로 연기할 때 보면 욕을 상당히 찰지게 하신다.
최근에 최민식과 다시 영화 출연에 할 것 같다는 카더라~가 나돌기도 하고, 드라마 출연도 긍정적으로 검토중인걸로 알려져있다. 드라마로 복귀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가 있다.
커리어를 보면 알겠지만 첩보물 주인공을 세번이나 맡았다. 쉬리-이중간첩-베를린.
연기활동 및 CF외에는 그 흔한 화보촬영이나 인터뷰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원래 매체 노출에 관심이 없는 성격이기도 하고, 아이들과 아내가 모두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지라 휴식기에는 주로 미국에 머문다고 한다. 그래서 동료배우 및 유명인들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거나 몰래 참석하는 정도... 현재는 미국에 머물고 있는데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공백기간이 더 길어질 거라는 이야기가 있다. 게다가 간간히 찍던 CF출연도 요즘엔 없고, 출연도 안 한다는 걸 보면..
9.1 영화[33] ¶
연도 | 제목 | 활동 | 관객수 | 흥행 |
2013 | 파파로티 | 주연 | 170만명 | 손익분기 |
2013 | 베를린 | 주연 | 710만명 | 성공 |
2010 | 이층의 악당 | 주연 | 40만명 | 실패 |
2009 | 백야행 | 조연 | 140만명 | 실패 |
2008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주연 | 205만명 | 손익분기 |
2006 |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 주연 | 21만명 | 실패 |
2006 | 구타유발자들 | 주연 | 16만명 | 실패 |
2006 | 음란서생 | 주연 | 257만명 | 성공 |
2005 | 미스터 주부퀴즈왕 | 주연 | 41만명 | 실패 |
2005 | 그때 그 사람들 | 주연 | 108만명 | 실패 |
2004 | 주홍글씨 | 주연 | 143만명 | 손익분기 |
2002 | 이중간첩 | 주연 | 102만명 | 실패 |
1999 | 텔 미 썸띵 | 주연 | 123만명 | 성공 |
1999 | 쉬리 | 주연 | 580만명 | 성공 |
1998 | 8월의 크리스마스 | 주연 | 42만명 | 성공 |
1997 | 접속 | 주연 | 67만명 | 성공 |
1997 | 넘버 3 | 주연 | 29만명 | 성공 |
1997 | 초록물고기 | 주연 | 16만명 | 성공 |
1996 | 은행나무 침대 | 주연 | 68만명 | 성공 |
1995 | 닥터 봉 | 주연 | 37만명 | 성공 |
* 90년대 흥행성적을 지금수준으로 어느정도 환산한 글이 있어서 링크를 걸어둔다.#
9.3 CF ¶
연도 | 제목 |
2012 | 몽벨 |
2012 | 메리츠화재 |
2010 | 한국증권금융 |
2010 | 던롭 젝시오 |
2006 | LG유플러스 |
2005 | 기탄교육 |
2005 | 교보생명 |
2000 | LG전자 액스캔버스 |
1999 | KEB 외환은행 |
1999 | 펜텍 스카이 |
1998 | SK텔레콤 넷츠고 |
1998 | 동서식품 맥심 |
1998 | SK텔레콤 스피드011[34] |
1998 | LG |
1998 | 한국화장품 파메스 |
1997 | GS칼텍스 |
1996 | 제일모직 갤럭시 |
1996 | 대우전자 대우입체냉장고 탱크2 |
1996 | LG유플러스 시외전화 082 |
1995 | 하이트진로 |
1994 | 쌍용제지 비바 |
1993 | 해태음료 썬키스트훼미리주스 |
1993 | 선창산업 선우드가구 |
1993 | 현대자동차 엑셀GS |
1993 | 삼성전자 그린컴퓨터 |
1993 | 제일모직 빈폴 |
10 수상 기록 ¶
연도 | 수상 | 작품 |
2011 | SBS 연기대상 대상 | 뿌리깊은 나무 |
2011 | SBS 연기대상 10대 스타상 | 뿌리깊은 나무 |
2000 | 제37회 대종상영화제 인기상 | - |
1999 | 제20회 청룡영화상 최고 인기배우상 | - |
1999 | 제1회 디렉터스컷 어워즈 올해의 연기자상 | 쉬리 |
1997 | 제18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 초록물고기 |
1997 | 제35회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 | 초록물고기 |
1997 | 제17회 영평상 남우주연상 | 초록물고기 |
1997 | 제20회 황금촬영상 인기 남자배우상 | 초록물고기 |
1997 | 제3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 초록물고기 |
1996 | 씨네21 영화상 신인연기상 | 닥터 봉 |
1996 | 제32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신인연기상 | 닥터 봉 |
1995 | 제6회 이천춘사대상영화제 | 닥터 봉 |
1994 | MBC 연기대상 최우수 연기상 | 서울의 달 |
1993 | MBC 연기대상 신인상 | 아들과 딸 |
1984 | MBC 강변가요제 장려상 | 길잃은 친구에게 |
첫댓글 컴으로다시봐야지!!
한석규ㅜㅜ 팔월의 크리스마스랑 텔미썸띵에 나오는 한석규가 제일 좋음ㅜㅜ
구타유발자들이 분명 망한 영화긴 하지만 배우들 모두의 연기가 끝내줬어 그리고 난 이 염화보기전까진 한석규아저씨가 걍 부드러운 이미지 배우였는데 이 영화보고 진짜 배우라고 생각하겠됐어 진짜 연기 최고!
접속접속접곳젖ㅅㄱ접속접소듀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저씨 조..좋아해여ㅠㅠㅠ
이층의 악당 되게 재밌게 봤는데 ㅋㅋㅋㅋ 김혜수랑 둘이 진짜 찰떡궁합!!